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느헤미야 10장 32-39절 말씀 묵상]
어느 목사님이 열심히 설교하는데 여 집사님 한 분이 일어났다 앉았다하며 두리번 두리번 하면서 사방을 살피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눈에 거슬렸지만 교인들이 얼마나 왔나 수를 세어 보는구나 하며 참았습니다. 예배 후에 여 집사님에게 왜그랬느냐 고 물었더니 0집사 0집사가 그저께 곗돈 줄 날인데 아무 소식이 없어서 오늘 왔나 보려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집사님 곗돈 받으러 온 것이요, 예배 드리러 온 것이요?”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겸해서지요 뭐”(인터넷). 내가 받아야 할 “곗돈”만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전에 사역을 위하여 하나님께 받쳐야 할 헌금을 생각하고 있지 못하는 현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성경 마택복음 6장2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For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your heart will be also). 우리가 “보물”처럼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학개 선지자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관심은 자기들의 “판벽한 집”이였습니다(학1:4). 그 때에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너희가 이 때에 판벽한 집에 거하는 것이 가하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전을 방치한 죄를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중심으로 수문광장에서 말씀의 부흥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39절)고 결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무엇을 드리겠다고 헌신했는지 한 4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받치고자 했던 것은 성전 세금(the temple tax)이였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10장 32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또 스스로 규례를 정하기를 해마다 각기 세겔의 삼분 일을 수납하여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쓰게 하되”. 4월25일까지가 세금 마감 일인데 다들 세금 내셨습니까? 오래 전에 김동길 연세대 명예 교수님이 여기 LA 오셔서 강연을 했었을 때 우리 크리스천들보러 나라에 세금을 받쳐야 할 것은 권면한 것이 기억납니다. 그 이유는 얼마나 우리 크리스천들이 정직하게 나라에 세금을 받치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윤리실천운동”(기윤실)에서도 나라에 세금을 양심있게 받치는 것을 권면하는 신문 광고를 여러번 본 기억이 납니다. 성경 마태복음 22장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받쳐야 할 예물(헌금)들은 받친다고 하면서 나라에 받칠 것은 받치고 있지 않는 크리스천들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10장 32절 배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이 20살과 그 위로 하나님의 전 사역을 위하여 성전 세금을 반 세겔씩을 내도록 되어있었습니다(출30:11-16). 이 세금은 이스라엘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속하시되 값주고 그들을 자유케 하셨다는 사실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였습니다. 또한 성전 세금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에게 속한 백성들로서의 행동을 취할 것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였습니다. 원래 이 세금은 출애굽기 38장25-28절을 보면 성소의 판장 받침과 문장 기둥 받침, 그리고 성전 기둥 갈고리를 만드는데 쓰여졌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사역에 드는 비용으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2절을 보면 반세겔이 아니라 “세겔의 삼분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이스라엘이 외국의 압제를 받아 너무 가난해진 결과(느9:37)로 반 세겔이 3분의 1세겔로 적어진 것 같다고 박윤선 박사님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7장24-27절을 가보면 나중에 예수님 당시에 와서는 다시 반 세겔로 돌아온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삼분 일 세겔을 해마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냈을 때에 어떻게 쓰여졌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낸 돈은 하나님의 전의 모든 일을 위하여 쓰여졌습니다. 하나님의 전에서 사역에 필요한 것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낸 돈을 사용하였습니다. 느헤미야 10장 33절을 보십시오: “곧 진설병과 항상 드리는 소제와 항상 드리는 번제와 안식일과 초하루와 정한 절기에 쓸 것과 성물과 이스라엘을 위하는 속죄제와 우리 하나님의 전의 모든 일을 위하여 쓰게 하였고”. 여기서 “진설병”은 성소 안에서 떡 열 두개를 안식일마다 번갈아 진설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외에 “소제”(곡식으로 성립되는 제물이니 노력을 제물로 드린다는 비유), “번제” (그 드리는 자의 헌신을 의미하는 것), “안식일 초하루와 정한 절기에 쓸 것”(제물로 드릴 것들을 가리킴) 등등이 있었습니다.
성전 세금을 요즘 말로 한다면 “헌금”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각기 세겔의 삼분 일”을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린 것처럼 교회 온 성도들이 주님의 교회에 헌금을 하므로 말미암아 교회가 모든 사역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 교회 영어 사역에 한 자매는 지난 주 영어 예배 전에 저에게 자기 헌금 봉투을 보여 주면서 “Church Building”(건축헌금)란에 Check mark와아예 “Church Building”이란 글을 볼펜으로 동그라미를 쳐서 저에게 보여주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 자매에게 ‘왜 건축헌 금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마 그 자매가 하는 말 교회 목양실 안에 있는 침대가 놓여있는 조그만 방을 수리(renovation)했으면 해서 헌금한다고 하면서 자기가 조금씩 헌금하기 때문에 오래 걸릴 것이라고 말하면서 웃더군요. ㅎㅎㅎ 우리는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물질을 하나님께 받쳐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마음으로 헌금을 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기들의 헌신에 대하여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그저 물질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만족한 줄 알기 때문입니다(박윤선).
둘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받치고자 했던 것은 나무 헌금(wood offering)이였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10장 34절을 보십시오: “또 우리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들이 제비 뽑아 각기 종족대로 해마다 정한 기한에 나무를 우리 하나님의 전에 드려서 율법에 기록한 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단에 사르게 하였고”. 이것은 레위기 6장8-13절(민28:1-8)에서 말씀하고 있는 “상번제”를 위한 것으로 “단위에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레6:12)해야 하기에 나무가 항상 많이 필요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가 언제가 없어지지 않는 것인 만큼 그들을 대신하여 번제물 을 단 위에 벌여 놓고 태워야 하기 때문에 단 위에 불이 항상 피워 있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비 뽑아 각기 종족대로 해마다 정한 기간에 나무를 가져 다가 하나님의 전에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젠 신약 시대 때 와서는 상번제를 계속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진정한 “상번제” 재물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자 십자가에 단번에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구약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상번제를 드리는 단위에 불을 항상 피워 꺼지지 않도록 나무를 하나님의 전에 받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나무 헌금”을 지금 우리 시대의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을까요? 저는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기도를 ‘나무 헌금’과 비교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상번제를 위하여 단위에 불을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나무 헌금을 한 것처럼 우리는 성령의 불이 우리 마음에 꺼지지 않게 하기 위하 여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에 날마다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너무나 많은 우리 크리스천들은 마치 희미한 등불과 같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꺼져가는 심지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환하게 발해야 할 우리들이 오히려 희미한 등불처럼 빛을 발하기는 커녕 어두움에 덮혀 서 꺼져가는 심지와 같이 무능력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원인은 성령의 불을 훨훨 타오르게 하는 주님의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 헌신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요즘 차 gasoline 가격이 얼마나 비싼 줄 모르겠습니다. 거의 3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차를 타고 다니려고 하기에 우리는 돈을 많이 내서라도 gasoline을 차 안에 넣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의 사람들로서 성령의 불길을 훨훨 타오르게 하기 위하여 성령의 기름인 말씀과 기도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는데 가격을 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헌신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우리 주님의 몸된 교회가 공동체로서 주위에 예수님의 빛을 발할 수 있겠습니까?
셋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받치고자 했던 것은 첫 열매 (firstfruits)이였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10장 35-3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해마다 우리 토지 소산의 맏물과 각종 과목의 첫 열매를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로 하였고 또 우리의 맏아들들과 생축의 처음 난 것과 우양의 처음 난 것을 율법에 기록된 대로 우리 하나님의 전으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주고 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에 두고”.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받쳤습니까? 그 이유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든 첫 번째 열매는 주님 것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4장 19절을 보십시오: “무릇 초태생은 다 내 것이며 무릇 네 가축의 수컷 처음 난 우양도 다 그러하며”(참고: 레27:26).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당시에 애굽에게 10가지 재앙을 내리시면서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지 아니한 모든 (애굽) 사람들의 첫 아기외 짐승을 다 죽이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던 것임. 결국은 첫 번째 아들은 하나님의 것이기에 희생으로 구속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친 첫 열매가 또 무엇이 있었습니까? 그것은 토지에서 처음 익은 제일 좋은 열매의 첫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9절을 보십시오: “너의 토지에서 처음 익은 열매의 첫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 …”.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수한 곡식 중에 제일 좋은 첫 열매를 하나님의 전에 드리므로 하나님의 전을 섬긴 것입니다. 그 곡식들은 곳간에 쌓게 하므로 성전에서 섬기는 종들로 하여금 사용케 한 것입니다(느12:44).
우리는 우리의 제일 좋은 첫것을 주님께 받쳐야 합니다. 예를 들어 하루에 제일 좋은 첫 시간을 주님께 받쳐야 합니다(예: 새벽기도, 아침 QT 등등). 또한 우리는 물질의 제일 첫 것, 즉 하나님께 받칠 예물(헌금)을 먼저 separate 해 놓어야 합니다. 건강의 제일 좋은 첫것을 주님께 받치자(예를 들어 주일 주님께 나올 때 제일 좋은 건강을 유지해서 나오는 것?).
마지막 넷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받치고자 했던 것은 십일조(tithe)였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10장 37절 하반절에서 39절을 보십시오: “또 우리 물산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 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물산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하나가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 곧 곳간에 두되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바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기명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및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십일조란 무엇입니까? “십일조”란 단어 자체의 의미는 “십분의 일”이란 말입니다. 십일조란 자신의 소득의 10의 1을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입니다. 한 3가지 종류의 십일조가 구약에 있었습니다: (1) 첫째로, 유대인들은 레위인들을 돕고자 매년 자기들의 생산물의 십분의 일을 가지고 주님께 받쳤습니다(레27:30-34). 유대인들에게 십일조를 받은 레위인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제사장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생계 비로 사용되었습니다 민18:25-32). (2) 둘째로, 신명기 26장1-11절에 가서 보면 유대인들은 십분의 일 외에 나머지 90% 에서도 십분의 일을 가지고 성전에 올라가 매년 잔치에 받쳤습니다. (3) 마지막 셋째로, 이 두 가지 십일조 외에 또하나의 십일조는 3년에 한번씩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데 10분의 1을 드렸습니다 신26:12-15, 14:28-29).
십일조 하면 제일 많이 인용되는 말씀이 말라기 3장 말씀일 것입니다. 말라기 3장8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이 말씀대로 십일조를 드리지 않은 것이 범죄 행위에 해당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한 3가지로 요약을 한 것이 있어 나눕니다: (1) 첫째,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인간은 단지 이것을 위탁받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2) 둘째, 10분 1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인간은 나눔의 최소화를 실천하게 되는데 이것은 물질소유에 대한 애착을 버리는 훈련의 기본단계입니다. 이 훈련을 통하여 인간이 물질의 종으로 타락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셋째, 사랑의 하나님의 뜻을 위반한 것이다. 하나님은 십일조의 운용을 통하여 복지 사회를 이루기 위한 소득의 재분배를 계획하신 것입니다(인터넷). 그러나 사람들이 십일조의 규례를 지키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인위적으로 파괴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에 관하여 이러한 도전을 우리에게 하시고 계십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도전하시고 계십니다: 나를 시험하여 보라!
하나님께 받치는 십일조는 우리에게 큰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어도 3가지를 피해야 합니다: (1) 첫째로, 십일조를 잘못된 동기 (예를 들어 마지못해서 혹은 욕심으로 – 만일 내가 십일조를 하나님께 받치면 하나님께서는 꼭 나를 풍요롭게 하셔야 되!)로 드리는 것, (2) 둘째로, 십일조를 받친 후 나머지 90%는 내 마음대로 사용해도 된다는 생각, 그리고 (3) 마지막 셋째로, 십일조만 드리고 주님께 사랑의 예물들을 드리지 않는 것(인터넷).
윈스턴 처어칠은 이러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얻는 것으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주는 것으로 삶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We make a living by what we get, but we make a life by what we give). 수문 광장에서의 진정한 말씀의 부흥은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받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찬송가 185장이 생각납니다. 그 찬송 “내 너를 위하여”(I Gave My Life for Thee) 해설은 이렇습니다. 작시자 하버갈은 독일 유학 중에 뒤셀도르프 시의 어느 화랑에서 ‘이 사람을 보라’는 제목의 유명한 그림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가시 면류관을 쓰신 예수님의 초상화였습니다. 그 밑에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 하였는데.. 너는 나를 위해 무엇을 하였느냐? 란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하버갈은 한동안 그림을 응시하다가 이 찬송시를 써 내려갔다고 합니다. 한 편 하버갈은 빈민굴 양로원의 가난한 여인들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자기가 쓴 이 글을 그들에게 읽어주자 그것을 들은 여인들은 뜻밖에도 큰 은혜를 받고 뜨거운 감사를 했다고 전해집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희생적인 사랑은 너무나 커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어떤 노력으로도 그 은혜를 갚을 길이 없습니다. 이 찬송은 바로 이런 심경을 절실한 어투로 표현한 노랩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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