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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otional Reflection Based on the Incident of Peter Cutting Off Malchus's Ear:

Devotional Reflection Based on the Incident of Peter Cutting Off Malchus's Ear: “Then one of those standing near drew his sword and struck the servant of the high priest, cutting off his ear.” ( Mark 14:47, Today's Korean Version ) 1. Identifying the People Involved: The person who stood beside Jesus and drew the sword was Simon Peter . The servant of the high priest was named Malchus . “Then Simon Peter, who had a sword, drew it and struck the high priest’s servant, cutting off his right ear. The servant’s name was Malchus.” ( John 18:10 ) 2. Jesus' Response to Peter's Action: (a) Jesus said: “Permit even this.” ( Luke 22:51, KJV: “Suffer ye thus far”; RSV: “No more of this” ) The Greek words clarify this: “ἕως τούτου” (“heōs toutou”) = “up to this point” or “even this” “ἐᾶτε” (“eate”) = “allow it,” “let it be,” “leave it alone” Therefore, Jesus is essentially saying: “Let them do what they are doing. Do not resist any further.” “If ...

서로 덕을 세워야 합니다.

 서로 덕을 세워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 11-15절 말씀 묵상]

 

 

여러분주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은 ‘… 내가 … 내 교회를 세우리니 …”입니다(16:18).  승리장로교회는 주님의 교회요 주님께서 세우시는 교회입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교회를 세우심에 있어서 우리 모두가 각자의 은사와 달란트로 각자의 기능을 다하여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미션은 주님의 교회를 세우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비전은 일꾼을 세워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중심된 꿈(비전)을 가진 일꾼들을 세워 파송하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일꾼을 세우시사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 1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고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한 3가지의 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인터넷): (1) 첫째는사람의 성품으로서의 덕이고(4:8), (2) 둘째로는하나님의 덕이며(벧전2:9; 벧후1:3), (3) 마지막 셋째는개인이나 공동체적으로 세워나가는 덕입니다(고전14:3-5, 12, 17, 26).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 11절에서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말한 은 세번째 의미인 공동체적으로 세워나가는 덕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바울은 지금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교회의 덕을 세우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현대인의 성경) “이 모든 것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 하십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고전14:26).  여기서 이 모든 것이란 하나님께서 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은사르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통해서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만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통역하여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3-5).  여기서 덕을 세운다는 헬라어 의미는 집을 세운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혹시 여러분은 건축자들이 집을 세우는 과정을 좀 보신적이 있으십니까?  “제대로 된 집을 짓기 위한 포인트 10가지란 제목 아래 인터넷 글이 있어 읽어 보았습니다(인터넷).  그 글에서 글쓴이가 말하고 있는 제대로 된 집을 짓기 위한 포인트 10가지를 보면 그 첫번째가 바로 설계인데 글쓴이의 주장은 설계가 집짓기 반이다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좋은 설계가 좋은 집짓기의 반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글쓴이가 언급하고 있는 나머지 9가지 포인트 중에 저에게 좀 관심이 갔었던 포인트는 바로 8번째 포인트였습니다: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  글쓴이의 주장은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마땅이 안전하고 편해야 한다는 것과 내 가족이 살 수 있다는 마음으로 집을 지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제대로 된 집을 짓기 위한 포인트 10가지 중에 1번째와 8번째를 생각할 때 제 대학 후배 설계사 형제가 생각났습니다.  지금 그 형제가 저희 부부를 도와 집 뒤에 장인장모님을 모실 수 있도록 방 하나와 화장실을 설계해 주었는데 아주 꼼꼼하게 마음과 심혈을 기울여서 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저희가 감사해서 왜 이정도로 신경을 쓰고 정성 등을 들여서 설계를 해주고 도와주고 있냐는 식으로 물었더니 그 형제가 하는 말이 저희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 후배는 저를 형으로 생각하고 제 아내를 형수님으로 생각하고 자기 가족이 살 집처럼 생각하고 설계를 그려준 것입니다.  감사하지요.  저는 이 외에 집을 짓는 과정을 생각할 때 전에 설교하면서 언급한 한옥을 짓는 과정에 꼭 필요한 그레질이 생각났습니다.  한옥을 지을때에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은 바로 주추를 놓는 일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주추란 기둥 밑에 괴는 돌을 의미합니다.  그 주추를 다 놓으면 그 때서야 기둥을 세우는데 바로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웁니다.  그리고 나서 기둥과 기둥을 잡아는 주는 일(창방)을 하며 집을 세워갑니다.  그런데 주추 위에 기둥을 세울 때에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레질입니다.  여기서 그레질이란 주춧돌은 보통 자연석을 쓰다 보니까 아무리 넓고 평평한 돌을 골랐다 해도 기둥을 바로 세우기가 어렵기에 주추 위에 기둥을 세우려면 주춧돌의 면과 기둥의 면이 잘 맞아 떨어지도록 하는 선 작업을 해 주어야 하는데그것이 바로 그레질입니다.  그레질의 방법은 간단합니다.  주춧돌 위에 세워지는 기둥의 면을 주춧돌에 맞게 깍고 갈아 내는 것입니다.  기초가 되는 주춧돌에 손을 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위에 세워지는 기둥의 면을 깍고 다듬어 주추에 맞추는 것입니다.  기준은 기둥이 아니라 항상 주춧돌입니다.  그리고 이 그레질을 잘 하면 잘 할 수록 집은 더 안전하고 튼튼하게 세워진다고 합니다(인터넷).

 

저는 한옥을 지을 때 이 그레질을 주님의 교회를 세우는데 적용함에 있어서 영적 그레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기서 영적 그레질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반석이 되시는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7:24).   다시 말하면영적 그레질이란 우리가 그저 “주여 주여”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21).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치 집을 지음에 있어서 기준이 기둥이 아니라 주초인 것처럼 우리의 삶에 기준은 바로 주님이요 주님의 뜻입니다.  그 말은 마치 주초가 기둥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기둥이 주초에 맞춰야하는 것처럼 주님의 뜻을 우리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뜻을 주님의 뜻에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오직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첫째로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일에 우리를 지도하고 가르치는 자들을 사랑하고 귀히 여겨야 합니다.

 

과연 주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 11절을 보면 주님의 뜻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어떻게 주님의 교회를 세워야 할까요?  저는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 12-15절 중심으로 한 3가지로 묵상하면서 어떻게 주님의 교회를 세워야 할지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13절을 보십시오“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현대인의 성경“형제 여러분주님을 섬기는 일에 여러분을 지도하고 가르치는 분들의 수고를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위해 일하는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서로 화목하게 지내십시오”].  어느 한 인터넷 기사를 보니까 “시사저널”에서 미디어리서치와 공동으로 총 30개 분야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선정한 글과 사진들이 있어 좀 읽어보았습니다(인터넷).  그 기사에 제가 관심이 있었던 것은 개신교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누군이가 보았더니 제 1위는 순복음 교회 원로 목사님이신 조용기 목사님, 2위로는 사랑의 교회 고 옥한음 목사님, 3위에는 명성 교회 담임 원로 목사님인 김삼환 목사님, 4위로는 고 한경직 목사님, 5위로는 고 하용조 목사님이라고 합니다.  이 설문조사 결과를 읽으면서 한 두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가지는 개신교에서 가장 존경 받는 분들 성함을 보니 다 대형교회 목사님들이신데 소형교회나 중형교회나 잘 알려지지 않은 목사님은 잘 알려지지 않았기에 존경 대상에 낄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설문조사는 그저 설문조사일 뿐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다른 한가지 든 생각은 가장 존경받는다고 조사된 순복음 교회 원로 목사님이나 명성 교회 원로 목사님은 인터넷 기독교 뉴스에 이런 저런 문제로 계속 뉴스가 나오는 것을 볼 때 한 때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받았던 분이 지금은 가장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을 볼 때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다는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라는 회의가 듭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 13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여러분을 위해 일하는 그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서로 화목하게 지내십시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여러분을 위해 일하는 그들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님 안에서 그들을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현대인의 성경 번역으로 말한다면 주님을 섬기는 일에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지도하고 가르치는 분들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이러한 교회 지도자들을 존경하고 사랑하며 서로 화목하게 지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서 교회 지도자들을 존경하라는 말씀을 생각할 때 저는 디모데전서 5 17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잘 다스리는 장로들”과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은 교회 안에 두 종류의 장로들을 가리킵니다.  그 두 종류의 장로들이란 “가르치는 장로”(Teaching Elder, TE)와 “치리하는 장로”(Ruling Elder, RE)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가르치는 장로”란 목사를 가리키고 “다스리는 장로”란 우리가 알고 있는 장로를 가리킵니다.  지금 바울은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말씀을 가르치는 목사님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여기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지도자들을 존경할 뿐만 아니라 성경은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는 것이 우리가 교회 지도자들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성경 요한복음 14장 21절을 보십시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존경하는 교회 지도자들을 사랑해야 하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회 지도자들의 말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교회 지도자들을 사랑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의 말에 순종해야 합니다.  한 가지 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한 것은 너희끼리 화목하라” [(현대인의 성경) “서로 화목하게 지내십시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꼭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 성도님들과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같이 보이지만 제 생각에 그보다 교회 성도님들끼리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 권면한 이유는 성도들끼리 서로 화목하게 지내는 것이 바로 교회 지도자들을 향한 존경과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자녀들이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서로 사랑하며 사로 화목하게 지낼 때 그것이 부모님에게 존경과 사랑의 표현이듯이 말입니다

 

            여러분요즘처럼 성도님들이 존경할 만한 교회 지도자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은 시대인 듯 합니다.  만일 제가 여러분에게 여러분이 존경하는 목사님이 있으십니까?’라고 질문을 한다면 여러분은 라고 답하실 목사님이 있으십니까?  저는 성도님이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하는 교회 지도자나 교회 성경공부 선생님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을 섬기는 일에 우리를 지도하고 가르치는 분들을 사랑하고 귀히 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오래 참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을 보십시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들을 훈계하고 마음이 약한 사람들을 격려하며 힘이 없는 사람들을 도와 주고 모든 사람들을 인내로 대하십시오”].  언젠가(2009. 8. 8. ) YMCA에 운동하러 갔다가 벽에 걸려 있는 액자에 이런 글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A life has speed; but the Truth has endurance” (거짓에는 스피드가 있고 진리에는 인내가 있습니다).  제가 그날 그 글을 보고난 후  토요일에 글을 쓴 내용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다시 읽어보니까 제가 그 주 수요기도회 후 진리의 말씀을 속히 떠나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던 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거짓에는 스피드가 있다는 말에 동의하게 된 글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수요기도회 후 뿐만 아니라 그 다음 날인 목요일 새벽에도 깨어서도 머리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제 마음으로는 이웃에게 분노하면서 그 이웃을 미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생각 속에서 사단의 거짓에 속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단의 거짓과 속임수 속에서 생각으로 죄를 범하고 있었을 때 그 속도도 무섭게 빨라지만 제 마음에 참을성이 고갈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참 무서운 사단의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날 새벽기도회 때 이러한 제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과 성도님들 앞에서 자백한 후 개인기도 시간에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저를 건져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단의 거짓과 속임수에 놀아나는 제 자신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날 밤 저는 그 기도를 응답받았습니다.  하나님의 건지심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으로 시달리던 저를 진리의 빛으로 인도해 주신 것입니다.  거짓과 죄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니 마음이 평안하였습니다.  더 이상 사단의 편지를 머리 속으로 쓰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는 제 마음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편지를 쓰면서 더욱더 사랑하기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좀 더 이해하고 좀 더 참고 좀 더 위로하는데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진리에는 참을성이 있는데…  진리에는 인내가 있는데 …  좀 더 참고 좀 더 인내하는데 재헌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사랑장인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 중 사랑은 오래참고”(4라는 말씀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데 실제로 우리는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가 사랑하고 있는 우리 가족 식구에게도 오래참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참고 또 참아야하는데 사랑하는 가족 식구로 인하여 마음에 상처를 입고 또 입으면 참고 또 참다가도 마음에 분노가 일어날 때가 있고 또한 용서가 안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성경 민수기 14 11절과 2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하시면서 모세에게 “어느 때까지 …”라고 세 번이나 반복하며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거듭 거듭 범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기적 같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공급해 주심 등 하나님의 은총을 생각하면서 감사 또 감사해야 할 그들이 하나님께 계속해서 거듭 내었던 소리를 바로 원망의 소리였습니다.  심지어 울면서까지 원망의 기도를 드렸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시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고 말씀하신 것입니다(27). 

 

            우리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래 참음”이란 영어 성경에는 “longsuffering(오랫동안 고통을 당하다)이라고 적혀있습니다.  어느 책을 보니까 이 단어는  Pain(고통) Patience(인내)라는 의미가 같이 있다고 합니다(Wayne Stiles, “Waiting on God”).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범죄하고 또 범죄하고 있는 것을 다 보시고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오래 참고 또 참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오래 동안 우리의 거듭 범하는 죄를 보고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오랫 동안 고통을 당하고 계신 하나님을 상상해 보실 수 있으십니까?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자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으시사 온갖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그리고 그 고통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계셨으면 독생자 예수님의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부르짖음도 듣고 계셨던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거듭 범하는 죄들을 보시면서 어느 때까지 참고 계셔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를 향하신 이 하나님의 오래참으심을 깨달아 알아갈 때 우리 또한 우리 이웃에게 오래참아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 1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이 말씀을 보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4가지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은 그들에게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 14절을 보십시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  성경 잠언을 보면 게으른 자에 대해서 여러번 말씀하고 있는데(10, 12, 13장 등그 말씀의 요점은 게으른 자는 가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게으른 자는 일을 부지런히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의 손을 게으르게 놀리고 있기 때문에(10:4) 가난하게 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게으른 자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합니다(21:25).  그러면서도 게으른 자는 오히려 일을 만듭니다.  어떻게 게으른 자는 일을 만듭니까?  성경 디모데전서 5 13절을 보면 게으른 자는 집집으로 돌아 다니면서 쓸데 없는 말즉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여 일을 만듭니다.  다시 말하면,게으른 젊은 과부는 오히려 집집에 돌아 다니면서 망령된 폄론을 하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므로 일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었습니다(살후3:11).  이들은 남의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로서 교회 안에서 다른 이들의 일을 참견하여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하루 하루의 삶의 필요한 것을 위하여 교회 안에서 어떤 형제들에게 세금()을 뜯어내므로 형제 사람을 실천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라고 말한 것입니다(살전5:14).  여러분우리 모두는 부지런해야 합니다.  성경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2:11).  우리 모두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2)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을 보십시오“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  지난 주에 읽은 인터넷 기사 중에 칭찬보다 소중한 격려란 글을 읽어보았습니다.  그 글을 보면 격려란 단어는 영어로 ‘encouragement’인데 여기서 “courage”는 ‘노력하려고 하는 의지(a willingness to make an effort)’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그리고 격려는 무엇인가를 시도할 의지가 생기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좌절(discouragement)은 이러한 의지가 없어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즉 격려는 용기를 주는 말이고미래를 향한 도전 의지를 높이는 것입니다(인터넷). 

 

교회 안에서 형제자매들 중 마음이 강한 자들은 염려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어떠한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마음을 강하게 하여 잘 견뎌내며 이겨나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약한 자들은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 충분히 두려워하고 염려하여 근심 걱정 속에서 허덕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격려입니다.  히브리서 10 24절을 보면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열심을 품고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사랑과 선한 일을 위해 힘쓰는 형제자매를 볼 때 우리는 격려해야지 비판해서는 아니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일을 열심히 잘해도 욕먹지 않으면 다행이다’라는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용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의 일을 열심히 잘했는데 왜 욕하고 비판하고 뭐라고 안좋은 소리를 합니까?  그래서는 아니됩니다.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하면서 더욱더 열심히 잘하라고 격려해야 합니다.  설상 우리가 보기에 일을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라도 우리가 이렇쿵 저렇쿵 수군수군해서는 아니된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역활은 그저 ‘다음에 더 잘할 수 있습니다’라는 마음 자세로 위로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3)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을 보십시오“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면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  교회 안에 마음도 약한데 힘까지 없는 형제자매를 볼 때 우리는 그/녀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격려할 뿐만 아니라 붙들어줘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 형제자매를 붙들어 줄수가 있을까요물론 우리가 그/녀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녀를 붙들어 주시길 사모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힘이 없는 그 형제자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므로 붙들어 줘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힘이 없는 그 형제자매에게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능력의 말씀이 그 형제자매의 힘이 없는 마음을 다시금 힘주고 소성케 해줄 수 있습니다.

 

(4)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을 보십시오“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우리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선 교회 식구 모든 사람들에게 오래 참아야 합니다.  우리는 참고 참아야 합니다.  성경 야고보서 5 10절을 보면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할 때 우리는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이 되는 신앙의 선배님들이나 믿음의 조상들을 우리의 본을 삼을 필요가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농부의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야고보서 5 7절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형제 여러분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보십시오.  농부가 귀중한 추수를 바라고 인내심을 가지고 가을비와 봄비를 기다립니다.  이러한 농부의 인내심으로 우리는 서로를 대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농부가 씨앗을 심듯이 우리도 사랑의 씨앗을 심고 또한 농부가 열매 맺기를 인내심으로 기다리듯이 우리도 사랑의 열매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되 우리는 사랑의 열매를 맺는 과정에서 서로의 다른점 등으로 인하여 갈등이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한 갈등의 상황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바 된 형제자매에게 분노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는 분노를 참고 참아야 합니다.  잠언 19장 11절을 보십시오“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  특히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인내심을 배워야 합니다.  바울이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인내심에 대해서 뭐라 말하는지 디모데전서 1 16절을 보십시오“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his unlimited patience)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일체 오래 참으셨던 것처럼 지금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무한한 인내로 참고 또 참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끝없이 참아주심을 본받아 우리도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오래 참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의 교회가 화목한 가운데서 견고히 세워져 갈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 셋째로우리는 언제나 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여러분선과 악이 공존하는 이 세상에서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로마서 12 21절 말씀을 선호합니다“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현대인의 성경“그러므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십시오”].  또한 우리는 악을 행하기보다 선을 행하므로 고난 받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경 베드로전서 3 17절을 보십시오“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현대인의 성경“선한 일을 하면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악한 일을 하면서 고난을 받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비록 우리는 선을 행하나 상대방이 악으로 우리에게 갚을 때에 우리의 영혼이 외롭지만(35:12)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살후3:13).  우리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화평을 추구해야 합니다(34:14).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5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누구에게나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여러분 자신과 모든 사람을 위해 언제나 선을 추구하십시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현대인의 성경“누구에게나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여러분 자신과 모든 사람을 위해 언제나 선을 추구하십시오”].  이 말씀을 보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2가지를 권면하였습니다:

 

(1) 바울은 누구에게나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 15 상반절을 보십시오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  여러분교회 안에서 형제자매들끼리 서로 악을 행해서도 아니되겠지만 교회 밖에서의 삶 속에서도 어느 누구에게도 악을 행해서는 아니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2:10).  그런데 문제는 교회 밖에서나 심지어 교회 안에서 누군가가 우리에게 악을 행했을 때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성경은 그 때에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살전5:15, 12:17).  상대방이 우리에게 악을 행했다고 우리고 그 사람에게 악을 행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악을 악으로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3:9).  그 이유는 우리는 이를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9).  우리는 복을 빌어야 합니다.  심지어 우리에게 악을 행한자에게도 말입니다.  그 의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복을 이어받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9).

 

(2)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 15 하반절을 보십시오...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어떻게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해 선을 추구할 수 있을까요?  여기서 “모든 사람”이란 우리에게 해를 입힌 사람도 포함되고 우리에게 악을 행한 사람까지 포함될텐데 어떻게 우리가 그런 사람을 위해 선을 추구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 대답을 창세기 50 20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요셉은 그의 형들이 자기를 해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이루어 나아가심을 깨달았기에 자기를 죽이려고까지 한 형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기르겠다(보살펴 주겠다)고 간곡한 말로 위로했습니다(21).  한 마디로요셉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았기에(34:8) 자기를 해아려고 한 형들에게도 선을 베풀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요셉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면(34:8) 우리도 요셉처럼 우리를 해하려 한 사람에게도 선을 베풀수가 있습니다.  비록 상대방이 우리를 해하려고 했었어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나아가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그 상대방을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에게 선을 행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형들을 용서하고 그들에게 선을 베풀었던 요셉처럼 우리는 우리 가정 식구들 뿐만 아니라 교회 식구들에게도 항상 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선하신 하나님을 믿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항상 선하시다는 진리를 믿음으로(12:2) 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8:28)의 선하심을 맛보므로(34:8) 우리가 서로를 대하든지 모는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살전5:15).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승리장로교회는 주님의 교회요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덕을 세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주님의 교회를 세우시는 일에 겸손히 순종하므로 동참해야 합니다.  동참하되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서로 덕을 세우는데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뜻때로 주님을 섬기는 일에 우리를 지도하고 가르치는 자들을 사랑하고 귀히 여겨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고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며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언제나 선을 추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도구로 사용해 주시사 주님의 교회를 계속해서 세워주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이 세우시는 교회주님이 세우시는 가정을 섬기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8년 7월 29주님의 말씀에 근거한 주님의 뜻대로 순종하길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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