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휼의 그릇”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로마서 9장 23절).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학교에서 도자기 수업(ceramic class)을 한적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수 업을 하면서 선생님의 가르침에 따라 도자기 물레(pottery wheel)로 이것 저것을 만들었습니다. 그 만든 것 중에 아직까지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그릇(bowl)입니다. 지금 저희 집 차고에 있는데 가끔 그 그릇을 보면 참 못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ㅎㅎ 아마 그 이유는 아무리 못 만들었어도 그래도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만들었는데 라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 주 월요일부터 저희 집 막둥이 예은이가 일주일에 한 번씩 도자기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은 이에게 이 아빠도 중학교 3학년 때 도자기 수업을 해 보았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예은이에 게 도자기 만드는 것 즐기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런 후 제가 월요일 도자기 수업을 마친 예은이를 데리러 가서 차 안에서 수업이 어땠냐고 물어보았더니 도자기 물레를 사용해서 무엇인가를 만들었나본데 재밌었다고 저에게 말해주었습니다. 조만간 예은이가 만든 작품을 저도 볼 날이 올 것 같습니다.
제가 고민 중에 성경을 읽다가 하나님의 주권을 조금이나마 심각하고 깊게 생각하게 된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그 구절은 바로 로마서 9장 20-21절 말씀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우리가 누군데 감히 하나님께 항의할 수 있겠습니까? 만들어진 물건이 그것을 만든 자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토기장이가 같은 흙으로 귀하게 쓰일 그릇과 천하게 쓰일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습니까?”]. 저는 로마 교회를 향한 사도 바울의 이 편지 내용을 생각하고 생각할 때 피조물이 제가 조물주이신 하나님께 감히 저를 왜 이렇게 만드셨습니까 라고 반문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특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러한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만일 토기장이가 되시는 주님께서 금그릇과 은그릇과 동그릇을 만드셨다면 왜 주님께서는 금그릇은 백악관(청와대)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쓰시면서 동그릇은 낮고 낮은 곳에서 힘들고 가난하고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쓰시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만일 주님께서 저를 동그릇처럼 쓰시고자 부르셨다면 그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 생각 속에서 여태까지 오면서 저의 생각의 변한 점은 토기장이 되시는 주님께서 저 같은 죄인도 동그릇으로 만들어주시사 써주시는 것만 해도 큰 은혜요 그저 감사 감사하면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저는 주님의 동그릇이 되었다는 생각에 감사하는 마음이 점점 더 많이 생겼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어제 수요기도회 때 원로 목사님의 설교 말씀을 듣던 중 오늘 본문 로마서 9장 23절에 적혀 있는 “긍휼의 그릇”이란 말씀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통성 기도하는 중에 제 자신이 주님께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된 긍휼의 그릇이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 속에서 저는 “긍휼의 그릇”(a vessel of mercy))에 대해서 더 묵상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 이렇게 “긍휼의 그릇”이란 제목 아래 말씀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저는 “긍휼의 그릇”에 대해서 묵상할 때 로마서 9장 18절 상반절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원하시는 대로 어떤 사람은 불쌍히 여기시고”].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란 말씀은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실 자를 가리킵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이미 로마서 9장 15절에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였습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으로서 출애굽기 33장 19절 하반절을 사도 바울이 인용하여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한 말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다보면 드는 질문은 그러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긍휼이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사람은 누구인가 입니다. 저는 그 질문에 답변을 로마서 9장 문맥 중심으로 답한다면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기시는 사람은 바로 “아브라함의 씨”입니다(7절). 그리고 그 “아브라함의 씨”는 “육신의 자녀”(8절)인 이스마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요 “오직 약속의 자녀”(8절)인 사라에게 있을 아들(9절)인 “이삭”입니다(7절). 더 나아가서, 아브라함의 씨는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7절)로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한(10절)한 자식들인 에서와 야곱 중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야곱입니다(13절). 그 두 자식들이 “아직 나기도 전, 선한 일이나 악한 일을 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11절, 현대인의 성경). “그것은 선택의 표준이 행위에 있지 않고 그분의 뜻에 있음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11절, 현대인의 성경).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인 아브라함이요 이삭이요 야곱은 그들의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근거한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에 대하여 우리는 아무 할 말도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14절). 그리고 결코 하나님께 불의가 없으시다는 사실입니다(14절). 또한 하나님께는 아무 허물이 없으시다는 사실입니다(19절). 감히 어느 누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대적(거역)하겠습니까(19절). 감히 누가 하나님께 반문(항의)할 수가 있겠습니까(20절). 하나님께서는 긍휼이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이십니다(15절). 그리고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신 자는 바로 모세였습니다(15, 19절).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원하시는 대로” 모세를 긍휼이 여기셨습니다(18절, 현대인의 성경). 바로 모세가 주권자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입니다(23절).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고 광야에서 40년 동안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면서 하나님의 풍성한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신5:24). 그러므로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습니까(롬9:23).
그 다음에 저는 “긍휼의 그릇”에 대해서 묵상할 때 로마서 9장 18절 하반절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해 보았습니다: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어떤 사람은 완고하게 하십니다”]. 여기서 주권자 하나님께서 완악(완고)하게 하신 자는 애굽 왕 바로입니다. 성경 로마서 9장 17절을 보십시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은 바로에게 '내가 너를 세운 것은 내 능력을 너에게 보여 내 이름이 온 세상에 널리 퍼지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성경 출애굽기를 읽다보면 애굽 왕 바로가 마음을 완강하게 하는 모습을 여러 번 봅니다(출7:14; 8:15, 32; 9:7; 10:1). 바로 왕과 애굽인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였습니다(삼상6:6).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바로 왕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심에 있어서 죄를 지셨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또한 이 말은 하나님께서 바로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들었다는 말도 결코 아닙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요18:38; 고후5:21).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를 지으시지 않으실 뿐만 아니라 죄를 지으실 수도 없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시는 분도 결코 아니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말씀(롬9:18하)을 하나님께서 바로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셨다고 생각해서는 결코 아니됩니다. 성경 야고보서 1장 13-15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악한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사람을 시험하시지도 않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유혹을 받기 때문입니다. 욕심이 생기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현대인의 성경).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롬9:18)는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저는 이 말씀을 로마서 1장 24, 26, 28절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 내버려 두셨다’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롬9:18)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내버려 두셨기에 바로의 마음은 완악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은 바로를 내버려 두신 것입니다. 바로 왕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 것입니다. 저는 우리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완고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시면 우리의 마음은 완고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셨습니다(겔36:26).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우리에게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26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해 주시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11:19).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우리의 공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긍휼을 입은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 왕 바로는 하나님께 긍휼을 입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된 “긍휼의 그릇”이 아니었습니다(롬9:23). 오히려 그는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a vessel of wrath)이었습니다(22절). 진노의 그릇이되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에게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셨습니다(22절). 다시 말하면, 주권자 하나님께서 멸하시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인 애굽 왕 바로는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한 진노의 그릇이었다는 말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완악한 바로에게 속히 진노를 쏟아 붇지 않으시고 열 번째 재앙까지 내리셨을까요? 제 생각엔 하나님께서 그러지 않으시고 그냥 딱 한 번의 재앙으로(열 번째 재앙을 그냥 첫 번째 때 내리셨으면 되셨을 텐데) 진노를 바로에게 쏟아 부셨으면 모세나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리 고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것은 저의 생각이고 하나님의 생각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어찌 이 땅에 사는 저의 생각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생각을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 이사야 55장 9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고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다”(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 바로 왕에게 속히 진노를 한꺼번에 다 쏟아 붇지 않으시고 10재앙을 내리신 것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바로에게까지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셨을까요? 저는 그 이유가 하나님께서는 바로 왕이 회개하길 원하셨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저의 생각의 근거는 로마서 2장 4절 말씀입니다: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자비로 인해서 사람이 회개하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오히려 그분의 넘치는 자비와 너그러움과 참으심을 업신여긴단 말입니까?”]. 저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도 적용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노하셔서 재앙을 내리실 수도 있으신 데도 불구하고 그리 않하시고 우리에게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을 업신여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그릇”인 애굽 왕 바로(22절)을 완악하게 내버려두신 것일까요(18절, 롬1:24, 26, 28)? 그 이유는 2가지였습니다: (1)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기 위해서, 그리고 (2) 하나님의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기 위해서(9:17). 결국 하나님께서 애굽 왕 바로의 완고함도 사용하셔서 10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시므로 하나님의 (심판의) 능력을 보이셨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도 보이시므로 하나님의 이름인 온 땅에 전파되게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입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맹세하신바 “내가 계획한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며 내가 하기로 마음 먹은 것은 반드시 실행될 것”입니다(사14:24,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는 진노의 그릇이 바로를 심판하시고 긍휼의 그릇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하셨습니다(롬9:23).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원래 “진노의 그릇”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를 마땅히 받아 멸망당해야 할 마음이 완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진노의 그릇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사 창세 전에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요 약속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된 것일까요? 바로 독생자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진노의 그릇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은 긍휼이 여기시지 않으시고 그에게 모든 진노를 다 쏟아부시므로 저와 여러분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리하셨나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야곱을 사랑하시고 에서를 미워하신(13절)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독생자 예수님을 미워하셨기에 예수님을 진노의 그릇으로 삼으셨고 저와 여러분을 긍휼의 그릇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진노의 그릇이 됐어야 했는데, 예수님이 대신 진노의 그릇이 되시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의 그릇이 된 것입니다. 우리야 말로 토기장이 되시는 하나님의 걸작품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을 입은,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6년 7월 21일, 마땅히 진노의 그릇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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