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적 형식주의를 버리고
내면부터 정결케 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누가복음 11:37-41).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1장
37-41절 말씀을 묵상할 때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38절)는 말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38절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이 바리새파 사람은 예수님이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a)
왜 그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던 것일까요?
(i)
여기서 ‘씻다’라는 헬라어 “ἐβαπτίσθη”(에바프티스테)는 동사 “βαπτίζω”(배티조)의 부정과거 수동태형으로,
여기서 “βαπτίζω”(배티조)는 “담그다”,
“잠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흔히 “세례”나 “침례”로 변역됩니다. 이 단어는 규례에 따라 식사전에 물 그릇에 손을 담그는 것을 뜻합니다[누가복음의 저자 누가가 여기서 일반적인
'씻다'라는 단어 “νίπτω”(닙토)
대신 “βαπτίζω”(배티조)의 수동태형인 “ἐβαπτίσθη”(에바프티스테)을 사용한 것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이 식사 전 세척을 단순한 청결이 아닌 하나의 엄격한 종교적 의례(baptism)로 간주했음을 보여줍니다”](참고: 인터넷, 호크마).
·
이 단어는 신약성경의 여러 문맥에서는 전신을 물에 담그는 것뿐만 아니라,
손이나 그릇을 씻는 정결 의식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용어로도 사용되었는데 오늘 본문 누가복음
11장 38절에서의 씻는 행위는 단순히 손의 먼지를 닦는 것이 아니라,
식사 전 손을 씻음으로써 자신을 성별하는 바리새인들의 전통적인 규례를 의미합니다(인터넷).
-
이 행위는 당시 하나의 예의요 관습이었고,
단순히 위생상의 문제 뿐만 아니라 죄많은 세상과 접촉함으로 인해서 생기는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결례였습니다.
아무튼 이 제의적 식사 관습은 바리새인 뿐 아니라 일반 유대인들도 철저히 지켰던 규범이었습니다(막 7:3-4). 따라서 이 유전을 무시한 예수의 행위는 그 바리새인에게 파격적인 것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호크마).
(2)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눅11:39-40).
(a)
왜 예수님(주님)은 예수님이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은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기고 있었던 그 바리새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i)
예수님은 주님으로서 자신을 초청한 그 바리새인을 면전에 두고 매우 강한 어조로 그뿐만 아니라 전체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비판하셨는데 마태의 경우는 “화 있을진저”라는 저주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25절 말씀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
이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거룩함을 보이려고 그릇의 겉을 닦듯이 철저히 예식을 엄수함으로써 자신들의 외양을 포장하지만 그 속은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위선자들이라는 것입니다(호크마).
-
여기서 “탐욕”이란 헬라어 “ἁρπαγή”(하르파게스)은 “움켜쥐다”
또는 “채어가다”는 뜻의 “ἁρπάζω”(하르파조)에서 온 말로 “강탈”,
“약탈”의 의미를 포함합니다.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이미지를 가집니다:
(1) 맹수의 사냥:
늑대가 양 떼를 덮쳐서 낚아챌 때(요 10:12) 사용됩니다. (2) 무력 사용:
상대방의 의사와 상관없이 강제로,
폭력적으로 빼앗는 행위입니다. (3) 약탈:
전쟁터에서 승리자가 패배자의 물건을 휩쓸어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인터넷).
n
“이는 단순히 마음속으로 더 갖고 싶어 하는 욕심을 넘어,
남의 것을 강제로 빼앗거나 약탈하는 공격적인 탐욕을 뜻합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척 씻고 있지만,
실제로는 남의 것을 착취하고 있었다는 통렬한 비판입니다”(인터넷).
-
또한 “악독”이란 헬라어 “πονηρία”(포네리아)은 “악한 자”를 뜻하는 “πονηρός”(포네로스)에서 온 말로서 이는 단순히 도덕적인 실수를 넘어 타인을 해치려는 적극적인 악의나 부패한 성품을 의미합니다. 즉,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종교적 순결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나 그 중심을 얼마나 욕심이 많고 악한 자들인가를 잘 표현해 주는 말입니다(호크마).
n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악독”이란 헬라어 “πονηρία”(포네리아)(39절)가 앞서
34절에서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요”라는 말씀에서 “나쁘면”이란 헬라어 “πονηρός”(포네로스)와 같은 단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악독”(39절)과 ‘나쁜 눈’(34절)과 연결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마음속에 “악독”(포네리아)이 가득한 바리새인들은 “나쁜(포네로스) 눈”을 가진 상태이며,
그 결과 하나님의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ii)
예수님께서 식사 전 손을 씻지 않은 것을 보고 의아해하는 바리새인에게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39절)라고 강한 어조로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의 '종교적 위선'과 '본질의 상실'을 정면으로 지적하시기 위함입니다(인터넷).
·
구체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의식적 청결'과 '도덕적 부패'의 극명한 대비
바리새인은 손을 씻는 “ἐβαπτίσθη”(에바프티스테)(정결 예식)'라는 외적 형식에만 몰두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겉(손, 잔의 겉)을 닦는 데는 지극 정성이지만,
정작 그 손으로 행하는 실상은 남의 것을 “강탈”[“ἁρπάζω”(하르파조)]하고 마음에는 “악독”[“πονηρία”(포네리아)]을 품고 있다는 이중성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즉,
"손은 씻어서 깨끗할지 모르나,
그 마음은 썩어 있다"는 것을
'안과 밖'의 비유로 질타하신 것입니다.
2.
'사람의 유전'이 '하나님의 공의'를 가로막음
당시 식사 전 손을 씻는 것은 구약 성경의 핵심 율법이라기보다 바리새인들이 만든
'장로들의 전통'에 가까웠습니다.
바리새인은 이 사소한 전통을 어기는 것에는 크게 놀라면서도,
정작 율법의 본질인
'사랑과 공의'를 저버리고 탐욕을 부리는 자신의 상태에는 무감각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무엇이 더 중요한 가치인지를 잊어버린
'영적 맹인'
상태임을 깨우쳐 주려 하신 것입니다.
3.
'내면의 빛'에 대한 실천적 훈계
앞선 33-36절에서 예수님은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보고
'이상히 여긴 것'
자체가 이미 그의 내면(눈)이 어둡다는 증거였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판단하는 바리새인에게
"정작 네 속(내면)이 탐욕으로 가득 차서 어두운데,
어찌 겉만 씻는 것에 연연하느냐?"라고 반문하시며 마음의 개혁을 촉구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하나님은 잔의 겉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는 강력한 경고이자 가르침이었습니다(인터넷).
(iii)
예수님께서 식사 전 손을 씻지 않은 것을 보고 의아해하는 바리새인에게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40절)하고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들이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인터넷).
1.
창조주의 통합적 주권
(겉과 속의 일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겉(외적 정결)'만을 보시는 분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드셨다"고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신체(겉)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속)까지 창조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겉만 깨끗하게 닦고 속(마음)은 탐욕으로 가득 찬 상태는,
창조주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위이자 그분의 주권을 무시하는
'어리석음'이라는 지적입니다.
2.
본질적인 정결의 기준 제시
바리새인들은 '손을 씻는 예식'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믿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정결은
'전인적인 정결'임을 강조하십니다.
겉을 닦는 정결례는 인간이 만든 전통에 불과할 수 있지만,
속(내면)을 살피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래 창조 목적입니다.
속을 만드신 하나님 앞에서 속이 더러운데 겉만 씻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논리입니다.
3.
영적 무지에 대한 책망
('어리석은 자들')
헬라어 '아프론(ἄφρων)'은 단순한 지능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영적 통찰력이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누가복음 11장 34-36절의 '눈(통찰력)' 비유와 연결됩니다.
그들은 눈이 나빠서(포네로스) 창조주의 의도를 보지 못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의식(씻기)에는 민감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부패(탐욕과 악독)에는 무감각한 그들의 지독한 모순을
'어리석음'이라는 단어로 꼬집으신 것입니다.
결국 이 말씀은
"하나님은 네 손의 청결보다 네 마음의 청결을 만드신 분이며,
그것을 더 중요하게 보신다"는 창조 신앙적 경고입니다(인터넷).
(3)
예수님께서는 식사 전 손을 씻지 않은 것을 보고 의아해하는 바리새인에게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41절)하고 말씀하셨습니다.
(a)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집착하던
'외적 정결'의 한계를 깨고
'내면의 본질적 변화'를 촉구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 구체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소유'보다 '존재'의 정결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잔과 대접의 겉(의식적인 면)을 닦는 데 몰두했지만,
그 안에는 남의 것을 낚아챈 탐욕(하르파게)과 악독(포네리아)이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은 독소로 가득 찬 내면을 비워내는 유일한 방법으로
'구제'를 제시하셨습니다. 남의 것을 빼앗아 채웠던 그 손을 펴서 가난한 자에게 내어줄 때,
비로소 창조주가 만드신
'속(내면)'이 씻겨 내려가기 때문입니다.
2.
율법의 형식보다
'사랑의 정신'이 본질임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정결이란 '물로 씻는 예식'이었으나, 예수님에게 정결이란
'하나님의 자비(구제)'를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손을 깨끗이 씻어도 마음속에 이웃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더러운 상태입니다. 따라서
"구제하라"는 말씀은 율법의 문자에 매몰된 그들에게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회복하라는 명령입니다.
3.
'모든 것'이 깨끗해지는 원리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구제를 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내면(속)이 하나님 앞에서 사랑과 자비로 정결해지면,
그 정결한 마음으로 행하는 식사나 의식 등 삶의 모든 외적인 영역(겉)까지도 저절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행위가 된다는 원리입니다. 즉,
'안에서 밖으로(Inside-out)'
흘러나오는 진짜 정결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탐욕으로 가득 찬 네 마음을 비우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제를 실천하라.
그것이 물로 손을 씻는 것보다 백 배나 더 너를 정결하게 만든다"는 영적 통찰을 주신 것입니다(인터넷).
(i)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제가
2010년 10월 14일에 “사도행전
22장 30절 – 23장
5절 말씀 중심으로 “바른 신앙생활”
(Upright Christian Life)이란 제목 아래 쓴 말씀 묵상 글을 다시금 읽게 되었습니다(참고: https://blog.naver.com/kdicaprio74/150095461603). 한 부분만 나눕니다:
“둘째로, 바른 신앙생활은 위선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3장 3절을 보십시오: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하느냐 하니.” 이 말은 사도 바울이모인 공회원들에게 자기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선한 양심대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말했을 때(1절)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바울의 입을 치라고 하여 바울이 대제사장 아나니아에게 말할 내용입니다. 이 내용을 살펴보면 ‘회칠한 담’이란 표현은 “겉은 아름답지만(희지만) 속은 온갖 더러운 것(흙)으로 가득 찼다는 말”입니다(유상섭). 한 마디로 말한다면,
겉과 속이 다르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위선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대제사장 아나니아에게 ‘당신은 위선자’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다’고 꾸짖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의 회칠한 겉모습은 율법에 따라 심판하기 위해서 재판석에 앉아 있는 것이고,
더러운 속모습은 율법을 어기고 바울을 치라는 명령에 있습니다(유상섭). 이 바울의 말은 예수님께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에게 하신 말씀들과 유사합니다. 누가복음
11장 39, 44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끗이 하나 너희 속인즉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 화 있을찐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마태복음
23장 2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회칠한 무덤 같다고 질책하신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회칠한 담이든,
회칠한 무덤이든 겉은 아름답지만 속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찼음을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종교적 예식을 철저히 감당하는 겉 모습은 사람이 보기에 참으로 아름답게 보이고 깨끗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 속에 있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함을 보고(알고) 계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는 ‘위선의 상징’으로 ‘바리새인’을 꼽았습니다. 그들은 당시 유태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가 높은 만큼 신앙적과 시욕 또한 대단해서 외식(外飾), 허식(虛飾), 가식(假飾)의 전형으로 비쳐졌습니다. 거짓으로 꾸미고 자기 의(self-righteous)를 과시하는 위선자들 이였습니다. 어거스틴은 배우들이 그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 것처럼 가장하고,
그들의 본 모습이 아닌 다른 사람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교회 안과 모든 인간 생활에서 본래의 자기 모습이 아닌 것처럼 가장하려는 모든 사람은 위선자이거나 배우라고 말했습니다(인터넷). 우리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12장 1절 하반절에서 하고 계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우리는 너무 겉으로 사람에게 옳게 보이려고 힘쓰지 말아야 합니다(마23:28). 오히려 우리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해야 합니다. 그래야 겉도 깨끗하게 될 것입니다(마23:26). 베드로전서
1장 22절 말씀처럼 우리는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우리)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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