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말씀 묵상
과연 나는 내 친구들의 영혼 구원을 어느 정도로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일까?
사도 바울처럼 만일 그들이 구원만 얻는다면 내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렇게 되기를 원하고 있는가? 지금
나에게는 큰 슬픔과 그치지 않는 마음의 고통이 있는가?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을 말하고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성령님 안에서 내 양심이 증거하고 있는가? (참고: 로마서 9:1-3,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선택의 표준은 사람의 행위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있습니다(로마서 9:11,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은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은 사람이 원하거나 노력한다고 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야 받습니다(로마서 9:15-16,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 악하고 마음이 완고한 이집트 왕 바로도 세우시사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다면 우리를 세우시사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참고: 로마서 9:17, 18, 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며 하나님께 반문할 수 있겠습니까?
지음을 받은 피조물이 어떻게 감히 조물주이신 하나님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습니까? (로마서
9:19-21, 현대인의 성경)
진흙 한 덩이는 토기장이에게 '왜 나를 귀히 쓸 그릇으로 만들지 않고 천히
쓸 그릇으로 만들었습니까?'라고 반문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것은 토기장이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토기장이가 원하는 대로 쓸 그릇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인 우리는 조물주의 권한을 도전하여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라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토기장이가 되시는 하나님의 권한을 겸손히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 사람들의 완고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로마서 9:20-21, 현대인의 성경).
과연 진노의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하고 항의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긍휼의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왜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십니까?'라고 반문할 수 있겠습니까? 도리어 긍휼의 그릇은 '왜 멸망받아야 할 진노의 그릇인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영광을 받도록
긍휼의 그릇으로 삼아주셨습니까?'라고 토기장이의 풍성한 은혜와 긍휼에 감사해야 하지 않나요?
(참고: 로마서 9:20-23, 현대인의 성경)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지만 인간의 노력과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으려고 추구하는 사람은 장애물에 걸려 넘어질 것입니다(로마서 9:32-33, 현대인의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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