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려하지 말고 까마귀를 생각하며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누가복음 12:22-24).
(1)
첫째로,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22-24절 말씀을 읽을 때 어제 “어리석은 부자의 진짜 죄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것’입니다.”란 제목 아래 묵상한 누가복음
12장
16-21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생각난 말씀이 지난 주 금요일에 “유산 문제로 다투지 말고 모든 탐심을 물리쳐야 합니다.”란 제목 아래 묵상한 누가복음
12장
13-1절에서 특히
15절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미 묵상한 누가복음
12장
13-15절과
16-21절과의 연관성이 오늘 본문
22-24절도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
먼저 이미 묵상한 누가복음
12장 13-15절과 16-21절가의 연관성은 두 가지로
(1) 예수님께서는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15절)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후 그 말씀을 어기고 불순종한 “한 부자”(16절)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신 것과
(2) 모든 탐심을 물리쳐야 하는 이유는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한데(15절) 그 “한 부자”(16절)는 자기의 생명이 자기의 소유의 넉넉한 데 있다고 믿고 자기 밭에 소출이 풍성하므로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하고 “심중에 생각”한(17절) 결과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18절)한 것입니다(이 두 연관성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받은 교훈은 여기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https://blog.naver.com/kdicaprio74/224251479740). 이 두 연관성이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22-24절 말씀과 어떻게 연관이 될까요?
(i)
예수님의 말씀대로 모든 탐심을 물리치지 못한(15절) 어리석은(20절) “한 부자”(16절)는 자신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다고 믿고(15절)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수확”(16절, 현대인의 성경)인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어 자기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자기의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고 심중에 생각한 것입니다(17-18절). 이렇게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21절)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22절의 예수님의 말씀인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에 불순종하여 자기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자기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합니다.
·
결국 그 어리석은 부자는 곳간을 크게 짓고 재물을 쌓아 놓으면 자신의 생명이 안전할 것이라고 믿었지만(19절) 예수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20절)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 부자의 어리석음은 생명의 주권이 재물이 아니 하나님께 있음을 모르는 무지함과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어야 할 줄 다 알고 계시다(30절)는 진리를 믿지 못하는 불신앙입니다(참고: 인터넷).
-
그는 생명의 주권에 대해 무지하였습니다(소유 ≠ 생명):
그는 "내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9절)라고 말하며,
재물이 자신의 미래와 생명을 보장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20절)라고 말씀하심으로,
생명의 시작과 끝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선포하셨습니다(인터넷).
-
또한 그 어리석은 부자는 공급자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 있었습니다(염려의 뿌리):
누가복음 12장 30절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는 진리를 신뢰하지 못할 때,
사람은 '쌓아 두려는 탐심'이나 '없을까 봐 떠는 염려'에 빠지게 됩니다.
그 부자는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눈에 보이는
'곳간'을 신뢰했기에 결론적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된 것입니다(인터넷).
(2)
마지막 둘째로,
저는 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22절)하고 말씀하셨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이유가 적어도
3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i)
첫째로,
그 이유는 예수님은 자신의 제자들이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고(15절) 한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지 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들이 되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
여기서 저는 예수님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15절)는 말씀대로 살지 못한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서 좀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 중에서 탐심의 문제를 끝내 극복하지 못한 가장 비극적인 인물은 가룟 유다입니다. 첫째로,
그는 제자들의 공동 재정을 관리하는 돈궤를 맡았으나,
그 안에 들어오는 것을 몰래 훔쳐가는 도둑이었습니다(요 12:6). 둘째로,
마리아가 비싼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부었을 때,
그는 이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지 않았다며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진정으로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탐심을 채울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결국 그는 은 삼십이라는 물질적 탐욕에 눈이 멀어,
자신의 스승인 예수님을 종교 지도자들에게 팔아넘기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마 26:15). 이처럼 가룟 유다의 사례는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는 예수님의 경고를 무시했을 때,
그 결말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인터넷).
“세속적 권력욕에 빠졌던 제자들의 사례를 보면,
탐심은 비단
'돈'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제자들 전체가
'누가 더 크냐'는 서열 다툼에 빠져 있었던 것은 명예와 권력에 대한 탐심의 결과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야고보와 요한은 주의 나라가 임할 때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달라고 요구하며 세속적인 영광을 탐냈습니다(막
10:35-37). 또한, 예수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는 엄중한 순간에도 제자들은 길에서 서로 누가 큰지를 다투며 명예에 대한 탐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냈습니다(눅 9:46). 결국 이러한 모습은 예수님께서 경계하신
'모든 탐심'
안에 물질뿐만 아니라 인간의 교만과 권력욕도 포함되어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인터넷).
·
여기서 한 어리석은 부자처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지 않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서 생각할 때 두 사람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1.
첫째 사람은,
위로의 아들인 바나바입니다(행4:36-37).
“바나바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의 구체적인 모델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있는 밭을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어 공동체의 가난한 이들을 돕게 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내 곡식,
내 물건’이라며 집착했던 것과 달리,
바나바는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내어놓았습니다”(인터넷).
2.
둘째 사람은,
생활비 전부를 드린 과부입니다(눅21:1-4).
“예수님은 헌금함에 넣는 부자들의 헌금보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을 더 귀하게 보셨습니다.
부자들은 ‘풍족한 중에서’
넣었지만, 이 여인은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 생명이
'돈'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온전히 신뢰한,
가장 부요한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인터넷).
-
그러면 내 생명이
'돈'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온전히 신뢰한,
가장 부요한 믿음의 표현을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n
“내 생명이 돈이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믿는
'가장 부요한 믿음'은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인 삶의 선택으로 증명됩니다.
성경의 원리에 기초하여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
3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곳간'을 늘리는 대신
'통로'를 넓히는 삶
(나눔)
어리석은 부자는 남는 곡식을 보고 ‘더 큰 곳간’을 생각했지만,
하나님께 부요한 자는 ‘나눌 대상’을 생각합니다.
구체적 실천: 나의 소득 중 일정 부분을
'내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고아와 과부,
소외된 이웃을 위해 정기적으로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재 물이 쌓이는 것을 보며 안심하는 마음을 의도적으로 거절하고,
재물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쓰이는 것을 보며 기뻐하는 훈련입니다.
2.
'염려'의 시간에
'감사와 간구'를 채우는 삶
(기도)
염려는 내 생명을 내가 책임지려 할 때 생깁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는 염려가 찾아올 때 그것을 기도의 제목으로 바꿉니다.
구체적 실천: 무엇을 먹고 입을까 하는 걱정이 엄습할 때,
즉시 ‘하나님,
제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필요한 것을 공급하실 아버지를 신뢰합니다’라고 선포하십시오.
눅
12:30 말씀처럼 하나님 아버지가 이미 다 알고 계심을 인정하며 감사 기도를 먼저 드리는 것이 부요한 믿음의 증거입니다.
3.
'자족'함으로 세상의 가치관을 거스르는 삶
(단순한 삶)
소유의 넉넉함이 생명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끝없는 소비와 비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구체적 실천: 남들보다 더 좋은 차,
더 큰 집을 가져야 안전하다는 세상의 유혹 앞에서 ‘지금 내게 있는 것으로 충분합니다(자족)’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삶의 규모를 단순하게 유지하고,
그로 인해 남는 시간과 에너지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일(예: 예배, 봉사, 말씀 묵상)에 우선적으로 배치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결국 가장 부요한 믿음의 표현은 ‘내일의 안전을 위해 오늘의 재물을 움켜쥐지 않고,
오늘 나를 먹이시는 하나님을 믿고 오늘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인터넷).
(ii)
둘째로,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기 때문입니다.
·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22절 말씀입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고 말씀하신 의미는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인터넷):
1.
창조의 질서와 하나님의 책임
(가장 큰 것을 주신 분)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고귀한 선물인
'목숨(생명)'과 '몸'을 이미 거저 주셨습니다.
음식과 옷은 그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부수적인 수단일 뿐입니다.
예수님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생명이라는 가장 거대한 선물을 주셨다면,
그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작은 것들(음식, 옷)을 책임져 주시지 않겠느냐?"라는 것입니다.
즉,
생명의 근원을 주신 분이 그 과정도 책임지신다는 창조적 신뢰를 강조하신 것입니다.
2.
본질과 수단의 역전 경계
세상 사람들은 흔히
'먹고 입는 것(수단)'을 위해
'목숨과 건강(본질)'을 소모하며 염려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일깨우십니다.
우리가 먹고 입는 것에만 온 정신을 쏟는다면,
정작 하나님이 주신
'목숨'의 참된 목적인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놓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3.
소유가 생명을 보장하지 못함
(어리석은 부자와의 대조)
앞서 나온 '어리석은 부자'는 곡식(음식)과 물건(의복 등)이 넉넉하면 자신의 목숨이 평안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밤에 목숨을 가져가시자 그가 쌓은 모든 수단은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즉,
"음식이 목숨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주권자인 하나님이 목숨을 붙들고 계신다"는 사실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이 말씀은 우리의 시선을
'내가 소유한 것(음식, 옷)'에서 '나를 존재하게 하신 분(하나님)'께로 돌리라는 초대입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인정할 때,
우리는 비로소 생존을 위한 염려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로 살 수 있게 됩니다(인터넷).
(iii)
마지막 셋째로,
까마귀를 기르시는 하나님께서 새보다 더 귀한 우리를 기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
오늘본문 누가복음 12장
24절 말씀입니다: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까마귀를 생각해 보아라.
까마귀는 씨를 뿌리거나 거두지도 않고 곳간이나 창고도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를 기르신다.
너희는 새보다 더 귀하지 않느냐?”(현대인의 성경)].
-
여기서 “까마귀를 생각하라”는 말씀에서 ‘생각하라’는 헬라어 단어 “κατανοήσατε”(카타노에사테)는 단순히
'한번 떠올려 보라'는 수준 이상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세 가지 핵심 의미입니다(인터넷):
1.
관찰을 통한 깊은 통찰
(To Observe Carefully)
이 단어는 '아래로(kata)'와 '마음/지성(noeo)'이 합쳐진 말입니다.
즉,
대상을 아주 자세히 주의 깊게 살피고 관찰하여 그 이면에 담긴 진리를 깨닫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까마귀라는 새를 보라는 것이 아니라,
그 까마귀가 어떻게 먹고 사는지,
누가 그를 먹이시는지를 연구하고 명상하여 영적인 원리를 발견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2.
고정관념을 깨는 깨달음
당시 유대인들에게 까마귀는 율법적으로
'부정한 새'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 부정한 새조차 하나님이 세밀하게 기르신다는 사실을
'주목(κατανοέω)'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돌보심에는 예외가 없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3.
'심중의 생각'을 교정하는 도구
어리석은 부자의 '자기 생각(17절)'과 대조됩니다.
부자의 생각: 자기 안의 욕망과 계획에 갇힌 생각
(Self-centered thinking)
“생각하라” [“κατανοήσατε”(카타노에사테)]: 밖을 내다보며 하나님의 성품과 일하심을 배우는 생각
(God-centered thinking).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 연민이나 불안의 생각(염려)에 빠져 있지 말고,
눈을 들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세상을
'깊이 관찰하고 깨달으라'고 촉구하신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κατανοήσατε”(카타노에사테)(생각하라)는 "까마귀의 생존 방식을 유심히 관찰하여,
하나님이 너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이성적·영적으로 확신하라"는 적극적인 정신 활동을 의미합니다.
-
저는이 “까마귀를 생각하라”(24절)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어리석은 부자가 ‘(심중에)
생각하였다’(17절)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n
그래서 저는 두 단어를 먼저 헬라어로 찾아서 묵상했습니다:
1.
“διελογίζετο”(디엘로기제토): 어리석은 부자의
'닫힌 생각'
(17절)
어원적 의미: '통과하여(dia)'
+ '계산/논리(logizomai)'가 합쳐진 말로,
자기 안에서 이리저리 재고 따지며 계산하는 것을 뜻합니다.
특징: 이 단어는 주로 자기 내면의 ‘독백’이나 ‘수평적 계산’에 쓰입니다.
17절에서 부자가
"심중에 생각하여(디엘로기제토)"라고 할 때,
그의 사고방식에는 하나님이 끼어들 자리가 없습니다.
오직
'나의 곡식',
'나의 곳간',
'나의 미래'만을 계산하는 폐쇄적인 사고입니다.
결과: 이 계산의 끝은 결국 탐심과
"내 영혼아 평안히 쉬자"라는 자기 기만으로 이어집니다.
2.
“κατανοήσατε”(카타노에사테): 제자들의 '열린 관찰'
(24절)
어원적 의미: '아래로(kata)'
+ '마음(noeo)'이 합쳐진 말로,
대상을 깊이 있게 주의 깊게 살피고 그 이면의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특징: 이것은 자기 안으로 파고드는 계산이 아니라,
눈을 들어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향하는 ‘수직적 관찰’입니다. 예수님은
"까마귀를 생각하라(카타노에사테)"고 하시며,
제자들의 시선을 자기 내면의 불안(염려)에서 하나님의 통치(자연 만물)로 돌리게 하십니다.
결과: 이 관찰의 끝은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얼마나 더 귀하냐"라는 확신과 평강으로 이어집니다(인터넷).
n
이 두 ‘생각’ 사이의 연관성과 영적 의미입니다(인터넷):
1.
‘자기 중심적 생각’
vs ‘하나님 중심적 생각’
어리석은 부자의 생각(17절): 성경은 그가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기를”이라고 기록합니다.
그의 생각은 철저히
'나'에게 갇혀 있었습니다.
"내가 내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17-18절). 그의 생각은 탐심과 자기 보존의 도구였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명령(24절): 예수님은 “까마귀를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나의 문제와 창고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과 그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2.
‘쌓아둠’의 논리
vs ‘공급’의 논리
부자의 논리:
"까마귀는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24절)라는 말씀은 부자의 행위와 정반대됩니다.
부자는 심고 거두고 창고에 가득 채우는 것에 자신의 생명을 걸었지만,
예수님은 그런 인간적인 방책(창고)이 전혀 없는 까마귀도 하나님이 기르신다는 사실을 대조시키십니다.
연관성: 부자가 자기 심중에서
'창고'를 생각할 때 염려와 탐심이 자랐다면,
제자가 '까마귀'를 생각할 때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평강이 자라납니다.
3.
‘무지’에서 ‘깨달음’으로
부자의 생각은 하나님을 배제한 무지함이었습니다.
자기가 자기 생명을 지킬 수 있다는 착각이었죠. 반면,
까마귀를 생각하라는 말씀은 학습을 의미합니다.
자연 만물을 보며
"하나님이 저 미물도 기르시는데,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24절)라는 영적 논리를 깨달으라는 초대입니다.
요약하자면: 부자가 자기 안의
'욕심의 계획'을 생각했다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밖을 보며
'하나님의 돌보심'을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부자의 생각은 죽음으로 끝났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생각하는 자는 염려에서 해방되어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됩니다(인터넷).
·
이렇게 까마귀를 기르시는 하나님께서 새보다 더 귀한 우리를 기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존재 가치를 깨달음으로 염려를 이겨 나아가야 합니다.
1.
가치의 비교:
까마귀는 당시 유대인들에게 부정하게 여겨지던 새였고(레 11:15), 농경 사회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미물이었습니다.
그런 까마귀도 하나님이 기르신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너희'는 얼마나 더 귀하게 보시겠느냐는 물음입니다.
2.
노력과 공급의 관계:
까마귀는 부자처럼 심지도,
거두지도, 창고(곳간)를 짓지도 않습니다.
즉,
생존을 위한 인간적인
'쌓아둠'이 전혀 없는데도 살아갑니다.
이는 생명이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에 달려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3.
염려의 무익함:
까마귀는 내일 일을 염려하여 오늘 곳간을 짓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까마귀를 보며,
하나님 아버지를 신뢰하는 법을 배우길 원하셨습니다.
결국 "우리가 새보다 귀하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부자처럼 곳간을 크게 짓느라 인생을 허비하거나 제자들처럼 무엇을 먹을까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는 바로 이 하나님의 돌보심을 확신하며 오늘을 자유하게 사는 사람입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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