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은 바리새인과 같은 교인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누가복음 11:42-44).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1장 42-44절 말씀을 목요일에 이미 묵상한 누가복음
11장 37-41절(말씀 묵상 글 제목:
“종교적 형식주의를 버리고 내면부터 정결케 해야 합니다!”)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할 때[그 이유는 두 말씀 다 바리새인들의 위선(Hypocrisy)을 주제로 하며,
“겉과 속의 불일치”라는 핵심 논리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임(인터넷)] 이 말씀 묵상 글 제목을 “어리석은 바리새인들과 같은 교인들”이라고 정했습니다(참고: 여기서 “어리석은”은 40절에서 말씀하고 있고,
“바리새인”은 42절과 43절에서 말씀하고 있음. 그리고 “교인들”이란 오늘 말씀을 현재 제 자신과 저 같은 교인들을 생각하면서 적용한 것임).
(a)
먼저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1장
42절과
4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란 헬라어(그리스오) 단어 “Φαρισαίοις”(파리사이오이스)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묵상하고자 합니다.
(i)
이 단어의 어원적 의미:
'파리새'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페루쉼(Perushim)'에서 유래했으며,
'분리하다'라는 뜻을 가집니다(“분리된 자들”). 그들은 이방인이나 부정한 유대인들로부터 자신들을 분리하여 율법을 엄격히 준수함으로써 거룩함을 유지하려 했던 집단이었습니다(인터넷).
·
오늘 본문 누가복음 11장 42-43절에서의 의미는 “위선의 상징”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라고 부르실 때,
이 명칭은 다음과 같은 부정적인 영적 상태를 폭로하는 호칭으로 쓰였습니다(인터넷):
-
“본질보다 형식을 앞세우는 태도:
박하와 운향 같은 아주 작은 채소의 십일조까지 철저히 계산해 바치면서도,
정작 신앙의 핵심인
'공의(Justice)'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Love
of God)'은 저버리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
사람의 인정을 갈구하는 종교적 명예욕:
회당의 높은 자리(상석)와 시장에서의 문안(공적인 존경)을 즐기는 이들의 자기중심적 신앙을 비판하는 대상입니다.
-
내면이 썩은 신앙:
겉으로는 거룩해 보이지만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타인을 영적으로 오염시키는
'평토장한 무덤'
같은 존재로 정의됩니다”(인터넷).
n
요약: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Φαρισαίοις)는 단순히 유대교의 한 파벌을 부르는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진실한 관계보다 외적인 종교적 행위와 사회적 지위에 집착하는
'외식하는 자'들을 말씀합니다(인터넷).
(ii)
“바리새인”들이란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여기서 외식이란 무엇입니까? 히브리어 의미는 ‘자기를 감추는 자’ 또는 ‘위선자’입니다. 신약에서는 원래 무대에서 가면을 쓰고서 연출하는 배우를 가리킨 것으로서,
후에는 위선자,
외식하는 자를 의미하는 단어 ‘휘포크리테스’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특히 종교인들에게 상용된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거짓된 태도를 뜻합니다. 겉으로는 아주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하면서도 내면으로는 거짓과 위선이 가득한 경우가 바로 외식의 적합한 표현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외식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의 죄악은 무엇이었습니까? 한 마디로,
경건은 말로만 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이였습니다(박윤선). 시편
50편 16절 말씀입니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이르시되 네가 어찌 내 율례를 전하며 내 언약을 네 입에 두느냐”.
-
이것은 외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로만 하나님의 종교를 전문하고 있음을 꾸짖고 있는 말씀입니다(박윤선). 17절 말씀입니다:
“네가 교훈을 미워하고 내 말을 네 뒤로 던지며”. 무슨 말씀입니까? 외식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교훈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 뒤로 던집니다.
·
이것이 우리의 외식이요 죄가 아닙니까?
주일,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예배당을 나아갈 때에 그 말씀을 우리의 뒤로 던지고 세상에 나아가서 또 다시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는 우리가 아닙니까. 왜 이렇게 하나님의말씀을 우리 뒷전에 미뤄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여기면서 살아갑니까?
-
그 원인을 칼빈은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외식하는 종교가들의 증표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의 결핍이다”(칼빈).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의 결핍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미워하고 뒤로 던지는 죄악을 범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b)
둘째로,
저는 우리가 이미 묵상한 누가복음
11장 4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어리석은 자들아”란 헬라어 단어 “ἄφρονες”(아프로네스)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묵상하고자 합니다.
(i)
어원적 의미:
부정 접두어
'아(ἀ-)' + 마음/지각을 뜻하는
'프렌(φρήν)':
직역하면 '지각이 없는',
'마음(정신)이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
사물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이 결여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ii)
누가복음
11장 40절에서의 구체적 의미: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이 단어를 사용하신 이유는 그들의 치명적인 영적 무지 때문입니다.
·
창조의 원리를 모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라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의 외형뿐만 아니라 내면(마음)도 창조하셨음을 간과하는 어리석음을 지적합니다.
· 본말전도(本末顚倒): 그릇의 겉(외적인 정결 예법)을 닦는 데는 온 힘을 쏟으면서, 정작 하나님이 보시는 그릇 안(마음의 탐욕과 악독)을 방치하는 비논리적인 태도를 꼬집는 것입니다(인터넷).
·
영적 근시안:
눈에 보이는 종교적 형식에만 매달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보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iii)
시편의
'어리석은 자'(성경적 배경):이 단어는 구약 성경(70인역) 시편 14편 1절의 "어리석은 자(나발, Nabal)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라는 개념과 맥을 같이 합니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고 공언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이 마음 중심을 보고 계심을 무시하고 사는
'실천적 무신론자'를 뜻하기도 합니다.
·
결국 “어리석은 자들”(아프로네스)(눅11:40)는 종교적 행위는 화려하지만,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단절된 영적인 눈먼 상태를 꾸짖는 강력한 경고의 단어입니다(인터넷).
-
로마서
2장 19-24절 말씀입니다: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n
어리석은 바리새인들은 스스로를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라고 확신합니다(19절). 하지만 정작 남은 가르치면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는 치명적인 영적 맹점을 보입니다(21절). 그리고 그들은 율법을
'소유'했다는 사실만으로 자랑하지만,
정작 율법을
'범함'으로써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다(23절).
# 그들의
'눈먼 상태'는 단순히 지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데 몰두하여 정작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모르는 상태입니다(인터넷).
-
마태복음 15장
14절 말씀입니다:
“그냥 두라 그들은 맹인이 되어 맹인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시니.”
n
겉(그릇)은 닦으면서 속(마음)을 만드신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어리석은 바리새인들은(눅11:40), 겉으로 드러나는
'장로들의 전통'(손 씻기 등)에 매몰되어,
정작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마 15:19)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그들은 스스로는
'가장 잘 믿는 자'라고 자부하지만,
예수님 보시기에 이들은 진리의 길에서 이탈한 위험한 안내자들입니다(인터넷).
# 제가
2009년 7월 21일에 “예배의 정화”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으면서 쓴 글의 한 부분입니다(참고: https://blog.naver.com/kdicaprio74/150057413766):
“우리 한국 교회의 예배당은 놀랍다.
그런데 진정한 교회인 우리 성도들(목회자들이나 평신도들이나)은 썩어져 가고있지 않나 하는 두려움이 있다.
특히 나 같은 목회자들이 썩어져 가므로 양 떼들이 영적 굶주림과 목마름 속에서 방황하고 있지않나 생각한다.
이젠 우리 목회자들이 더이상 양 떼들에게 모델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시대를 맞이하지 않았나 생각한다.바래새인의 모델로 대치 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젠 성도님들 입에서 목회자를 향한 말
- '자기는 안하면서 왜 우리에게 자꾸만하라고 하는지
...'- 이란 말이 충분히 나오는 시대를 맞이한 것이다.
배가 부른 목회자,
자기 배만 살찌우고 양 떼들은굶주려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서도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목회자들에게 주신 영적 권위를 우리 목회자들이남용하여 권위주의식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러한 권위주의식 목회를 하는 목회자를
'존경' (적어도겉으로는)하는 양 떼들이 수 없이 많다는 생각이다.
이것을 가리켜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격이 아닌가 생각된다.
바리새인목회자는 바리새인 교인들 만들어 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라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이사야
1장14절말씀처럼 하나님의 마음이 싫어하시는 예배요 하나님에게 무거운 짐이 되는 예배일 뿐인 것이다.”
(c)
마지막 셋째로,
저는 “평토장한 무덤”
(눅11:44)같은 어리석은 바리새인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는지 관심을 가지게 되어 묵상합니다.
(i)
“평토장한 무덤”
같은 바리새인들은 한마디로
'겉은 평범해 보이나 속은 죽음(부정함)을 품고 있어,
타인까지 오염시키는 치명적인 위선자들'을 의미합니다.
구체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보이지 않는 위선'을 가진 사람들
(눅 11:44)
평토장한 무덤:
원래 유대인들은 무덤에 회칠을 하여 사람들이 닿지 않게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평토장한 무덤”은 표시가 없어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지나가도 그것이 무덤인 줄 모릅니다.
의미: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경건하고 거룩해 보여서,
사람들은 그들과 접촉하는 것이 영적으로 유익하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그 실체는 영적 죽음 상태에 있습니다.
2.
본질보다
'사소한 규칙'에 목숨 거는 사람들
(눅 11:42)
박하와 운향의 십일조:
아주 작은 향신료 채소까지 철저히 계산해 바치는 종교적 열심을 보였습니다.
결여된 것: 정작 신앙의 핵심인
'공의(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통째로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즉,
형식은 있으나 생명력은 없는 상태입니다.
3.
'영적 교만'과 '명예욕'에 빠진 사람들
(눅 11:43)
높은 자리와 문안:
회당의 상석에 앉고 시장에서 존경 섞인 인사를 받는 것을 즐겼습니다.
의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종교적 권위'를 더 중요하게 여긴 이들입니다.
4.
타인을
'부정하게' 만드는 사람들
(눅 11:44)
유대 율법상 무덤을 밟으면
7일 동안 부정해집니다.
평토장한 무덤 같은 바리새인들과 접촉하는 이들은,
그들이 위선자인 줄도 모른 채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가치관에 물들어 영적으로 오염됩니다.
요약: 결국 이들은 "신앙의 껍데기는 화려하고 정교하지만,
그 중심에는 하나님이 아닌 자기 의(Self-righteousness)와 탐욕이 가득하여 주변 사람들까지 영적 파멸(구덩이)로 끌어들이는 위험한 인도자들"이었습니다(인터넷).
(2)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 누가복음
11장 42-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어리석은 바리새인과 같은 교인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a)
'본질'보다 '종교적 체크리스트'에 집착하는 교인
(42절)
(i)
성경의 모습:
박하와 운향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림.
(ii)
오늘날의 모습:
주일 성수,
십일조, 봉사 등 외형적인 종교 의무는 철저히 수행하지만,
일상 속에서 정직(공의)하게 살거나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은 식어버린 상태입니다.
신앙을
'관계'가 아닌
'행위의 목록'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b)
'영적 허영심'과 '인정 욕구'가 강한 교인
(43절)
성경의 모습: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즐김.
오늘날의 모습: 교회 내에서의 직분이나 사회적 지위를 영적 권위로 착각하며,
남들에게 경건해 보이고 대접받는 것에 큰 가치를 둡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들의 시선과 칭찬'에 머물러 있는 상태입니다.
3. '영적 선영력'이 아닌
'오염원'이 된 교인
(44절)
성경의 모습: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도 모름.
오늘날의 모습: 겉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신실한 교인처럼 보이지만,
실제 삶(속)은 세속적인 가치관과 탐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가 신앙인인 줄 알고 교제하지만,
정작 그의 위선적인 삶과 이중성을 통해 은연중에 영적인 해악을 입게 됩니다.
4.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 교인
성경의 모습: 자신이 '무덤'인 줄도 모르고 남을 인도하려 함.
오늘날의 모습: 스스로는 구원받은 의인이라 확신하며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이 부패해 가고 있다는 사실에는 눈먼
'영적 소경'의 상태입니다.
결국 어리석은 바리새인 같은 교인은
"종교적 형식이라는 안경을 쓰고 자기 의(Self-righteousness)에 취해,
정작 하나님이 보시는 마음 중심은 방치하는 사람"입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