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까지 참으라”(눅 22:51)
“그때 예수님의 곁에 섰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의 귀를 잘라 버렸다”(마가복음14:47,
현대인의 성경)하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여기서 “예수님의 곁에 섰던 한 사람”은 바로 “시몬 베드로”이고 “대제사장의 종”은 “말고”입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요한복음18:10).
(a)
그리고 시몬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잘라버렸을 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까지 참으라”(누가복음22:51),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다 칼로 망한다. 내가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12개 여단의 군대보다 더 많은 천사들을 당장 보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너는 모르느냐? 만일 그렇게 한다면 이런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한 성경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태복음26:52-54,
현대인의 성경),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고난의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요한복음18:11,
현대인의 성경).
(i)
“이것까지 참으라”(누가복음22:51)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King James Version 성경에는 “너희는 이보다 더한 고생도 받으리라”(Suffer
ye thus far)라고 번역하며
Revised Standard Version는 “이만큼 해두라”(No
more of this)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의미는 “너희의 항거는 이정도로만 하지 더해서는 안 된다”라는 뜻과 함께 “내가 잡히더라도 너희는 항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헬라어 원문은 그 의미를 보다 확실하게 전달해 주는데 “이것까지”는 말씀은 “헤오스 투투”로서 “여기까지”라는 의미를 갖고 있고 “참으라”는 뜻의 “에아오”는 “버려두라”,
“가게 하라”라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그들의 행동을 그냥 내버려두어 그들 마음대로 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호크마).
(ii)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아라”(마태복음26:52,
현대인의 성경)하는 예수님의 명령은 베드로의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행동을 단호히 거부하시는 말씀입니다(호크마).
(iii)
“칼을 쓰는 사람은 다 칼로 망한다”(52절, 현대인의 성경)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요한계시록13장 10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을 묵상하게 됩니다:
“잡혀갈 사람은 잡혀가고 칼날에 죽임을 당하도록 되어 있는 사람은 칼날에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인내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두 말씀을 연합해서 묵상할 때 우리 성도들은 “칼을 쓰는 사람”이라 기보다 오히려 “칼날에 죽임을 당하도록 되어 있는 사람”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뿐만 아니라 시몬 베드로도 “인내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iv)
“내가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12개 여단의 군대보다 더 많은 천사들을 당장 보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너는 모르느냐?”(마태복음26:53,
현대인의 성경)하는 예수님의 말씀은 개역한글 번역본을 보면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하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열 둘”이라는 숫자는 제자들의 수와 일치하고 열 두 지파의 수와도 일치하는 매우 의미 깊은 숫자로서 성경 문학적으로
'완전수'에 해당하며 “영”으로 번역된 헬라어 “레기온”은 로마 군대의 일개 군단을 뜻하는데 예수님 시대를 전후하여 팔레스틴에는 상당수의 로마군대가 주둔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주로 가이사랴와 예루살렘의 안토니아 요새에 주둔했었는데 아우구스투스 당시의 일개 정규 군단은 보병
6100명, 말 726필 규모였다고 합니다(Robertson).
따라서 “열 두 영 더 되는”
하늘의 군대를 호출하기만 한다면 그 힘은 불과 몇 백명에 불과한 체포자들을 능히 무찌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잡히신 것은 자기 자신을 막아낼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 만일
'지금' 아버지께 청하기만 하면 아버지께서 지금 당장에 열 두 영도 넘는 천사를 보내셔서 원수들을 쳐부술 것이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리하지 않으신 이유는 “성경 말씀”(54절, 현대인의 성경)에서 가리킨 바와 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 곧 인류 대속의 완성을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잡혀 주신 것입니다(호크마).
(v)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고난의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요한복음18:11,
현대인의 성경)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저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생각났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나 다 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마가복음14:36,
현대인의 성경). 이 두 말씀을 연관해서 묵상할 때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라면 고난의 잔(예수님이 겪어야 할 수난)을 마시겠다고 이미 결단하신 바 그 수난의 길이 필연적으로 걸어가야 할 자신의 길임을 확신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어 순종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칼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길을 막는 것임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줍니다[(마태복음 16:21-23,
현대인의 성경)
“그때부터 예수 그리스도에서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밝히기 시작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붙들고
'주님, 그럴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하고 말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고 꾸짖었다.
'사탄아,
썩 물러가거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이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다'”](호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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