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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건강한 아이로 키우려면? 부모 자신부터 감정을 다스려라"

"자녀를 건강한 아이로 키우려면? 부모 자신부터 감정 다스려라   부모의 감정이 무엇보다 자녀의 감정에 큰 영향을 미친다 / 셔터스톡 부모라면 자녀의 감정을 존중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부모인 당신의 감정은 어떠한가? 임상 사회 복지사이자 심리 치료사인 힐러리 제이콥스 헨델과 심리학자이자 양육 교육자인 줄리 프라가 박사는 신간, 『부모도 감정이 있다(Parents Have Feelings, Too)』에서 통념을 뒤집었다.  즉, 정서적으로 건강한 아이를 양육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먼저 부모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핵심 메시지다. 이들이 부모들에게 어떤 조언을 했는지 CNN과 함께 알아본다.  부모에게 가장 중요한 감정, '분노' 헨델은 부모가 다뤄야 할 6가지 핵심 감정으로  ▲분노 ▲슬픔 ▲두려움 ▲혐오 ▲기쁨 ▲흥분을 꼽았다. 그러면서 ‘분노’를 가장 중요한 핵심 감정으로 보았다.  그녀는 “분노는 파괴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감정이며, 그래서 우리는 대개 그것을 묻어버린다. 그런데 이때 분노는 안으로 폭발하여 우울, 죄책감, 불안, 수치심으로 나타날 수 있다. 혹은 밖으로 폭발하여 공격성으로 표출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중요한 것은 분노를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경험’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는 분노에 이름을 붙이고, 신체에서 어떻게 느껴지는지 알아차리고, 그 순간의 충동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며, 궁극적으로는 그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을 포함하는 내면의 과정이다.  이에 더해 헨델은 분노를 두 개의 분리된 단계로 이해할 필요성을 말했다. 분노를 경험하는 내적인 과정과 스스로와 가족에게 건설적인 방식으로 분노를 표현하는 외적인 과정이 그것이다.  한편, 프라가 박사는 엄마와 달리, 아빠들의 경우 ‘분노’라는 감정처리에 더욱 익숙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아빠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이유 (2) (골로새서 1장 1-8절)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이유 (2)

 

 

[골로새서 1 1-8]

  

 

          오늘 본문 골로새서 1 1-2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여기 골로새서 1 1절 말씀을 보면 누가 이 골로새서 편지를 쓰고 있는지 저자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저자는 바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입니다(1).  여기서 사도 바울은 자기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되었다고 자신을 소개하고 있는데 저는 이 부분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사도행전 9장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행전 9장에 주님께서는 사울(바울)을 “회심”(conversion)시키시고 이방인의 사도로서 “사명”(commission)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9 1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널리 전하도록 내가 선택한 사람이다”].  주님께서는 바울을 선택하시사 예수님의 이름(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널리 전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 8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사도 바울이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하면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1:1)이라고 소개한 이유는 골로새 교회는 사도 바울이 개척한 교회도 아니었기에 그 교회 성도들에게는 바울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unknown to the Colossians)(KJV 성경주석).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 주님께서 자기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으므로 다른 12 사도들과 동등함을 알리기 위해 골로새서 편지를 쓰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것입니다(1)(KJV 성경주석).

 

오늘 본문 골로새서 1 2절 상반절 말씀을 보면 골로새서 편지의 수신자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  골로새서 편지의 수신자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편지를 썼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2가지를 좀 잠깐이라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1)  첫재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성도들”이란 단어입니다.

 

“성도들”이란 거듭난 신자들로서 원어 헬라어의 문자적 의미는 ‘분리된 사람들’(separated ones)입니다.  성경적으로 말한다면, “성도들”이란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 성도들이란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들로서 하나님께서 세상으로부터 구별(분리)시킨 사람들입니다(The saints are separated to God, separated by God, and separated from the world).  달리 설명하자면, 성도들이란 하나님의 목적(Gods purpose)과 하나님의 일(Gods service)을 위하여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들입니다(KJV 성경 주석).  성경을 보면 성도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진실한 자들이요(31:23), 예수님의 증인들이요(17:6),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하는 자들이요(30:4), 기도하는 자들이요(5:8), “옳은 행실”을 하는 자들이요(19:8),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요(14:12), 영광 중에 즐거워하는 자들(149:5)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다운 성도들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성장하여 성숙한 성도들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육신에 속한 성도들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누가 육신에 속한 성도들입니까? 

 

(a)  육신에 속한 성도들은 어린 아이들과 같아서 잘 속습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3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영적으로 미성숙한 육신에 속한 성도들은 어린 아치처럼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쉽게 빠집니다(4:14).  그리고 그들은 이런저런 잘못된 교훈, 잘못된 가르침에 귀가 솔깃하여 마음의 믿음이 쉽게 흔들립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영적으로 온전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연약하여 쉽게 유혹 당하고 쉽게 흔들립니다. 결국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어린 아이들처럼 잘 속아 넘어가 세상의 간사한 유혹에 빠져 하나님께 죄를 범합니다.

(b)  육신에 속한 성도들은 을 먹습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3 2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영적으로 갓난아기인 육신에 속한 성도들은 바로 밥을 먹을 수는 없기 때문에 젖을 먹어야 합니다.  ‘젖’이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모든 기본 교리를 가리킵니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에 대한 초보적인 교훈(the elementary teachings about Christ)’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6:1, 현대인의 성경).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의 초보자들로서(5:12) 기본 교리는 알고 있지만 더 깊은(더 차원 높은) 교리는 듣는 것이 둔하여(11) 알아듣지 못합니다.  그 결과 깊은 영적 분별력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사단과 이 죄악된 세상이 유혹할 때 선과 악을 분명하게 분별하지 못하여 그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 죄를 범하기가 쉽습니다.

(c)  육신에 속한 성도들은 시기와 분쟁으로 교회의 연합을 깨는 자들입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3 3-4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사람이 아니리요.  육신에 속한 자들이란 불신자라는 뜻이 아니라 부패한 성질의 영향을 받고 있는 자란 뜻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따라 행하는 것으로서(3)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natural man)의 성품을 따라 행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한 마디로, 육신에 속한 성도들은 성령님의 이끌림을 받기보다 아직도 예수님을 믿기 전처럼 옛 사람의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지금 우리 성도들 가운데 불신자와 너무나 비슷하게 살아가는 육신에 속한 성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이끌림을 받아 살기보다 옛 죄악 된 습관대로 육체의 일을 추구하면서 세상과 짝지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지금 교회 밖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육체의 일을 생각하고 육체의 일을 좇으면서 교회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육신에 속한 성도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 된 교회가 신령한 공동체가 되기보다 점점 더 세상과 별 다를 바 없는 불신자들의 공동체로 변질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2)  둘째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신실한 형제들”이란 단어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책을 읽거나 인터넷에서 도전 받은 기사 글 내용들이 있으면 제 개인 블로그나 페이스 북 등에다가 적는 습관이 있습니다.  제 신앙 생활에 유익합니다.  지지난 주에도 한 3개의 도전글들이 있어 여러분과도 나누고 싶습니다:

 

(a)  나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썼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모든 것을 하셨습니다’(마티 루터).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말씀 묵상의 글을 써서 나눌 때에 말씀의 능력과 말씀이 모든 것을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고 쓰고 나눠야 겠다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b)  이혼은 관계, 상황 및 위치를 변경하지만 마음은 변경하지 않습니다.  이혼을 해결책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은 종종 다른 관계에서 동일한 문제를 반복합니다.  변경해야 할 한 가지는 변경되지 않은 채로 있기 때문입니다’(Paul David Tripp).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마음의 변화가 관계나, 상황이나 위치를 변경하는 것보다 우선이 돼야 할 정도로 매우 중요하다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c)  위대함(greatness)을 달성하거나 특별해지는(being special) 목표는 신실함(faithfulness)과 자족(contentment)의 목표로 대체(replace)되어야 합니다’(Brad Hambrick).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비록 우리의 본능은 위대해지는 것이요 또한 특별해 지는 것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중요한 것은 신실함과 자족의 비결을 우리가 배우는 것이라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저는 자족의 비결을 생각할 때 빌립보서 4:11-12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그리고 저는 신실함을 생각할 때 디모데후서 2 13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우리는 신실성이 없지만 주님은 언제나 신실하셔서 약속하신 것을 어기실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1 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말씀했는데 현대인의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들”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 “신실한 형제들”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신실하게 믿는 형제들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신실한 형제들”이란 (1) 믿음이 충만한 자들이요(full of faith), (2) 신뢰하는 사람들(trustful)이요, 또한 신뢰할 만한 사람들(trustworthy)로서 (3) 그리스도에게 충성된 자들(loyal to Christ)입니다(KJV 성경 주석).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은 그리스도에게 충성된 자들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으로서(1:5) 흠 없이 정직하게 주님을 따르며(101:6, 현대인의 성경), 지극히 작은 것에도 충성하며(16:10), 죽도록 충성하여(2:10) 주님 앞에서 설 때에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다는 주님의 칭찬(19:17)과 더불어 주님께로부터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사람들입니다(2:10).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골로새서 편지를 쓴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된 자입니다(1:1).  그는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이 골로새서 편지를 썼습니다(2).  여기서 성도들이란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들이요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란 믿음이 충만한 자들이요, 신뢰할 만한 사람들이요, 그리스도에게 충성된 자들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 보시기에 성도다운 성도요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 자매들이 되어서 장차 주님 앞에 설 때에 잘하였다 착한 종이요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다는 주님의 칭찬(19:17)과 더불어 주님께로부터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수 있길 기원합니다(2:10).

 

 

 

 

주님 보시기에 신실한 성도로 세움 받길 원하는,

 

 

제임스 김 나눔

(2022 2 6, 나 같은 불성실하고 거룩하지 못한 죄인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으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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