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하지
말고
까마귀와
백합화를 생각하십시다.
제임스 김 나눔
염려하지 말고 까마귀를 생각하며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누가복음 12:22-24).
(1)
첫째로,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22-24절 말씀을 읽을
때 어제 “어리석은 부자의 진짜 죄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것’입니다.”란 제목 아래 묵상한 누가복음
12장 16-21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생각난 말씀이 지난 주 금요일에 “유산 문제로 다투지
말고 모든 탐심을 물리쳐야 합니다.”란 제목 아래 묵상한 누가복음 12장 13-1절에서 특히 15절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미 묵상한 누가복음 12장 13-15절과 16-21절과의 연관성이 오늘 본문
22-24절도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 먼저
이미 묵상한 누가복음 12장 13-15절과
16-21절가의 연관성은 두 가지로 (1)
예수님께서는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15절)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후 그 말씀을 어기고 불순종한 “한 부자”(16절)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신 것과 (2) 모든 탐심을 물리쳐야 하는 이유는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한데(15절) 그 “한 부자”(16절)는 자기의 생명이 자기의 소유의 넉넉한 데 있다고 믿고 자기 밭에 소출이 풍성하므로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하고 “심중에 생각”한(17절) 결과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18절)한 것입니다(이 두 연관성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받은
교훈은 여기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https://blog.naver.com/kdicaprio74/224251479740). 이 두 연관성이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22-24절 말씀과 어떻게 연관이 될까요?
(i)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든 탐심을 물리치지 못한(15절) 어리석은(20절) “한 부자”(16절)는 자신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다고 믿고(15절)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수확”(16절, 현대인의 성경)인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어 자기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자기의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고 심중에 생각한 것입니다(17-18절). 이렇게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21절)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22절의 예수님의 말씀인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에 불순종하여 자기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자기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합니다.
·
결국 그 어리석은 부자는 곳간을 크게 짓고 재물을 쌓아
놓으면 자신의 생명이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지만(19절) 예수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20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 부자의 어리석음은
생명의 주권이 재물이 아니 하나님께 있음을 모르는 무지함과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어야 할 줄 다 알고 계시다(30절)는 진리를 믿지 못하는 불신앙입니다(참고:
인터넷).
-
그는 생명의 주권에 대해 무지하였습니다(소유 ≠ 생명): 그는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9절)라고 말하며, 재물이 자신의 미래와 생명을 보장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20절)라고 말씀하심으로, 생명의 시작과 끝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인터넷).
-
또한 그 어리석은 부자는 공급자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
있었습니다(염려의 뿌리): 누가복음 12장 30절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는 진리를 신뢰하지 못할 때, 사람은 '쌓아 두려는 탐심'이나 '없을까 봐 떠는 염려'에 빠지게 됩니다. 그 부자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곳간'을 신뢰했기에 결론적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된 것입니다(인터넷).
(2)
마지막 둘째로, 저는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22절)하고 말씀하셨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이유가 적어도 3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i) 첫째로, 그 이유는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고(15절) 한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지 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들이 되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
여기서 저는 예수님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15절)는 말씀대로 살지 못한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서 좀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 중에서 탐심의 문제를 끝내 극복하지
못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은 가룟 유다입니다. 첫째로, 그는 제자들의 공동 재정을 관리하는 돈궤를 맡았으나, 그 안에 들어오는 것을 몰래 훔쳐가는 도둑이었습니다(요 12:6). 둘째로, 마리아가 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부었을 때, 그는 이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지 않았다며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진정으로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탐심을 채울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결국 그는 은 삼십이라는 물질적 탐욕에 눈이 멀어,
자신의 스승인 예수님을 종교 지도자들에게 팔아넘기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마 26:15). 이처럼
가룟 유다의 사례는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는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했을 때, 그 결말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인터넷).
“세속적 권력욕에 빠졌던 제자들의 사례를 보면, 탐심은 비단 '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 전체가
'누가 더 크냐'는 서열 다툼에 빠져 있었던 것은 명예와 권력에 대한 탐심의 결과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야고보와 요한은 주의 나라가 임할 때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구하며 세속적인 영광을 탐냈습니다(막 10:35-37). 또한,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는 엄중한 순간에도 제자들은 길에서 서로 누가
큰지를 다투며 명예에 대한 탐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눅 9:46). 결국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께서 경계하신 '모든 탐심' 안에 물질뿐만 아니라 인간의 교만과 권력욕도 포함되어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인터넷).
·
여기서 한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지 않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서 생각할 때 두 사람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1. 첫째
사람은,
위로의 아들인 바나바입니다(행4:36-37).
“바나바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의 구체적인 모델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있는 밭을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어 공동체의 가난한 이들을 돕게 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내 곡식, 내 물건’이라며 집착했던 것과 달리, 바나바는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내어놓았습니다”(인터넷).
2. 둘째
사람은,
생활비 전부를 드린 과부입니다(눅21:1-4).
“예수님은
헌금함에 넣는 부자들의 헌금보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을 더 귀하게 보셨습니다.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서’ 넣었지만, 이 여인은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 생명이 '돈'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온전히 신뢰한,
가장 부요한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인터넷).
-
그러면 내 생명이 '돈'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온전히 신뢰한, 가장 부요한 믿음의 표현을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n “내
생명이 돈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믿는 '가장 부요한 믿음'은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선택으로 증명됩니다. 성경의 원리에 기초하여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 3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곳간'을 늘리는 대신 '통로'를 넓히는 삶 (나눔)
어리석은
부자는 남는 곡식을 보고 ‘더 큰 곳간’을 생각했지만, 하나님께 부요한 자는 ‘나눌 대상’을 생각합니다.
구체적
실천:
나의 소득 중 일정 부분을 '내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고아와 과부, 소외된 이웃을 위해 정기적으로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재 물이 쌓이는 것을 보며 안심하는 마음을 의도적으로 거절하고, 재물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이는 것을 보며 기뻐하는 훈련입니다.
2. '염려'의 시간에 '감사와 간구'를 채우는 삶 (기도)
염려는
내 생명을 내가 책임지려 할 때 생깁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염려가 찾아올 때 그것을 기도의 제목으로 바꿉니다.
구체적
실천:
무엇을 먹고 입을까 하는 걱정이 엄습할 때, 즉시 ‘하나님, 제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필요한 것을 공급하실 아버지를 신뢰합니다’라고 선포하십시오. 눅 12:30 말씀처럼
하나님 아버지가 이미 다 알고 계심을 인정하며 감사 기도를 먼저 드리는 것이 부요한 믿음의 증거입니다.
3. '자족'함으로 세상의 가치관을 거스르는 삶 (단순한 삶)
소유의
넉넉함이 생명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끝없는 소비와 비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구체적
실천:
남들보다 더 좋은 차, 더 큰 집을 가져야 안전하다는 세상의 유혹 앞에서 ‘지금
내게 있는 것으로 충분합니다(자족)’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삶의 규모를 단순하게 유지하고, 그로 인해 남는 시간과 에너지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예: 예배, 봉사, 말씀 묵상)에 우선적으로 배치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결국
가장 부요한 믿음의 표현은 ‘내일의 안전을 위해 오늘의 재물을 움켜쥐지 않고, 오늘 나를 먹이시는 하나님을
믿고 오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인터넷).
(ii) 둘째로,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기 때문입니다.
·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22절 말씀입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고 말씀하신 의미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1. 창조의
질서와 하나님의 책임 (가장 큰 것을 주신 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고귀한 선물인 '목숨(생명)'과 '몸'을 이미 거저 주셨습니다. 음식과 옷은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부수적인 수단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생명이라는 가장 거대한 선물을 주셨다면, 그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작은 것들(음식, 옷)을 책임져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것입니다. 즉, 생명의 근원을
주신 분이 그 과정도 책임지신다는 창조적 신뢰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2. 본질과
수단의 역전 경계
세상
사람들은 흔히
'먹고 입는 것(수단)'을 위해
'목숨과 건강(본질)'을 소모하며 염려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일깨우십니다. 우리가 먹고 입는 것에만
온 정신을 쏟는다면, 정작 하나님이 주신 '목숨'의 참된 목적인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3. 소유가
생명을 보장하지 못함 (어리석은 부자와의 대조)
앞서
나온
'어리석은 부자'는 곡식(음식)과 물건(의복 등)이 넉넉하면 자신의 목숨이 평안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밤에
목숨을 가져가시자 그가 쌓은 모든 수단은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즉, "음식이 목숨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권자인 하나님이 목숨을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이 말씀은 우리의 시선을 '내가 소유한 것(음식,
옷)'에서 '나를 존재하게 하신 분(하나님)'께로 돌리라는 초대입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생존을 위한 염려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로 살 수 있게 됩니다(인터넷).
(iii)
마지막 셋째로, 까마귀를 기르시는 하나님께서 새보다 더 귀한 우리를
기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
오늘본문 누가복음 12장 24절 말씀입니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까마귀를
생각해 보아라. 까마귀는 씨를 뿌리거나
거두지도 않고 곳간이나 창고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를 기르신다. 너희는 새보다 더 귀하지 않느냐?”(현대인의 성경)].
- 여기서 “까마귀를 생각하라”는 말씀에서 ‘생각하라’는 헬라어 단어
“κατανοήσατε”(카타노에사테)는 단순히 '한번 떠올려 보라'는 수준 이상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세 가지 핵심 의미입니다(인터넷):
1. 관찰을 통한 깊은 통찰 (To Observe
Carefully)
이
단어는
'아래로(kata)'와 '마음/지성(noeo)'이 합쳐진 말입니다. 즉, 대상을 아주 자세히
주의 깊게 살피고 관찰하여 그 이면에 담긴 진리를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까마귀라는 새를 보라는 것이 아니라, 그 까마귀가 어떻게 먹고 사는지, 누가 그를 먹이시는지를 연구하고 명상하여 영적인 원리를 발견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2. 고정관념을
깨는 깨달음
당시
유대인들에게 까마귀는 율법적으로 '부정한 새'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 부정한 새조차 하나님이 세밀하게
기르신다는 사실을 '주목(κατανοέω)'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돌보심에는 예외가 없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3. '심중의 생각'을 교정하는 도구
어리석은
부자의
'자기 생각(17절)'과 대조됩니다.
부자의
생각:
자기 안의 욕망과 계획에 갇힌 생각 (Self-centered thinking)
“생각하라”
[“κατανοήσατε”(카타노에사테)]: 밖을 내다보며 하나님의 성품과 일하심을
배우는 생각 (God-centered thinking).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 연민이나 불안의 생각(염려)에
빠져 있지 말고, 눈을 들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을 '깊이 관찰하고
깨달으라'고 촉구하신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κατανοήσατε”(카타노에사테)(생각하라)는 "까마귀의 생존 방식을 유심히 관찰하여, 하나님이 너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이성적·영적으로 확신하라"는 적극적인 정신
활동을 의미합니다.
-
저는 이 “까마귀를 생각하라”(24절)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어리석은 부자가 ‘(심중에) 생각하였다’(17절)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저는 두 단어를 먼저 헬라어로 찾아서 묵상했습니다:
1. “διελογίζετο”(디엘로기제토): 어리석은 부자의 '닫힌 생각'
(17절)
어원적 의미: '통과하여(dia)' + '계산/논리(logizomai)'가 합쳐진 말로, 자기 안에서 이리저리 재고 따지며 계산하는 것을 뜻합니다.
특징: 이 단어는 주로 자기 내면의 ‘독백’이나 ‘수평적 계산’에 쓰입니다. 17절에서 부자가 "심중에 생각하여(디엘로기제토)"라고 할 때,
그의 사고방식에는 하나님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오직 '나의 곡식',
'나의 곳간', '나의 미래'만을 계산하는
폐쇄적인 사고입니다.
결과: 이 계산의 끝은 결국 탐심과 "내 영혼아 평안히 쉬자"라는 자기 기만으로 이어집니다.
2. “κατανοήσατε”(카타노에사테): 제자들의 '열린 관찰'
(24절)
어원적 의미: '아래로(kata)' + '마음(noeo)'이 합쳐진 말로,
대상을 깊이 있게 주의 깊게 살피고 그 이면의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특징: 이것은 자기 안으로 파고드는 계산이 아니라, 눈을 들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향하는 ‘수직적
관찰’입니다. 예수님은
"까마귀를 생각하라(카타노에사테)"고 하시며, 제자들의 시선을 자기 내면의 불안(염려)에서 하나님의 통치(자연 만물)로 돌리게 하십니다.
결과: 이 관찰의 끝은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얼마나 더 귀하냐"라는 확신과 평강으로 이어집니다(인터넷).
n 이
두 ‘생각’ 사이의 연관성과 영적 의미입니다(인터넷):
1. ‘자기
중심적 생각’
vs ‘하나님 중심적 생각’
어리석은
부자의 생각(17절): 성경은 그가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기를”이라고 기록합니다. 그의 생각은 철저히 '나'에게 갇혀 있었습니다. "내가 내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17-18절). 그의 생각은 탐심과 자기 보존의 도구였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명령(24절): 예수님은 “까마귀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나의 문제와 창고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과 그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2. ‘쌓아둠’의
논리
vs ‘공급’의 논리
부자의 논리:
"까마귀는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24절)라는 말씀은 부자의 행위와 정반대됩니다. 부자는 심고 거두고 창고에 가득 채우는 것에 자신의 생명을
걸었지만, 예수님은 그런 인간적인 방책(창고)이 전혀 없는 까마귀도 하나님이 기르신다는 사실을 대조시키십니다.
연관성: 부자가 자기 심중에서 '창고'를 생각할 때 염려와 탐심이
자랐다면, 제자가 '까마귀'를
생각할 때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평강이 자라납니다.
3. ‘무지’에서
‘깨달음’으로
부자의
생각은 하나님을 배제한 무지함이었습니다. 자기가 자기 생명을 지킬 수 있다는 착각이었죠.
반면, 까마귀를 생각하라는 말씀은 학습을 의미합니다. 자연 만물을 보며 "하나님이 저 미물도 기르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24절)라는 영적 논리를 깨달으라는 초대입니다.
요약하자면: 부자가 자기 안의 '욕심의 계획'을 생각했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밖을 보며 '하나님의 돌보심'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부자의 생각은 죽음으로 끝났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생각하는 자는 염려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됩니다(인터넷).
·
이렇게 까마귀를 기르시는 하나님께서 새보다 더 귀한 우리를
기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 가치를 깨달음으로 염려를 이겨 나아가야 합니다.
1. 가치의
비교:
까마귀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부정하게 여겨지던 새였고(레
11:15), 농경 사회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미물이었습니다. 그런 까마귀도 하나님이 기르신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너희'는 얼마나 더 귀하게
보시겠느냐는 물음입니다.
2. 노력과
공급의 관계:
까마귀는 부자처럼 심지도, 거두지도, 창고(곳간)를 짓지도 않습니다. 즉, 생존을 위한 인간적인
'쌓아둠'이 전혀 없는데도 살아갑니다. 이는 생명이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에 달려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3. 염려의
무익함:
까마귀는 내일 일을 염려하여 오늘 곳간을 짓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까마귀를 보며,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는 법을 배우길 원하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새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부자처럼 곳간을 크게 짓느라 인생을 허비하거나 제자들처럼 무엇을 먹을까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는 바로 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확신하며
오늘을 자유하게 사는 사람입니다(인터넷).
‘믿음이 적은 자들아,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누가복음
12:25-28).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25-28절 말씀을 읽은 후 원어 헬라어로 다시금 본문 말씀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리하였을 때 제일 먼저 관심을 갖게 된 헬라어 단어가 바로
“ὀλιγόπιστοι”(올리고피스토이)(“믿음이 적은 자들아”)입니다.
(a) 이
헬라어 단어는
“적다”는 뜻의 “ὀλίγος”(올리고스)와 “믿음”을 뜻의
“πίστις”(피스티스)가 결합된 단어로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부족하여
염려에 빠진 상태를 의미합니다(인터넷).
(i) 이 신뢰의 결핍은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과 입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는 말씀(30절)을 전적으로 믿는 확신이 없기에 세상적인 걱정에 매여서 염려하는 마음입니다(참고:
인터넷).
·
이 염려하는 마음은 눈 앞에 위협이나 현실적인 결핍(궁핍) 앞에서 마음이 갈려 흔들리는 상태로서 그 좋은 예가 바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오라”고 말씀하셨을 때 물 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며 손을 내미신 사건입니다(마14:26-31).
-
여기서 “의심”(31절)이란 헬라어 단어
“διστάζω”(디스타조)를 직역하면 “두
갈래 길에 서 있다” 또는 “두 마음을 품다”라는 뜻으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주저하다, 망설이다, 흔들리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인터넷).
n 마태복음 14장 31절에서의 영적 의미
이 맥락에서 '의심'은 아예 믿지 않는 '불신'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시선의 분산: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물 위를 걸었으나, 거센 바람(환경)을 보자 마음이 예수님과 폭풍 사이에서 두 갈래로 나뉜 상태를 말합니다.
불안정한 신뢰: 확고한 신뢰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유동적인 마음의 상태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환경에 마음을 빼앗겨 두 마음(디스타조)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보고 "믿음이 작은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인터넷).
n 왜
우리는 그리도 예수님께 집중하지 못하고[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하고(히12:2)]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마음을 쉽께 빼앗기는 것일까요?
“인간이
예수님보다 눈앞의 거센 풍랑(환경)에 먼저 반응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 본능'과 '시각적 한계'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베드로가 처했던 상황을 통해 우리가 왜 마음을 쉽게 빼앗기는지
그 이유를 몇 가지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1. '보이는 것'이 '믿는 것'보다 압도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각은 당장 눈앞에 닥친 위험에 즉각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서
베드로가 바라본 '바람'은 피부로 느껴지는 차가움과 귀를 울리는 소음,
생명을 위협하는 실재였습니다. 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히 11:1)이기에,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보다 보이는
물리적 위협이 우리 뇌에 훨씬 빠르고 강렬한 신호를 보냅니다.
2. '디스타조(두 마음)'의 본성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본
'디스타조'의 의미처럼,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세상을 향한 염려가 공존합니다. 마음이 하나로 모이지 않고 '두 갈래'로 나뉘어 있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더 위험해 보이는 쪽(어려운 환경)으로 시선이 쏠리게 됩니다. 즉,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려 해서가 아니라, 주님과 환경을
동시에 보려다 보니 결국 더 자극적인 환경에 압도당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보다 '나의 계산'이 빠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마주할 때 습관적으로 내가 가진 자원과 경험으로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베드로는 어부였기에 파도가 얼마나 위험한지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자신의 경험적 지식이 주님의 능력을 앞서 나갈 때,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기보다 "이제 죽었구나"라는 자기 결론에 도달하며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4. 믿음의 '근육'이 약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주를 바라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본능이 아니라, 부단한 훈련이 필요한 '영적 근육'과 같습니다. 고난이 닥치면 우리는 본능(두려움)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의식적으로 시선을 고정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마음의 무게중심은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를 꾸짖기 전에 먼저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환경에 마음을 빼앗기는 연약한 존재임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인터넷).
# 시편 103편 15-16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시드는 풀처럼, 우리의 마음과 결단이 환경의 바람(고난)에 쉽게 시드는 존재임을 이미 알고 계시는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체휼)하신다는 말씀(히4:15)에 위로를 받습니다.
-
저는 마태복음14장 3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의심”이란 헬라어 단어
“διστάζω”(디스타조)의 의미를 묵상할 때 야고보서 1장 5-8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그리고
여기 야고보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의심”이란 헬라어 단어와 “두 마음”이란 헬라어 단어가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n 여기서 “의심”이란 헬라어 단어는 “διακρίνω”(디아크리노)로서 문자적으로는 “둘로 나누다” “구별하다”는 뜻을
가집니다. 이는 지적인 불확실성보다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갈등하며 흔들리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계산이나 세상의 방법을 의지하려 할 때 나타나는 분열된 의지를 뜻합니다(인터넷).
n 여기서 “두 마음”이란 헬라어 단어는 “δίψυχος”(딥쉬코스)로서 직역하면 “두 영혼을 가진 자”(double-souled)라는 뜻인데 한 인격 안에 두 개의 독립된 의지가 싸우고 있는 “영적 분열”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듯 보이나 실제로는 세상을 향한 욕심을
버리지 못해 모든 행위가 불안정하고 일관성이 없는 상태를 묘사합니다(인터넷).
# 그러면 마태복음 14장 3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의심”이란 헬라어 단어 “διστάζω”(디스타조)와 야고보서 1장 6-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의심"이란 헬라어 단어는 “διακρίνω”(디아크리노)와 두 마음”이란 헬라어 단어는 “δίψυχος”(딥쉬코스)와의 연관성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무엇일까요?
“세
단어의 연관성과 영적 교훈
이
단어들을 연결하면 '의심의 심화 과정'이 보입니다.
현상 (디스타조): 눈앞의 위협 앞에 믿음과 두려움 사이에서 머뭇거립니다. (베드로의 순간적 흔들림)
작용 (디아크리노): 그 머뭇거림 속에서 '하나님인가,
세상인가'를 저울질하며 내면이 분열됩니다. (야고보가 경고하는 기도의 태도)
고착 (딥쉬코스): 결국 하나님께도, 세상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두 마음'을 가진 불안정한 존재가 됩니다.
예수님과
야고보는 공통적으로 우리에게 '단일한 마음(Single-mindedness)'을 요구합니다. 베드로가
바람을 보지 않고 주님만 보았어야 했듯, 야고보는 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마음을 정결하게 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고정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인터넷).
(ii)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부족하여 염려에 빠진 믿음이 적은 자들은 “의심”(마14:31)할 뿐만 아니라 “염려”합니다(눅12:25). 여기서
“염려”라는 헬라어 단어 “μεριμνῶν”(메림논)은 “나누다”(메리조, μερίζω)와 “마음”(누스, νοῦς)'의 합성어에서 유래했는데 그 의미는 "마음이 여러 갈래로 찢어지는 상태"를 뜻합니다. 걱정거리에
온 신경이 분산되어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를 아주 생생하게 묘사한 단어입니다(인터넷).
·
누가복음 12장 25절 문맥에서 예수님은 "염려함(메림논)으로 그 키(또는 목숨)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라고 물으셨는데 여기서의 염려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부질없이 애쓰는 정신적 고통을 의미합니다. 결국 “염려”는 내 힘으로 상황을 바꿔보려 애쓰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무익한 마음의 고통을 뜻합니다(인터넷).
-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25절)는 말씀은 인간의
염려가 가진 무력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키”와 “한 자”로 번역된 단어들을 통해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1. 수명(Life
Span)의 연장 (시간적 의미)
여기서 '키'에 해당하는 헬라어 '헬리키아(ἡλικία)'는 신체적인 키뿐만
아니라 '나이'나 '수명'을 뜻하기도 합니다.
'한 자'로 번역된 '페퀴스(πῆχυς)'는 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약 45~50cm)를 말합니다.
의미: 사람이 아무리 밤잠을 설쳐가며 염려한다고 해도, 자기 수명을 단 1분(한 뼘의 시간)이라도 연장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강조입니다.
2. 신체적
키(Height)의 성장 (공간적 의미)
말
그대로 신체적인 키를 의미할 경우입니다.
의미: 사람이 고민한다고 해서 갑자기 키를 50cm(한 자)나
쑥 키울 수 없듯이, 염려라는 정신적 활동은 물리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데 아무런 효력이 없음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3. "지극히 작은 것" (26절과의 연결)
예수님은
이어지는
26절에서 이 일을 "가장 작은 일(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부르십니다. 인간에게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큰일이지만,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편에서는 아주 작은 일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염려는 네 인생의 문제(수명이나 건강 등)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무익한 소모일 뿐이니, 그 주권을 가진 하나님께
맡기라"는 강력한 메시지입니다(인터넷).
(2)
그러면 예수님께서 “믿음이 작은 자들”(눅12:28)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바로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27절)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가 이미 묵상한 “까마귀를
생각하라”(24절)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a) 여기서 “생각하라”(24절)과 “생각하여 보라”(27절)는 헬라어 단어
“κατανοήσατε”(카타노에사테)는 “아래로, 철저히”라는 뜻의 “κατά”(카타)와 “이해하다, 마음을 쓰다”라는 뜻의
“νοέω”(노에오)가 결합된 단어로서 단순히 "한번 쳐다보라"는 뜻을 넘어 다음과 같은 아주 구체적이고 강렬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인터넷):
1. 철저하고
집중적인 관찰:
건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그 이면에 담긴 원리와 본질을
파악하라는 뜻입니다(영어의 'Consider'보다 훨씬 강한
'Observe closely'에 가깝습니다).
2. 영적
통찰력의 발휘:
시각적인 관찰을 넘어, 까마귀와 백합화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마음(지성)으로 깨달으라는 권고입니다. 즉, "자연을
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결론을 내리라"는 명령입니다.
3. 마음을
고정함:
이 단어는 “주목하다”, “마음을 두다”라는 의미도 있어, 염려에 분산되었던 마음을 빼앗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고정시키라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4. 강조된
명령:
헬라어 문법상(부정과거 명령형) 이는 지금
당장, 그리고 단호하게 수행해야 할 결단을 촉구하는 표현입니다. "이제 그만 걱정하고, 이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라!"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걱정에 뺏긴 그 눈으로 까마귀와 백합화를 아주 자세히 뜯어보며,
너희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다시 발견하라"고 강력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인터넷).
(i) 왜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동식물 중 “까마귀”와 “백합화”를 선택하셔서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데 당시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관통하는 깊은 의도가 있습니다.
이는 “가장 낮은 것”과 “가장 덧없는 것”조차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극대화하여 보여주기 위함입니다(인터넷):
1. 왜
“까마귀”인가요?
(가장 가치 없고 부정한 존재)
율법적 부정함: 유대인들에게 까마귀는 레위기 11장에서 규정한 “부정한 새”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외면받고 영적으로도 가치 없게 여겨지는 존재조차
하나님은 잊지 않고 먹이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생존의 상징: 까마귀는 비둘기처럼 귀엽거나 길들여진 새가 아닙니다.
거칠고 소외된 들짐승 같은 존재도 챙기시는 하나님이시라면, “하물며”
당신의 자녀인 너희를 굶기시겠느냐는 논리입니다.
2. 왜
“백합화”인가요?
(가장 흔하고 덧없는 존재)
화려함과 허무함의 대비: 여기서 백합화는 정원에서 가꾼 꽃이 아니라 들판에 흔히 핀 “야생화”를 뜻합니다.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 불꽃을 살리는 땔감으로 쓰일 만큼
“하찮고 수명이 짧은 존재”입니다.
솔로몬과의 비교: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솔로몬의 인위적인 의복보다, 하나님이 입히신 들꽃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더 뛰어나다는 점을 대조합니다. 이를 통해 인간의 수고(길쌈, 노력)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탁월함을 보여줍니다.
3. 요약하자면: '극단적 대조'를 통한 안심
까마귀(부정한 새)도 먹이신다. 하물며
너희(자녀)일까 보냐?
들풀(땔감)도 입히신다, 하물며 너희(영원한 존재)일까 보냐?
결국 가장 가치 없는 것(까마귀)과 가장 금방 사라질 것(들꽃)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보며,
"너희는 이들보다 훨씬 귀하다"는 확신을 주시려는 것입니다(인터넷).
·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가 이미 묵상한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는 누가복움 12장 7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즉, 누가복음
12장 7절(참새)과 24절(까마귀), 27절(백합화)은 모두 “하물며”(How
much more)(24, 28절)라는 강력한 신적 논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들을 통해 일관되게 강조하시는 핵심은
'가치의 비교'입니다(인터넷):
1.
존재의 가치: 참새 vs 까마귀 vs 너희
참새 (7절): 당시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아주 작은 동전)에 팔릴 만큼 흔하고 값싼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작은 생명 하나도 잊지 않으십니다.
까마귀 (24절): 참새보다 더 부정하고 외면받는 존재입니다.
결론: 예수님은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저 까마귀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하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우리의 가치가 그들의 생존권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하나님이 방치하실 리가 없다는 논리입니다.
2. 돌보심의
깊이:
머리카락 vs 먹이심 vs 입히심
7절 (참새와 머리카락): 하나님은 우리의 세밀한 부분(머리카락)까지 다 세실 정도로 우리를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24, 27절 (까마귀와 백합화): 하나님은 우리의 실제적인 필요(먹고
입는 것)를 책임지시는 공급자이심을 보여줍니다.
3. "두려워하지 말라"와 "염려하지 말라"
7절의 결론은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존재의 위협에 대한 안심)
22~31절의 결론은
"염려하지 말라"입니다. (생활의 결핍에 대한 확신)
결국, 참새-까마귀-백합화로 이어지는 이 비유의 라인은
"하나님 눈에 당신의 자녀인 우리가 얼마나 압도적으로 소중한 존재인가"를 일깨워 줍니다. 믿음이
적은 자(올리고피스토이)가 되는 이유는 바로 이 '나의 소중함'과 '하나님의 섬세함'을 잊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인터넷).
-
“믿음이 적은 자”[“ὀλιγόπιστοι”(올리고피스토이)](28절) 되는 원인을 '나의 소중함'과 '하나님의 섬세함'이라는 관점에서 풀면,
이는 단순한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와 시선의 문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나의 소중함'을 잊었을 때 (존재 가치의 망각)
사람이
염려에 빠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이 '고아'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비교의
논리:
예수님은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들풀과
까마귀도 돌보시는데, 그보다 훨씬 귀한 '자녀'인 너희를 방치하시겠냐는 것입니다.
망각의
결과: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참새보다 귀하고, 머리카락까지 세신 바 된 존재) 잊어버리면, 나는 내
인생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존재가 됩니다. 이때부터 세상의 풍파는 '훈련'이 아니라
'생존의 위협'이 되고, 자연스럽게 믿음은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2. '하나님의 섬세함'을 잊었을 때 (공급자의 성품 망각)
믿음이
적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알지만, 그분이 '내 삶의 디테일'까지 신경 쓰신다는 것을 신뢰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섬세한
돌보심:
백합화의 무늬를 입히시고, 까마귀의 배고픔을 아시는 하나님은 '큰 그림'만 그리시는 분이 아니라 아주 세밀한 분이십니다.
망각의
결과:
하나님의 섬세함을 잊으면, "하나님은 큰일(구원, 천국)은 하시겠지만, 내 당장의 월세나 내일의 먹거리 같은 '작은 일'에는
관심 없으실 거야"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갈라지는 '메림나오(염려)'의 시작이며, 예수님이 지적하신 '적은 믿음'의 핵심입니다.
3. 결론: “믿음이 적은 자”(28절)는 '시선'의
결핍입니다.
결국
믿음이 작아졌다는 것은 내 시선이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에게서 '결핍된 환경'으로 옮겨갔음을 의미합니다.
까마귀를
보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카타노에오(깊이 관찰) 하지 않기
때문에, 나의 가치를 세상의 기준(소유의 넉넉함)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마음이 요동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이들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라고 물으시며,
"네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네 아버지가 얼마나 세심한지 다시 보라"고 권면하시는 것입니다(인터넷).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생존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기초적인 요구'를
다 보고 알고 계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누가복음
12:29-31).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29-31절 말씀을 묵상할 때 제일 먼저 헬라어 성경으로 읽을 때 29절을 시작하는 “Καὶ”(카이)라는 접속사의 의미가 궁금해졌습니다.
(a) 한국어
성경 개역개정과 개역한글에는 이 “Καὶ”(카이)라는 단어가 번역이 되있지 않지만 현대인의 성경과 공동번역은 “그러니”라고 번역을 했고 새번역은 “그러므로”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i) 제가 이 단어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개역개정으로
29절 말씀을 읽었을 때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앞서 말씀하신 내용과 연관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어쩌면 원어 헬라어 성경에는 예수님의 앞서 하신 말씀과 29절부터 하시는 말씀과 연결시켜주는 접속사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제가 헬라어 성경을 찾아 보니까 “Καὶ”(카이)라는 접속사가 있길래 인공지능(AI)에다가 “눅12:29에서 말씀하고 있는 Καὶ라는
접속사의 의미는?”이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얻은 답변입니다:
“누가복음 12장 29절에 쓰인 헬라어 접속사 '카이(Καὶ)'는 문맥상 앞서 언급된 내용과
뒤따르는 교훈을 강하게 연결하며, 그 의미를 '심화 및 확장'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구절에서 '카이'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문법적 의미를
지닙니다.
1. 연결과
강조의 의미
("그리고 또한")
문맥적 연결: 앞서 공중의 새와 백합화를 기르시는 하나님의 돌보심(눅 12:24-28)에 이어, "그리고(Καὶ) 너희는..."이라며 결론적인 교훈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합니다.
강조: 단순히 문장을 잇는 수준을 넘어, 하나님이 미물도 입히시니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는 논리를 바탕으로 성도가 가져야 할 마땅한 자세를 강조합니다.
2. 금지의
대조적 강조
부정적 상관 관계: 눅 12:29은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Καὶ μὴ ζητεῖτε)..."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카이'는 앞의 긍정적 돌보심과 대조하여 "그렇기에 너희는 세상 사람들처럼 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부여합니다.
3. '카이'의 일반적 기능과 이 구절에서의 특수성
순접적 기능: 헬라어에서 '카이'는 'and'의 의미로 가장 많이 쓰이지만, 이 구절에서는 앞선 비유(백합화, 새)에서 도출된 필연적인 결과를 도입하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종속적 의미: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전제되었을 때 비로소
"먹고 마시는 것을 구하지 않는 상태"로 나아갈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요약하자면, 눅 12:29의 Καὶ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공급하심을 근거로 삼아, 제자들이 세상적인 염려에서 벗어나야 함을 선포하는 '결정적 전환과 확신'의 접속사라 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2)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신 공급하심을 확신하지
못하기에 세상적인 염려를 한다는 것입니다.
(a)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이미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1)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2절)
(직설적 명령), (2)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25절) (반문 형식의 강조), (3)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26절)
(염려의 무익함 강조).
(i) 우리가 이미 묵상했듯이 여기서 사용된 ‘염려하다’라는 헬라어 단어는 “μεριμνάω”(메림나오)로서 마음이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성경적 의미는 단순히 미래를 준비하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흔들려 불안해하고 마음이 분산된 상태를 말합니다.
·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지속적으로 염려하는 습관을 멈추라(22절), 염려를 계속하고 있는 상태에서 벗어나라(25절),
현재 처해 있는 염려의 상태의 무익함을 강조하셨습니다(26절)(인터넷).
(b)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29절에서는 ‘염려하지 말라’[예수님께서는 이 단어를 누가복음 12장 22, 25, 26절에서만 사용하신 것이 아니라 11절에서도 사용하셨음(도합 4번임)]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근심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입니다.
(i) 여기서 “근심하지
말라”는 헬라어 단어는 “μετεωρίζω”(메테오리조)로서 앞서 언급된
22, 25, 26절의 “μεριμνάω”(메림나오)(염려)와는 또 다른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인터넷):
1. “μετεωρίζω”(메테오리조)(근심하다)라는 단어의 의미
어원적 의미: '높이 올리다'라는 뜻의 '메테오로스(μετέωρος)'에서 유래했습니다. 현대
영어 단어인 'Meteor(유성, 별똥별)'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비유적 의미: 배가 바다 위에서 파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떠 있는 상태, 혹은 마음이 공중에 붕 떠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2. 문맥적
해석
("마음을 띄워 두지 말라")
이
단어는 당시 천문학이나 기상학적 현상을 설명할 때도 쓰였는데,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뉘앙스를
가집니다.
불안과
초조:
내일 일을 알 수 없어 마음이 허공에 뜬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심리 상태입니다.
지나친
기대나 걱정:
세상적인 욕심 때문에 마음이 들떠 있거나, 반대로 닥치지 않은 일에 대해 과도하게
걱정하며 평안을 잃은 상태를 금지하시는 것입니다.
3. “μεριμνάω”(메림나오)(염려)와“μετεωρίζω”(메테오리조)(근심하다)의 차
“μεριμνάω”(메림나오)(염려)(22, 25,
26절): 마음이 여러 갈래로 '나뉘는 것'(분열)에 초점이 있습니다.
“μετεωρίζω”(메테오리조)(근심하다)(29절): 마음이 정착하지 못하고 '붕 떠서 흔들리는 것'(불안정)에 초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음이 세상 염려로 갈라지지도 말고(메림나오), 닥칠 일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지도 말라(메테오리조)고 경계하신 것입니다(인터넷).
(3)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하신 공급하심을 확신하지 못하기에 무엇을
먹고 마실까 염려 가운데 구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애써 구하는 것”입니다.
(a)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그러니 너희는 먹고 마시는 것을 구하지 말고 이런 일로 걱정하지 말아라. 이런 것들은 모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애써 구하는 것이다”(현대인의 성경)](눅12:29-30).
(i)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구하다’라는 헬라어 단어 “ἐπιζητοῦσιν”(에피제투신)(30절)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
누가복음 12장 30절에 사용된 “ἐπιζητοῦσιν”(에피제투신)은 “찾다”, “구하다”라는 뜻의 기본 동사
“ζητέω”(제테오)에 접두어 “ἐπί”(에피)가 붙은 형태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무엇을 찾는 행위를 넘어 다음과 같은 강한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인터넷):
1. "간절히, 필사적으로 구하다"
강조의 의미: 접두어 “ἐπί”(에피)는 방향성과 강도를 더해줍니다. 따라서 “끈덕지게 매달리다”
“열성을 다해 추구하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삶의 목적: 세상 사람들이 의식주 문제(무엇을 먹고 마실까)를 해결하는
것을 인생의 최우선 순위이자 전부로 삼고 전력투구하는 모습을 묘사합니다.
2. 문맥적
의미:
"이방인들의 태도"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ἐπιζητοῦσιν)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하늘 아버지를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생존을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물질적인 가치에 집착하는 모습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백성들(이방인)'과 '제자(하나님 자녀)'의 결정적인 차이를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가'에 두셨습니다. 그들이 물질적 가치에 집착(에피제테오)할 수밖에 없는 심리적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a. '하늘 아버지'의 부재
이방인들에게는
삶을 책임져 줄 절대적인 보호자, 즉 '아버님'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나를
돌보는 상위 존재가 없다고 믿기 때문에, 생존의 모든 책임은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b.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
삶이
전적으로 내 노력과 비축한 재물에 달려 있다고 믿으면, 자연스럽게 '강박적 집착'이 생깁니다.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생존이 위협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에, 29절에서 금지하신 '메테오리조(불안해하며 마음이 붕 뜸)'와
'에피제테오(집요하게 구함)'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c. 하나님은 '너희 아버지'이시다(30절 하반절)
예수님은
이방인들의 집착을 언급하신 직후 곧바로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고 선포하십니다.
이방인과
신자의 차이는
'필요한 것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아니라, '그 필요를 미리 알고 계시는 아버지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임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이방인들의 물질 집착은 단순한 탐욕이 아니라 '영적 고아 상태'에서 오는 생존 본능입니다. 반면 제자들은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신뢰하기에, 그 생존 에너지를 하나님의 나라(31절)를 구하는 데로 전환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은 사람들입니다.
3. “ζητέω”(제테오)(29절) vs “ἐπιζητέω”(에피제테오)(30절)
“ἐπιζητέω”(에피제테오)(30절): 이방인들이 세상 것들에 대해 보여주는 탐욕스럽고 집착적인 구함입니다.
“ζητέω”(제테오)(31절):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ζητεῖτε)."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본질적인 방향을 말할 때는 기본 동사인
'제테오'를 사용하여 대조를 이룹니다. (물론
'제테오' 역시 간절함을 포함하지만, 여기서는
추구하는 대상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이 '제테오(ζητέω)(구하다)라는 헬라어 단어가 오늘 본문
29절과 31절에 “ζητεῖτε”(제테이테)라는 똑같은 형태(현재 명령형)가 쓰였졌는데 그 의미는
"먹고사는 것에 대한 집착을 멈추고(29절), 그 열정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지속적으로 구하라(31절)"는 강한 대조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요약하자면, “ἐπιζητοῦσιν”(에피제투신)(“간절히, 필사적으로 구하다”)은 하나님 없는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에 매몰되어 그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갈구하는 상태를 뜻합니다(인터넷).
(4)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신다는 말씀(30절)을 믿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더하실 것입니다(31절).
(a) 여기서
저는 세 헬라어 단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i) 첫째로,
‘알고 계시다’라는 헬라어 단어 “οἶδεν”(오이덴)입니다(30절).
·
“하나님의 완전한 통찰과 세심한 돌보심을 동시에 보여주는
매우 위로가 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1. 직관적이고
완전한 지식
어원: '보다'라는 뜻의 '에이도(εἴδω)'의 완료 형태에서 유래했습니다. 헬라어에서 '오이다'는 학습을 통해 점진적으로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보아서 이미 알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의미: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드리기 전에도 우리의 형편과 결핍을 직접 보고 다 알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2. '안다'는 것의 신학적 무게
단순히
지식적으로
'정보'를 알고 있다는 뜻을 넘어 다음과 같은 뉘앙스가 있습니다.
공감과
배려:
아버지가 자녀의 배고픔을 아는 것처럼, 우리의 고통과 필요를 자신의 일처럼 깊이
인지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충분한
근거: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는 사실은, 제자들이 세상 사람들처럼 집요하게 구걸(에피제테오)하거나 불안해(메테오리조)하지 않아도 될 가장 확실한 근거가 됩니다.
3. 현재적이고
확정적인 상태
시제: 문법적으로 완료 시제지만 현재의 의미로 쓰입니다.
즉, ‘과거에도 보셨고, 지금도
여전히 속속들이 알고 계신 상태’를 강조합니다.
결론적
의미:
예수님은 이 단어를 통해 '고아의 영성'과
'자녀의 영성'을 가르고 계십니다.
고아: 아버지가 없기에 내 형편을 알릴 대상이 없고, 스스로 생존을 증명해야 합니다.
자녀: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오이덴(다 보고 알고 계신)'
아버지가 계시기에, 먹고사는 문제보다 더 높은 가치인 '하나님 나라'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이
"아심"이 전제되었기에 31절에서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명령이
무리한 요구가 아닌, 신뢰에 기반한 권유가 되는 것입니다”(인터넷).
(ii) 둘째로,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필요한 것)’라는 헬라어 단어 “χρῄζετε”(크레제태)입니다(30절).
·
”이 단어의 핵심 의미와 뉘앙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절실히
필요하다’
(Necessity)
어원: '사용하다, 필요로 하다'라는 뜻의 '크라오마이'에서 유래했습니다.
의미: 사치품이나 있으면 좋은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음식, 옷,
거처와 같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기초적인 요구'를 가리킵니다.
2. 하나님의 '오이덴(아심)'과 연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너희에게 이런 것들이 '크레제테(절실히 필요한
줄)'를 이미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인 상태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한계와 물질적인 결핍까지도 충분히 인정하고 공감하고
계심을 보여줍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라고 무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3. 염려의
정당성(?)을 잠재우는 단어
우리는
보통 ‘필요하니까 염려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단어를 통해 ‘너희에게 그게 정말 필요하다(크레제테)는 걸 아버지가 이미 다 알고 계시니(오이덴), 너희는
더 이상 그 필요에 매여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를 완성하십니다.
정리하자면
'크레제테'는 우리가 가진 생존의 욕구와 필요가 정당함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 하나님 아버지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쓰였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결핍(크레제테)을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를 소진하는 대신, 그
필요를 아시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나라(31절)를 구하는 우선순위의
전환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인터넷).
(iii) 셋째로, “πλὴν”(플렌)(다만)이라는 헬라어 단어입니다(31절).
·
이 헬라어 단어는 앞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논의를
한곳으로 모아
'우선순위의 대전환'을 선포하는 결정적인 접속사입니다. 이 단어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인터넷):
1. 강한
대조와 전환
("오직", "오히려",
"그것보다도")
의미: 앞 절(30절)에서 언급한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방식'과 제자들이 취해야 할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강력하게 대조합니다.
뉘앙스: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만, 너희만큼은(but
rather) 달라야 한다"는 단절과 전환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 '제외'와 '집중'의 의미 ("~은 제쳐두고")
어원적 배경: 이 단어는 '더 많은'이라는 뜻의 '플레온'에서 유래했지만, 문맥상으로는
"다른 모든 것은 일단 젖혀두고 가장 중요한 이것에 집중하라"는
의미로 쓰입니다.
해석: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염려를 마음의 중심에서 밀어내고(제외), 그 자리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다 놓으라는 강력한
권고입니다.
3. 문맥상의
역할:
"삶의 중심 이동"
29-30절: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하는 '자기 중심적' 생존의 문제.
31절 (πλὴν): 하나님의 통치와 뜻을 구하는
'하나님 중심적' 사명의 문제.
예수님은 '플렌'이라는 단어 한 마디로 제자들의 시선을 땅(생존)에서 하늘(사명)로 단번에 끌어올리십니다.
요약하자면, '플렌'은 "너희는 이방인과 다르니,
이제 그런 염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오직(rather) 이것에만 전념하라"는 단호한 명령의 전환점입니다(인터넷).
(b) 그러면
우리가 오직 전념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여라”(눅12:31,
현대인의 성경)인데 그 의미는 무엇입니까? [참고: (마6: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
(i) 여기서 먼저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킵니다(다국어성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현대인의 성경)“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낸다면 벌써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눅11:20; 참고: 마
12:28). 이 말씀을 보면 약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셨을 때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임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했다는 것을 과거형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7장 2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미래형으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9, 11절을 보면 성경은 “…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9절), “…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11절)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22장
18절을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하시고”[(현대인의 성경) “나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올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과거형과 미래형으로 둘 다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Already) 임했다는 것과 동시에 “아직도”(Not yet) 임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요일5:13)과 또한 장차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롬8:23, 빌3:12-14)과 더불어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빌2:12), 이렇게
과거, 현재, 미래형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과 유사합니다[구원의 삼중성(인터넷)]. 즉,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도 과거, 현재, 미래형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안에 임했을 뿐만 아니라 장차
임할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이미”와
“아직도” 사이에 살고 있는 우리는 지금 현재 어떻게살아가야 하느냐 질문할 때 마태복음 6장
33절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신
주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며 또한 성령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입니다.
1. 왕이신
주님의 통치
(Lordship)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의 개념보다 '통치(Basileia)'의 개념이 강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내 삶의 보좌를 주님께 내어드리고,
내 뜻이 아닌 주님의 다스림이 내 가정, 직장, 그리고 내 마음속에 임하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2. 말씀에
대한 복종
(Obedience)
왕의
통치는
'말씀'을 통해 나타납니다. 누가복음 12장
31절에서 '구하라'는 명령(제테이테)은 현재 명령형으로, '지속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단순히
입술로만 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선택지에서 하나님의 법과 말씀의 가치를 선택하며 사는 태도입니다.
3. 성령님의
능력으로 사는 삶 (Empowerment)
내
의지만으로는 주님의 통치에 온전히 복종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의 저자인 누가는 사도행전과 연결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먹고사는 염려(메림나오)를 이기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쫓을 수 있는 힘은 오직 성령님으로부터 나옵니다.
결론적
의미:
결국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삶'이란,
"나의 생존(먹고사는 문제)은 내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 있음을 인정하고, 나는 오직 오늘 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뜻과 사명에
전념하는 삶"을 말합니다(인터넷).
·
하나님의 의를 구하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의를
행한다’는 의미입니다(요일2:29). 의를 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왕이신 의로우신
예수님을 구하는 것입니다(마 6:33). 즉, 의를 행한다는
것은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요일2:1) 행하시는 대로 우리도
행하는 것입니다(6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자들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대로 우리고 행해야 하는데(6절)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7-11절). 예수님의 이중계명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먼저
의를 행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중 계명 중 첫 번째 계명대로 주 하나님을 우리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요한일서의 관점으로 말한다면 요한일서
2장 15-17절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는 의미는 다 지나가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인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의를 행하는 것이란 첫째로 다 지나가는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대로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 뜻을 행하면서 사는 것입니다(2:15-17)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살전4:3)]. 그 다음에 의를 행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이중계명 중 두 번째 계명대로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요한일서의 관점으로 말한다면 요한일서
2장 3-11절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인데 그 말씀을 요약한다면 형제를 사랑하고 미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계명의 순종하여 그 형제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습니다(5절). 그리고 그는 빛 가운데 거하여[“빛
가운데 살기 때문에”(현대인의 성경)] 자기 속에 거리낄 만한 것이
없습니다(10절, 현대인의 성경).
(c)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서 살면(눅12:31; 마6:33) 예수님께서는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눅12:31)고 약속하셨습니다.
(i) 여기서 "더하시리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προστιθήσεται”(프로스티데세타이)입니다. 이 단어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시는 아주 풍성하고 넉넉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인터넷):
1. 단어의
구성과 의미
어원: '~곁에(πρός)'와 '두다, 놓다(τίθημι)'의 합성어인 '프로스티데미'에서 왔습니다.
의미: 원래 있던 것에 '추가로 덧붙여 주다', 혹은
'덤으로 얹어 주다'라는 뜻입니다.
2. "부록" 또는 "보너스"의 개념
우리는
먹고사는 문제(이 모든 것)를 인생의 '본론'이라고 생각하며 매달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본론'이고,
우리가 염려하는 의식주 문제는 그 본론에 딸려 오는 '부록'이나 '덤(Bonus)'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왕이신 주님의
통치를 구하며 살 때, 주님은 우리 삶에 필요한 것들을 마치 덤을 얹어주는 상인처럼 기꺼이 더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3. 수동태의
의미
(하나님의 주권)
이
단어는 헬라어 문법상 미래 수동태입니다.
우리가
애써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집중하고 있을 때 하나님에 의해(by
God) 우리 삶에 선물처럼 주어지는 결과임을 강조합니다.
정리하자면, 예수님은 우리의 시선을 '생존'에서 '사명'으로 옮기라고 도전하십니다. "너희가 나의 일(하나님 나라)을 우선하면, 나는 너희의 일(먹고사는 문제)을 덤으로 책임지겠다"는 거룩한
계약의 말씀입니다(인터넷).
·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삶의 태도를 세 가지로 요약하여 제안해
드립니다(인터넷):
1. 마음의
방향을 수정하십시오 (Stop & Shift)
요약: 세상 사람들처럼 먹고사는 문제에 집착(에피제테오)하거나,
내일 일을 몰라 마음이 공중에 뜬 것처럼 불안(메테오리조)해하는 습관을 멈추어야 합니다.
적용: 염려가 몰려올 때 "이건 하나님 없는 이방인들의 방식이다"라고 선포하십시오. 내가 내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내 형편을 다 보시고 아시는(오이덴)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2. 우선순위를
단호하게 재정립하십시오 (The 'But Rather' Life)
요약:
"오직(플렌)"이라는 단어처럼,
삶의 우선순위를 '생존'에서
'사명'으로 옮겨야 합니다.
적용: 매일 아침 "오늘 어떻게 살아남을까?"라는 질문 대신, "오늘 내 삶에서 주님의 다스림(통치)이 나타나려면 내가 무엇에 순종해야 할까?"를 먼저 질문하십시오. 내 생각과 계획보다 주님의 말씀(하나님 나라)을 앞세우는
것이 '구하는(제테오)' 삶의
시작입니다.
3. '덤'으로 주시는 은혜를 신뢰하며 사십시오 (Trust the Bonus)
요약: 내가 하나님의 일을 우선할 때, 하나님께서 내 삶의 필요를 수동태적 은혜(프로스티데미)로 채워주실 것을 믿어야 합니다.
적용: 필요한 것(크레제테)이 생길 때마다 그것을 얻으려 발버둥
치기보다, 먼저 하나님 앞에 머무르십시오. "하나님, 제게 이것이 필요한 것을 아시지요? 저는 오늘 주님의 나라를 구하는 일에 집중하겠습니다"라고 맡겨 드리는 배짱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인터넷).
의식주 문제로 마음이 흔들려서
미래를 두려워하는 상태에 빠지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누가복음 12:32).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32절 말씀을 먼저 헬라어 성경으로 읽을 때에 “무서워
말라”[“Μὴ φοβοῦ”(메 포부)]라고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의 궁극적인 의미는 “두려워하는 것을 이젠 그만해라” 혹은 “계속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인터넷).
(a) 이 “무서워 말라”[“Μὴ φοβοῦ”(메 포부)](32절)는 말씀이 우리가 이미 묵상한 4절과
7절에도 나옵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μὴ φοβηθῆτε”(메 포베데테)](4절),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μὴ φοβεῖσθε”(메 포베이스테)]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7절).
(i) 4절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박해와
죽음의 위협 앞에서 “겁내지 말라”, “두려움에 압도당하지 마라”는 의미이고, 7절에서”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은 우리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고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알기에,
일상 속에서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두려워하거나 불안에 빠지지 말라는 의미이고, 오늘
본문 32절에서 “무서워 말라”는 말씀은 까마귀와 백합화를 돌보시는 하나님이 제자들의 필요를 채우실 것이니,
경제적 결핍 때문에 무서워하며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말라[“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29절)]는 의미입니다(인터넷).
·
여기서 저는 예수님의 “근심하지도 말라”(29절)는 말씀과 “무서워 말라”(32절)는 말씀의 연관성이 무엇인가 궁금해졌습니다. 그 연관성이란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의식주 문제로 마음이 흔들리면(29절), 결국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하는 상태(32절)에 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참고: 인터넷).
(b) 만일
우리가 의식주 문제로 마음이 흔들려서(29절), 결국 우리는
미래를 두려워하는 상태(32절)에 빠지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i) 의식주에 대한 근심이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이어질 때,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2장에서 그 고리를 끊어낼 수 있는
두 가지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십니다(인터넷):
1. 나
자신의 근심의 상태를 인정하고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29-30절). ‘근심’에서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시선을 옮겨야 합니다(30절). 하나님의 돌보심을 신뢰해야 합니다(시선의 전환).
29절의 '근심(메테오리조)'은 '마음이 허공에 떠서 갈팡질팡하는 상태'입니다. 내가 나를 책임져야 한다는 중압감이 마음을 띄워 올리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방법:
"내가 나를 먹여 살린다"는 생각에서 "아버지가 내 필요를 이미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불안이 엄습할 때 내 필요를 가장 잘 아시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안은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고립감에서 옵니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을 '창조주'를 넘어 '너희 아버지'라고 부르십니다. 공중의
까마귀와 들의 백합화를 보며(24, 27절), 그들을 먹이시는 분이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상기하며 관계의 확신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까마귀와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시며, 심지도 거두지 않는 미물조차 먹이시는 하나님이 그보다 훨씬 귀한 자녀인 당신을 반드시 돌보실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십니다. 염려는 키를 한 자도 키울 수 없음을 지적하며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할 것을 권하십니다.
2. '더 큰 보장'을 바라보며 ‘먼저’ 해야 할 우선순위를 재설정해야 합니다(31-32절).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구해야 합니다(목적의전환).
작은 것(의식주)에 매몰되면 마음이 좁아지지만, 큰 것(하나님 나라)을 바라보면 여유가 생깁니다. 예수님은 "그의 나라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불안은 '나'에게 집중할 때 커지지만, 사명에 집중할 때 작아집니다.
방법: '생존' 자체가 목적이 되면 평생 두렵지만, '하나님의
다스림(나라)'을 목적으로 삼으면 생존은 하나님이 덤으로 주시는
'부수적인 것'이 됩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고 있는가?"에 집중할 때 미래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사라집니다.
우리가 오늘 우리가 처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통치(평강, 정의, 사랑)가 이루어지기를 먼저 구할 때,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는 우리가 구할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이 채워주실 '결과'임을 믿고 삶의 목적을 다시 세워야 합니다.
(2)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32절 말씀을 묵상할 때에 왜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가리켜 “적은 무리여”[“작은 양떼들아”(현대인의 성경)](눅12:32)라고 말씀하셨는지 궁금해졌습니다.
(a) 여기서 “적은 무리여”란 말씀은 헬라어로 “μικρὸν
ποίμνιον”(미크론 포이므니온)인데 “μικρὸν”(미크론)은 '작은', '적은'을 뜻합니다. 이는 단순히
숫자가 적다는 의미를 넘어,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잘것없고 무력하며 연약한 상태를 암시합니다. 그리고 “ποίμνιον”(포이므니온) '양 떼'를 뜻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단어 자체가 이미 '작은 양 떼'라는 의미를 담은 지소사(diminutive) 형태인데, 그 앞에 '미크론(작은)'을 한 번 더 붙여서 극도의 연약함과 소중함을 동시에 강조하고 있습니다(인터넷).
(i) 당시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리새인이나 로마 권력에 비해
사회적·경제적으로 힘이 없는 소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호칭을 통해 제자들이 세상에서 느끼는 위축감과 소외감을 정확히 알아주셨습니다. "너희는 세상 눈에 작아 보이지? 나도 안다"는 공감의 표현입니다(인터넷).
1. 목자의
절대적 보호
(소속감 부여)
'양 떼'라는 표현은 반드시 '목자'를 전제로 합니다. 양은
스스로를 보호할 능력이 전혀 없는 짐승입니다. 따라서 '적은 무리'라는 말은
"너희는 작고 약하지만, 내가 너희의 목자이기에 안전하다"는 강력한 보호의 약속을 내포합니다.
2. 반전의
정체성
(상속자로서의 선포)
이
구절의 놀라운 점은 '작은 양 떼'라고 부르신 직후에
'하나님 나라'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 큰 무리(강한 자)가 나라를 차지함.
하늘의 기준: 작고 약한 양 떼(신뢰하는 자)가 나라를 상속받음.
예수님은
제자들이 비록 현실은 연약한 양 떼일지라도, 신분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임을 선포하시며 두려움을 깨뜨리십니다.
3. 결론적
메시지
"미크론 포이므니온"(“적은 무리여”)은 제자들에게
"너희의 작음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의 작음이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나라를 받는 데에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는 위로를 줍니다.
결국
이 호칭은 우리에게 "내가 작을수록 목자이신 하나님의 크심이 더 드러난다"는 역설적인 평안을 선물합니다(인터넷).
·
"내가 작아질수록 하나님의 크심이 드러난다"는 고백은 기독교 신앙에서 '겸손'과 '하나님의 주권' 사이의 역설적인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해 그 의미를 세 가지 핵심 원리로
풀이해 볼 수 있습니다(인터넷):
1. 의존의
공간 확보:
내가 스스로를 '큰 존재'로 여기며 모든 문제를
직접 해결하려 할 때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들어올 자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내가 양처럼 '작고 연약한 존재'임을 인정할 때, 비로소 목자이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이 내 삶에 개입될 공간이 생깁니다.
2. 능력의
출처 명확화:
작은 양이 험한 골짜기를 통과하거나 푸른 초장에 도착했을 때, 양이 작을수록 그
결과는 양의 능력이 아닌 '목자의 유능함' 덕분임이 분명해집니다. 즉, 나의 약함은 하나님의
강함과 지혜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배경(Backdrop)이 됩니다.
3. 영광의
주인공 전환:
세례 요한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했던 것처럼, 나의 자아(자존심, 계획, 공로)가 작아질 때 사람들의 시선은 나를 넘어
내 뒤에 계신 하나님께 향하게 됩니다. 나의 작음이 하나님을 비추는 투명한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문장은
"내 힘을 뺄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내 삶에서 더 크게 일하신다"는 믿음의 원리를 강조하는 것입니다(인터넷).
(3)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32절 말씀을 묵상할 때에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32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a)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는 것을 "기뻐하신다”[“εὐδόκησεν”(유도케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i) 여기서 “기뻐하신다”는 헬라어 “εὐδόκησεν”(유도케센)의 주요 의미와 특징입니다:
1. 자발적이고
기꺼운 즐거움:
이
단어는
'좋게 생각하다', '기뻐하다', '만족스러워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못해 나라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줄 때 느끼는
것과 같은 최고의 즐거움을 가지고 이 일을 행하십니다.
2.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
문법적으로
이는
'부정과거' 시제로 쓰여, 하나님이 이미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그 나라를 주시기로 확정하고 기뻐하셨음을 나타냅니다.
3. 관계적
친밀함:
이
단어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들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εὐδόκησα)자라"는 선포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즉,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을 보며 느끼셨던 그 동일한 무한한 기쁨을,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느끼신다는 놀라운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씀이 주는 위로와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적은 무리'라고 부르시며 세상에서 위축되지 말라고 격려하십니다. 비록 우리는 작고 연약해 보일지라도,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분의 나라를 주시는 것을 진심으로 행복해하신다는 사실이 우리의 모든 두려움을 내쫓는 근거가 됩니다(인터넷).
(ii)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신다'는 것은 단순히 죽어서 가는 장소를 약속하시는 것 이상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경적 맥락에서 이
선물은 크게 세 가지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1. 통치권의
회복
(Relationship)
성경에서 “나라”[“βασιλείαν”(바실레이아)]는 영토보다
'통치'나 '다스림'의 의미가 강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주신다는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죄나 세상의 가치관에 휘둘리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신 다스림 아래 보호받으며 살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회복됨을 의미합니다.
2. 현재적
누림
(Present Reality)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1)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미래의 일만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과 희락과 정의를 맛보며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맡길 때 경험하는 마음의 천국이 바로 그분이 주시는 나라의 시작입니다.
3. 상속자로서의
권위
(Status)
하나님은
우리를 종이 아니라 '자녀'이자 '상속자'로 대우하십니다. 누가복음 12장
32절에서 '나라를 주신다'는 표현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업과 모든 권한을 물려주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세상을 치유하고 다스리는 영적인 권위와 사명을 부여하셨음을 뜻합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 나라를 주시는 것은 우리를 당신의 가장 가까운 가족으로 초청하여, 그분의 무한한 자원과
통치 아래서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인터넷).
·
“하나님이 주시는 그 나라의 권세를 실제로 '내 것'으로 받아 누리는 방법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매우 실제적인 '관계의 전환'에 있습니다. 다음 세 가지 단계를 통해 일상에서 그 자유를 경험해 보세요.
1. '신분'을 먼저 확정하세요 (Be: 존재)
가장
먼저 할 일은 내가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가족(자녀)'이라는 사실을 감정이 아니라 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녀의
권세:
자녀는 아버지의 집에 들어갈 때 허락을 구하지 않습니다. 기도를 '부탁'이 아닌 '대화'로 바꾸세요. "하나님, 저는 당신의 자녀이니 이 상황에 개입해 주세요"라고 선포하는 것이 시작입니다.
소속감: 세상의 성과나 평가로 내 가치를 매기지 말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졌다는 자부심을 가질
때 세상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2. '주권'을 이양하세요 (Surrender: 통치)
그분의
무한한 자원은 그분이 '왕'이 되실 때 공급됩니다.
염려를
맡기기:
염려는 내가 왕 노릇 하려 할 때 생깁니다.
"이 문제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문제의 핸들을 하나님께 넘겨드리세요.
작은
순종:
하나님 나라의 통치는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거나, 정직하게 업무를 처리하는
'작은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력이 내 삶에 실제로 흐르게 됩니다.
3. '자원'을 끌어 쓰세요 (Access: 누림)
하나님의
자원은 고갈되지 않습니다. 이를 누리는
도구는 '믿음'과 '기다림'입니다.
말씀을
약속으로 붙잡기:
성경에 기록된 약속들을 나에게 주시는 개인적인 약속(Rhema)으로 믿고 선포하세요.
감사로
선점하기: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도, 하나님이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미리 감사해보세요. 감사는 하나님 나라의 자원을 이 땅으로 끌어오는 가장 강력한
통로입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
나라는
'내가 애써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오늘 당신의 마음을 짓누르는 가장 큰 걱정거리를 하나님 나라의
통치 아래 맡겨보는 연습부터 시작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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