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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생존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기초적인 요구'를 다 보고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생존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 기초적인 요구 ' 를 다 보고 알고 계십니다 .         “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누가복음 12:29-31).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 장 29-31 절 말씀을 묵상할 때 제일 먼저 헬라어 성경으로 읽을 때 29 절을 시작하는 “Κα ὶ ”( 카이 ) 라는 접속사의 의미가 궁금해졌습니다 .   (a)     한국어 성경 개역개정과 개역한글에는 이 “Κα ὶ ”( 카이 ) 라는 단어가 번역이 되있지 않지만 현대인의 성경과 공동번역은 “ 그러니 ” 라고 번역을 했고 새번역은 “ 그러므로 ” 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   (i)                       제가 이 단어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개역개정으로 29 절 말씀을 읽었을 때 “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라 ” 고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앞서 말씀하신 내용과 연관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어쩌면 원어 헬라어 성경에는 예수님의 앞서 ...

‘믿음이 적은 자들아,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믿음이 적은 자들아,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키를 자라도 더할 있느냐 그런즉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누가복음 12:25-28).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 25-28 말씀을 읽은 원어 헬라어로 다시금 본문 말씀을 읽어보았습니다.  그리하였을 제일 먼저 관심을 갖게 헬라어 단어가 바로 λιγόπιστοι”(올리고피스토이)(“믿음이 적은 자들아”)입니다.

 

(a)    헬라어 단어는 적다 뜻의 λίγος”(올리고스) 믿음 뜻의 “πίστις”(피스티스) 결합된 단어로서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부족하여 염려에 빠진 상태를 의미합니다(인터넷).

 

(i)                      신뢰의 결핍은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과 입는 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것을 아신다는 말씀(30) 전적으로 믿는 확신이 없기에 세상적인 걱정에 매여서 염려하는 마음입니다(참고: 인터넷).

 

·       염려하는 마음은 앞에 위협이나 현실적인 결핍(궁핍) 앞에서 마음이 갈려 흔들리는 상태로서 좋은 예가 바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오라 말씀하셨을 위를 걷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믿음이 작은 자여 의심하였느냐"라며 손을 내미신 사건입니다(14:26-31).

 

-            여기서 의심”(31)이란 헬라어 단어 “διστάζω”(디스타조) 직역하면 갈래 길에 있다또는 마음을 품다라는 뜻으로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주저하다, 망설이다, 흔들리다라는 의미를 가집니다”(인터넷).

 

n  마태복음 14 31절에서의 영적 의미

 

맥락에서 '의심' 아예 믿지 않는 '불신'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시선의 분산: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위를 걸었으나, 거센 바람(환경) 보자 마음이 예수님과 폭풍 사이에서 갈래로 나뉜 상태를 말합니다.

 

불안정한 신뢰: 확고한 신뢰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유동적인 마음의 상태를 지적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환경에 마음을 빼앗겨 마음(디스타조)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을 보고 "믿음이 작은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인터넷).

 

n  우리는 그리도 예수님께 집중하지 못하고[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지 못하고(12:2)]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 마음을 쉽께 빼앗기는 것일까요?

 

인간이 예수님보다 눈앞의 거센 풍랑(환경) 먼저 반응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 본능' '시각적 한계'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베드로가 처했던 상황을 통해 우리가 마음을 쉽게 빼앗기는지 이유를 가지로 살펴볼 있습니다.

 

1.       '보이는 ' '믿는 '보다 압도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감각은 당장 눈앞에 닥친 위험에 즉각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에서 베드로가 바라본 '바람' 피부로 느껴지는 차가움과 귀를 울리는 소음, 생명을 위협하는 실재였습니다.  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 11:1)이기에, 보이지 않는 영적 실재보다 보이는 물리적 위협이 우리 뇌에 훨씬 빠르고 강렬한 신호를 보냅니다.

 

2.       '디스타조( 마음)' 본성 때문입니다

 

앞서 살펴본 '디스타조' 의미처럼, 우리 안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세상을 향한 염려가 공존합니다.  마음이 하나로 모이지 않고 ' 갈래' 나뉘어 있을 , 우리는 본능적으로 위험해 보이는 (어려운 환경)으로 시선이 쏠리게 됩니다.  , 주님을 바라보지 않으려 해서가 아니라, 주님과 환경을 동시에 보려다 보니 결국 자극적인 환경에 압도당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보다 '나의 계산' 빠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마주할 습관적으로 내가 가진 자원과 경험으로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베드로는 어부였기에 파도가 얼마나 위험한지 누구보다 알았습니다.  자신의 경험적 지식이 주님의 능력을 앞서 나갈 , 우리는 주님을 바라보기보다 "이제 죽었구나"라는 자기 결론에 도달하며 두려움에 빠지게 됩니다.

 

4.       믿음의 '근육' 약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주를 바라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본능이 아니라, 부단한 훈련이 필요한 '영적 근육' 같습니다.  고난이 닥치면 우리는 본능(두려움)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의식적으로 시선을 고정하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마음의 무게중심은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를 꾸짖기 전에 먼저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환경에 마음을 빼앗기는 연약한 존재임을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인터넷).

 

#   시편 103 15-16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인생은 날이 풀과 같으며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이면 시드는 풀처럼, 우리의 마음과 결단이 환경의 바람(고난) 쉽게 시드는 존재임을 이미 알고 계시는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체휼)하신다는 말씀(4:15) 위로를 받습니다.

 

-            저는 마태복음14 3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의심이란 헬라어 단어 “διστάζω”(디스타조) 의미를 묵상할 야고보서 1 5-8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그리고 여기 야고보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의심이란 헬라어 단어와 마음이란 헬라어 단어가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n  여기서 의심이란 헬라어 단어는 “διακρίνω”(디아크리노)로서 문자적으로는 둘로 나누다” “구별하다 뜻을 가집니다.  이는 지적인 불확실성보다는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갈등하며 흔들리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계산이나 세상의 방법을 의지하려 나타나는 분열된 의지를 뜻합니다(인터넷).

 

n  여기서 마음이란 헬라어 단어는 “δίψυχος”(딥쉬코스)로서 직역하면 영혼을 가진 ”(double-souled)라는 뜻인데 인격 안에 개의 독립된 의지가 싸우고 있는 영적 분열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헌신하는 보이나 실제로는 세상을 향한 욕심을 버리지 못해 모든 행위가 불안정하고 일관성이 없는 상태를 묘사합니다(인터넷).

 

#   그러면 마태복음 14 3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의심이란 헬라어 단어 “διστάζω”(디스타조) 야고보서 1 6-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의심"이란 헬라어 단어는 “διακρίνω”(디아크리노) 마음이란 헬라어 단어는 “δίψυχος”(딥쉬코스)와의 연관성은 무엇일까요?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무엇일까요?

 

단어의 연관성과 영적 교훈

 

단어들을 연결하면 '의심의 심화 과정' 보입니다.


현상 (디스타조): 눈앞의 위협 앞에 믿음과 두려움 사이에서 머뭇거립니다. (베드로의 순간적 흔들림)

 

작용 (디아크리노): 머뭇거림 속에서 '하나님인가, 세상인가' 저울질하며 내면이 분열됩니다. (야고보가 경고하는 기도의 태도)

 

고착 (딥쉬코스): 결국 하나님께도, 세상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 마음' 가진 불안정한 존재가 됩니다.

 

예수님과 야고보는 공통적으로 우리에게 '단일한 마음(Single-mindedness)' 요구합니다.  베드로가 바람을 보지 않고 주님만 보았어야 했듯, 야고보는 환경에 따라 흔들리는 마음을 정결하게 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고정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인터넷).\

 

(ii)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부족하여 염려에 빠진 믿음이 적은 자들은 의심”(14:31) 뿐만 아니라 염려합니다(12:25).  여기서 염려라는 헬라어 단어 “μεριμνν”(메림논) 나누다”(메리조, μερίζω) 마음”(누스, νος)' 합성어에서 유래했는데 의미는 "마음이 여러 갈래로 찢어지는 상태" 뜻합니다.  걱정거리에 신경이 분산되어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상태를 아주 생생하게 묘사한 단어입니다(인터넷).

 

·       누가복음 12 25 문맥에서 예수님은 "염려함(메림논)으로 (또는 목숨) 자라도 더할 있느냐"라고 물으셨는데 여기서의 염려란 인간이 통제할 없는 영역에 대해 부질없이 애쓰는 정신적 고통을 의미합니다.  결국 염려 힘으로 상황을 바꿔보려 애쓰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는 무익한 마음의 고통을 뜻합니다(인터넷).

 

-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키를 자라도 더할 있느냐”(25) 말씀은 인간의 염려가 가진 무력함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번역된 단어들을 통해 가지 측면에서 해석할 있습니다(인터넷):

 

1.       수명(Life Span) 연장 (시간적 의미)

 

여기서 '' 해당하는 헬라어 '헬리키아(λικία)' 신체적인 키뿐만 아니라 '나이' '수명' 뜻하기도 합니다.

 

' ' 번역된 '페퀴스χυς)' 팔꿈치에서 손가락 끝까지의 길이( 45~50cm) 말합니다.

 

의미: 사람이 아무리 밤잠을 설쳐가며 염려한다고 해도, 자기 수명을 1( 뼘의 시간)이라도 연장할 없다는 뜻입니다.  생명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강조입니다.

 

2.       신체적 (Height) 성장 (공간적 의미)

 

그대로 신체적인 키를 의미할 경우입니다.

 

의미: 사람이 고민한다고 해서 갑자기 키를 50cm( ) 키울 없듯이, 염려라는 정신적 활동은 물리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아무런 효력이 없음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3.       "지극히 작은 " (26절과의 연결)

 

예수님은 이어지는 26절에서 일을 "가장 작은 (지극히 작은 )"이라고 부르십니다.  인간에게 생명을 연장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큰일이지만,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 편에서는 아주 작은 일에 불과하다는 뜻입니다.

 

결론적으로: "염려는 인생의 문제(수명이나 건강 ) 해결하는 아무런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무익한 소모일 뿐이니, 주권을 가진 하나님께 맡기라" 강력한 메시지입니다(인터넷).

 

(2)    그러면 예수님께서 믿음이 작은 자들”(12:28)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바로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라”(27) 말씀입니다.  저는 말씀을 묵상할 우리가 이미 묵상한 까마귀를 생각하라”(24)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a)    여기서 생각하라”(24) 생각하여 보라”(27) 헬라어 단어 “κατανοήσατε”(카타노에사테) 아래로, 철저히라는 뜻의 “κατά”(카타) 이해하다, 마음을 쓰다라는 뜻의 “νοέω”(노에오) 결합된 단어로서 단순히 "한번 쳐다보라" 뜻을 넘어 다음과 같은 아주 구체적이고 강렬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인터넷):

 

1.       철저하고 집중적인 관찰: 건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이면에 담긴 원리와 본질을 파악하라는 뜻입니다(영어의 'Consider'보다 훨씬 강한 'Observe closely' 가깝습니다).

 

2.       영적 통찰력의 발휘: 시각적인 관찰을 넘어, 까마귀와 백합화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마음(지성)으로 깨달으라는 권고입니다.  , "자연을 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결론을 내리라" 명령입니다.

 

3.       마음을 고정함: 단어는 주목하다”, “마음을 두다라는 의미도 있어, 염려에 분산되었던 마음을 빼앗아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고정시키라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4.       강조된 명령: 헬라어 문법상(부정과거 명령형) 이는 지금 당장, 그리고 단호하게 수행해야 결단을 촉구하는 표현입니다.  "이제 그만 걱정하고,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라!"라는 의미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걱정에 뺏긴 눈으로 까마귀와 백합화를 아주 자세히 뜯어보며, 너희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다시 발견하라" 강력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인터넷).

 

(i)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동식물 까마귀 백합화 선택하셔서 말씀하신 것일까요?  이유는데 당시 문화적, 종교적 배경을 관통하는 깊은 의도가 있습니다.  이는 가장 낮은 가장 덧없는 조차 돌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극대화하여 보여주기 위함입니다(인터넷):

 

1.       까마귀인가요? (가장 가치 없고 부정한 존재)

 

율법적 부정함: 유대인들에게 까마귀는 레위기 11장에서 규정한 부정한 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외면받고 영적으로도 가치 없게 여겨지는 존재조차 하나님은 잊지 않고 먹이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생존의 상징: 까마귀는 비둘기처럼 귀엽거나 길들여진 새가 아닙니다.  거칠고 소외된 들짐승 같은 존재도 챙기시는 하나님이시라면, “하물며당신의 자녀인 너희를 굶기시겠느냐는 논리입니다.

 

2.       백합화인가요? (가장 흔하고 덧없는 존재)

 

화려함과 허무함의 대비: 여기서 백합화는 정원에서 가꾼 꽃이 아니라 들판에 흔히 야생화 뜻합니다.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 불꽃을 살리는 땔감으로 쓰일 만큼 하찮고 수명이 짧은 존재입니다.

 

솔로몬과의 비교: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솔로몬의 인위적인 의복보다, 하나님이 입히신 들꽃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뛰어나다는 점을 대조합니다.  이를 통해 인간의 수고(길쌈, 노력)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탁월함을 보여줍니다.

 

3.       요약하자면: '극단적 대조' 통한 안심

 

까마귀(부정한 ) 먹이신다.  하물며 너희(자녀)일까 보냐?

 

들풀(땔감) 입히신다, 하물며 너희(영원한 존재)일까 보냐?


결국 가장 가치 없는 (까마귀) 가장 금방 사라질 (들꽃) 돌보시는 하나님을 보며, "너희는 이들보다 훨씬 귀하다" 확신을 주시려는 것입니다(인터넷).

 

·       저는 말씀을 묵상할 우리가 이미 묵상한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누가복움 12 7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 누가복음 12 7(참새) 24(까마귀), 27(백합화) 모두 하물며”(How much more)(24, 28)라는 강력한 신적 논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들을 통해 일관되게 강조하시는 핵심은 '가치의 비교'입니다(인터넷):

 

1.       존재의 가치: 참새 vs 까마귀 vs 너희

 

참새 (7): 당시 참새 마리가 앗사리온(아주 작은 동전) 팔릴 만큼 흔하고 값싼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작은 생명 하나도 잊지 않으십니다.

 

까마귀 (24): 참새보다 부정하고 외면받는 존재입니다.

 

결론: 예수님은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까마귀보다 비교할 없을 정도로 귀하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우리의 가치가 그들의 생존권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하나님이 방치하실 리가 없다는 논리입니다.

 

2.       돌보심의 깊이: 머리카락 vs 먹이심 vs 입히심

 

7 (참새와 머리카락): 하나님은 우리의 세밀한 부분(머리카락)까지 세실 정도로 우리를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24, 27 (까마귀와 백합화): 하나님은 우리의 실제적인 필요(먹고 입는 ) 책임지시는 공급자이심을 보여줍니다.

 

3.       "두려워하지 말라" "염려하지 말라"

 

7절의 결론은 "두려워하지 말라"입니다. (존재의 위협에 대한 안심)

 

22~31절의 결론은 "염려하지 말라"입니다. (생활의 결핍에 대한 확신)

 

결국, 참새-까마귀-백합화로 이어지는 비유의 라인은 "하나님 눈에 당신의 자녀인 우리가 얼마나 압도적으로 소중한 존재인가" 일깨워 줍니다.  믿음이 적은 (올리고피스토이) 되는 이유는 바로 '나의 소중함' '하나님의 섬세함' 잊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인터넷).

 

-            믿음이 적은 ”[“λιγόπιστοι”(올리고피스토이)](28) 되는 원인을 '나의 소중함' '하나님의 섬세함'이라는 관점에서 풀면, 이는 단순한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와 시선의 문제로 이해할 있습니다.

 

1.       '나의 소중함' 잊었을 (존재 가치의 망각)

 

사람이 염려에 빠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이 '고아'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비교의 논리: 예수님은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들풀과 까마귀도 돌보시는데, 그보다 훨씬 귀한 '자녀' 너희를 방치하시겠냐는 것입니다.

 

망각의 결과: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참새보다 귀하고, 머리카락까지 세신 존재) 잊어버리면, 나는 인생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존재가 됩니다.  이때부터 세상의 풍파는 '훈련' 아니라 '생존의 위협' 되고, 자연스럽게 믿음은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2.       '하나님의 섬세함' 잊었을 (공급자의 성품 망각)

 

믿음이 적다는 것은 하나님이 계신 것은 알지만, 그분이 ' 삶의 디테일'까지 신경 쓰신다는 것을 신뢰하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섬세한 돌보심: 백합화의 무늬를 입히시고, 까마귀의 배고픔을 아시는 하나님은 ' 그림' 그리시는 분이 아니라 아주 세밀한 분이십니다.

 

망각의 결과: 하나님의 섬세함을 잊으면, "하나님은 큰일(구원, 천국) 하시겠지만, 당장의 월세나 내일의 먹거리 같은 '작은 '에는 관심 없으실 거야"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갈라지는 '메림나오(염려)' 시작이며, 예수님이 지적하신 '적은 믿음' 핵심입니다.

 

3.       결론:  믿음이 적은 ”(28) '시선' 결핍입니다.

 

결국 믿음이 작아졌다는 것은 시선이 '나를 돌보시는 하나님'에게서 '결핍된 환경'으로 옮겨갔음을 의미합니다.

 

까마귀를 보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카타노에오(깊이 관찰) 하지 않기 때문에, 나의 가치를 세상의 기준(소유의 넉넉함)으로 판단하기 때문에 마음이 요동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이들보다 얼마나 귀하냐!"라고 물으시며, "네가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아버지가 얼마나 세심한지 다시 보라" 권면하시는 것입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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