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게 하옵소서!
[사도행전 6장 1-7절 말씀 묵상]
교육적 관점에서 본 한국교회의 현재는 어떠합니까? 20세기에 한국교회의 화두가 ‘교회성장’이었다면 21세기에는 ‘교회성숙’으로 초점이 모아지고 있습니다. 교회 성장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대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의 성숙된 모습이 겸비된 가운데에서만이 온전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인터넷). 과연 우리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습니까? 진정한 교회 성장은 말씀 성장에 기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는 곳에 참된 교회의 부흥과 성장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더 가까이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6장 7절에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였다는 말씀은 사도행전에 3번 나오는데(6:7, 12:24, 19:20) 오늘 본문 7절에 처음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했다는 말씀은 하나님 말씀의 힘입는 성장을 말씀합니다. 즉, 사도들이 택한 목회 정책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으로서 하나님 말씀의 강력한 성장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에 제자들의 숫자가 증가되는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말씀의 강력한 역사를 우리 승리장로교회 가운에 일어나길 간절히 사모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 중심으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교회 가운데 점점 왕성할 수 있는지 한 세 가지로 묵상해 보면서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치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6장 2절을 보십시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는 것일까요? 다시 말하면, 왜 우리는 성경책을 잘 읽지 않는 것일까요? 아마도 그 이유는 성경을 “읽기가 어려워서” 혹은 “무슨 뜻인지 몰라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아마 학생들은 “재미가 없어서” 성경책을 읽지 않는다고 말합니다(인터넷). 성경을 읽지 않는 아마 제일 첫번째 이유는 “너무 바빠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 일 저 일에 바쁘다 보면 성경 읽기가 쉽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성경 읽기를 삶에 우선순위를 두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두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열 두 사도들은 분쟁 속에 휩쓸릴 뻔 했습니다(1-2절). 여기서 분쟁이란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간에 물욕으로 인한 불평이 생겨난 것입니다(1절, 박윤선). 여기서 “헬라파 유대인”들이란 이방에서 출생한 유대인들로서 헬라어를 사용하였는데 이들은 “히브리파” 유대인들, 즉 아람어를 사용하는 팔레스틴의 유대인들을 원망하였습니다(1절). 그 이유는 구제 사업에 있어서 헬라파 유대인들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원망하였습니다. 상식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헬라파 유대인들은 아람어를 사용하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에 비하면 소수였기 때문에 이들이 매일 시행되는 구제프로그램에서 소외되었습니다 (유상섭). 여기서 매일 구제란 하루의 끼니도 감당하기 어려운 극빈자들에게 교회가 매일 나누어주는 음식이나 금전상의 지원을 말합니다(유상섭). 이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냐면 오늘 본문 2절에 나오는 “공궤을 일삼는 것”란 문구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문구의 헬라어 뜻은 “식탁에서 섬긴다”입니다. 사실 이 당시에 대부분의 신자들은 걸어서 올 수 있는 예루살렘 인근에 살았기 때문에 매일 있는 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2:46-47, 5:42). 이러한 모임이 있을 때에 교회는 과부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다음 끼니를 위한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교는 기아선상에 있는 자들을 위한 두 가지 지원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즉 실직하여 먹을 것이 없는 자들에게 날마다 음식을 제공하는 것과 일주일에 한 번씩 도시 빈민들에게 음식과 의류를 제공하는 일이었습니다(J. Jeremias, 유상섭). 이 구제 사역에 헬라파 과부들이 빠지므로 헬라파 유대인들이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였습니다. 궁금한 것은 왜 구제 사역에 헬라파 과부들이 빠졌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 원인은 유대교 안에 두 개의 적대적인 파당을 만들게 되었습니다(캠벨 몰간). 언어의 차이점도 있고 문화의 차이점도 있는 이 두 그룹은 결국 분파적 대립(schism) 가운데서 구제 사업에서 사역한 사람들이 헬라파 유대인들이 아니라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였습니다. 분파적 대립의 원인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것(favoritism), 즉 편애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편애는 결국 분열을 낳게 합니다. 예를 들어 원로 목사님은 따르는 성도들과 후임자 목사님들을 따르는 성도들, 결국 한 교회 안에 나뉘어진 두 교회가 있습니다. 결국 이렇게 분열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다시금 찢는 것이나 마찬 가지입니다. 또 한 예로 담임 목사님이 당회원인 장로님들 중에 어느 장로님을 더 편애한다면 당회가 질투, 시기, 분쟁 가운데 분열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십니다[(롬2: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그러기에 우리도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국 초대교회에는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범죄 외에도 교회 안에 편애로 말미암은 분열과 불평이 있었습니다. 과연 이 문제를 사도들은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그들은 즉각적으로 온 교회를 소집하여 더 이상 교회의 구제 프로그램에 관여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말씀 사역에 우선 순위를 두는 것이 마땅함을 지적했습니다(2절).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구제 사업을 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모든 제자들에게 공포하였습니다(2절). 박윤선 박사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이 사도들의 올바른 행정이었다(롬12:8). 사도직은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신령한 직분인데(마28:19-20), 사도들이 구제 사업을 맡아서 하다보니 그 본래의 사명 실행에 지장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목회자가 교회 안에 다른 일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마디로 말한다면 망합니다. 목회자도 망하고 양 떼들도 망합니다. 교회가 무너집니다. 호세아 4장 6-9절을 보십시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저희(제사장들)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저희가 내 백성의 속죄 제물을 먹고 그 마음을 저희의 죄악에 두는도다 장차는 백성이나 제사장이나 일반이라 내가 그 소행대로 벌하며 그 소위대로 갚으리라”. 그러기에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순위에 둬야 합니다. 구제 사업이나 다른 것이 우선순위가 되서는 아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우선 순위를 둬야합니다.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이런 저런 일에 휩쓸려 바삐 살면 아니됩니다.
둘쨰로,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게 되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사역에 헌신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6장 4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교회를 소집한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구제 사업을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함을 공포한 후에 그 구제 사업 일을 대신 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여 그들에게 위임하였습니다. 지금 말로 하자면 안수집사 일곱을 택하여 그들에게 위임하고 목회자들은 기도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하겠다고 공포하였습니다.
목회자는 위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만일 목회자가 장로님이나 안수 집사님이나 평신도 사역자들에게 위임하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교회 안에 이 일 저 일 다하려고 하던지 아니면 자꾸만 간섭해서 평신도 사역자들로 하여금 일을 잘 못하도록 하면 아니됩니다. 그러한 교회는 결코 건강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 목회자들은 평신도 사역자들에게 위임을 하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까? 한 두 가지, 제 생각을 나눈다면 권위주의 때문입니다. 목회자의 권위주의가 살아 있는 한 교계에 전문가를 우대하는 풍토가 조성되기는 어렵습니다(인터넷). 우리 목회자의 권위가 남용되어 권위주의 속에서 목회를 하게 되면 평신도 사역자들에게 될 수 있는데로 위임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신뢰하지 못해서 입니다. 다시 말하면, 목회자가 평신도 사역자를 믿지 못하기에 위임하지 못하고 자기가 일을 다하려고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어느 면으로 보면 목회자가 자기 자신만을 믿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외에는 다른 사람이 일을 제대로 할지 믿지 못합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 남편들이 아내에게 운전대를 잘 맞기지 않는 경향입니다. 아내도 운전을 잘 하는데 제가 운전대를 잡지 않으면 불안해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구제 사업을 일곱 집사에게 위임하고 기도와 말씀 사역에 헌신하겠다고 온 교회 앞에서 공포하였습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말씀 사역은 마치 구제 사역에 있어서 과부들에게 음식을 먹이듯히 신자 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먹이는 것과 더불어 불신자들에게 복음전파(전도) 또한 가리킵니다. 흥미로운 것은 2절에서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지 않겠다고 공포하면서 말씀에 헌신할 것을 이미 예고했었지만 여기 4절에 와서는 “기도하는 것”에 헌신하겠다는 추가 목록이 있습니다. 그것도 ‘말씀 전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에 전무하겠다’고 말씀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고 말씀하였습니까? “말씀 전하는 것”이란 말보다 “기도하는 것”이란 말이 앞에 나왔는데, 이것은 전도자는 무엇보다 먼저 기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팁니다(박윤선). 기도하는 자가 되도록 힘쓰시 않는 가운데서 목회자나 섬기는 자는 나올 수 없는 것이며 또한 나와서도 아니됩니다. 기도하지 않는자가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기가 쉽상일 것입니다. 사도들이 기도와 말씀 사역에 전무하겠다는 결단과 선언은 저자 누가의 기록 관점에서 볼 때에 예수님의 목회 철학을 그대로 반영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결정적으로 보여준 모습은 그가 말씀의 사역 앞에 기도의 사역을 두었다는 사실입니다(눅5:15-16)(유상섭).
과역 요즘 우리 목회자들이 이러한 사도들의 목회철학이 있습니까? 한국 교회를 보면 교회 행정상의 업무 과중으로 인하여 목회자들의 기도 생활과 말씀 사역이 약화되어 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 처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전임 부교역자들이 하는 말중에 하나는 교회의 많인 잡무(일) 때문에 제대로 기도하지도 못하고 말씀 연구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유상섭 교수님의 권면이 유익하다고 생각합니다: “현대 교회가 초대 교회의 사도들의 목회 철학을 회복하려면 평신도 사역자들에게 맡겨야 할 것은 과감하게 맡기고 목회자들은 기도와 말씀의 본질적인 사역으로 복귀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해지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사역에 헌신해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게 되기 위해서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6장 5절을 보십시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이 기도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 사역에 전무하겠다고 공포했을 때에 온 교회는 기쁨으로 받아들였습니다(5절). 그래서 사도들은 일곱 집사들을 선택하라고 온 회중에게 말하였습니다. 일곱 집사 선택 기준은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한 두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 즉, “영적 지혜가 충만”한 자를 가리킵니다(Grosheide). 교회에서 구제하는 일은 단순히 육체를 돌아보는 세속적 사업이 아닙니다. 교회의 구제 사업은 그리스도 중심한 영적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 만큼 신령한 지혜가 필요합니다(박윤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함”은 직무를 잘 감당하도록 하는 지혜의 분량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칭찬 듣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칭찬 듣는 사람”이란 말은 사람들에게 인정 받는 덕망과 신임성의 소유자를 가리킵니다(박윤선). 디모데전서 3장10절에 나와 있는 안수집사의 자격중 하나는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되야합니다. 즉, 안수 집사 후보자의 자격(은사)이 교회 대중의 인정을 받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 선택받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 듣는 사람 일곱 명의 이름을 보면 모두 다 헬라 이름들입니다. 이것을 무엇을 말해주는가 하면 그 당시 교회의 구제 사업의 불공평에 대하여 헬라파 사람들 측에서 원망했는데, 그 헬라파 사람들 중에서 집사를 등용한 것은 매우 공평하고 너그러운 처사였습니다(박윤선). 이 일곱 헬라파 집사들의 이름은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입니다(5절). 우리가 알다시피 스데반과 빌립이란 인물은 사도행전 6-8장에서 나옵니다. 이들 일곱 집사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오늘 본문 5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 사도들은 구제 사역을 다 위임합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도들 12명과 일곱 집사들이 함께하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를 생각할 때에 과연 우리 승리장로교회는 어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과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거리 위해서는 사도들처럼 기도와 말씀에 헌신해야 합니다. 결코 기도하지 않으면서 또한 말씀을 방관하면서 믿음과 성령의 충만한 사람이 될 수가 없습니다. A. W. 토저 목사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령 충만한 생활을 하려면 물고기가 물 안에서 살듯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산다’는 것은 단순히 성경 공부를 한다거나 교리 강좌에 참가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밤낮으로 그분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뜻이다. 날마다, 시간마다 말씀을 사랑하고 배불리 먹고 완전히 소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생활 속의 이런저런 문제들이 우리 마음속으로 침투해 들어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할 때, 우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말씀대로 반응해야 한다” (인터넷).
A. W. 토저 목사님은 그의 책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랜 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때, 교회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때마다 거기에는 항상 진리에 대한 순종이 있었다. 되살아난 교회와 죽은 교회를 가르는 시금석은 교회 구성원들이 진리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이다. 죽은 교회는 진리에 복종하지 않고 단지 진리의 껍질만을 붙든다. 반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교회는 즉시 영적인 능력을 부여받는 복을 받는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알려주신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합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다른 일에 바빠서는 아니 됩니다. (2)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사역에 헌신해야 합니다. (3)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들이 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승리장로교회 안에 점점 왕성하게 하옵소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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