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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함은 기회입니다. (6)

불가능해 보이는 인간(부부) 관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믿음이란 ... (1)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합니다. (2)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합니다. (3)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합니다. https://youtu.be/LwfJR3i5w48?si=DeFjUqZG3WtAIYGA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통의 축복된 결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통의 축복된 결말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욥기 42 2-6).

 

           우리가 받은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우면 우리에게는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23:2).  그 때에 우리는 우리 말을 들으시는 하나님(6)을 간절히 찾으면서 하나님께 호소하며 변론도 할 수 있습니다(3-4, 7).  그런 후 우리는 하나님의 답변을 듣고 싶어합니다(5).  또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간절히 기도를 드릴 것입니다(30:24).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답변을 들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습니다(23:6, 8-9).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택하여 걸어가는 길을 다 알고 계십니다(10).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단련하신 후에 우리를 순금같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10).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주님의 길을 바로 걸으면서 치우치지 않습니다(11).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지 않습니다(12).  우리는 이렇게 고백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일정하시고 하나님께서 마음에 하시고자 하시는 일은 반드시 그것을 행하십니다(13).  그런즉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작정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14). 

           오늘 본문 욥기 42 2-6절은 재앙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당한 욥의 결말이 나옵니다.  물론 우리가 ‘욥의 결말’하란 하면 주로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축복해 주셔서 전에 그가 소유한 재산의 갑절을 그에게 주신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10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주로 생각하는 욥의 결말은 하나님께서 욥의 말년에 그에게 처음보다 더 많은 복을 주신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12현대인의 성경).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욥의 결말’하면 주로 하나님께서 욥에게 7아들과 3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15)]을 주신 것을 생각할 것입니다(13).  한 마디로 요약을 할 수 있다면우리고 ‘욥의 결말’하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베풀어 주신 회복의 은총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엔 욥의 결말은 이러한 하나님의 회복의 은총보다 오늘 본문 욥기 42 2-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은총이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은총은 한 4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 은총은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은총입니다.

           오늘 본문 욥기 42 2절을 보십시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욥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앙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는 뜻이 일정하시니 그분이 마음에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면 반드시 그것을 행하신다고 고백했습니다(23:13).  그 뿐만 아니라 욥은 주님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으며 무슨 계획이든디 못 이루실 것이 없음을 안다고 말했습니다(42:2).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계획하신바를 반드시 이루신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참고1:11).  비록 사탄의 계획은 욥의 모든 소유물을 치고(1:11) 심지어 욥의 뼈와 살도 치는 것이였지만(2:5) 하나님께서는 사탄의 악한 계획(21:16; 22:18)을 통해서도 합력하여 욥에게 선을 이루시는 것이었습니다(8:28).   하나님의 계획은 욥의 집에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것이었습니다(22:18).    욥은 자기 자신의 계획이 아닌(17:11) 하나님의 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짐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42:2).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8:3, 5; 27:2; 37:17).  우리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십니다(1:37).  우리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적인 뜻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영원히 섭니다(33:11).  비록 우리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만이 완전히 섭니다(19:21).  우리가 마음으로 우리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느 분은 하나님이십니다(16:9).  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허락하시는 고통의 축복된 결말입니다.

           둘째 은총은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정하는 은총입니다.

           오늘 본문 욥기 42 3절을 보십시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앙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자기가 무식한 말로 주님의 뜻을 흐리게 한 자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3절상현대인의 성경).  그는 자기가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했음을 인정했습니다(3절하).  그는 자기가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했다는 것을 인정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욥은 자기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인정한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고통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아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을 알아가므로 자기 자신을 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뜻하시고 계획하신바를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알아갈 때 자기의 무지함(무식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생각이 자기의 생각과 다르며 하나님의 길과 자기의 길이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 같이 하나님의 길은 자기의 길보다 높고 하나님의 생각은 자기의 생각보다 높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55:8-9, 현대인의 성경).  어떻게 자신의 제한된 지성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가운데서 계획하신 바를 이뤄나아가시는 것을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욥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였고 너무 신기하여 내가 알 수도 없는 말을 하였습니다”라고 인정한 것입니다(42:3,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139).  그러나 우리는 무식합니다(73:22).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행하시고 기적도 수없이 행하십니다(5:9, 현대인의 성경).  또한 하나님은 신기한 방법으로 음성을 발하시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37:5, 현대인의 성경).  누가 감히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26:14,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악인은 형통케 하시고 의인은 고통을 당하게 허락하시는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섭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참고73).  어떻게 우리의 제한된 이성으로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지 충분히 헤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이 주의 지식은 너무 깊어서 내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139:6,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땅이 얼마나 넓은지 네가 이해할 수 있겠느냐?  네가 알면 나에게 말해 보아라”(38:18, 현대인의 성경)고 질문하신다면 우리는 아무 답변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 자신을 알고 인정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허락하시는 고통의 축복된 결말입니다.

           셋째 은총은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은총입니다.

           오늘 본문 욥기 42 5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앙으로 인한 고통으로 말미암아 귀로만 듣던 주님을 이젠 눈으로 뵈옵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님을 눈으로 뵈었다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씀하고 있는데(4:24, 고후3:17) 어떻게 우리가 영이신 주님을 뵈울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의 의미는 욥이 영이신 주님을 육신의 눈으로 뵈었다는 말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통의 축복될 결말입니다

    고통 이전에는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고통의 결말에 가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는 것은 고통의 큰 축복이요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모태 신앙인 저에게 첫째 아기 주영의 삶과 죽음을 통해서 귀로만 듣던 주님의 사랑을 실제로 체험했습니다.  첫째 아기 주영이가 제 품 안에서 잠들던 그 날 아침에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시편 63 3절인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는 말씀대로 아기가 죽은 후 화장한 제 아기의 뼛가루를 물에 뿌리면서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My Saviors Love(I Stand Amazed)란 찬양을 부르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극심한 고통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의 놀랍고 굉장한 구원의 사랑을 찬양케 하시고 경험케 하셨습니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의 사랑을 통하여 사랑의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삶 속에 허락하시는 고통의 축복된 결말입니다.

           마지막 넷재 은총은회개의 은총입니다.

           오늘 본문 욥기 42 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재앙으로 인한 고통 속에서 자기가 말한 모든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했습니다(6현대인의 성경).  그는 자기가 무식한 말로 주님의 뜻을 흐리게 하였고 또한 자기가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말을 한 것에 대해(3현대인의 성경부끄럽게 여기고 회개한 것입니다(6현대인의 성경). 

           회개하고 싶은데 회개가 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찔림을 받아 하나님께 제가 지은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는데 또 다시 같은 죄를 범하는 제 자신의 모습을 수 없이 보면서 회개도 제 힘으로 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회개의 은총을 베풀어주셔야만이 제가 참된 회개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은혜를 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회개의 은총을 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극심한 고통을 통해서라도 참된 회개를 할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시길 기도한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한 후에는 극심한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 두렵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더 이상 거룩하신 사랑의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싶지 않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시사 습관적인 죄에도 돌이킬 수 있는 회개의 은총을 내려주시길 기도하고 기도했습니다.  제 자신이 첫째 아기의 죽음이라는 극심한 고통을 겪은 후에도 다시금 죄를 범하는 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잠언 26 11절 말씀이 자꾸만 생각났습니다: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느니라.  이 말씀이 생각나면서 저희 집 강아지도 생각이 났습니다.  그 이유는 저희 집 강아지는 자기가 싼 똥을 도로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희 집 강아지보다도 못한 사람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제 자신이 얼마나 미련한 죄인인지 더욱더 깨달아 가는 가운데 하나님께 회개의 은총을 사모하며 간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도 회개함을 주시길 기원합니다(딤후2:25).  하나님께서 욥에게 베풀어주신 고통의 축복된 결말인 회개의 은총을 더욱더 베풀어 주시길 기원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주는 고통조차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허락하심이 없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사탄이 우리에게 고통을 주도록 허락을 하시는 것일까요?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왜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실 수 있으신 것일까요?  과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아무리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았자 우리는 하나님의 답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23:6-9).  그래서 이젠 “왜”, “어떻게”, “무”"이라는 질문보다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가 고통 중에서 하나님은 누구이신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시고 또한 경험케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의 뜻은 일정하시고 하나님께서 마음에 하시고자 하시는 일은 반드시 그것을 행하십니다(13).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작정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십니다(14).  주님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으시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습니다(42:2).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깨닫는 큰 은총을 받습니다.  또한 우리는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아갈 때에 우리 자신을 알아가며 인정하는 은총을 받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지함과 무식함을 깨닫게 되며 그 무지함과 무식함 속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무지함과 무식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은총을 누리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고통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회캐케 하십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사탄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은총나 자신을 깨닫고 인정하는 은총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은총회개하는 은총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길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고통의 축복된 결말을 경험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8 6 17,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새찬송가 438, “내 영혼이 은총 입어” 1절과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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