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짧은 말씀 묵상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그들이 예수를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가니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이더라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마가복음14:50-54)하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습니다(50절).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27절)하고 예언하신 말씀이 성취된 것을 보여줍니다. 다시 말하면,
가룟 유다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로마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들로하여금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게 하려고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잡았을 때(공격하였을 때)
예수님의 “양들”인 제자들이 모두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 것입니다(참고: 호크마 주석).
(a)
여기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공격을 당하신 것은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란 구약 성경 스가랴
13장 7절의 예언 말씀의 성취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 작은 자들 위에는 내가 내 손을 드리우리라”[(현대인의 성경)
“전능하신 여호와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칼아,
깨어서 내 목자,
곧 내 짝을 쳐라.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질 것이다.
내가 내 백성을 칠 것이니”].
(i)
여기서 여호와 하나님이 스가랴 선지라를 통해 말씀하신 “내 목자”
즉 “내 짝 된 자”라는 히브리어 원어 “아미다”는 “나의 가장 가까운 자”를 의미합니다. 즉,
여호와 하나님과 일체이신 메시야(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이 스가랴
13장 7절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잡히워 십자가에 못 박히우실 것을 가리킵니다(호크마).
·
이 말씀을 제 자신에게 반영하고 적용할 때 저는 가정의 가장으로서 시련을 당할 때 “내 짝 된 자”
즉, “나의 가장 가까운 자”인 제 아내도 저와 함께 시련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심지어 제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마가복음
8장 35절 말씀대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다면 저의 짝 된 자요 저와 가장 가까운 자요 저의 “한 몸”(마가복음10:8, 개역한글)인 사랑하는 제 아내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부부 일심동체(夫婦一心同體)’는 ‘부부는 한 마음 한 몸’이라는 뜻으로,
부부가 서로 깊이 이해하고 하나처럼 가깝게 지내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흔히 부부가 서로의 마음과 생각을 잘 알아서 마치 한 몸처럼 행동하고 생각한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인터넷)].
-
저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목사가 된 자로서 요한복음
6장 1-15절(오병이어의 말씀:
예수님께서 물고기
2마리와 보리 떡 다섯 덩어리로 남자만 약
5,000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이루신 말씀)에 나오는 “한 아이”(9절)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다 바친 것처럼 저 또한 저의 모든 것을 주님께 받쳐야 하는데 그 모든 것이란 제 생명뿐만 아니라 제 아내와 자녀들도 다 주님께 바쳐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적게나마
1987년 대학부 수련회 때 주님께서 저를 요한복음
6장 1-15절 말씀으로 부르셨을 그 당시부터 지금까지 제 자신뿐만 아니라 제 아내와 자녀들을 주님께 받치고자 조금이나마 몸부림쳐왔습니다. 그 과정에 제 마음에 복음성가 “나의 모습 나의 소유”
가사가 생각나곤 하였습니다:
n
나의 모습 나의 소유 주님 앞에 모두 드립니다 모든 아픔 모든 기쁨 내 모든 눈물 받아주소서,
어제일과 내일일도 꿈과 희망 모두 드립니다 모든 소망 모든 계획 내 손과 마음 받아주소서,
나의 생명을 드리니 주 영광 위하여 사용하옵소서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주를 찬양하며 기쁨의 제물되리 나를 받아주소서,
우리 가진 이 모든 것들을 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었네 몸 밖에 드릴 것이 없으니 내 삶을 받아주소서.
(ii)
스가랴
13장 8-9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온 땅에서
3분의 2가 죽임을 당하고 내 백성의
3분의 1만 남을 것이다. 내가 그
3분의 1을 불 속에 던져 은과 금을 정련하듯 그들을 연단하고 시험할 것이다. 그때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것이며 나는 그들에게 대답할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이들은 내 백성이다.'
하고 말할 것이며 그들은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우심에 따라서(7절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됨에 따라서)
유대인들이 환난 중에서 많이 멸망당하고 그들 중 기독 신자들은 영생에 참여하게 됨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기독 신자들도 환난 중에서 시련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호크마).
·
환난 중에서도 남은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에 대해서 하신 말씀(9절)은 바로
(1) 신앙상 연단을 받음,
(2)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심,
(3)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임(호크마).
-
새 찬송가
336장 “환난과 핍박 중에도”
가사가 생각났습니다:
(1)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2)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우리도 고난 받으면 죽어도 영광 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3) 성도의 신앙 본받아 원수도 사랑하겠네 인자한 언어 행실로 이 신앙 전파하리라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b)
여기서 예수님의 “양들”인 제자들이 모두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했다는 말씀(마가복음14:50)을 묵상할 때 그 모든 제자들 중에는 사도 베드로도 있었을 것이기에 저는 예수님께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27절)하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의 답변의 말씀을 묵상하게 됩니다: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현대인의 성경)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린다해도 저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29절).
(i)
여기서 드는 생각은 실로 우리는 “절대”란 말을 절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린다해도 저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하고 장담을 했지만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그도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버렸습니다(50절, 현대인의 성경). 베드로 자신지 주님께 자기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하였고 어쩌면 다른 제자들이 베드로를 볼 때 ‘베드로만큼은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을 사람이야’하고 생각했다 할지라도 결국에 가서는 구약성경 스가랴
13장 7절의 예언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 마가복음14장 50절 말씀을 묵상할 때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는 사탄(8:33,
현대인의 성경)의 유혹에 넘어가는 자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보다(요한복음6:29) 자기 자신을 믿으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보다 자기의 뜻을 행하고 있습니다(참고: 요한일서2:16-17).
-
새 찬송가
549장 “내 주여 뜻대로”
가사가 생각났습니다:
(1)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2)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3)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아멘.
(2)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쳐버렸는데(마가복음14:50,
현대인의 성경)
“한 청년은 베 홀이불만 두르고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그들에게 잡히자 두른 것을 팽개치고 알몸으로 달아났다”(51-52절, 현대인의 성경)는 말씀을 묵상합니다.
(a)
호크마 주석입니다:
“이 청년 은
(24세에서 40세 사이의 한창 때의 나이)
마가 자신일 것이라고 주석가들이 의견 일치를 보고 있다.
이 청년은 잠을 자다가 예수를 체포하러 왔다는 소식을 알려주자 그는 옷 입을 틈도 없이 황급히 이 소식을 예수께 전하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까지 뛰어올라갔다.
그러나 그가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예수께서 체포되신 후였다.
예수의 뒤를 따라가다가 그만 발각되자 그는 홑이불을 팽개친 채 도망가 버렸다”(호크마).
(i)
저는 여태까지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한 청년”이 “예수를 따라가다가 …”(51절)란 말씀보다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갔다(54절)는 말씀에 초점을 맞춰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곤 하였습니다. 그 말은 저는 “한 청년”이 예수님을 따라갔다는 말씀을 등한시하였습니다. 실제로 저는 오늘 이 시간 처음으로 제자들이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하였지만 이 “한 청년”이 그나마 잡히기 전까지 예수님을 따라갔었다는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ii)
호크마 주석의 말처럼 그 “한 청년”이 마가복음을 기록한 마가라면,
그래서 마가가 이미 예수님께서 체포되셨는데도 불구하고 모든 제자들처럼 도망하지 않고 적어도 발각되기 전까지라도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다면 그는 어떠한 인물이기에 그랬을까 하는 궁금함이 생겼습니다.
·
마가복음을 기록한 요한 마가는 사도 베드로의 통역이었으며,
베드로의 설교를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하는 과정에서 마가복음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또한 초대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바나바의 조카 또는 사촌으로 언급되기도 했으며,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신자들이 모이는 장소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인터넷).
·
“마가 요한은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전도 여행에서 그들을 돕는 조력자였습니다(사도행전
13:5). 하지만, 그는 여행이 끝날 때까지 함께 하지 않았습니다.
마가 요한은 밤빌리아에서 선교를 계속하는 것을 포기하고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팀을 이탈했습니다(사도행전
15:38). 왜 마가가 그들을 떠났는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마가는 구브로에서의 선교가 거의 열매를 맺지 못했던 시기 이후로 그들을 떠났던 것으로 보입니다(사도행전 13:4–12). 구브로에서의 선교는 오직 한 사람의 개종만이 기록되어 있고,
그 과정에서 마귀가 강하게 방해했습니다.
젊은 마가 요한이 험난한 선교의 길에 낙심하고 편안한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인터넷).
·
시간이 흘러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전도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 바울은 그들이 예전에 방문했던 여러 도시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을 찾아가서 그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보고 싶어서(15:36)
바나바와 함께 가려고 했었을 때 마가 요한을 함께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의 일로 “심하게 다투었고”(39절) 결국에 가서는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헤어져 따로 선교 여행을 떠났습니다. “위로의 아들”(4:36)이라 불린 바나바는 마가 요한의 실수를 기꺼이 용서하고 그에게 또다른 기회를 주고자 했지먄 바울은 더 이성적인 견해를 취하여 개척선교에는 헌신,
결의, 인내가 필요하다고 여겼기에 마가 요한이 그들의 선교에 위험 요소가 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인터넷).
·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직감했을 때 로마 감옥에서 디모데에게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디모데후서
4:11)하고 말한 것을 보면 마가 요한은 세월이 흐르면서 성숙해졌고 주님의 충실한 종이 되었기에 바울은 마가의 성장을 알아보고 그를 귀중한 동역자로 여겼던 것을 우리는 좀 알 수가 있습니다(참고: 호크마).
-
이렇게 실수를 통해 성장하고 성숙해져서 주님의 충실한 종이 된 마가 요한은 예수님께서 잡히셨을 때 비록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을 때에도 무리에게 잡히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따라갔던 것입니다(마가복음14:50-51). 그러다가 무리에게 잡히자 마가 요한은 두른 것을 팽개치고 알몸으로 도망갔습니다(51절, 현대인의 성경).
(b)
저는 “한 청년이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예수를 따라가다가 무리에게 잡히매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51-52절)는 말씀을 묵상할 때 이사야
20장 2-3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가 되었느니라.”
(i)
속옷 이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더구나 신발도 신지 않은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나선다는 것이 참으로 수치스러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의 명령에 전적으로 순복한(호크마) 반면에 오늘 본문 마가복음
14장 51-52절에 나오는 “한 청년”은 주님을 전적으로 끝까지 따라가지 못하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였습니다.
(3)
여기서 “그들”(마가복음14:53)은 요한복음
18장 12절에 의하면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 사람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님을 “잡아 결박하여”(12절) “끌고”간 “대제사장”(마가복음14:53)은 바로 “안나스”로서 그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이었습니다 (요한복음18:13). 여기서 “가야바”는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대제사장으로서(마태복음26:57)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권고하던 자”였습니다(요한복음18:14).
(a)
그 대제사장의 집에는 이미 “대제사장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다”
있었던 것(마가복음14:53)을 보면 예수님을 체포한 주동 세력은 대제사장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안나스는 A.D.
15년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에 의해 대제사장직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안나스는 대제사장직을 종신직으로 여기던 유대인들에게는 여전히 대제사장으로 추앙받았고 가야바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안나스는 명예 대제사장으로서 그 일가 중에서 세력의 우두머리를 차지하고 있어 현재 대제사장직으로 있는 자기의 사위 가야바를 통하여 실질적으로 굉장한 세력을 계속 갖고 있었다.
이처럼 유대 전통에 따라 대제사장직을 종신직으로 맡고 있으면서 유대 사회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자들은 예수를 죽이는데 함께 공모해 예수의 십자가 처형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호크마).
(4)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마가복음14:54)하고 마가는 기록하였는데 마태는 베드로가 그리한 이유는 “그 결말을 보려고”[(현대인의 성경)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보려고”]하고 기록하였습니다. 누가는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누가복음22:54하-55)하고 기록하였고,
요한은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오니”(요한복음18:15-16)하고 기록하였습니다.
(a)
요한복음
18장 15-16절 말씀에 의하면 베드로 외에 “다른 제자”도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다른 제자”는 대제사장과 친분이 있어서 문지키는 여종에게 아무런 저지를 받지 않고 문을 통화했을 뿐만 아니라 문 밖에 서 있었던 베드로도 문지키는 그 여종에게 말하여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b)
왜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님을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갔었던 것일까요? 요한복음
18장 10절에서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쪽 귀를 쳐서 잘라 버렸듯이 예수님을 구출하거나 복수하기 위해 따라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혼자서 그들의 손에서 예수님을 구출한다는 것은 불가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는 스승인 예수님의 신변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걱정이 되어 따라왔을 것입니다.
(i)
그러나 여기에는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13:38)는 말씀을 이루려는 주님의 섭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문안으로 들어가려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던 것을 보면(18:16)
주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따라오기는 했지만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신분이 드러날 경우 자기의 신변에 위험이 있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감히 들어가려고 시도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거기에는 자기의 칼에 상처를 입었던 대제사장의 종(10절)도 있었을 것이므로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을 것입니다(호크마).
(5)
대제사장의 집 뜰안까지 들어간 베드로는 “아랫사람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마가복음14:54)고 마가는 기록하였는데,
요한은 “그 때 추운 고로 종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요한복음18:18)하고 기록하였습니다.
(a)
“그 때 여종 하나가 앉아서 불을 쬐고 있는 베드로를 유심히 보더니
'이 사람도 그와 한패예요'
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여자야,
나는 그를 모른다.'
하고 딱 잡아떼었”는데(누가복음22:56-57,
현대인의 성경)
[(마가복음14:68,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베드로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소.
당신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단 말이오!'
하고 부인하며 현관으로 나갔다.
그러자 닭이 울었다”]
그 “여종 하나”는 “이 문지기 여종”(요한복음18:17,
현대인의 성경)입니다. 이것이 바로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13:38)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뤄지기 시작한 것입니다(베드로의 첫 번째 예수님을 부인함).
(b)
“조금 후에 또 어떤 사람이 베드로를 보고
'당신도 그들과 한패지요?'
하자 베드로는
'이 사람아,
나는 아니야'
하고 말하였다”(누가복음22:58,
현대인의 성경)고 누가는 기록하였고,
마태는 “베드로가 정문으로 나갈 때 다른 여종이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어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베드로가 맹세까지 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니까요.'
하며 딱 잡아 떼었다”(마태복음26:71-72,
현대인의 성경)고 기록하였습니다(베드로의 두 번째 예수님을 부인함).
(c)
“잠시 후 거기 섰던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와서
'당신 말씨를 보니 그들과 한패임이 틀림없소.'
하자 베드로는 만일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맹세하면서
'나는 정말 그 사람을 모릅니다.'
하였다. 바로 그때 닭이 울었다”(마태복음26:73-74,
현대인의 성경)하고 마태는 기록하였고,
마가는 “잠시 후 거기 섰던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당신도 갈릴리 사람인 걸 보니 그들과 한패임이 틀림없소.'
하자 베드로는 만일 자기가 그런 사람이라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맹세하면서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이 사람을 정말 모릅니다.'
하였다. 바로 그때 닭이 두 번째 울었다”(마가복음14:70-71,
현대인의 성경)하고 기록하였습니다(베드로의 세 번째 예수님을 부인함).
(i)
흥미로운 점은 누가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한 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닭이 곧 울었다. 주님께서 몸을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자 그는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한없이 울었다”(누가복음22:60-62,
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제가 잊을 수 없는 말씀은 “주님께서 몸을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자 …”하는 말씀입니다.
·
저는 이 말씀의 장면을 상상해보곤 합니다. 멀찍이 예수님을 뛰따라갔던 베드로(54절, 현대인의 성경)가 예수님께서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요한복음13:38)하고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후 주님께서 몸을 돌이켜 자기를 보셨을 때 예수님과 베드로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만일 그리했다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시선을 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 성경에도
'내가 목자를 칠 것이니 양들이 흩어질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내가 다시 살아나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겠다”(마가복음14:27-28,
현대인의 성경)하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린다해도 저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29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분명히 너에게 말하지만 바로 오늘 밤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
하셨고, 그러나 베드로는 “내가 주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하고 큰 소리로 장담하였기 때문입니다(30-31절, 현대인의 성경).
(d)
저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였을 때 그가 종들과 아랫사람들이 불을 피우고 서서 쬐고 있었을 때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었다(요한복음18:18)는 말씀을 묵상할 때 요한복음
21장 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숯불”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숯불 위에 생선이 놓여 있었고 떡도 있었을 때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시몬 베드로에게 세 번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으셨기 때문입니다(15,
16, 17절). 그러신 후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태복음4:19)하고 말씀하셨던 베드로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한복음21:15),
“내 양을 치라”(16절), “내 양을 먹이라”(17절)하는 더 큰 사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i)
결국 주님께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세 번 질문하신 후 더 큰 사명을 주시사 오순절 날 베드로로 하여금 성령이 충만하게 하시사(사도행전2:4, 현대인의 성경)[참고: 그 때 “혀처럼 생긴 불이 나타나더니”(3절, 현대인의 성경)]
그로하여금 주님의 사명을 완수케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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