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는 최우선순위(First Priority)를
주님께 두는 사람들을 통해 확장됩니다.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누가복음 9:57-62).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9장 57-62절 말씀을 유사한 성경구절인 마태복음
8장 19-22절 말씀과 함께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a)
첫째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실 때에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가겠습니다’하였습니다(눅9:57; 마8:19, 현대인의 성경).
(i)
여기서 누가복음
9장 57절을 보면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하고 누가는 기록하였지만,
마태복음 8장 19절을 보면 마태는 “한 서기관”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
그리고 누가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서[“하늘로 올라가실 때가 가까와지자”(현대인의 성경)]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눅9:51) 사마리아 사람의 마을로 가시려고 했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아니 하므로(52-53절) 제자들[그 중에는 예수님께 꾸짖음을 받은 야고보와 요한도 포함하였음(54-55절)]과 함께 다른 마을로 가실 때에 그 서기관이 예수님께 왔다고 기록하였습니다.
-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사람의 마을로 가시려고 했지만 그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영접하지) 않았지만, 다른 마을에서는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왔다는 사실이 좀 흥미롭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제 자신에게 비춰보고 적용해 볼 때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선교지에 갔다가(또는 가기 전에)
한국에 들려서 “인터넷 사역 한국으로”란 가칭아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형제들,
자매들을 만날 때에 어떤 만남들을 제가 다가가서 만나려고 시도하지만 만남이 이뤄지지 않은 반면에 어떤 만남들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상대방 형제들이나 자매들이 저에게 먼저 연락이 와서 만나고 싶다하여 만나는 만남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n
결국 못만남과 만남도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만나고 싶은 사람을 못 만난다 하여 낙심할 필요가 없고 또한 만날 계획이 없었지만 주님께서 서프라이즈로 만남을 주신다면 그 만남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만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모든 만남은 우연히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신 뜻이 있다는 믿음입니다.
(ii)
여기서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가겠습니다’하였다(눅9:57; 마8:19, 현대인의 성경)는 말씀을 묵상할 때 한 두가지 의문이 듭니다:
·
제일 먼저 드는 의문은,
‘왜 유대 사회의 최고 상위계층에 있는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예수님께 와서 말했을까?’입니다.
-
첫 번째 해석은,
호크마에 의하면 누가복음
9장 5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의 답변을 볼 때 아마 그 서기관은 예수님의 권능(마8:16)에 매력을 느꼈을 것이고 그렇게 능력 많으신 분을 수행하는 제자들의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에 부러움을 가졌을 것이기에 그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호크마).
-
두 번째 해석은,
어쩌면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 층이었던 그 서기관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기존의 서기관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음을 보고(마7:29), 학문적 혹은 영적인 호기심에서 그 가르침의 원천을 더 가까이서 배우고 싶어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Rabbi)”이라 부름으로 예수님을 존경받은 율법 해석자로 인정했을 수도 있습니다(참고: 인터넷).
·
만일에 두 번째 해석이 맞다면,
두 번째 드는 의문은,
‘그 서기관은 예수님의 율법 해석을 이해하고 예수님을 따르려고 했던 것인가?’하는 것입니다.
-
제 생각은 ‘아니오’(No)입니다. 제 생각에 근거는 예수님의 율법 해석은 ‘문자적 준수’를 넘어 ‘사랑의 완성’으로 향하는데 그 서기관은 그 예수님의 율법 해석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n
여기서 예수님의 율법 해석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예수님은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마
22:37-40)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가르치심으로 율법의 세부 조항보다 그 정신인
'사랑'이 우선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를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마 5:17)이라 선포하셨는데 이는 구약의 제사 제도를 자신의 희생으로 완성하시고,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사랑으로 성취하셨음을 의미합니다(인터넷).
-
또한 저는 그 서기관은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습니다’하고 말했지만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치러야 할 대가(희생)을 간과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참고: 인터넷).
n
그리고 제 생각엔 그 서기간은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자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고 계시는 것(눅9:51, 53)조차도 간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그는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가운데서 열정적으로 또는 성급하게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했던 것입니다(참고: 인터넷).
(iii)
저는 지금도 이 서기관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헌신 기도를 드리지만 제자로서 치러야 할 대가(희생)을 간과할 정도로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서 열정적으로 또는 성급하게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제가2005년 9월 11일에 “제자도의 값을 지불하라!”는 제목 아래 쓴 칼럼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지만 구원받은 자로서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우리 크리스 찬들은 제자도의 값을 지불하기를 싫어합니다. 그 결과 믿음의 기초만 쌓게 되므로(눅14:29) 이런 저런 사단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결과는 비웃음을 사는 크리스찬이 되는 것입니다(29절). 우리를 주위 깊게 보는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과 비웃음 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은 제자도의 값을 지불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제자도의 값을 지불해야 합니다.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걸머지고 예수님을 쫓아야 할 것입니다. 마음에 십자가 또는 삶의 십자가는 없이 그저 장식용 십자가만 지니고 교회를 들락날락 하면 아니 될 것입니다. 우리는 제자 만드시는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그의 음성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제자도의 값을 지불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족한 은혜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연약함에서 온전해지는 하나님의 능력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고후12:9). 우리는 복음의 소망을 가지고 그 복음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할 각오가 되 있어야 할 것입니다.”
(b)
둘째로,
예수님은 그 서기관에게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나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눅9:58; 마8:20).
(i)
암시성이 깊은 예수님의 이 대답은 그 서기관의 의도를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으며 그런 생각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뜻합니다(호크마). 동시에 예수님을 따르는 길의 실제적인 희생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대답입니다(인터넷).
·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권력이나 부,
명예 따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도리어 여우나 새와 같은 짐승들에게도 허락된 최소한의 삶의 터전조차 보장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의.
식. 주 문제가 안정적으로 확보되고 거기에 덧붙여 입신양명을 지향하는 출세주의가 아니라 때로는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며 안정된 삶의 거처도 없이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자기를 희생시켜 다른 사람을 살리는 일입니다(눅9:23)(호크마).
-
“1. 극심한 비하(Humiliation)와 자발적 가난
예수님은 만물의 주인이시지만,
이 땅에서는 미물인 여우나 새보다도 못한 철저한 나그네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는 주님을 따르는 길이 안락한 정착이나 경제적 안정이 보장되는 길이 아님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2. 세속적 보상에 대한 경고
당시 서기관들은 높은 사회적 지위와 존경을 누렸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더 큰 권세를 얻을 줄 알았던 서기관에게,
예수님은
"나에게는 네가 기대하는 정치적,
물질적 보금자리가 없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3. 영적 배척과 고난의 길
'머리 둘 곳이 없다'는 것은 단순히 잠잘 곳이 없다는 뜻을 넘어,
이 세상이 메시아를 거부하고 배척할 것임을 암시합니다.
제자의 길은 세상에서 환영받는 길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고난에 동참하는 길임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4. 사명 중심의 삶
예수님은 한곳에 정주하며 안위를 누리기보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끊임없이 이동하는 사명 우선의 삶을 사셨습니다.
제자 또한 이 땅에 소망을 두기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꺼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인터넷).
(c)
셋째로,
예수님은 또 다른 사람(제자 중 한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고 말씀하시자 그는
'먼저 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죽은 사람의 장례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하게 버려 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 그리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눅9:59-60; 마8:21-22, 현대인의 성경).
(i)
여기 누가복음
9장 59절에서 누가가 말하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은 마태복음
8장 21절에서 마태는 “제자 중 또 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두 성경구절을 종합해서 묵상할 때 이 두 번째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로서 첫 번째 사람인 “한 서기관”(마8:19)[“어떤 사람”(눅9:57)]도 “제자”임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제자 중 또 한 사람”(마8:21)].
·
그렇다면 여기서 마태가 말하고 있는 “제자”란 무슨 의미일까요?
-
성경에서 말하는
'제자'의 두 가지 의미입니다:
(1) 좁은 의미:
예수님에 의해 특별히 부름받고 모든 것을 버려둔 자(예: 12사도), (2) 넓은 의미:
예수님의 가르침에 관심을 갖고 그분을 이동 경로를 따라다니던 무리(예: 70인의 전도대,
혹은 호기심에 따르던 군중)(인터넷).
(ii)
예수님은 이 제자 중 한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고 말씀하시자 그는 “먼저 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하였습니다(눅9:59, 현대인의 성경).
·
여기서 이 제자가 "먼저 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하는 요청은 "오늘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장례식만 가게 해달라"는 뜻이 아니라고 신학자들은 해석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집에서 모시다가,
장례를 다 치른 후에(수년 뒤가 될 수도 있음)
따르겠습니다"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부모를 봉양하고 장사 지내는 것은 가장 큰 효도였기에,
이를 주님의 부르심을 뒤로 미루는 정당한 사유로 내세운 것입니다(인터넷).
-
저는 이 제자의 지연의 핑계를 생각할 때 저희 교회 원로 목사님이
2022년6월 22일 수요 예배 때 설교하신 말씀 내용 중 새 찬송가
511장 “예수 말씀하시기를”
2-3절 가사를 다시금 읽게 되었습니다:
“(2절) 멀리 가서 이방사람 구원하지 못하나 네 집 근처 다니면서 건질 죄인 많도다 천사같이 말 못하고 바울같이 못하나 예수께서 구속함을 힘을 다해 전하세,
(3절) 죽을 사람 구하라고 예수 너를 부르니 힘이 없어 못한다고 핑계하지 말아라 주가 주신 직분 맡아 항상 기뻐 지키고 부르실 때 대답할 말 나를 보내 주소서.”
n
“힘이 없어 못한다고 핑계하지”
않고 주님이 저를 부르시니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18:1)하고 고백하면서 믿음으로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주님이 저에게 은혜로 주신 직분을 항상 감사하며 기쁨으로 충성하길 기원합니다.
(iii)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제자에게
'죽은 사람의 장례는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하게 버려 두고 너는 나를 따르라 그리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고 말씀하셨는데(눅9:60; 마8:22, 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죽은 사람’은 실제로 숨이 끊어져 장례의 대상이 된 사람을 말하고,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불순종과 죄 때문에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참고; 엡2:1, 현대인의 성경)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은 그 제자에게 육적인 장례는 영적으로 죽은 세상 사람들에게 맡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참고: 인터넷).
·
그리고 예수님은 그 제자에게 두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1) “너는 나를 따르라”(마8:22)와 (2)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눅9:60).
-
(1) “너는 나를 따르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뒤를 쫓아오라는 이동의 명령이 아니라,
인생의 주권과 우선순위를 완전히 재편하라는 강력한 부르심입니다(인터넷):
“1. 즉각적인 순종
(Immediacy)
이 명령은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이나 "내 일을 다 마친 후에"라는 조건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가 되려는 이에게 가장 정당해 보이는 인간적 도리(장례)보다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더 시급함을 가르치십니다.
2. 절대적 우선순위
(Priority)
‘너는’이라는 지칭을 통해,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세상의 관습이 아닌 주님과 나 사이의
1:1 관계를 강조하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가치(가족, 효도)조차 하나님 나라의 가치 앞에서는 우선순위가 뒤로 밀려나야 함을 의미합니다.
3. 생명의 길로의 초대
(Mission)
죽은 자를 돌보는 일(과거/사망)에 매여 있지 말고,
생명을 살리는 일(미래/복음)로 나아오라는 초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이동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 전파]라는 새로운 사명 속으로 들어가는 삶의 전환을 뜻합니다.
4. 예수님의 권위
(Authority)
당시 랍비들은 제자들이 스스로 찾아오는 것을 허락했지만,
예수님은 직접 제자를 선택하고 명령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우리 삶의 진정한 주인이며,
그분의 명령이 인간의 모든 관습과 율법 위에 있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
(2)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이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가 해야 할 사명의 본질과 긴급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다음과 같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인터넷):
“1. 사명의 전환:
'죽음'에서 '생명'으로
앞서 ‘죽은 자들이 장사하게 하라’는 말씀과 대조됩니다.
장례가 이미 끝난 생명(과거)을 수습하는 일이라면,
하나님 나라 전파는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일(현재와 미래)입니다. 예수님은 제자가 슬픔과 과거에 매몰되지 않고,
생명을 살리는 역동적인 현장으로 즉시 이동하기를 원하셨습니다. …
2. 제자의 존재 목적
(Identity)
제자는 단순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구경하는
'팬'이 아니라,
주님의 통치와 복음을 세상에 알리는
'대사(Ambassador)'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행위(Follow)는 반드시 복음을 전하는 행위(Preach)로 이어져야 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3.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선포함
'하나님 나라'를 전파한다는 것은 죽어서 가는 천국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지금 이곳에 임했음을 선포하고,
사람들이 세상의 가치관(돈, 명예, 권력)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오도록 초대하는 것입니다.
4. 뒤로 미룰 수 없는 긴급성
‘너는 가서’라는 명령은 지금 당장의 실행을 요구합니다.
인간적인 도리(장례, 작별 인사)가 중요하지만,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그보다 훨씬 시급한
'골든 타임'이 있는 일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요약하자면: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세상의 관습에 묶여 머뭇거리지 말고,
너에게 맡겨진 생명의 사명을 최우선 순위에 두라’는 강력한 파송의 메시지입니다.”
(d)
마지막 넷째로,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제가 주님를 따르겠나이다마는 저로 먼저 제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하자 예수님은 그에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눅9:61-62).
(i)
먼저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제가 주님를 따르겠나이다마는 저로 먼저 제 가족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눅9:61)하고 예수님께 말했는데 이 요청은 겉보기에 매우 예의 바르고 당연한 인간적 도리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마음의 분산'과 '결단의 지연'이라는 위험 요소를 담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세 가지 핵심 포인트로 정리했습니다(인터넷):
“1. ‘나를 따르겠나이다마는...’
(조건부 순종)
이 사람은 주님을 따르겠다는 의지가 있었지만,
그 앞에
'조건'을 붙였습니다.
주권의 충돌:
제자도는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즉각 반응하는 것인데,
그는 여전히 자기 삶의 스케줄과 주도권을 본인이 쥐고 있으려 했습니다.
미련: "먼저(First)"
가족에게 가겠다는 것은,
아직 세상적인 관계와 애착을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 심리적 상태를 보여줍니다.
2. 작별 인사의 위험성
(엘리사와의 대조)
이 장면은 구약의 엘리사가 엘리야의 부름을 받았을 때 부모와 입 맞추고 오겠다고 한 장면(열왕기상
19:20)과 대조됩니다.
당시 유대 관습에서 가족과의 작별은 단순히
"안녕"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친지들을 모아 잔치를 베푸는 등 상당한 시간과 감정적 소모가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과정에서 가족들의 만류나 정에 이끌려 부르심의 확신이 흔들릴 가능성을 경계하신 것입니다.”
(ii)
예수님은 그에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눅9:62)하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가족 사랑을 부정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그만큼 시급함을 강조하신 말씀으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전적인 헌신’이 무엇인지 농사 현장의 생생한 이미지를 통해 세 가지 핵심 의미가 있습니다(인터넷):
·
“1. 시선의 고정:
‘방향이 흐트러진다’
고대 팔레스타인에서 소가 끄는 쟁기로 밭을 갈 때,
농부는 오직 앞에 있는 푯대만을 주시해야 합니다.
비뚤어지는 고랑: 만약 농부가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면,
쟁기는 즉시 옆으로 비껴나가고 밭이랑은 삐뚤어집니다.
이렇게 갈린 밭에는 씨를 제대로 뿌릴 수 없습니다.
영적 의미: 하나님 나라의 일을 시작한 사람이 자꾸 세상의 미련이나 과거의 삶을 돌아보면,
사명의 방향을 잃게 되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2. 마음의 분산:
‘두 마음을 품은 자’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결단하지 못한 마음을 상징합니다.
미련과 후회: 소돔을 떠나며 뒤를 돌아보았던
'롯의 처'처럼, 주님을 따르기로 했으면서도 세상의 안락함이나 인간적인 관계(앞선 구절의 작별 인사 등)에 마음을 빼앗기는 상태를 말합니다.
불완전한 헌신: 주님은 99%의 헌신이 아니라,
100%의 전심을 원하십니다.
마음이 나누어진 상태로는 하나님 나라의 엄중한 사역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3. 합당성(Fitness)의 문제:
‘준비된 일꾼’
예수님은 그런 사람을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구원을 취소한다는 심판의 메시지라기보다,
하나님 나라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행할
'적임자로서의 태도'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최우선순위(First
Priority)를 주님께 두는 사람들을 통해 확장됩니다.
적당히 타협하거나 핑계를 찾는 태도로는 그 나라의 역동적인 사역에 동참할 수 없다는 현실적인 선언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비유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쟁기(사명)를 잡았습니까?
그렇다면 지금 어디를 보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제자의 길을 걷기 시작한 우리가 세상의 정이나 관습,
안락함이라는 '뒤'를 보지 않고,
오직 주님이라는
'앞'을 향해 전진하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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