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
"죄책은 우리의 행위에 관한 것이다. 수치심은 우리가 말하거나 행한 어떤 것에 의해 유발되기는 하지만 우리 존재에 관한 것이다. ... 수치심의 핵심에는 자기 노출로 인해 느끼는 예민한 느낌이 있다."
[스테판 씨맨즈, "마음의 상처를 십자가로 가져가라"]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수치심을 느낀 사람은 아담과 하와이다. 에덴동산 살면서 선악과를 따먹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기 전까지는 하나님과 서로에 대한 완벽한 신뢰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수치심을 전혀 느끼지 않았었지만 하나님 처럼 되기를 구하며(창3:5)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그 행위의 첫 번째 결과로 찾아온 것이 수치심이였다 -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3:7) (씨맨즈). 아담과 하와는 자기 노출로 인해 수치심을 느끼기 된 것이다. 이 수치심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주저함으로 시작했다. "자기 의혹에 빠져서 두려워하던 그들은 더 이상 하나님 앞에, 그리고 상대방 앞에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벌거벗은 모습으로 설 자신이 없었다" (씨맨즈). 결국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찾으시는데로 숨어버렸던 것이다. 왜 그랬는가? 창세기 3장10절을 보면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던 것이다. 이렇게 수치심은 주저함을 낳고 주저함은 급기야 숨는 것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상대방으로부터 숨어버렸고, 심지어는 자신으로부터도 숨어버렸다(씨맨즈). 그러고 나서 자신을 계속 숨기기 위해서 남을 비난하는데 몰두했던 것이다: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 3:12, 13). 자기 자신을 숨기기 위해, 다시 말하면 자기 노출을 두려워 하여 남을 비난하며 원망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사람의 본능이라 생각한다. 자기가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들을 어떻케 해서던지 사람들에게
숨기고자 포장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노출을 막고자 다른 것들로 자기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의 수치스러운 점들을 알까봐 노심초사 두려움 속에서
긴장해야 하며 그러한 긴장감 속에서 자기의 수치스러운 점들을 여러 겹으로 포장하여서 아무도 알아 채리지 못하게 하는게 우리 인간의 본능이라 생각된다. 결국 이러한 인간의 본능에 이끌려서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할 뿐만아니라 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기 자신의 가치를 하잖게 보는 가운데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자 에너지를 많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진실을 인정하기를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함으로써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데 애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남을 혹은 환경 등을 탓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존재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수치심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삐뜰어진 자아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무력감을 느끼게
하며 또한 자신감을 잃게 만든다. 더 나아가서 수치심은 모든 중독성 행동을 부추길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존 브랜드쇼).
"고통스러운 자기 노출을 견뎌내기가 너무나 벅차기 때문에 위로와 인정을 받기 위해 마약,
일, 음식, 섹스, 기타 자신의 창조한 무감각의 세계로 뺘져든다는 것이다" (씨맨즈). 이렇게 하여 자신의 창조한 무감각의 세계로 빠져든 사람은
마음 깊은 속에 수치심의 썩은 뿌리는 존재하고 있지만 그 사실을 잊어버리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착각 속에서 나은 더 이상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고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수치심은 마음 깊은 속에 존재하여 병든 자아를 더 병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이 수치심을 어떻게 우리는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인가? 씨맨즈는 "십자가의 수치"를 바라볼 때 우리의 수치심을 극복할 수 있다고 도전하고 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말씀하고 있다(히12:2).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에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그는 그들의 관점에서는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셨던 것이다. "수치의 나무"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으심의 메시지는 사도 바울의 의하면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려한 것"(고전1:23)이였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우리 예수님께서는 벌거벗기신 채 십자가에 매달리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벌거벗으심은 사람들의 벌거벗음을 드러내셨다. 수치를 당하신 최후의 위대한 행동이 수치심 자체를 극복하게 했다(씨맨즈). 우리는 예수님의 수치의 나무를 바라볼 ㅤㄸㅒㅤ에 우리의 모든 가식의 옷이 벗겨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도 두려워하고 꺼리겼던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인정하게 되며 또한 우리의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사 사랑해주시며 우리의 존재를 존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관점이 생기므로 말미암아 자기 노출을 더 이상 꺼리끼며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결국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벌것벗은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가 전에 수치스럽게 여겼던 것을 우리는 자랑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사도 바울이 자기의 연약함과 미려함 등을 자랑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서 온전케 되는 것을 수치의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 볼 때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수치의
나무를 사랑하며 자랑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06년 5월 16일 나의 수치심에서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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