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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은혜스러운 말씀은 지혜의 말씀이요 능력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은혜스러운 말씀은 지혜의 말씀이요 능력의 말씀 입니 다 .   지혜의 하나님이시요 능력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은혜스러운 말씀 자체가 지혜요 능력 입 니다 .   그 말씀 , 그분의 가르치심을 듣고 감탄한 회당 안에 모였던 사람들처럼 지금도 교회당에 모여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이요 능력의 말씀인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 새찬송가 200 장 “ 달고 오묘한 그 말씀 ” 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찬양드릴 수 있길 기원합니다 : (1 절 )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은 귀한 그 말씀 진실로 생명의 말씀이 나의 길과 믿음 밝히 보여주니 , ( 후렴 )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 샘이로다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 샘이로다 .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하는 가정 (골로새서 3장 18-21절)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하는 가정

 

 

 

 

[골로새서 3 18-21]

 

 

우리 가정들을 생각할 때란 제목아래 이러한 글을 썼습니다: (1)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긍휼을 사모합니다. (2)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3)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과 상처와 아픔을 통해서라도 우리 모든 식구들을 겸손케 하여 주시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의지케 하옵소서. (4)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철저히 부서트려 주시고 깨뜨려 주시사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5)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들을 들쳐 내시사 우리의 죄를 깨달아 알아 인정하며 고백하며 예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용서를 구하게 하여 주시길 원합니다. (6)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죄의 확신을 갖게 하여 주시고 용서함을 받았다는 크신 은혜와 사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7) 하나님께서 우리 자녀들을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시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상처 입은 우리 자녀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셔서 치유해 주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8) 하나님께서 가정의 위기를 돌이켜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사랑을 깊고 넓게 많이 크게 경험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9) 우리 가정에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다스려 주시고 통치하여 주시사 모든 악한 세력과 사탄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10)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신적 사랑의 열매를 더욱더 맺어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의 통로로 사용해 주시사 온 가정 식구가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2023 5월에기도와 찬양의 기적을 경험하는 가정이란 제목 아래 역대하 20장 말씀을 이미 묵상했었습니다. 역대하 20장에는 유다 왕 여호사밧이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 전혀 감사할 수 없는 엄청난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었습니다. 그 엄청난 어려운 위기 상황이란 모압 사람과 암몬 사람이 일부 마온 사람들과 함께엄청난 대군이 유다를 침략한 상황이었습니다(1-2, 현대인의 성경). 그 때 여호사밧 왕은두려워서 여호와께 물어보기로 결심하고 모든 유다 백성에게 금식 선포령을 내렸습니다(3,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모든 유다 백성들은여호와께 도움을 구하려고전국 각처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습니다(4, 현대인의 성경). 결국 여호사밧왕과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양대를 조직하여 찬양을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 유다로 하여금 엄청난 대군을 물리치고 승리함. 저는 이 승리의 기적을 묵상하면서 4가지 교훈을 받았습니다:

 

(1)  첫 번째로 얻는 교훈은 우리가 갑자기 엄청난 어려운 일을 접하게 될 때 다니엘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추려고 결심하고(10:12, 현대인의 성경) 여호사밧 왕처럼 하나님께 물어보기로 결심하고(대하20:3,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가정의 엄청난 어려움을 접했을 때 모든 식구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2)   두 번째로 얻는 교훈은 우리가 엄청난 어려운 일을 접했을 때 먼저 우리 자신에게는 그 엄청난 어려운 일을 해결한 힘과 능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깨닫고 인정해야 하는 것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이 그 엄청난 어려운 일을 해결할 힘과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3)   세 번째로 얻는 교훈은 우리가 엄청난 어려운 일을 당면했을 때 하나님 앞에 잠잠히 머물러 있으면서 과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회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4)   네 번째로 얻는 교훈은 아무리 사탄과 그의 세력이 우리 가정을 공격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영적 전쟁은 우리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엄청난 어려운 일을 당면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을 신뢰하므로 구원의 확신과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다고 찬양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괴로움(아골)의 골짜기축복(찬송)의 골짜기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골로새서 3 18-21절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 말씀대로 순종하는 가정은 어떠한 가정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할 때 제 눈에 들어오고 관심을 갖게 된 말씀은 이미 우리가 묵상한 바로 골로새서 3 16절 하반절과 17절 하반절 말씀이었습니다: “…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16절하),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리고 저는 이 두 말씀을 골로새서 3 18-21절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했을 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가정이란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하는 가정이라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하는 가정이란 제목 아래 오늘 본문 골로새서 3 18-21절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지 4가지로 묵상하고자 합니다: (1) 하나님께서 아내들에게 하시는 말씀, (2) 하나님께서 남편들에게 하시는 말씀, (3)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하시는 말씀, (4) 하나님께서 부모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가정 문제와 위기에 대한 나의 생각입니다: (1) 가정 문제는 매우 개인적이기에(personal) 깊은 상처와 극심한 스트레스를 충분히 받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2) 가정 문제는 우리 인간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3) 가정 문제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충분히 절망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4) 가정의 위기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인내하며 견디면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5) 그 기회란 하나님께서는 가정의 위기로 부부를 변화시키시고, 부모님을 변화시키시고, 자녀를 변화시키신다고 생각합니다. (6) 그 변화의 핵심 중 하나는 자아가 깨지고 부서지는 가운데 전적으로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게 만드시사 결국에 가서는 이 모든 문제들도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8:28)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34:8). (7) 하나님을 더욱더 신뢰하므로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아는 큰 은혜와 축복을 받습니다(46:10).

첫째로, 하나님께서 아내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골로새서 3 18절 말씀입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현대인의 성경)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십시오.  이것은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에베소서 5 22절을 보면 성경은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아내들은 주님께 순종하듯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라고 번역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의 책 “영적 생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주께 하듯 하라는 그 말씀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아내들아, 너희 남편들에게 복종하라, 왜냐하면 그것이 주께 대한 너희 의무의 일부이기 때문이요, 그렇게 하는 것이 주께 대한 너희 복종의 표현이기 때문이다'는 의미입니다."  만일 우리 여자 성도님들이 남편들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주님께 대한 여러분의 의무를 감당하지 않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은 여러분이 주님께 복종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사람들이 보기에 여자 성도님들이 믿음이 크게 보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믿음이 큰 여자는 아닙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는 여자는 보이지 않는 주님께 복종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어느 여자 성도님들은 ‘내 남편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데도 주님께 하듯 그에게도 복종을 해야 합니까?’ 라고 질문을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1-5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아내된 여러분은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남편이라도 말없이 실천하는 여러분의 행동을 보고 하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남편들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깨끗한 생활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겉모양만 화려하게 꾸미지 말고 순하고 정숙한 마음 가짐으로 속 사람을 아름답게 하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매우 귀한 일입니다.  옛날 하나님에게 희망을 두었던 거룩한 여자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함으로 자기를 꾸몄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러한 짧은 말씀 묵상의 글을 적었습니다: “아내된 여러분은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귀한 일인 겉모양만 화려하게 꾸미지 말고 순하고 정숙한 마음 가짐으로 속 사람을 아름답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내된 여러분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함으로 자기를 꾸며야 합니다.  아내된 여러분이 남편에게 순종할 때에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남편이라도 말없이 실천하는 여러분의 행동을 보고 하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남편들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깨끗한 생활을 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참으로 믿음이 큰 여자 성도님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믿음이 큰 여자 성도님은 교회 안에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 만큼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는 여자 성도님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는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 같은 여자 성도님을 믿음이 큰 여자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여자 성도님들은 한나처럼 자녀가 없어서 자식을 놓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드릴 때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시고 자녀를 주시면 그 자녀를 평생토록 하나님께 바치겠습니다’라고 서약 기도를 드리는 여자 성도님들도 있을 것입니다(참고: 삼상1:11, 현대인의 성경).  그 정도로 하나님을 간절히 헌신적으로 찾는 기도하는 여자 성도님들을 볼 때 우리는 그러한 여인들은 믿음이 큰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15 21-2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실제로 “믿음이 큰 자”(a woman with great faith)이라고 말씀하신 여인이 나옵니다(28).  이 여인은 마가복음 7 25-26절을 보면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헬라인”이란 말은 그녀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여자로서 “수로보니게 족속”, 즉 수리아에 속하는 베니게 사람으로서 이 민족은 일찍이 유대인들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북향하고 쫓겨 갔던 가나안 민족의 자손입니다(박윤선).  그래서 마태는 그 여인을 한 마디로 “가나안 여자”라고 소개한 것입니다(15:22).  그런데 이 가나안 여자에게는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자마자 예수님을 찾아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22).  그러면 저의 질문은 왜 예수님께서 이 여자에게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28)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입니다. 적어도 2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  믿음이 큰 여자는 예수님이 주님과 그리스도되심을 믿는 자입니다.

 

주후 1세기에 살았던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님과 그 가나안 여인이 만났던 두로 지방은 수로보니게 땅으로 갈릴리 북편에 붙은 지역으로서 거기에는 이방인들이 거주하였는데 유대인을 원수시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방인인 이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자마자 곧장 예수님께 와서 그의 발 아래에 엎드렸습니다.  그 이유는 그 여인은 예수님을 다른 이방인들처럼 그저 한 유대인 사람으로 여긴 것이 아니라 그녀는 예수님을 “주 다윗의 자손”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15:22).  그녀는 이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2)  믿음이 큰 여자는 간절히 주님께 간구하는 자입니다(22).

 

그녀는 흉악하게 귀신들려 고통을 당하는 자신의 딸을 위하여 주님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예수님께 부르짖었습니다(23).  특히 그녀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간절히 부르짖음에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셨는데도(23) 불구하고 예수님을 뒤따라 가면서 계속해서 부르짖었습니다.  그녀가 그리도 간절히 계속해서 예수님께 구했던 것은 예수님께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7:26).  결국 예수님께서는 믿음이 큰 이 가나안 여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사 그녀에게도 천국의 축복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귀신 들린 딸이 치유를 받아 온전케 되었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큰 여자 성도님들은 분명히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마음에 모시고 살아갈 때 저의 질문은 ‘그녀는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마음에 모시고 살고 있는가?’ 입니다.  제가 이 질문을 던지게 된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보기에 믿음이 큰 여자 성도님들 중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면서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며 살려고 헌신적으로 무척이나 애쓰곤 있지만 가정 안에서는 그렇게 살고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믿음이 큰 여자 성도님들이 가정 안에서는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며 살려고 헌신적으로 무척이나 애쓰지 못하면서 살고 있다는 말은 그녀들은 오늘 본문 골로새서 3 1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데로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비난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2:5, 현대인의 성경).  분명히 성경은 아내들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18, 현대인의 성경)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가 보기에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 믿음이 큰 여자들이 가정 안에서는 그 말씀대로 살고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과연 믿음이 큰 여자는 가정 안에서는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인 남편에게는 복종하지 않고 있으면서 주님께만 복종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을까?’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 말씀대로 남편에게는 복종하지 않고 있으면서 주님께만 복종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생각입니까?

 

믿음의 여인들인 여자 성도님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여러분들이 남편에 복종하라는 것입니다(3:18; 5:22; 벧전3:1, 5).  왜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까?  성경은 3가지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5 23절 말씀입니다: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현대인의 성경)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것처럼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  이 성경 말씀을 보면 가정에서 남편의 위치 혹은 지위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위치 혹은 지위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성경 말씀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남편의 위치(지위)를 명백하게 하므로 가정에 질서가 있어야 할 것을 암시해 주고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의 위치 혹은 지위를 알고 “나의 머리”됨을 인정하므로 남편이 가정의 지도자란 사실을 알고 인정할 때에 이것이야말로 아내가 남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일입니다.  이것이 아내의 중요한 책임 중 하나입니다.  이동원 목사님 책 “새 가정 행전”을 보면 한 설문조사가 나옵니다.  그 설문조사에 따르면 남자들이 아내로부터 가장 필요로 하는 것 다섯 가지 중 그 첫 번째가 자아 존중감입니다.  지혜로운 아내는 남편의 위치인 가정의 가장이요 지도자임을 인정하므로 그 남편에게 복종합니다. 그러므로 남편의 필요인 자아 존중감을 세워줍니다.

 

(2)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함이 주님 안에서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3 18절 말씀입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현대인의 성경)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십시오. 이것은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십니다(고전 14:33). 그러므로 주님이 세우시는 가정에는 무실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화평이 있습니다.  , 화평이 있는 가정에는 질서가 있음. 그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선 가정에서 각자가 자기의 성경적인 책임을 신실하고 겸손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바로 가정에서 아내의 책임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보시기에 마땅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내의 의무입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가정 제도에 아내가 주님께 하듯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적합하고(it is fitting) 마땅한(당연한) 것입니다.  

 

(3)    믿지 않는 남편에게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베드로전서 3 1절 말씀입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현대인의 성경) “아내된 여러분은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남편이라도 말없이 실천하는 여러분의 행동을 보고 하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을 믿지 않는 남편을 둔 많은 믿는 아내들이 교회 생활은 열심히 하면서 가정 생활은 등한히 하고 있습니다. 그녀들은 교회 안에서는 본이 되고 있는지 모르지만 가정 안에서는 본이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균형을 잃은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혜로은 아내는 교회 안에서뿐 아니라 특히 가정 안에서도 본이 됩니다. 그녀는 주님께 하듯 불신자 남편에게 복종하므로 가정 안에서도 본이 됩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불신 남편이 그 아내의 신덕을 보고서 복음의 진실성을 깨닫게 되어 회심할 수 있다. 그것은 실행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함이다. 우리의 복음 증거가 우리의 선한 생활과 병행하지 않으면 무력하다”(박윤선).  지혜로운 아내는 복음 증거를 말로만 하지 않습니다. 결코 그녀는 불신자 남편에게 ‘교회 나가자’고 말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주님께 하듯 남편에게 복종하므로 복음의 진실성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녀를 사용하여 그녀의 불신자 남편도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지혜로운 아내는 그녀의 남편에게 복종합니까?  성경은 2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지혜로운 아내는 그녀의 남편에게 복종하되 주님께 하듯 합니다.

 

에베소서 5 22절 하반절과 24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주께 하듯하라”(22절하),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24절상).  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되 주님께 하듯 해야 합니까?  그 이유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기 때문입니다(23).  우리가 “남편”이란 단어를 보면 히브리어로는 “바알” 또는 “주인”이란 뜻이요 헬라어로는 “주”(lord) 또는 “위에 남자”(man above)란 뜻입니다.  , 남편은 가정에서 잘 돌보며 또한 부드러운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벧전3:1)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이와 같이”란 말은 베드로전서 218절에 나와있는 “종이 상전에게 순종함같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사라도 그녀의 남편인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입니다(벧전 3:6, 18:12).  지혜로운 아내는 그녀의 남편을 주님께서 가정의 가장으로 세우신 것을 알고 남편의 권위를 인정하고 남편에게 복종합니다. 남편에게 복종하되 그녀는 그의 말을 청취하고 잘 들어줍니다.  본래 “복종”(submission)이란 단어는 두 가지 단어의 결합입니다. ~아래서”(under) 라는 뜻의 전치사와 “잘 듣는다”(to listen to well)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므로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한다는 의미는 무엇보다 남편 얘기를 잘 들어준다는 의미요, 남편에 대해 그 권위를 인정한다는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동원).

 

(2)        지혜로운 아내는 그녀의 남편에게 복종하되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복종합니다.

 

에베소서 5 21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  , 그리스도께서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2:3) “자기를 비”우시고(2:7) 또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2:8)처럼 지혜로운 아내는 예수님을 본받아 주님을 경외하므로 그녀의 남편에게 복종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까?  모든 일에 복종해야 합니다.  에베소서 5 24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좋은 아내와 나쁜 아내와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좋은 아내는 좋은 남편을 만족시키고 나쁜 아내는 남편을 침묵시킵니다. 결코 완전한 아내는 완전한 남편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현명한 아내는 순종함으로 남편을 지배합니다(인터넷).  남편을 주님을 경외하며 주님께 하듯 복종하는 지혜로운 아내가 되길 기원합니다.

 

세기의 부흥사 빌리 그레함 목사님에겐 기도로 훌륭하게 내조한 아내 루스 그래함이 있었습니다. 전에 기독교 기자로부터 받은 질문입니다: "루스 사모님!  당신은 사도 바울 다음으로 가장 위대한 부흥사로 여기는 목사님의 아내로 수십 년을 살아왔는데 그 오랜 세월 살아오시면서 혹시 이혼을 생각해 본 적이 있으셨나요?  루스 그레함 사모님은, "아니요!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매일 생각해 본 것은 있었지요!"  호기심에 가득한 기자는, "그게 뭔가요?"  루스 그레함 사모님은 웃으시면서, "Murder...살인요!"  여러분 아내들도 혹시 남편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울 때가 있지 않았었나요?  요한일서 3 15절 상반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자입니다 …. 

 

둘째로, 하나님께서 남편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골로새서 3 19절 말씀입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현대인의 성경)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히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남편들을 가정에 가장으로 세우시고 우리에게 신적 권위를 주셨습니다.  그 만큼 우리 남편들에게 큰 책임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막중한 우리 남편들의 책임입니까?  그 책임이란 바로 남편이 자기 아내와 가족 식구들을 사랑하되(5:25) 그들을 보호하고 공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호하고 공급하되 남편은 아내와 가족 식구들을 위하여 희생을 하면서까지 보호하고 공급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3 19절을 보면 성경은 남편들에게 2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1)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남편들은 아내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요?  에베소서 5 25절 말씀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현대인의 성경) “남편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5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a) 우리 남편들은 아내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복으로 여겨야 합니다.

 

잠언 18 22절 말씀입니다: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  여기서 성경은 아무 아내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아내”는 “어진 여인”(an excellent wife)(12:4), “슬기로운 아내”(prudent wife)(19:14) 또는 “현숙한 여인”(A wife of noble character)(31:10)입니다.  이러한 여인은 유능한(10, 새번역) 여인으로서 강직하고 덕이 있습니다.  그러한 여인은 지혜롭고 분별력이 있어서 남편을 잘 도와줍니다.  성경은 이러한 어질고 슬기로우며 현숙한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하나님께 은총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아내를 둔 남편은 복받은 자입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어질고 슬기롭고 현숙한 아내는 그에게 복덩이(매우 귀중한 사람)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많은 남편들이 자기들의 아내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려주신 복으로 여기고 있지 않고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 중 하나는 그 여인이 현숙하고 슬기롭고 어진 여인이 아니라 “욕을 끼치는 여인”이기 때문입니다(12:4).  여기서 “욕을 끼치는 여인”이란 바로 남편과 다투기를 잘 하는 여자를 말합니다(박윤선).  또한 자기의 부끄러운 말이나 행위를 통해 남편을 부끄럽게 하는 여인을 말합니다(인터넷).  다투기를 잘 하는 여인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21:9),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25:24).  아마 우리 남자들 중 이렇게 변명하고 싶은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현숙한 여인을 주시지 않으시고 다투며 성내(성깔 있)는 여인을 주셨는데 제가 어떻게 그런 아내를 복덩이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참 그럴싸한 변명 같지 않습니까?  만일 그러한 말을 제가 듣는 다면 저는 그 형제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다투며 성내는 여인을 주신 것이 아니라 당신이 그런 여인을 선택했으니 책임감을 가지고 그 여인을 현숙한 여인으로 양육하십시오.   너무나 많은 경우 우리 남자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어질고 슬기롭고 현숙한 여인을 거부하고 우리가 보기에 예쁘고 매력을 느끼는 그러나 나중에는 다투며 성내는 여자를 선택하여 결혼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러한 선택을 했다면 우리는 책임감을 가지고 우리의 아내를 현숙한 여인으로 양육하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지금 너무 많은 우리 남자들이 자기가 선택하여 결혼한 아내에게 참 무책임한 말과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아내에게 저주스러운 말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또한 행동으로도 아내로 하여금 자기가 저주 덩어리라고 느끼게 만들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지금 많은 아내들이 자기들의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여인의 인생입니까? 

 

     우리 남편들은 우리 아내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덩이로 여겨야 합니다. 

아내는 하나님이 우리 남편들에게 주신 복입니다.  우리는 우리 아내를      즐거워하며 그 아내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겨야 합니다.

 

(b) 우리 남편들은 우리의 아내를 귀히 여겨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3 7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  현대 사회과학의 연구가 밝혀낸 것은 결혼에서 아내가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 3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 제일 첫 번째가 귀히 여김을 받는 것이라고 합니다(나머지 두 가지는 이해받는 것, 존경받는 것임).  우리 남편들은 우리 아내를 귀히 여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들의 아내를 귀히 여기고 계신데 우리 남편들이 누구이길래 주님이 귀히 여기고 계시는 하나님의 딸을 경히(없신) 여길 수 있습니까?  요한일서 4 20절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우리 남편들이 주님을 귀하여 여기므로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찬송가 102)을 보이지 아니하는 영이신 하나님께 찬양하면서 보이는 아내를 귀히 여기지 않고 있다면 이것은 위선입니다.

 

오늘 6 16일은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 미국에선 “Fathers Day(아버지의 날)로 지킵니다.  "Happy Father's Day" 사진을 인도 현지인 선교사님에게 받았는데 “F.A.T.H.E.R.S."이란 단어를 잘 적용했다고 생각합니다:

 

(1)  F: Faithful (아버지는 신실하십니다).

(2)  A: Always there (아버지는 항상 거기에 계십니다).

(3)  T: Trustworthy (아버지는 신뢰할 수 있습니다).

(4)  H: Honoring (아버지를 공경합니다).

(5)  E: Ever-loving (아버지는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십니다).

(6)  R: Righteous (아버지는 의로우십니다).

(7)  S: Supportive (아버지는 지원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한 인도 현지인 선교사님과 하나님의 사람인 그녀의 아버님을 생각하면서 이런 글을 제 자신에게도 반영 및 적용을 하면서 써보았습니다:

 

(1)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는 가정의 가장인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의 사람'이십니다.

(2)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람이신 우리 아버지를 통하여 자녀인 우리에게 지대한 선한 영향을 끼치셨고 지금도 끼치고 계시며 우리가 죽을 때까지 끼치실 것입니다.

(3)    이러한 사랑의 아버지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잠시 헤어지지만 다가오는 저 세상에서 다시 만날 줄 확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은 말로 표현이 안될 것 같습니다.

(4)    우리도 우리의 아버지를 본받아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며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큰 은혜요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5)    마치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큰 선한 영향을 받은 것처럼 우리의 자녀들도 우리에게 받을 수 있길 기원합니다.

 

(c) 우리 남편들은 아내를 즐거워해야 합니다.

 

잠언 5 18절 말씀입니다: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과연 우리 남편들은 우리의 아내들을 어떻게 즐거워해야 합니까?  우리 남편들은 아내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겨야 합니다.  잠언 5 19절 말씀입니다: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아내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라는 말은 우리 남편들은 아내의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이 사로잡힌바 돼야 한다(we must be captivated by her love)는 의미입니다.    특히 우리 남편들은 아내의 미모보다 그녀의 미덕에 우리의 마음이 사로잡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다’는 말씀 비유의 의미입니다(박윤선).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의 “우물”과 우리의 “샘”(15)인 우리의 아내의 사랑만을 즐기며 결코 그녀를 버리고 음녀의 집으로 가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아내로 말미암아 성적으로나 애정적으로나 만족할 만한 원기 회복(satisfying refreshment)을 얻을 때에 우리는 결코 음녀의 품을 그리워하며 음녀의 사랑을 연모하지 않을 것입니다(20).  잠언 5 16-17절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겠으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그 물로 네게만 있게 하고 타인으로 더불어 그것을 나누지 말라. 

 

그러나 지금 얼마나 많은 남편들이 자기들의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며 타인으로 더불어 나누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자기들의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인에게 가고 있습니까?  지금 많은 남편들이 자기들의 아내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지 못하며 아내를 즐거워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 그녀의 사랑을 연모하지 않고(19) 오히려 음녀를 연모하며 다른 여인의 가슴을 안고 있습니다(20).  이렇게 우리 남자들이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인에게 관심을 가지면서 바람을 피우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죄악 된 선택의 결과를 맛볼 수밖에 없습니다(7-14).  그 징계란 “존영 상실”(9), “시간 상실”(9), “재물 상실”(10), “건강 상실”(11), “양심상 고통을 당함”(12-14)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간음의 결과를 알고 음녀를 연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아내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므로 아내를 즐거워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3 19절을 보면 성경은 남편들에게 2가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첫 번째 말씀은,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남편은 아내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5가지 성경적인 교훈(원리) 중에 이미 3가지를 묵상했습니다: (1) 남편은 아내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주신 복으로 여겨야 합니다(18:22).  (2) 남편은 아내를 귀히 여겨야 합니다(벧전3:7).  (3) 남편은 아내를 즐거워해야 합니다(5:18).  남편들은 아내를 어떻게 즐거워해야 합니까?  우리 남편들은 아내의 품을 항상 그리고 충분히 족하게 여겨야 합니다.  잠언 5 19절 말씀입니다: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여기서 아내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라는 말은 남편은 아내의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의 마음이 사로잡힌바 돼야 한다(we must be captivated by her love)는 의미입니다.

 

지난 주일 이 세 번째 성경적인 교훈(원리)를 배웠는데 저는 지난 주 금요일에 “서로를 위한 기도후원 (카카오톡) 방”에 제가 인터넷 사역으로 알게 된 영상 형제가 올린 아가 4 9절 중심으로 짧은 말씀 묵상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아가 4 9절 말씀입니다: “내 누이, 내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현대인의 성경) “나의 누이, 나의 신부여, 그대가 내 마음을 빼앗아갔소이다. 그대가 한 번의 눈짓과 목걸이의 보석 하나로 내 마음을 훔쳐 가고 말았소”].  여기서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라는 말씀은 영상 형제의 말로는 “내 마음의 주도권을 잃고 사로잡힌 바 되어 언제 어디서나 그 마음이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모든 시간이 상대방을 향해있다는 의미”라고 말했습니다.  신랑되신 주님께서 신부된 교회인 우리의 작은 눈길 하나에도, 우리 목의 작은 장식 하나에도 그 마음을 빼앗기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 묵상을 다시금 생각할 때 3 성경 구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1) (이사야 43 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현대인의 성경) “내가 너를 소중하고 귀한 존재로 여겨 너를 사랑하고 있으니 내가 다른 민족을 희생시켜서라도 네 생명을 구하겠다”].  (2) (스바냐 3 17)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현대인의 성경)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신다.  그는 전능한 구원자이시다.  그가 너를 아주 기쁘게 여기시며 너를 말없이 사랑하시고 너 때문에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실 것이다”].  (3) (시편 139 17-18) “하나님이여 주의 생각이 내게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내가 세려고 할지라도 그 수가 모래보다 많도소이다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이시여, 주의 생각은 나에게 정말 소중합니다. 어쩌면 주는 그렇게도 많은 생각을 하십니까?  내가 만일 그 수를 헤아린다면 해변의 모래알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내가 깰 때에도 주는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십니다”].

 

신랑되신 주님이 신부된 교회인 우리를 이정도로 사랑하고 계시다는 말씀을 이렇게 다시금 묵상하게 되었을 때 저는 ‘나는 내 아내를 이정도로 사랑하고 있는가?’라는 자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잠언 5 19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나는 내 아내의 품을 항상 그리고 충분히 족하게 여기고 있는가?, ‘나는 내 아내의 사랑으로 인하여 내 마음이 사로잡힌바 되어 있는가?  박윤선 박사님에 의하면 남편들은 아내의 미모보다 그녀의 미덕에 우리의 마음이 사로잡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제 토요일, ‘내 마음이 사로잡힌 바 된 내 아내의 미덕은 무엇인가?’라고 자문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미덕”이란 단어의 의미를 잘 몰라서 인터넷으로 찾아보았습니다.  국어 사전에는 “도덕적으로 바르고 아름다운 일.  또는 그러한 행위”라고 합니다(인터넷). 저는 이 의미보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이 “참된 미덕의 본질”이란 책에서 말한 의미가 더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에드워즈 목사님에 의하면 참된 미덕이란, “하나님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이며, 성도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을 말한다.  그런데 참된 미덕의 참 소유주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참된 미덕이 되신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으로 거듭날 때 이 참되 미덕을 소유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을 무조건으로 사랑한다.  또한 성령을 받은 성도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에게는 직접적인 성령 하나님이 임재하시기 때문이다”(인터넷).  저는 제 아내의 미덕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고자 제가 이미 묵상한 잠언 31 10-31절에 나오는 “현숙한 여인”에 대한 6가지 목록을 다시금 묵상하면서 제 아내가 현숙한 여인을 닮은 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여섯 가지 중에 저는 제 아내를 생각할 때 3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 “현숙한 여인은 남편에게 신뢰를 줍니다”(11-12)란 말씀 묵상대로 제 아내는 저에게 신뢰를 줍니다.  그래서 저는 제 아내를 믿습니다.  (2) “현숙한 여인은 자기 남편으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게 합니다”(23)라는 말씀 묵상대로 제 아내는 저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은 사람으로 세워줍니다.  (3) “현숙한 여인은 지혜로운 입을 가지고 있습니다”(26)란 말씀 묵상대로 제 아내는 제가 보기에 지혜로운 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지혜로운 입이란 제가 볼 때 제 아내는 “때에 맞는 말”(15:23)을 잘합니다.  , 제 아내는 상대방에게 말할 때에 여러가지를 고려하여 잘 조절해서 말을 합니다(박윤선).

 

(d) 우리 남편들은 우리 아내를 우리 몸같이 사랑하고 아껴야 합니다.

 

에베소서 5 28절과 33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하고.  마치 우리 남편들이 우리 몸의 필요한 것들을 돌보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아내를 향한 우리의 사랑은 그녀의 필요를 채워주므로 그녀의 성장과 발전을 촉진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남편들은 우리 아내를 사랑하되 2가지 목적을 가지고 사랑해야 합니다.  2가지 목적은 우리 아내를 거룩하게 하기 위하여(to make her holy)(5:26a)와 주님 앞에서 영광스러운 아내로 세우기 위하여(to present her to the Lord as a radiant wife)입니다(27).  그리고 그 목적을 이루는 방법은 에베소서 5 26절 상반절에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라고 말씀하고 있고, 베드로전서 1 22절에는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남편들은 우리 아내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교훈하며 그 말씀을 순종케 하므로 세상과 분리된 삶, 즉 하나님의 거룩한 삶을 본받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남편들은 우리 아내를 주님 앞에서 “영광스러운 아내”, 주님의 광채가 들어나는 아내로 양육해야 합니다.

 

(e) 우리 남편들은 우리 아내를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서 5 25절 말씀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남편들은 희생적인 사랑을 실천하되 그 목표는 오직 아내를 위한 것이어야 하며 또한 아내로부터 상을 받을 기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돌보고자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남편들은 작은 일에서부터 희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아내의 얘기를 잘 들어주고, 시간을 함께 하고, 쓰레기도 가끔 버리고, 부엌에 가서 설거지하는 척하는 등 아주 작은 관심을 아내에게 보여주면 그것이 큰사랑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f) 우리 남편들은 자녀양육에 대해 적극적 책임을 가져야 합니다.

 

에베소서 6 4절 말씀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남편들은 가정의 가장으로서 아내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들도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자녀 양육, 우리는 무조건 우리 아내들에게만 다 맡기고 수동적으로 있으면 아니 됩니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우리 자녀 양육에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의 책 “영적생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편은 자기 아내를 자기 몸으로, 자신의 일부로서 사랑해야 합니다.  그는 그녀를 모욕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녀를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녀를 아주 완벽한 무엇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그녀를 그녀의 약한 특징들에서 보호합니다. 그는 그녀를 견고케 합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데 헌신하는 우리 남편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어제 토요새벽기도회 후 “슬픔은 기회입니다. (1)”라는 설교 동영상을 여기 저기 나눈 후 오늘 주일 준비를 하다가 “GRACE TO KOREA”라는 기독교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올려져 있는 기사들의 제목을 흝어보다가 “성경이 말하는 결혼: 10. 부부의 갈등 해결 (1)”이란 제목의 기사를 보고 관심이 생겨서 읽어 보았습니다.  그 기사 내용 중에 “배우자는 사랑의 대상이지만, 갈등 속에서는 싸움의 대상이 됩니다” 라고 말하면서 “갈등”이란 단어의 표준국어대사전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칡과 등나무가 서로 얽히는 것과 같이,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 목표나 이해관계가 달라 서로 적대시하거나 충돌함, 또는 그런 상태.  그래서 부부 사이도 목표나 이해관계가 달라지면 서로 적대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부부 갈등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2가지 이유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차이”

 

“’도대체 이해가 안 가’라고 배우자를 향해 말해본 적이 있다면, 당신은 갈등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서로의 다름은 그 자체로 죄가 아니지만, 결혼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다름’은 하나 되기 위해 서로 끊임없이 이해하고 용납하기 위한 노력을 요구합니다.

 

(2) “죄”

 

“부부의 다름은 그 자체로 죄가 아니지만, 남편과 아내 모두 가지고 있는 교만과 육신의 소욕은 갈등을 일으키는 주원인으로 죄에 그 뿌리를 둡니다( 5:19-21; 4:1-3).  죄는 아주 사소한 바람으로 시작하지만 매우 강력한 요구로 끝이 납니다. 필요(need)가 원함(want)이 되고, 원함은 곧 요구(demand)가 됩니다.

 

 제가 그 기사 내용 중에 좀 관심을 많이 갖게 된 내용은 “갈등을 잘못 피하거나 잘못 해결하는 부부의 특징”입니다. 

 

(1)  “조용히 침묵하는 것”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그냥 넘어가기만을 바랍니다. 하지만, 실상 이것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괴롭게 만드는 일입니다( 3:19).

 

(2) “서로 격리되는 것” 

 

“멀리 떨어져 있다 보면 적당한 평안을 알아서 각자 누릴 수 있을 것이란 기대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또한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고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일과는 거리가 멉니다(벧전 4:8).  부부의 친밀함을 포기하고 큰 갈등을 피하는 것으로 만족하려는 것입니다. 반드시 논의해야 하는 주제를 문제가 생길까 봐 일부러 피하는 경우도 있고, 일어난 사실을 감추거나 마음속 깊이 뿌리내린 상처를 숨기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면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냥 덮어둔 것일 뿐, 제때 다루지 않아 곪아 터진 문제로 더 큰 갈등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둘째로, 남편들은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 19절 말씀입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언제 우리 남편들이 우리 아내들을 괴롭게 합니까?  아니, 언제 우리가 우리 아내들을 괴롭게 하는지도 모르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니면 알면서도 괴롭게 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같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남편들은 사랑하는 아내에게 언제 또한 무엇때문에 우리 때문에 괴로워하는지 알고 민감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내를 괴롭게 하는 것은 우리 남편들 자신을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미련한 가장인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기보다 아내를 괴롭게(harsh) 합니다(골로새서 3:19).  그는 그의 아내의 말에 부드럽게 대답하기보다 과격한 말(a harsh word)로 그녀로 하여금 분노케 합니다(잠언 15:1, 현대인의 성경).  또한 미련한 남편은 아내에게 잔소리를 하므로 아내를 괴롭게 합니다.  “잔소리 중에서도 특히 아내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하루종일 집에 있으면서 도대체 하는 게 뭐야?  이거 하나도 제대로 못해?’ 처럼 무조건적인 비난을 쏟아내는 것입니다.  잔소리하는 남편 특히 집안의 경제권을 지니고 있는 남편의 경우에는 아내를 자신보다 부족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매일 잔소리를 반복하며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잔소리를 하는 남편 대부분이 아내와 대화를 하기보다는 버럭 화를 내는 경우가 더 많은데 이렇게 아내와의 소통을 거절을 하는 남편은 심리적인 문제로 제대로 된 소통에 어려움을 겪고 끊임없이 잔소리를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골로새서 3 19절을 보면 성경은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을 다시금 묵상할 때 ‘아내를 제일 괴롭게 하는 것은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2018 1 11일에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여인”이란 제목 아래 창세기 29 31절 말씀 중심으로 남편인 야곱에게 사랑받지 못한 여인 레아에 대해서 묵상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부인은 심히 괴로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하나님의 존귀하고 보배로운 딸들이 그녀들의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미움을 받고 상처와 아픔과 눈물로 세월을 보낸다면 이 얼마나 괴롭고 괴로운 인생입니까?  레아가 야곱에게 사랑을 받지 못한 이유는 야곱이 시력이 약한 자기보다 곱고 아리따운 자기의 여동생인 라헬을 더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7, 18).  이렇게 남편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내들은 남편에게 받지 못하는 사랑을 무의식적으로 자녀에게 지나치게 사랑을 쏟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결과 그 자녀는 어머니의 과잉 사랑과 과잉 보호를 받으므로 마마 보이나 마마 걸이 될 위험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빈약한 부부관계는 왜곡된 부모 자녀 관계를 생산합니다.  “이때 부모는 부부관계에서 충족하지 못하는 정서적 욕구나 사회적 욕구, 성적 욕구를 무의식적으로 아이를 통해 충족시키려고 합니다. 또한 배우자에게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원망과 미움을 아이와 편 먹고 배우자를 밀어내는 식으로 보상하려고 합니다"(인터넷).  아마 많은 부부들이 ‘애들 때문에 참고 산다’고 말하면서 애들이 크면 이혼을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실제로 2019년에 제가 읽은 어느 한 기사를 보면 한국의 1년 한해 전체 이혼 사건이 총 10 8684건이었는데 20년 이상 함께 산 황혼 이혼이 33.3%(3 6327)로 가장 많은 비율을 차치했고, 그 다음으로 0-4년 신혼부부(21.4%)가 뒤를 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고, 친밀하지 못하면 주로 아내는 남편에게 받지 못하는 사랑을 무의식적으로 자녀에게 지나치게 사랑을 쏟을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아내가 무의식적으로는 자기 자녀에게 사랑을 받고자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부부 관계가 어떠한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 이유는 자녀들은 자신만을 바라보며 사는 엄마, 아빠 때문에 마음이 병들어 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 골로새서 3 19절 말씀대로 우리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아내를 괴롭게 하지 않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5:25)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에베소서 5 28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아내를 제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골로새서 3 20절 말씀입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현대인의 성경) “자녀들은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제가2021 5 11일에 “’부모님 잘 따르면 나처럼 된다’ 노소영의 후회”란 제목 아래 기사가 있어서 관심을 갖고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 기사에 이러한 내용의 글이 있었습니다: “… 노 관장은 지인들에게 어머니 김 여사가 ‘네 뜻을 펼치지 못하게 하고 집안에만 가둬 둔 것, 오지 않는 남편을 계속 기다리라 한 것, 여자의 행복은 가정이 우선이라고 우긴 것에 대해 미안하다, 너는 나와는 다른 사람인데 내 욕심에 (그런 거 같다)’라는 말을 했다고 소개했다.  노 관장은 이어 ‘부모님 말씀을 잘 따르면 나처럼 된다.  모든 젊은이에게 알려주고 싶다’”(인터넷).  저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한 번쯤은 심각하게 고민해 볼필요가 있다는 생각되어서 제 나름대로 생각하면서 글을 썼었습니다[“노소영 얼굴 무너지며, 울상… 인내심으로 버틴 아버지’란 기사를 읽고나서” (https://blog.naver.com/kdicaprio74/222549549958)].  제가 그 기사를 읽으면서 우리가 고만하면 좋겠다고 생각이 든 문구는 바로 "부모님 말씀을 잘 따르면 나처럼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이 왜 고민해야 할 점이냐면 성경은 분명히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6;1)고 말씀하고 있는데 노관장이란 사람은 "부모님 말씀을 잘 따르면 나처럼 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말을 들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면 우리는 대부분 당연히 성경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성경 말씀도 따름에 있어서 노관장이란 사람이 한 말도 잘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우리 부모에게 순종해야 하지만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말씀(6:1)과 노관장이란 사람이 한 말을 겸하여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지혜를 주셔서 과연 주님 안에서 부모님의 말씀을 순종할 것과 순종하지 말아 할 것을 분별하고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은 자녀들은 무조건 부모님의 말씀을 순종하면 안 된다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사랑하는 딜런, 예리, 예은이가 아빠인 저의 말을 무조건 순종하는 자녀가 되길 결코 원치 않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그들에게 말할 때 제 말일 충분히 틀릴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떻게 주님의 뜻을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제가 어떻게 주님의 말씀대로만 자녀들에게 믿음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전 그럴 수 없는 아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제 세 자녀의 각자의 삶 속에 뜻하신 바를 이루어 나아가심에 있어서 제가 모르고 무지한 가운데 아이들에게 이래라저래라 그러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시는 마음과 인도하심이 각자 있을 텐데 제가 아빠로서 그들에게 다르게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는 제 아이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길 원합니다.  제가 이 기사를 읽으면서 이렇게 좀 흥분(?)해서 글을 적어 내려간 이유는 우리 부모님들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대로 자녀를 양육하고 있기 보다 우리 부모님의 욕심이나 온전하지 못한 믿음과 신앙관 등등으로 양육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인식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가운데 우리 자녀를 사랑한답시고(그것도 너무 지나치게 과잉 보호 과잉개입 등등) 자녀에게 이래라저래라 말하면서 자녀의 선택권까지도 뺐어 가고 등등하면 우리 자녀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  이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3 20절을 보면 성경은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에베소서 6 1절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할 때 자녀들이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말씀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주 안에서”(6:1)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서 묵상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옳은 일”이기 때문입니다(1, 현대인의 성경).  이 에베소서 6 1절 말씀을 반대로 묵상한다면, 자녀들이 주님 밖에서 부모님에게 순종하는 것은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옳은 일이 아니고 틀린 (잘못된)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본문 골로새서 3 20절에서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고 말씀하고 있지만 에베소서 6 1절에는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 해 둘 때 종합적으로 성경에서 자녀들에게 주시는 말씀(교훈)은 ‘자녀들이 주님 안에서 모든 일에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녀들은 이 성경 말씀을 종합적으로 묵상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무조건 모든 일에 부모님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은 자녀들은 주님 안에서 부모님에게 순종해야 하는데 부모님이 주님 밖에서 하시는 말씀들조차도 다 순종해야 한다고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 자신의 뜻과 자신의 욕심 속에서 자녀들에게 하는 말은 자녀들이 하나님의 지혜로 분별하여 이것은 주님 안에서 부모님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부모님에게 불순종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경 말씀을 오해하고 무턱대고 부모님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 골로새서 3 20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부모님을 순종함에 있어서 그들은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것은 제가 대학교 다닐 때, 그러니까 약 34년전에, 제가 대학 캠퍼스에서 후배 한 명이 성적이 좋지 않아 고민하는 것 같길래 그녀에게 그저 최선을 다하고 점수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자고 권면했었습니다.  그 때 그 후배가 저에게 한 말의 내용은 부모님이 안 좋아하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 그 후배는 학교 점수가 안 좋으면 부모님이 기뻐하지 않을 것이라고 염려했던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엔 지금도 많은 자녀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부모님을 사랑하기에 어떻게 해서 든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면 우리 자녀들은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과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고민하는 자녀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충돌(conflict)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충돌이 마음에서 일어날 때 우리 자녀들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26:39, 현대인의 성경)라고 간구하신 것처럼 ‘내 부모님의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간구하는 훈련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자녀들의 입장에서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부모님을 순종하는 것은 귀하지만 그 순종함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주님께 순종하는 것과 충돌한다면 우리 자녀들은 주님께 순종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녀들은 부모님을 순종함에 있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먼저 그들은 부모님의 말씀을 순종함에 있어서 그 부모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 1절에서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 자녀들은 만일 부모님의 말씀이 주님의 말씀과 불일치한다면 그것은 주님 안에서 부모님을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불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 19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다”[(현대인의 성경)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이렇게 대답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일인지 한번 판단해 보십시오”].  과연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부모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일이지 자녀들이 판단해야 합니다.  만일 부모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를 한다는 것을 확인했다면 당연히 자녀들은 그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3:20, 현대인의 성경).  “이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옳은 일입니다”(6:1, 현대인의 성경).  주님을 믿는 자녀들이라면 그들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주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3:20)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입니다.

 

잠언 23 15-16절 말씀입니다: “내 아들아 만일 네 마음이 지혜로우면 나 곧 내 마음이 즐겁겠고 만일 네 입술이 정직을 말하면 내 속이 유쾌하리라”[(현대인의 성경) “내 아들아, 네가 지혜로우면 내 마음이 기쁠 것이며 네가 옳은 말을 하면 내가 정말 즐거워할 것이다”].  부모의 마음을 기쁘고 즐겁게 하는 자녀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녀요 입술이 정직을 말(옳은 말)을 하는 자입니다.  이러한 지혜로운 자녀는 부모님의 말씀을 듣습니다(19, 22).  그 부모님의 말씀이 책망이라 할지라도 그는 겸손히 듣습니다(25:12).  그리고 그는 더욱더 지혜를 얻어 자기 마음을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23:19).  결코 그는 자기 자신을 방탕의 길로 향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20).  그리고 지혜로운 자녀는 자기 부모님이 늙었다고 해서 그들을 업신여기지 않습니다(22).   그러나 부모님이 늙었다고 업신여기는 자녀는 지혜가 없는 자입니다(11:12).  , 그는 미련한 자입니다.  그리고 지혜 없는 자녀가 부모님을 멸시하는 이유는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13:13).  생각해 보십시오.  분명히 에베소서 6 1절은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미련한 자녀는 그 말씀을 무시하고 멸시하기에 부모님께 순종하지 않습니다.  지혜 없는 미련한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만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말도 업신여겨서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23:9).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14:21).

 

마지막 넷째로, 하나님께서 부모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골로새서321절 말씀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현대인의 성경) “부모들은 자녀들의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들이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부모가 이렇게 하면 자녀들은 교회 떠납니다”라는 기사를 보면 “예배에 참석하는 신도들의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가운데 신앙과 멀어져 교회를 떠나는 젊은이들을 붙잡아야 하는 게 한국교회가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 중의 하나이다.  가속화되는 교회의 고령화 현상을 중단하고, 신앙의 계보를 이어나갈 미래 세대를 교회에 안착시키기 위해서 자녀를 둔 가정의 부모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인터넷).  “그런 점에서 자녀가 있는 부모가 자녀를 교회에서 떠나지 않도록 신앙의 본보기를 보여주는 자세가 요구된다.  반대로, 부모가 절대로 하면 안 되는 신앙적 태도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한 6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1) 가끔씩 교회 나가기, (2) 교회에 관해 불평하기, (3) 자녀들을 청소년 문화에 한정시키기, (4) 중요한 질문들 무시하기, (5) 교회 자주 바꾸기, (6) 복음을 하찮게 취급하기.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만들어진 공동체다.  그런데 부모가 복음을 하찮게 여기거나 이를 삶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부로 밀어낼 때, 자녀들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로부터 단절된다.  교회가 삶에서 복음 중심적인 우선순위를 차지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출석해야 하는 곳임을 자녀들에게 보여준다면 그들 또한 부모와 마찬가지로 복음을 자신들 인생의 가장자리로 밀어내게 될 것이다”(인터넷).

 

오늘 본문 골로새서 3 21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현대인의 성경) “부모들은 자녀들의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들이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부모님들에게 뭐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하면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말한다면, “부모들은 자녀들의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과연 우리 ‘부모들이 자녀들의 감정을 잘 헤아리고 함께 느끼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의문이 든 이유는 아무래도 제 자신도 제 자녀들의 감정을 잘 헤아리지 못하고 함께 느끼고 있지 못해서인 것 같습니다.  제가 세 자녀들의 아버지로서 무엇을 어떻게 하면 딜런, 예리, 예은이의 감정을 건드려서 화나게 하는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한 가지 제가 조금 아는 것은 저희 집 아이들은 제가 제 아내와 관계에서 저희 부부가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지 못할 때 제 자녀들의 감정을 슬프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만일 제가 그들에게 언행 일치의 삶을 살지 않고 또한 성급하게 말하고 행동함으로 그들의 감정을 화가 나게 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외에도 제가 저희 집 세 자녀들의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한 일들이 얼마나 수없이 많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제가 그들의 감정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 4절 상반절에서도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옆에 하지 말고 …”[(현대인의 성경) “부모들은 자녀의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말고…”]라고 말씀했습니다.  , 부모들은 자녀들을 화나게 하지 말라, 자극하지 말라, 격분시키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 부모들이 우리들의 자녀를 노엽게 할 수 있습니까?  여러 대답이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1) 윽박지르므로, 화를 내므로, (2) 자극적인 말을 하므로, (3) 잘못된 징계, (4) 부모가 인격적으로 형편없이 살면서 자녀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 (5) “부모라고 해서 자녀를 마치 자기의 소유물인 것처럼 생각하여 무조건적인 권위를 내세우며 강압적으로 다루거나 자녀를 학대하고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것입니다(피종진).  The Bible Exposition 주석을 보면 아버지들이 그들의 자녀들을 언제 화나게 하며 낙심시키는지 6가지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1) 말을 한 다음에 행동은 달리 하는 것, (2) 항상 자녀들을 원망하면서 절대로 칭찬을 안하는 것, (3) 일관성이 없고 징계에 있어서 불공평 하는 것, (4) 집 안에서 편애를 하는 것, (5) 약속을 한 후 지키지 않는 것, (6) 자녀들에게  있어선 아주 중요한 것을 가볍게 치급하는 것.  제 생각에는 이것들 외에도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부모가 서로 사랑하지 않을 때라 생각합니다.  특히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을 자녀들이 볼 때에 그들은 노여워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자녀들이 자라나면서 자신들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으므로 어머니가 고통을 당하고 고생하다가 병들던지 하면 충분히 자녀들은 아버지를 향하여 분하게 여길 수(resentment)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들은 충분히 낙심할 수 있습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구요?”라는 제목 아래 기사가 있어 읽어 보았습니다.  그 기사의 권면은 “부모는 자녀가 낙심하지 않고 자신감을 갖고 자라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녀는 언제 부모님에게 상처를 받고 분노하는 것인가요?  그것을 알아야 우리 부모들이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명령을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기사를 쓴 저자의 말로는 그가 많은 사람들의 대답을 들었는데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형제자매와 비교할 때, 딸이라는 이유나 또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차별을 당했을 때, 부모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때, 부모의 이중적인 모습을 보았을 때, 학업에 지나친 압박을 가할 때,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나 가고 싶은 길을 못 가고 부모의 요구를 억지로 따라야만 했을 때, 장남이나 장녀라는 이유로 큰 부담을 안겨줄 때 화가 납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대답은 ‘부모가 싸울 때’였다고 합니다.  자녀가 가장 크게 상처받고 화가 나고 낙심되는 이유는 바로 부부싸움이었다.  자녀는 부모가 싸울 때 상처받는다”(인터넷).

 

에베소서 6 4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사도 바울은 우리 부모들에게 자녀들을 교육하고 강건하게 하며 그들이 성숙할 때까지 양육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양육하라”는 단어는 에베소서 529절에 나와있는 남편은 아내를 ‘양육하라’는 말과 같은 단어입니다.  , 아버지는 가정에 영적 지도자로서 아내를 양육 할뿐만 아니라 자녀들도 양육해야할 책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부모가 자녀를 어떻게 양육해야 합니까? 

 

(1)  우리 부모들은 우리 자녀들을 “주의 교양”으로(in the training of the Lord) 양육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부모들이 먼저 주님께 징계를 받아 고치심을 받은 후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걷듯이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이렇게 양육해야 합니다.  잠언 226절 말씀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마땅히 행할 길, 지혜로운 길 또는 경건한 삶의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가르침에 있어서 저는 특히 제 자녀들과 교회 자녀들에게 3가지를 가르치려고 부족하나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1) 바른 가치관(Right Value),  (2) 뚜렷한 목적관(Clear Purpose) 그리고 (3) 영원한 인생관(Eternal View of Life)입니다. 

 

(2)  우리 부모들은 우리 자녀들을 주님의 “훈계”로(in the instruction of the Lord) 양육해야 합니다.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를 사랑으로 충고하며 경고하며 또한 권고해야 합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훈계”해야 합니까?  Tedd Tripp은 그의 책 “Shepherding a Childs Heart”에서 2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Rich, full communication(대화를 충분히 하는 것) The rod(회초리).  주님의 “훈계”로 자녀를 양육한다는 말은 회초리보다 대화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대화를 우리가 자녀들하고 할 것입니까?  3가지 원리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얘기하지 말고 자녀들과 얘기해야 합니다(Dont talk to your children; rather, talk with them).  (2)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만을 표현하지 말고(18:13) 자녀로 하여금 그의 생각을 표현하도록 허락해야 합니다(Dont just express your thoughts only; rather, learn how to draw out their thoughts).  (3)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이해하는데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Focus on understanding your children).  자녀들이 겪고 있는 고민들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 그들이 그들의 감정들을 터뜨리는지 이해하는데 힘과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 가정을 세워주시되(참고: 16:18) 우리 모든 가정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하는 가정으로 세워주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3 18-21절 말씀 중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하는 가정”이란 제목 아래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지 4가지로 묵상했습니다: (1) 하나님께서 아내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현대인의 성경)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십시오.  이것은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3:18).  (2) 하나님께서 남편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현대인의 성경)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히지 마십시오”](3:19).  (3) 하나님께서 자녀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현대인의 성경) “자녀들은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3:20).  (4) 하나님께서 부모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현대인의 성경) “부모들은 자녀들의 감정을 건드려 화나게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면 그들이 낙심하게 될 것입니다”](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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