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넬료
[사도행전 10장 1-8절 말씀 묵상]
유명한 토크쇼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가 “내 우상이며 스승”이라고 고백하는 여인은 피터 제닝스, 댄 래더스, 톰 브로코우 등 쟁쟁한 방송인들을 제치고 수십 년간 텔레비전 뉴스 진행자 중 연봉 순위 1위를 굳데 지키고 있는 여인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바로 바바라 월터스라고 합니다. 어떤 점이 그녀를 이처럼 특별한 존재로 만든 것일까요? 누구든 그녀 앞에서는 모든 것을 술술 털어놓게 되기 때문입니다. 월터스는 미국에서 가장 ‘편안한’ 느낌을 주는 뉴스 진행자입니다. 그녀의 탁월성의 요체는 바로 신뢰에 있다고 죤 멕스웰 목사님은 말씀합니다. 월터스와 인터뷰하는 사람들은 그녀를 신뢰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털어놓는다고 합니다. 잘 모르지만 바바라 월터스란 뉴스 진행자를 보면 괴테의 이 말을 기억하게 됩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대해주라. 그러면 그는 지금보다 더욱 못한 사람이 될 것이다. 사람을 훌륭한 인물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으로 대해 주라. 그러면 그는 잠재력을 100퍼센트 발휘하여 정말 훌륭해질 것이다”(인터넷). 그러므로 죤 멕스웰 목사님은 그의 책 “함께 승리하는 신뢰의 법칙”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최고의 순간을 기억하라: … 성숙한 사람은 상대방을 대할 때 그들의 ‘최고의 순간’을 기준으로 삼는다”(인터넷).
상대방의 ‘최고의 순간’을 기준으로 삼을 때에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고넬료란 인물의 ‘최고의 순간’을 봅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오늘 본문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 전도의 시초석이 된 고넬료의 최고의 순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고넬료의 최고의 순간을 묵상하면서 어떠한 그리스도인이 되야할 지 한 3가지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만나는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였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0장 2절을 보십시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금년 5월28일 Memorial Day 전날 연합 예배 때 행복한 가정보다 “경건한 가정”을 이루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 3가지로 묵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을 오늘 “경건한 고넬료”에 다시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합니다[(2절)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 집안에 가장인 고넬료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그 교훈은 다름 아닌 우리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인 우리 남자 형제들이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어서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입니다. 잠언 8장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하나님께서 교만, 거만, 악한 행실, 그리고 패역한 입을 미워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이 것들을 미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씀이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면 반대로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씀은 또 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9절을 보십시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그리고 우리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열매를 거둘 것이기 때문입니다 (갈6:9)
둘째로, 경건한 사람은 많이 구제합니다[(2절)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 고넬료와 그의 가정은 위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아래로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참된 경건의 양전 모습을 보였주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참된 경건은 두 가지가 함께 동전 앞뒤처럼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동전의 앞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요 동전의 뒷면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의 구체적인 면은 구제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은 진정한 경건입니다(약 1:27). 고넬료는 사도행전 10장22절을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이웃 사람들을 많이 구제한 사실이 소문이 나서 유대 온 족속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10장22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
마지막 셋째로,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께 항상 기도합니다[(2절)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고넬료는 유대인들의 기도 관습 따라 항상 기도했습니다. 유대인들의 기도 관습은 하루에 두 번(오전 9시, 오후 3시) 혹은 세 번(오전 9시, 정오12시, 오후 3시) 기도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넬료는 규칙적인 기도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된바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는 기도 생활과 구제가 연결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도와 구제의 연결은 기도가 선행을 바탕으로 할 때 바른 기도가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유상섭).
둘째로,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만나는 고넬료는 환상 중에 천사를 만나는 사람입니다.
경건한 고넬료가 하루는 제 구 시쯤, 지금 시간으로는 한 오후 3시에 자신의 규칙적인 기도 생활에 따라 기도하고 있었을 때 환상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게 됩니다(3절). 그 때에 고넬료는 두려움 속에서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라고 여쭈었을 때에(4절) 천사의 대답은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4절).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경건의 원리를 배워야 합니다. 곧, 성도의 기도는 그의 선행(구제)으로 병행되어야만 하나님께 상달된다는 것입니다(박윤선). 결국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의 경건의 삶을 보시고 그의 기도의 삶과 병행된 구제의 삶을 기억하고 계시다가 고넬료에게 축복을 주시고자 고넬료에게 환상 중에 명령하셨습니다. 그 명령은 다름 아닌 지금 사람들을 피장 시몬의 집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5-6절).
여기서 우리가 얻는 교훈은 하나님은 경건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이란 사실입니다. 경건한 고넬료처럼 기도의 삶과 선행(구제)의 삶이 잘 병행한 성도에게 하나님은 가까이 오시사 임재하셔서 복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신명기 4장7절을 보십시오: “우리 하나님 여호와꼐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있느냐”. 문제는 무엇입니까? 기도는 한다고 하면서 살아있는 기도를 드리고 있지 못함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즉, 하나님께 기도는 드리지만 기도의 행실이 결핍된 것이 문제입니다. 결국, 이러한 기도는 행함이 결핍된 기도이기에 기도의 능력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마치 살아있는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인 것처럼 살아있는 기도는 행함이 있는 기도, 혹은 행실로 옮기는 기도입니다. 그 예로 예수님의 기도와 행함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즉,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의 기도 중 그의 제자들을 위한 기도가 있는데 그 기도 중에 제자들을 보전해 달라는 기도가 있습니다(11, 12절). 그 기도처럼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그의 공생애 때 보호하셨습니다. 그 예로 제자들이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을 때에 그 풍랑을 잔잔케 하시므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또 얻어야 할 교훈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에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건한 고넬료를 기도하는 가운데 환상 중에 하나님의 사자를 만났을 때 그를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했던 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 4절에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와 같이럼 우리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에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의 거룩하심과 엄위를 생각할 때 그래야 합니다. 박윤선 박사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늘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말씀(성경)도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합당하게 대한다면, 우리에게 두려움을 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로 어두워져서 그 말씀 앞에서 두려워할 줄 모르는 때가 대부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그의 말씀을 통해서도 경험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데살로니가 성도들처럼 바울을 통하여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던 것처럼 우리는 목회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살전2:13).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경외심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만나는 고넬료는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0장 7-8절을 보십시오: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이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경건한 고넬료는 천사가 떠나자마자 즉시 천사의 명령을 순종하는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그는 그의 하인 둘과 그의 군인들 중에 경건한 자 한 사람을 불러서 천사와의 만남에 있었던 일을 다 고한 후 베드로가 머물고 있는 욥바로 보냄니다. 과연 이러한 순종의 행동이 고넬료에게 쉬웠겠습니까? 결코 인간적으로 생각해 볼 때 천사의 명령을 순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문화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과의 사이에는 높은 장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고넬료는 유대인들이 자기와 같은 이방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여기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와 같은 이방인들을 사람처럼 여기지도 않았기에 고넬료는 충분히 유대인들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불순종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고넬료는 문화적인 편견과 같은 것을 다 뛰어 넘어서서 천사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두 하인과 경건한 군사 한명을 욥바로 보냈는데 그 이유는 사도행전10장22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통하여 들려 주시는 말씀을 듣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얻는 교훈은 순종하는 지도자는 순종하는 좇는자를 생산한다는 제자 원리입니다. 백부장이였던 고넬료는 천사의 지시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욥바로 보냄을 받는 그의 경건한 군사는 고넬료의 명령에 순종하는 모습을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봅니다. 마치 자녀가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가운데 그의 자녀가 그에게 순종하는 것처럼 순종하는 사람은 경건의 영향력을 주위 사람들에게 끼치지 않나 생각합니다. 구약에서 얻은 단순성의 통찰은 철저한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보다 그 점이 극명하게 드러난 곳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순종했습니다. 긴급대책을 세우거나 조건이나 구실을 달지도 않았습니다. 긴 고통의 과정을 통해 아브라함의 삶은 한 가지 진리를 배웠는데 그것은 바로 여호와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거룩한 순종’이야말로 단순한 삶이 흐르는 도관입니다. 철저한 순종은 우리의 궁극적인 충성을 하나님께 둘 때만 가능합니다. 십계명은 우상숭배에 대한 세 마디 짤막한 경고로 시작됩니다. 하나님보다 더 높은 충성의 대상이 모두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십계명은 안 된다고 외칩니다 (인터넷)
오늘 “고넬료”의 최고의 순간을 묵상하였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한 그리스도인이 되야 합니까? 첫째로, 우리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되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기도와 선행을 병행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순종하는 그리스도인 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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