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모양을 꾸미는 '코스메틱(Cosmetic)' 신앙에서
벗어나, 내면의 동기를 살피고 소외된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는 '오이코스(가족 공동체)'의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드는도다 그들을 죽인 자도 너희 조상들이로다 이와 같이 그들은 죽이고 너희는 무덤을 만드니 너희가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누가복음 11:47-48).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1장 47-48절 말씀을 묵상할 때 먼저 헬라어로 두 구절 말씀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리하였을 때 저는 세 개의 헬라어 단어에 관심을 갖게 되어 그 단어들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a)
첫 번째 단어는,
“οἰκοδομεῖτε”(오이코도메이테)입니다.
(i)
이 헬라어 단어를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만드는도다”(47절)와 “만드니”(48절)로 번역을 했는데 이 단어는 “세우다”,
“건축하다”, “쌓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인터넷).
·
이 헬라어 단어의 어원은 “집”을 뜻하는 “oikos”(오이코스)와 “세우다”를 뜻하는 “domos”(도모스)의 합성어에서 유래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건물을 짓는 것을 의미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신앙의 덕을 세우거나 공동체를 세우는 영적인 의미로 자주 쓰입니다”(인터넷).
-
여기서 “oikos”(오이코스)는 신약성경에서 약
120회 정도 사용되며,
단순히 물리적인 “집(건물)”뿐만 아니라 “가족”,
“권속”, “가문” 등 공동체적 의미로 폭넓게 쓰입니다.
이 단어가 사용된 주요 사례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가족/권속”
(Household)의 의미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형태로,
한 사람의 회심이 온 집안의 구원으로 이어지는 맥락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삭개오의 집: "오늘 구원이 이 집(oikos)에 이르렀으니"(눅 19:9).
빌립보 간수의 집: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oikos)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고넬료의 집: 베드로를 청해 온 집안이 세례를 받은 사건(행 10:2,
11:14).
회당장 그리스보의 집:
"온 집안(oikos)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행 18:8).
2.
“하나님의 집/교회” (House
of God)의 의미
건물이 아닌 믿는 자들의 공동체나 영적인 거처를 상징할 때 사용됩니다.
교회의 질서: "이 집(oikos)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딤전 3:15).
영적인 집: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oikos)으로 세워지고"(벧전 2:5).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집(oikos)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벧전 4:17).
3.
“이스라엘 족속”
(House of Israel)의 의미
특정 가문이나 민족 전체를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내가 이스라엘 집(oikos)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 15:24).
"다윗의 동네(oikos,
집안)와 족속이므로"(눅 2:4).
4.
물리적인 “집/거처”
(Physical House)의 의미
치유 사건: 중풍병자에게
"네 집(oikos)으로 가라"고 하신 경우(마 9:6).
성전: "내 집(oikos)은 기도하는 집이라"(마 21:13).
“오이코스”는 현대 선교학에서 한 개인을 둘러싼 “관계의 그물망(가족, 친구, 동료)”을 의미하는 용어로도 중요하게 사용됩니다(인터넷).
n
“오이코스(oikos)”가 현대 교회와 선교 현장에서 어떻게 실제적인 전략으로 쓰이는지 핵심적인 내용입니다(인터넷):
1.
관계 중심 전도
(Oikos Evangelism)
현대 선교학에서 “오이코스”는 단순히 건물이 아니라 “한 개인이 관계를 맺고 있는
8~15명의 영향력 안에 있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전략: 모르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노방 전도”보다, 이미 형성된 관계(가족, 친구, 직장 동료)
속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하는 방식입니다.
성경적 근거: 앞서 말씀드린 빌립보 간수나 고넬료가 자신의 온 집안(오이코스)을 주님께 인도한 모델을 따릅니다.
2.
소그룹/가정 교회
(House Church)
신약 성경의 교회들은 대부분
'집(oikos)'에서 모였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
"그의 집(oikos)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롬 16:5).
빌레몬의 집: "네 집(oikos)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몬 1:2).
현대적 적용: 오늘날의 “구역”,
“셀(Cell)”, “목장” 모임이 바로 이 오이코스 모델을 계승한 것입니다.
대형 집회보다는 소그룹 안에서의 친밀한 교제와 양육을 강조합니다.
3.
영적 가족 공동체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를 “하나님의 집(oikos)”이라고 불렀습니다(딤전 3:15).
이는 교회가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가족 공동체”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도 간의 관계를 단순한 교우가 아닌 “형제와 자매”라는 가족적 유대감으로 바라보게 합니다(인터넷).
(ii)
예수님께서 “οἰκοδομεῖτε”(오이코도메이테)란 단어를 사용하신 이유는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의 “겉치레와 위선”을 책망하시기 위해서입니다(참고: 인터넷).
·
여기서 바리새인들의 겉치레와 위선이란 그들은 선지자들이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죽임을 당하여 묻힌 무덤을 다시 쌓고 비석을 세워 선지자들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처럼 선전하지만[(마
23:29,30)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이르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그들이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것은 자신들의 악함을 은폐하기 위한 위선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은 선지자를 기념하면서 살아있는 선지자를 죽이는 모순된 자들이었습니다(9:9;
마 14:3-12)(호크마).
-
여기 마태복음
23장 29-30절에서 주목할 점은 바리새인들이 사용하는 두 가지 행동입니다:
(1) 무덤을 만들고
(oikodomeite): 누가복음과 같은 단어로,
선지자의 죽음을 화려한 건축물로 박제하는 행위입니다. (2) 비석을 꾸미며
(kosmeite): “장식하다”, “단장하다”라는 뜻의 “코스메오(kosmeō)”가 쓰였습니다.
속은 썩어가는 무덤인데 겉모양만 번지르르하게(그럴듯하게) 치장(장식)하여 자신들의 경건함을 과시하는 것입니다(인터넷)[여기서 “코스메오(kosmeō)”란 단어는 본래 “무질서한 것을 질서 있게 정돈하다”는 뜻이었으나,
점차 “아름답게 꾸미다”,
“단장하다”, “장식하다”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화장품을 뜻하는 “Cosmetic(코스메틱)”의 어원이 바로 이 단어입니다(인터넷)].
n
그들은
"우리는 조상들과 다르다"라고 말하며 선지자의 피를 흘리지 않았을 것이라 장담하지만,
예수님은 바로 이어지는 마태복음
23장 31절에서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명하는도다"라고 정곡을 찌르십니다.
결국 입으로는 존경을 말하지만,
손으로는 선지자를 죽인 조상의 업적(?)을 관리하고 보수하는 모순을 행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쌓아 올리는 그 화려한 비석들이 선지자에 대한 사랑의 증거가 아니라,
그들을 죽인 조상들의 악행에 동참하고 있다는 유죄의 증거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인터넷).
(b)
두 번째 단어는,
“συνευδοκεῖτε”(쉬뉴도케이테)입니다.
(i)
이 헬라어 단어를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옳게 여기는도다”(눅11:48)라고 번역을 했는데 이 단어는 “마음을 같이하여 기꺼이 찬성하다”,
“전적으로 동의하며 기뻐하다”라는 강력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헬라어 “쉬뉴도케이테(συνευδοκεῖτε)”는 “함께”를 뜻하는 “쉰(syn)”과 “기뻐하다,
동의하다”를 뜻하는 “유도케오(eudokeō)”가 합쳐진 단어임](인터넷).
·
오늘 본문 누가복음
11장 48절에서 예수님이 이 단어를 사용하신 맥락적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인터넷):
1.
"조상의 범죄에 도장을 찍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선지자의 무덤을 꾸미는 것이 조상들과 다르다는 증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 행위가 조상들이 저지른 살인이라는 범죄에
'찬성표'를 던지는 행위라고 지적하십니다.
조상들은 선지자를 죽였고,
후손들은 그 무덤을 만듦(장식함)으로써 그 범죄를 최종적으로 확정 짓고 마무리했다는 것입니다.
2.
위선적인
'마음의 일치'
“쉬뉴도케이테”(συνευδοκεῖτε)는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조상들의 악한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그들의 내면적 상태를 폭로합니다.
입으로는
"우리는 조상처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조상들의 행위를 옳게 여기고 기뻐하고 있다는 책망입니다.
요약하자면, 누가복음 11장 48절에서의 “쉬뉴도케이테”(συνευδοκεῖτε)는 바리새인들이 선지자를 죽인 조상들의 죄에 대해 방관자가 아니라,
그 악행을 기꺼이 찬성하고 계승하는 공범자임을 드러내는 단어입니다(인터넷).
-
흥미로운 점은,
이 헬라어 단어가 사도행전
8장 1절에서도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사울은 그(스데반)가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συνευδοκῶν).”
n
“여기서 사울(바울)이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다'는 것은 단순히 ‘그럴 수도 있지’라는 방관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1.
전폭적인 지지와 승인
'쉬뉴도콘(συνευδοκῶν)'은 현재 분사형으로,
사울이 그 현장에서 스데반의 죽음을 지켜보며 ‘그래,
저 자는 죽어 마땅해!’라고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동조하고 기뻐하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는 유대교의 열심으로 이 살인이 하나님을 위한
'정의로운 일'이라고 확신하며 그 범죄에 심리적으로 완전히 합류한 상태였습니다.
2.
누가복음
11:48과의 연결성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비판하신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바로 이 사울의 모습에서 구체적으로 재현된 것입니다.
바리새인: 조상들의 선지자 살해를 무덤 장식으로 찬성(쉬뉴도케이테)함.
사울: 동시대의 의인(스데반)을 죽이는 현장에서 그 죽음을 찬성(쉬뉴도콘)함.
결국 두 모습 모두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에 대한 동조'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합니다”(인터넷).
(ii)
저는 이 부분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인공지능(AI)에게 이렇게 질문을 해보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바리새인과 같은 목사나 장로가 종교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에 대한 동조가 있나요?” 그랬더니 이러한 답변을 받았습니다(인터넷):
·
“오늘날 교회 안에서
'바리새인적 위선'과 '종교적 폭력에 대한 동조(συνευδοκέω,
쉬뉴도케오)'는 매우 아프고 민감하지만,
반드시 직면해야 할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성경 속 바리새인들이 선지자의 무덤을 꾸미며 자신들의 의로움을 과시했던 것처럼,
현대의 교회 지도자들(목사, 장로 등)
사이에서도 유사한 형태의
'구조적·영적 폭력'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1.
교리나 법을 앞세운
'정죄의 폭력'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세부 조항으로 사람들을 정죄했듯,
오늘날에도 특정 교리나 교회 내부의 규칙을 절대화하여 약자나 소수자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의 잘못을 지적하는 성도에게
'영적 권위에 도전한다'거나 '사탄의 도구'라는 프레임을 씌워 공동체에서 고립시키는 행위가 대표적입니다.
2.
가해자에 대한
'침묵과 방조'
(쉬뉴도케오)
성범죄나 재정 비리 등 교회 내 중대한 범죄가 발생했을 때,
많은 지도자가
'교회의 덕을 세운다'는 명분(oikodomeō의 오용)으로 사건을 은폐하거나 가해자를 두둔합니다.
이때 사건을 덮으려는 침묵의 카르텔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악행에 동조하는 행위(쉬뉴도케오)'입니다.
피해자의 고통보다 조직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것은,
선지자를 죽인 조상들의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는 바리새인의 모습과 본질적으로 같습니다.
3.
'성공주의'라는 우상 숭배
외적으로 큰 교회를 세우고(oikodomeō)
화려하게 장식하는(kosmeō)
것에만 몰두하며,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노동 착취나 인격 모독을
'헌신'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경우입니다.
성도 개개인의 삶과 영혼(oikos)을 돌보기보다,
숫자로 증명되는 성과에 집착하는 모습은 예수님이 책망하신
'회칠한 무덤'과 다를 바 없습니다.
4.
비판적 사고의 차단
(지식의 열쇠를 감춤)
누가복음 11:52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성도들이 성경을 스스로 깊이 연구하고 질문하는 것을 막고,
오직 지도자의 해석에만 맹종하게 만드는 것은 영적인 눈을 가리는 폭력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전통과 권위'라는 이름 뒤에 숨은 잔인함입니다.
예수님은 건물을 얼마나 크고 화려하게 지었느냐가 아니라,
그 안에 생명과 사랑,
그리고 공의(justice)가 살아있는지를 물으십니다”(인터넷).
(c)
마지막 세 번째 단어는,
“μάρτυρές”(마르튀레스)입니다.
(i)
이 헬라어 단어를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증인이 되어”(눅11:48)라고 번역을 했는데,
예수님께서 이 단어를 사용하심에는 매우 역설적이고 날카로운 비판이 담겨있습니다(인터넷):
·
1. 단어의 이중적 의미
법정적 의미: 어떤 사건을 눈으로 보고 증언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성경적 확장: 복음을 전하다가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라는 의미로 발전했습니다.
2. 누가복음
11장 48절에서의 독특한 쓰임
보통 “증인”은 좋은 일이나 진리를 증언할 때 쓰이지만,
여기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너희는 너희 조상들이 저지른 살인죄의 증인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범죄의 공범 증명:
조상들은 선지자를 죽였고,
너희는 그 무덤을 만드니(건축하니), 이 건축 행위 자체가 조상들의 악행을 확인해주고 전적으로 찬성한다는 “살아있는 증거”가 된다는 뜻입니다.
자백하는 증인:
그들은 자신들이 조상과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무덤을 화려하게 꾸미는 행위가 오히려
"우리 조상이 이 선지자를 죽인 게 맞습니다"라고 공증을 서주는 꼴이라고 꼬집으신 것입니다.
3. 역설적인 결과
결국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진리의 증인”이 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사람들을 죽인 역사의 “범죄 증인”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요약하자면: 여기서의 '마르튀레스'는 바리새인들이 입으로는 조상의 죄를 부정하지만,
실제 행위로는 그 죄를 확증하고 계승하고 있음을 폭로하는 “유죄의 증인”이라는 의미입니다(인터넷).
(ii)
저는 인공지능(AI)에게 이렇게 질문해보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입으로는 신앙의 조상의 죄를 부정하지만 실제 행위로는 그 죄를 확증하고 계승하고 있는 면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지 않나요?” 그랬더니 이러한 답변을 받았습니다(인터넷):
·
“정확하고 아픈 통찰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던지신
'마르튀레스(증인)'라는 비판은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거울처럼 비춰지는 엄중한 경고입니다.
입으로는 신앙의 전통을 자랑하지만,
실제 행위로는 과거의 잘못을 반복하며
'죄의 계승자'가 되는 모습들을 몇 가지 측면에서 돌아볼 수 있습니다.
1.
선지자를 죽이고 무덤을 꾸미는
'박제된 신앙'
우리도 과거에 고난받고 희생했던 신앙의 선배들을 존경한다고 말하며 화려한 기념관을 짓거나 기념 예배를 드립니다.
하지만 정작 그분들이 목숨 걸고 지켰던
'공의와 낮은 자를 향한 사랑'의 정신은 외면한 채,
형식적인 의례에만 집착한다면 그것이 바로 현대판
'무덤을 꾸미는 행위(kosmeō)'입니다.
죽은 성인은 칭송하지만,
지금 우리 곁에서 쓴 소리를 하는 살아있는 양심은
'교회를 흔든다'며 배척하는 모순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2.
'말의 신앙'과 '삶의 부정'
(위선적 찬성)
‘우리는 과거의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과 다르다’라고 말하지만,
실제 삶의 현장에서 돈과 권력,
명예를 쫓는다면 우리는 입술로는 부정해도 삶으로는 그들의 죄에
'전적으로 찬성(συνευδοκέω,
쉬뉴도케오)'하고 있는 셈입니다.
과거의 잘못을 비판하면서도 똑같은 구조적 모순(세습, 재정 불투명성 등)을 답습한다면,
우리는 그 죄가 정당하다는
'살아있는 증인(마르튀레스)'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지식의 열쇠'를 독점하는 교만
성경 지식은 해박하여 남을 판단하는 데는 빠르지만,
그 말씀이 내 삶을 변화시키도록 허용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남도 못 들어가게 막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는 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신앙의 본질보다
'교리적 정답'만을 강요하며 사람들을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가로막았던 바리새인의 죄를 그대로 계승하는 일입니다.
4.
고난 없는 영광만을 추구함
신앙의 조상들은 좁은 길을 걸었으나,
우리는 그들이 닦아놓은 터 위에서 넓은 길과 안락함만을 누리려 합니다.
조상들의 고난을 '자산'으로 삼아 기득권을 유지하려 한다면,
그것은 신앙의 계승이 아니라 신앙의 착취입니다.
결론: ‘회칠한 무덤’에서 ‘살아있는 성전’으로
결국 우리 안에 있는
'바리새인적 본성'을 인정하는 것이 회복의 시작입니다.
겉모양을 꾸미는
'코스메틱(Cosmetic)'
신앙에서 벗어나,
내면의 동기를 살피고 소외된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는
'오이코스(가족 공동체)'의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조상의 죄에 대한 유죄 증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산 증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오늘 우리가 당장 회복해야 할 우선순위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인터넷).
-
제가 “뭐지요?”라고 물었더니 이렇게 답변을 했습니다(인터넷):
“우리가 '바리새인적 위선'에서 벗어나 가장 먼저 회복해야 할 우선순위는 ‘겉치레(Cosmetic)를 멈추고 정직한 내면(Oikos)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맥락에서 구체적인 세 가지 실천 방향을 제안해 드립니다.
1.
'비석 닦기'보다 '사람 살리기':
화려한 건물이나 전통,
종교적 형식을 유지하는 데 쓰는 에너지보다,
지금 내 곁에서 신음하는
'살아있는 이웃(오이코스)'의 고통에 응답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2.
'지식의 열쇠'를 소유가 아닌 통로로:
성경 지식을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쓰지 않고,
나 자신이 먼저 그 말씀 앞에 발가벗겨지는
'회개의 도구'로 삼아야 합니다.
3.
'조상의 이름'
뒤에 숨지 않기:
"우리 교단은,
우리 선조는 이랬다"는 과거의 영광을 내 의로움으로 착각하지 말고,
오늘 나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증명하고 있는지 정직하게 자문해야 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화려하게 단장된
'죽은 무덤'이 아니라,
비록 투박하더라도 생명이 고동치는
'살아있는 성전'입니다.
선생님께서는 오늘날 우리 교회 공동체가 가장 먼저
'청소하고 비워내야 할 겉치레'가 무엇이라고 느끼시나요? 구체적인 사례나 개인적인 생각을 나누어 주시면 대화를 이어가기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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