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영적 교만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누가복음 10:25-37).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0장 25-37절 말씀을 크게 두 개로 나눠서 묵상하려고 합니다:
(a)
첫째로,
누가복음 10장 25-28절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두 말씀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a1)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와서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하고 물었다는 말씀(25절, 현대인의 성경)과 (a2) 예수님께서 “네 말이 옳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하고 대답하신 말씀(28절, 현대인의 성경).
(i)
먼저 “어떤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내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하고 질문하였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26절)하고 말씀하셨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리 질문하신 것일까 라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
예수님의 질문에 그 율법교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27절)하고 대답하였는데 이 대답은 모세 오경인 신명기
6장 5절(“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과 레위기
19장 18절(“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에 근거한 대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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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점은 마태복음
22장 35-40절을 보면 바리새인들(34절)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35-36절)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37-39절).
·
결국 “어떤 율법교사”의 대답(눅10:25,
27)과 예수님의 대답(마22:37-39)이 일치합니다. 그 말은 이 대답인 모세의 법 중에 가장 큰 계명으로서(36절, 현대인의 성경)
그 율법교사는 그 가장 큰 계명을 행해여야만 영생을 얻는다고 답변한 것입니다(눅10:25-27). 그래서 예수님은 그에게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네 말이 옳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현대인의 성경)](28절)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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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과연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옳게 대답한 말 그대로 자기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주 그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자기 이웃을 자기 자신 같이 사랑할 수 있었을까요? 과연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기가 옳게 답변한 그대로 실천할 수 있었을까요?
n
결국 예수님의 의도는 율법을 온전히 지켜 행함으로(실천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의 한계는 어느 누구도 모든 율법을 단 하나도 어기지 않고 평생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인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율법은 인간이 죄인임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진리를 암시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갈2:16),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b)
마지막 둘째로,
누가복음 10장 29-37절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세 말씀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b1) 그 율법교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하고 물었다는 말씀(29절)과 (b2)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30-35절)과 (b3) 예수님의 질문인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절)와 그 율법교사의 답변인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37절)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너도 가서 그와 같이 실천하여라”(현대인의 성경)]는 예수님의 말씀(37절).
(i)
먼저 그 율법교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29절)했다는 말씀을 묵상할 때 “옳게 보이려고”라는 헬라어 “δικαιῶσαι”(디카이오사이)는 자기 자신을 정당화(self-justification)하려는 의미로서 그는 회개하지 않고 의롭게 보이려 애쓰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인터넷).
·
그 율법교사는 자신의 체면을 세우고,
자신이 율법을 충분히 잘 지키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하거나 정당화하려 했습니다. 그는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8절)는 예수님의 말씀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모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정하는 대신,
그는 '이웃의 범위'를 좁힘으로써 자신이 율법을 다 지켰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입니까?
(내 기준에 맞는 사람들만 이웃이라면 나는 이미 다 사랑하고 있습니다)"라는 자기 정당화의 태도입니다(인터넷).
-
저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했던 그 율법교사를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말씀하신 비유가 생각났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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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율법교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10:29)했다는 말씀에서 “옳게 보이려고”라는 헬라어 “δικαιῶσαι”(디카이오사이)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긍휼을 구하는 대신,
자신의 행위와 논리로 자신의
'옳음'을 방어하려 했던 영적 교만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단어입니다(인터넷).
(ii)
그 다음에 묵상할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30-35절)은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 강도를 만납니다.
옷을 빼앗기고 얻어맞아 거의 죽게 된 채(거반 죽은 것)
길가에 버려집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가장 거룩하다고 여겨진 제사장과 레위인이 차례로 그곳을 지나갑니다.
하지만 그들은 강도 만난 자를 보고도
"피하여 지나가 버립니다"(율법의 정결 예법이나 자신의 안위를 사랑보다 우선시한 모습입니다).
·
그 때 당시 유대인들이 멸시하던 사마리아인이 등장합니다.
그는 세 단계에 걸쳐 압도적인 자비를 베풉니다:
(1) 감정적 반응: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측은지심이 행동의 동기가 됨),
(2) 응급 처치: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후,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가 돌봐줌. (3) 지속적 책임:
다음 날 주막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이틀 치 임금)을 주며 비용을 지불하고,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 갚겠다고 약속함.
-
“이 비유의 핵심 포인트:
예수님은 율법교사가 던진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대상 찾기)라는 질문에 대해,
이 비유를 통해
"너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 주겠느냐?"(주체적 사랑)로 질문의 본질을 바꾸어 버리십니다”(인터넷).
(iii)
예수님은 그 율법교사에게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절)하고 물으셨을 때 그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37절)하고 대답하였는데 왜 그는 ‘사마리아인이니이다’하고 대답하지 않았을까요?
·
“그 율법교사가
'사마리아인'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지 않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에둘러 대답한 데에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그의 심리 상태가 깊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1.
극심한 민족적 적대감과 편견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혼혈 민족이자 배교자로 여겨 짐승 취급을 할 정도로 경멸했습니다.
율법교사에게
'사마리아인'은 부정한 이름이었기에,
그 이름을 직접 입에 올리는 것조차 자존심이 상하고 불쾌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2.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모순을 인정하기 싫음
율법교사는 처음에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정당화하려고)"
질문을 던졌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정작 존경받는 유대 종교 지도자(제사장, 레위인)는 악역이 되고,
자신이 개처럼 여기던 사마리아인이
'참된 이웃'으로 등판하자 커다란 심리적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이 옳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그 정체성(사마리아인)까지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던 고집스러운 태도가 투영된 대답입니다.
3.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마지못한 굴복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으시며 그를 외통수에 몰아넣으셨습니다.
논리적으로 사마리아인이 이웃이라는 결론을 부정할 수 없게 되자,
그는 그의 인종이나 이름 대신 그가 행한
'행위(자비)'만을 언급함으로써 최소한의 체면을 지키려 한 것입니다.
4.
역설적인 진리 강조
오히려 이 대답 덕분에 성경을 읽는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웃은
'혈통'이나 '신분'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당하는 자에게
'자비를 베푸는 구체적인 행위'로 증명된다는 사실입니다”(인터넷).
-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민족적,
인종적 제한을 두고 있는 유대인들의 이웃 개념을 타파하고 그들이 원수처럼 여기는 사마리아인도 이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려 하셨지만 그 율법교사는 여전히 사마리아인에 대해 배타적 태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호크마).
(iv)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교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너도 가서 그와 같이 실천하여라”(현대인의 성경)](37절)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28절 말씀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네 말이 옳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현대인의 성경)].
·
결국 예수님은 그 율법교사에게 반복해서 “행함(실천)”을 강조하셨는데 그 의도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영생에 이를 만큼 완벽하게 ‘행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실 뿐만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가르쳐 주시고자 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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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일5:12, 현대인의 성경). 그 이유는 우리는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1:2;
5:20, 현대인의 성경)를 마음에 모셨기 때문입니다(12절, 현대인의 성경).
-
그리고 성경은 이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셔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들은(3:14,
현대인의 성경)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되(23절)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5:12).
-
그리고 성경은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1:2;
5:20)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요일3:23)이야 말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2절, 현대인의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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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성경은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4절).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을 통해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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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성경은 우리가 주님 안에,
주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5:5). 여기서 “열매”란 무엇일까요? 다시 자문하면,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계명대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할 때 맺는 그 “열매”란 무엇일까요? 저는 그 “열매”가 두 가지라 생각합니다.
n
그 두 가지,
이중적인 열매(twofold
fruit)는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요 또한 성령님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믿어 이미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중 계명(twofold
commandment)대로 우리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우리의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할 때에(마22:37,
39) 맺는 이중적인 열매(twofold
fruit)란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벧후1:4)으로서 그 의미는 성령님의 성화로 인해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요 또한 성령님의 열매(fruit)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갈5:22-23)를 맺는 것입니다.
# 그리고 성경은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임을 보여 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8절, 현대인의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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