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바울의 3가지 마지막 권면 (11)

바울의 3 가지 마지막 권면 (11)       우리는 입술로만 아니라 생활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한다는 말씀은 3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   (1)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한 마음 , 한 뜻으로 서서 서로 협력하는 것 ( 빌 1:27).   우리는 주님의 겸손한 마음으로 한 마음을 품고 서로 돕고 힘을 합쳐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림에 있어서 같은 의지와 욕망으로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     (2)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 (28 절 ).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사 그 핍박과 고난을 견디며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 스도와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두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보다 그 두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지라도 그 상황을 극복해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이 우리에게 없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   (3) 그리스도를 위하여 믿음으로 고난을 받는 것 (29 절 ). 고난은 유익합니다 .     그 이유는 우리가 고난당하기 전에 그 릇행하였다가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배우므로 그 말씀을 지키게 되기 때문입니다 ...

"간음하지말라, 마5:27-30"

"간음하지말라, 5:27-30

 

 

간음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왔다. 주님 당시에 이스라엘에서 간음한 여인은 돌에 맞아죽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방에서 간음으로 돌에 맞아 죽지는 않는다. 한국에서도 몇년전만 해도 간음은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어 간음을 행한 남자와 여자는 감옥에 가야했다. 간음은 보통 남편이 있는 여자나, 아내가 있는 남편이 다른 여자나 남자와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결혼하지 않은 처녀와 총각이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도 간음이라고 한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은 혼외 정사를 모두 간음으로 보았다. 간음은 결혼의 순수성을 해치고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파탄에 이르게 한다. 바리새인들은 간음으로 인해서 나타나는 부부관계의 파탄 보다 하나님의 징벌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만일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백체 하나가 없어지고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백체 하나가 없어지고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하였다. 말은 주님이 하신 말씀인 것처럼 되어 있지만 내용을 들여다 보면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평소에 가르치는 내용을 주님이 인용하신 것이다. 그들은 간음이라는 불법을 범하지 않도록 눈을 빼버리고 손을 자르기까지 피나는 노력을 하라고 가르쳤다. 그렇지 않으면 벌을 받아 지옥에 가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은 성관계라는 행동에 경고의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성적인 유혹을 받아 실족하지 않기 위해서 실족의 빌미가 되는 눈이나 손을 없애는 것도 감수해야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길을 여자를 만나면 성적인 유혹을 피하려고 눈을 감고 가다가 나무에 부딪쳐 이마에서 피를 흘리기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들의 그러한 행동의 바닥에는 벌을 피하려는 자기 중심적인 태도가 담겨있다. 그들은 간음을 하지 말아야할 이유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하나님께 벌을 받는 것을 피하고 지옥에 가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들에게는 당시 사회적 약자인 여자의 처지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주님은 성관계라는 행동보다 근본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주님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을 간음이라고 하신다. 눈이 없어 여자를 없고 손이 없어 여자를 건드릴 없다 하여도 마음에 음욕을 품은 사람은 이미 간음하였다고 가르치신다. 주님은 겉으로 나타난 행동이전에 여자를 바라보는 마음과 대하는 태도를 중시하셨다. 주님의 가르침의 중심에는 여자에 대한 배려가 담겨있음을 있다.

 

주님 당시 사회에서 여자는 심한 차별을 받았다. 사람들이 간음하던 여인을 현장에서 잡아왔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기 위해서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일 것인지 물었다.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자는 돌로 쳐죽이는 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아한 것은 남자도 현장에 있었을텐데 여자만 붙잡아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고 당시에 남자들이 생각하는 여자는 어떤 존재였는가?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사람이 아니라 단지 남자의 성적인 욕구를 채워주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음욕이 가득한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아도 간음하지 않는한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음욕으로 가득한 눈으로 바라볼 앞에 있는 여자는 어떤 심정이었을지 사람들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여자의 인격이나 처지에 대한 생각은 전혀없었다. 주님은 그들을 향해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다”고 정죄하셨다.

 

아름다운 여자를 보고 성욕이 일어나는 것은 생리적인 현상일 있다. 남자와 여자는 성적으로 이끌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성에 대해서 성적으로 이끌린다고 해도 상대방을 배려하고 그의 인격과 생각과 마음을 존중하는 태도가 이성을 대하는 기본적인 마음이다. 그러나 음욕을 품는다는 것은 여자를 향해서 성적인 욕심을 품는 것을 말한다. 가게 주인이 종업원을 향해서 음욕을 품거나 상사나 감독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관리 아래 있는 여자를 향해서 성적인 욕심을 품는 것을 많이 본다. 여자를 하나의 성적인 욕구충족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여자를 비하하는 것이며 인간으로 존중하지 않는 태도이다. 주님이 정죄하신 간음은 바로 이런 것이다. 영화 감독이 자기의 아래에서 일하는 배우를 향해서 음욕이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성적인 욕망을 드러낼 배우는 인간적인 모멸감을 느낀다.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미투운동은 여성이 성적인 욕구충족의 대상이 아니라 존중받아야 인간임을 선언하는 것이다.

 

남자 혹은 이성을 보고 음욕을 품은 자라고 하지 않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라고 것은 당시 남존여비 사상 아래서 여자가 일방적으로 성적인 수모를 당했던 상황을 보여준다. 배우 장자연 사건은 여자를 성적욕구 충족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잘못된 인간관을 보여준다. 재력이 있거나 권력이 있거나 인기가 많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음욕이 가득한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자체가 인격을 가진 여성의 존엄성을 짓밟는 행동이다. 그들이 자신의 지위나 권력을 이용해서 여자를 성적인 농락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음욕을 품은 마음이 밖으로 나타난 것일 뿐이다. 힘없는 여자라고 혹은 사회적으로 약한 자라고 해서 인격적으로 대접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따라 함부로 대하는 것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젊은 여자를 대할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대하듯 하라고 가르친다. 간음하지 말라는 율법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간음을 금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간음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여자를 비롯하여 사회적으로 약한 자를 배려하고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보여주신다."

 

(출저: 미주 중앙일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