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마지막 문안 인사 (3)
[골로새서 4장 7-18절]
둘째로, “오네시모”란 사람은 빌레몬의 종으로 있다가 로마로 도피해 있던 중 바울을 만나 복음을 받고 주님께 돌아온 자입니다(호크마). 성경 빌레몬서를 보면,
사도 바울은 오네시모를 가리켜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몬 1:10)라고 말씀하였는데 바울은 그렇게 표현할 정도로 오네시모를 귀중히 여겼습니다. 바울이 오네시모를 사랑하여 빌레몬에게 부탁하면서 그 이름의 뜻인 “유익한”을 음미해 말하기를,"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11절)라고 말하였습니다(호크마). 저는 이 빌레몬서
1장 11절 말씀을 묵상할 때 사람을 세우는 사역에 있어서 중요한 교훈은 무익한 사람을 유익한 사람으로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해산하는 수고”[“해산의 고통”(새 번역)](갈4:19)를 해야 합니다. 복음성가 “너는 내 아들이라” 후렴 가사입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너는 내 아들이라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언제나 변함없이 너는 내 아들이라 나의 십자가 고통 해산의 그 고통으로 내가 너를 낳았으니.”
여러분은 고통을 유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무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사야 38장 17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현대인의 성경)
“내가 이런 고통을 당한 것은 나에게 유익이었습니다.
주는 내 영혼을 사랑하셔서 나를 죽음에서 건지시고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여기서 히스기야 왕에게 임하였던 “큰 고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임박한 죽음이었습니다.
이사야38장1절을 보면 히스기야 왕은 “병들어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큰 고통”을 히스기야 왕에게 주신 것일까요?
그 목적은 그에게 “평안”을 주시고자 함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17절).
좀 이해가 안 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큰 고통”을 겪을 때에 평안을 누릴 수 있는지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을 좀 더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큰 고통”을 통하여 히스기야 왕에게 어떻게 “평안”을 주셨는지 그 대답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 왕의
“모든 죄”를
“큰 고통”을 통하여 결국은 회개 기도케 하시므로 말미암아(2-3,
5절) 그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시고[그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현대인의 성경)]
그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17절). 왜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 왕에게 “큰 고통”을 통하여
(회개) 기도케 하시므로 평안을 주셨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영혼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17절). 이러한 큰 고통의 과정을 통해서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무익한 우리를 오네시모처럼 주님께 유익한 사람으로 세우십니다. 이렇게 주님께 유익한 사람으로 세움을 받는 성도는 고통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그릇행하였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므로 그 말씀을 지키므로 그 고난을 자신에게 유익되게 합니다(참고: 시119:67,
71). 이러한 주님의 일꾼은 주님의 일을 충실히 감당하므로 주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귀히 쓰임 받을 것입니다.
제가 두기고와 오네시모 이 두 사람을 하나로 묶어서 같이 묵상하고자 한 이유는 그 두 사람의 공통점이
3가지가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3가지 공통점이란 …
(1)
두기고와 오네시모는 ‘사랑(을) 받는 형제’(our
beloved brother)라는 것입니다(골4:7, 9).
저는 여기서 ‘사랑을 받는’이란 영어 단어인 “beloved”을 묵상할 때
2023년 5월에 사랑하는 막내 딸 예은이가 헨리 나우웬이 쓴 “Beloved”(“사랑의 존재”)라는 책을 읽고 “헨리 나우웬의 ‘Beloved’(사랑의 존재)과 함께한 해를 되돌아 보며”라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났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너무나 놀랄 정도여서 마음의 뭉클했고 눈물까지 나오려고 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정도로 저의 부족한 기도도 응답해주시사 예은이의 마음과 삶 속에서 역사하고 계신 것을 믿음의 눈으로 엿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는 예은이가 헨리 나우웬의 “Beloved”(사랑의 존재)
책을 읽고 그 정도로 자기 자신을 정직하게 되돌아보며
(성찰하며) 투명하게 글을 쓰되 자신의 취약점까지도 나눈 것이 좀 놀랬습니다. 특히 저는 그 글을 접하기 전에 사랑하는 아내가 성경공부를 한 후 집에 와서 자기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beloved)
딸이라는 사실에 은혜를 받은 것을 저에게 나누면서 울었는데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막내 딸 예은이로 하여금 나우웬의 “Beloved”이란 책을 읽고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시니 참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제가 예은이의 글을 읽고 답변의 글을 썼었는데 제가 쓴 그 글을 다시 찾아 읽어보면서 “beloved”이란 단어가 제일 많이 나오는 성경이 바로 아가서란 사실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여러 개 말씀들 중에 저는 아가
7장 10절이 제 마음에 다가왔었습니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도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이 말씀이 제 마음에 다가왔던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속하였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사모하신다는 묵상과 더불어 바로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에게 속하였고 예수님을 우리를 사모하신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4장 7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두기고를 “사랑받는 형제”라고 말씀한 후에
9절에 가서는 오네시모도 ‘사랑을 받은 형제”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첫번째 공통점을 묵상할 때 저는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마지막 문안 인사를 편지로 하면서 사랑받는 그 두 사람을 그들에게 제일 먼저 언급했다는 것은 어쩌면 그만큼 바울은 그들을 사랑했고 또한 신뢰하였기에 그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2)
두번째로,
두기고와 오네시모의 공통점은 그들은 ‘신실한 형제’ 또는 ‘신실한 일꾼’이라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4장 7절을 보면 바울은 두기고에 대해서 “신실한 일꾼”이라고 말한 후
9절에 가서는 오네시모를 가리켜 “신실하고”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여기서 “신실”이란 “’하나님의 비밀’곧,
복음을 맡은 사역자의 유일한 자격”임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2절에서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신실)이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주님의 일군의 신실은 적어도
3가지라로 호크마는 말하고 있습니다:
(a) “복음에 신실함이니,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복음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보수하여 전함이고(고후 2:17), (b)
인격 생활에 있어서 진실하여 거짓이 없는 것이고(고후
1:18-20), (c)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다가 고통과 난관을 당하여도 변절하지 않는 진실입니다(엡 6:24). “신실한 형제들”이란 말(골1:2)을 현대인의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는 형제들”이라고 번역을 했은데 여기서 “신실한 형제들”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신실하게 믿는 형제들입니다. 여기서 “신실한 형제들”이란
(a) 믿음이 충만한 자들이요(full
of faith), (b) 신뢰하는 사람들(trustful)이요, 또한 신뢰할 만한 사람들(trustworthy)로서 (c) 그리스도에게 충성된 자들(loyal
to Christ)입니다(KJV
성경 주석).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은 그리스도에게 충성된 자들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입니다(계1:5). 그들은 흠 없이 정직하게 주님을 따르며(시101:6, 현대인의 성경),
지극히 작은 것에도 충성하며(눅16:10), 죽도록 충성하여(계2:10) 주님 앞에서 설 때에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다는 주님의 칭찬(눅19:17)과 더불어 주님께로부터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사람들입니다(계2:10).
(3)
두기고와 오네시모의 공통점은 그들은 바울과 디모데(1:1)의 사정과 바울과 디모데가 있는 곳 사정을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알게 해주는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골4:7-9).
바울이 두기고를 오네시모와 함께 골로새 교회에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정황을 교회에 알리게 하여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의 사정을 알지 못해 궁금하고 염려하는 교인들의 마음을 위로하도록 하였습니다(인터넷). 에베소서
6장 21-22절 말씀입니다: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우리 사정을 알리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내가 특별히 그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현대인의 성경)
“내 사랑하는 형제이며 주님의 신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것을 말하여 내가 어떻게 지내며 무엇을 하는지 내 사정을 여러분에게 알려 줄 것입니다.
우리 사정을 여러분에게 알리고 여러분을 격려하기 위해서 내가 그를 여러분에게 보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이 “특별히” 두기고를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목적은 자기의 사정과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들에게 알리므로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고자 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자기와 디모데의 사정을 두기고와 오네시모를 통해 알게 되므로 마음의 위로를 하고 싶었던 동시에 그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사정을 더 알고 싶어했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거짓 교사들로부터 유혹을 받는 상황에 놓여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로 인해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골로새서
2장 1절에서는 그들을 위하여 “얼마나 힘쓰는지를 너희가 알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A
Commentary, Critical and Explanatory, on the Old and New Testaments).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힘쓴 것은 그들로하여금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였고(2절), 그 목적은 아무도 교묘한 말(달콤한 말)로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속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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