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을 향하여”
[누가복음 19장 28-38절]
여러분, 여러분도 찬송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를 좋아하시지요? 1절 가사입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 내 뜻과 정성 모아서 날마다 기도합니다.” 여러분,
신앙은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한 걸음씩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한 걸음씩 저 높은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임. 우리도 이 세상에 안주하지 말고 저 천국을 향하여 전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뜻과 정성 모아서 날마다 주님과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우리를 부르시사 주님의 품에 안겨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일시적인 즐거움에 안주하기보다,
영원한 본향인 천국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인생의 최종 목적지로 삼고 살아가야 합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누가복음
19장 28-38절은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을 당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 죽으시고자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이야기를 기록한 내용입니다. 저는 이 말씀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라는 28절 말씀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란 말씀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오늘 종려 주일 설교 제목으로 삼고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저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이란 도시의 의미가 무엇인지 한 4가지로 간략하게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참고: 인터넷):
(1)
“예루살렘”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이유는 그곳에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의 임재가 거하는 거룩한 처소”).
유대인들은 성전을 하나님이 지상에서 당신의 백성과 만나시는 유일한 장소이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으로 믿었음.
(2)
“예루살렘”은 흩어져 살던 모든 유대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강력한 구심점이었기 때문입니다(“민족 정체성의 근간과 영적 고향”).
구약 성경의 율법(출23:14-17;
신16:16)에 따라 이스라엘의 성인 남성들이 매년 세 번,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예루살렘 성전)을 직접 방문해야 했던 종교적 의무가 있었습니다(“3대 절기 순례”). 즉,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이 되면 전 세계(디아스포라)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역뿐만 아니라 전 세계(디아스포라)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며 민족적 일체감을 확인했습니다(“민족적 결속”). 순례객들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시편 120~134편)를 부르며 축제 분위기를 즐겼습니다(“기쁨의 축제”).
그들은 율법에 따라 각자의 형편에 맞는 제물(가축이나 곡식)을 정성껏 준비하여 성전에 바쳤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순례 규모:
예수님 시대에는 예루살렘 평소 인구의 몇 배에 달하는 수십만 명의 인파가 순례를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도시 전체가 매우 혼잡했으며,
로마 당국은 민족주의 열기가 고조되어 폭동이 일어날까 봐 군대를 증원해 감시를 강화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과 함께 이 순례의 전통을 지키셨으며[(눅 2:41)”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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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28-40절을 보면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 역시 이 유월절 순례 인파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3)
“예루살렘”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이유는 그곳이 바로 메시아적 희망과 정치적 해방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 지배를 받던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은 장차 올 메시아의 통치가 시작될 장소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시면 예루살렘에서 로마 세력을 몰아내고 다윗의 영광스러운 왕국을 재건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메시아적 기대(messianic
expectation)입니다:
(1) 정치적 해방(political
freedom), (2) 사회적 공의(social
justice), (3) 경제적 풍부함
(economic prosperity)
(4)
“예루살렘”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이유는 그곳이 바로 행정과 문화의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종교적인 면 외에도 예루살렘은 유대 사회의 최고 의결 기구인 산헤드린 공회가 위치한 행정적,
사법적 중심지였음(여기서 “산헤드린 공회”란 성경 시대 예루살렘 성전에 기반을 둔 유대인의 최고 의결 기관이자 재판소였습니다(누가복음 2장 41절에서 언급된 유월절 기간처럼 수많은 유대인이 성전에 모일 때,
이들의 종교적·사법적 질서를 유지하던 핵심 조직임). 또한 헤롯 대왕의 대대적인 건축 사업을 통해 당시 로마 제국 내에서도 손꼽히는 웅장하고 부유한 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습니다(인터넷).
둘째로, 저는 ‘언제(When)
예수님께서 이 “예루살렘을 항하여”
가셨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그 때는 바로 유대인의 3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중 바로 “유월절”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요한복음
12장 12절을 보면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라고 사도 요한은 기록하였는데 1절을 보면 그 “명절”이 “유월절”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시기가 유월절 절기와 맞물려 있었는데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란 유대인들이 유월절 어린 양을 준비하는 바로 그 기간에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할
'하나님의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에 제물로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여기서 “제물”이란 예수님께서 진정한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우리의 모든 죄의 대가를 대신 지불하신 완전한 대속제물로서 십자가에 피 흘려 단번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죄로 인해 원수가 되었던 하나님과 우리를 다시 화해시키시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셨습니다(화목제물).
셋째로, 저는 ‘어떻게(How)
예수님께서 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셨는가 (입성하셨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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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36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가”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말”(horse)도 아니고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신 것일까요? 마태복음 21장 1-5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을 입성하신 이유를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4절)하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선지자”란 스가랴 선지자를 말씀합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9:9). “당시 세상의 왕들이나 정복자들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위엄을 뽐내기 위해 크고 당당한
'말'을 타고 입성했습니다. 말은 군사력과 정복,
전쟁을 상징합니다. 반면 나귀는 작고 초라하며 짐을 나르는 겸손과 평화의 짐승입니다. 예수님은 무력으로 로마를 물리칠 정치적 해방자가 아니라,
낮아짐과 섬김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평화의 왕'임을 몸소 보여주신 것입니다”(인터넷).
마지막 넷째로,
저는 ‘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셨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신 목적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신 목적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의 제물이 되러 가신 것’입니다”(인터넷). 누가복음
19:28-38과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그 구체적인 목적
3가지가 있습니다(인터넷):
(1)
인류의 죄를 대속할
'희생 제물'이 되기 위함입니다(대속의 목적).
예수님은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인류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을 대신 받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 값을 치를
'대속 제물'이 되기 위해 스스로 그 죽음의 장소로 걸어 들어가신 것입니다.
(2)
자신이
'참된 왕(메시아)'임을 공식 선포하기 위함입니다(계시의 목적).
그동안 사역하시면서 자신의 정체를 숨기셨던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 때만큼은 공개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며 자신이 평화의 왕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군중들의 찬양을 제지하지 않으시고(눅 19:40),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임을 온 세상에 공포하셨습니다.
(3)
하나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순종'하기 위함입니다(복종의 목적).
예수님께 예루살렘은 환영의 장소가 아니라 고난과 십자가가 기다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 앞서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눅
19:28)"는 표현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려는 자발적이고 결연한 순종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려 하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신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대신 죽으시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19장 2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셨다는 말씀을 묵상할 때 요한계시록
21장 1-2절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여기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죄와 죽음으로 물든 이전의 세상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영원한 천국의 시작을 의미합니다(인터넷). 그리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란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게 될
'완성된 성도들의 모임'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이곳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처소이며,
다시는 눈물이나 사망,
애통하는 것이 없는 곳입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3-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셨기에(요12:12), 우리가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계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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