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답답함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누가복음 12:49-50).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49-50절 말씀을 읽으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50절)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말씀 묵상 글의 제목을 “예수님의 답답함”이라고 정했습니다.
(a)
먼저 저는 “답답함”이란 단어의 정의가 궁금해서 인터넷에 찾아보았는데 크게 세 가지 맥락에서 정의를 내렸는데 그 중에 ‘심리적/상황적 답답함’에 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애가 타거나 속이 풀리지 않아 괴로운 상태,
혹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안타까울 때 사용합니다”(인터넷).
(i)
“한국인들이 일상에서 ‘답답하다’고 할 때는 다음과 같은 세부적인 감정을 포함합니다.
불통(不通)의 감정: 상대방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 느끼는 막막함입니다.
무력감: 무엇인가를 하고 싶지만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답답한 성격: 융통성이 없거나 행동이 느릿느릿하여 보는 사람이 안달이 날 때도 사용합니다”(인터넷).
·
저는 이 세 가지 세부적인 감정 중 “불통의 감정”에서 우리가 보편적으로 “느끼는 막막함”을 “무력감:
무엇인가를 하고 싶지만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고통”과 연결해서 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지난 주에 주님 안에서 어느 자매로부터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았는데 그 내용 중 한 부분인 그녀가 느끼는 ‘막막함’이란 말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
“우리가 느끼는 그 답답한 막막함은 단순히
"어렵다"는 느낌을 넘어,
나의 의지와 현실의 벽이 충돌할 때 발생하는 심리적 질식 상태와 같습니다.
1.
'내면의 에너지'와 '외부의 벽'의 충돌
무력감은 무언가 하고 싶은 의지(내면의 에너지)는 가득한데,
그것이 나갈 통로(현실적 수단)가 완전히 차단되었을 때 극대화됩니다.
이때 느껴지는 것이 바로 답답함입니다.
에너지가 밖으로 분출되지 못하고 안에서 소용돌이치며 가슴을 압박하는 것이죠.
2.
안개 속을 걷는 듯한
'막막함'
'막막함'은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을 때(막막함)와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무력감)가 만나면,
사람은 마치 좁고 공기가 희박한 방에 갇힌 듯한 심정을 느끼게 됩니다.
3.
'나'라는 존재가 작아지는 고통
…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자신의 존재가 작아지는 듯한 경험을 합니다.
내 삶의 주인으로서 통제권을 잃었다는 느낌이
무력감이라면, 그 좁아진 선택지 속에서 숨이 가빠오는 통증이 답답함입니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가슴이 턱 막힌다’거나 ‘숨통이 조여온다’는 표현을 자주 씁니다.
이는 심리적인 고통이 신체적인 압박감으로 전이될 만큼 그 무게가 무겁다는 것을 의미합니다”(인터넷).
(ii)
이렇게 우리에게 답답함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제가2018년 7월 16일에 “심히 두렵고 마음이 답답할 때”라는 제목 아래 창세기
32장 7절 상반절과
11절 말씀 중심으로 묵상한 글 내용 중 몇 부분만 나눕니다(참고: https://blog.naver.com/kdicaprio74/221319881254):
여러분은 죽음이 두려우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사랑하는 가족 식구의 죽음이 두렵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몰려오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더불어 그 위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숨 막힐 정도로 답답할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 창세기
32장 7절 상반절과
11절에 나오는 야곱은 심히 두렵고 마음이 답답했을 때 주님께 간구했습니다.
세일 땅 에돔 들에 있는 형 에서에게로 사자들을 자기보다 앞서 보낸 야곱은(3절)그 사자들이 돌아와 형 에서가
400명을 거느리고 자기를 만나려고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6절) 심히 두렵고 답답해했습니다(7절). 그는 몰려오는 죽음의 공포와 생사가 달린 위기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몰라 마음이 숨막힐 정도로 답답했을 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그는 하나님께 간구했습니까?
한 3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야곱은 심히 두렵고 마음이 답답할 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9-10절).
(2)
야곱은 심히 두렵고 마음이 답답할 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12절).
(3)
야곱은 심히 두렵고 마음이 답답할 때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실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끈기있게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26절).
저는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자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제 아내와 자녀들의 죽음조차도 두려워하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가 두려워하고 싶은 것은 사랑하는 친구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다가 영원히 죽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회 형제,
자매님들의 예수님을 믿지 않는 가족,
친척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영원한 죽음을 맛볼까봐 두려워하고 싶습니다. 점점 더 두려워하고 싶고 제 마음이 더욱더 답답해지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극심한 두려움과 마음의 답답함 속에서 하나님께 간구하고 싶습니다. 저는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고 싶습니다. 마치 모세와 바울처럼 저는 제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또는 제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질지라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제가 사랑하는 죽어가는 영혼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기를 간구하고 싶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죽어가는 영혼들에게도 그 구원의 은총을 내려주시길 간구하고 싶습니다. 저는 제게 약속의 말씀을 주시고 그 약속의 말씀을 신실하게 이루어 나아가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포기하지 않고 기도 응답 받을 때까지 생명을 걸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싶습니다.
(b)
그러면 오늘 본문 누가복음
12장 50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의 답답함”은 무엇이었을까요?
(i)
먼저 여기서”답답함”이란 헬라어 단어 “συνέχω”(쉬네코)는 단순히 심리적인 불안을 넘어,
매우 강력한
'압박'과 '구속'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인터넷):
1.
단어의 본래 의미
“συνέχω”(synechō, 쉬네코)는 '함께(syn)'와 '붙잡다(echō)'가 결합된 단어로,
"사방에서 에워싸고 압박하다",
"꼼짝 못 하게 붙들다"라는 뜻을 가집니다.
마치 양쪽에서 꽉 짜는 듯한 물리적인 압박 상태를 말합니다.
2.
성경적 문맥에서의 의미
예수님께서 이 단어를 사용하신 이유는 곧 닥쳐올 고난(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목적을 이루기까지 느끼시는 강렬한 중압감을 표현하기 위함입니다.
강한 긴장감:
해야 할 사명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느끼는 거대한 심적 압박입니다.
몰입과 집중: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 없을 만큼 오직 그 사명(십자가)에만 온 마음이 매여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3.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현실적 제약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답답함"이 수동적인 무력감에 가깝다면,
‘예수님의 답답함’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스스로를 그 고통스러운 과정 속에 밀어 넣고 견뎌내시는 능동적이고 목적 있는 압박감에 가깝습니다.
질식할 것 같은 압박 속에서도 끝까지 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을 때 느끼는
'거룩한 답답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거룩한 답답함’에는 자신이 이 세상에 던지러 오신 “불”(눅12:49)(여기서 “불”은 세상을 변화시키고 정결하게 하는 성령님의 역사나 복음의 능력,
또는 심판과 정화를 의미함)이 온 땅에 붙어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히 임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이 전제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만 비로소 그 “불”이 세상에 온전히 붙을 수 있다는 것(즉, 인류 구원과 성령 강림이라는 위대한 사명이 오직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음)을 알고 계셨기에 그 일이 완성되기까지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했는지를 “나는 고난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답답하겠느냐?”(50절, 현대인의 성경)라고 표현하신 것입니다(인터넷).
(ii)
여기서 저는 ‘예수님의 답답함’이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스스로를 그 고통스러운 과정 속에 밀어 넣고 견뎌내시는 능동적이고 목적 있는 압박감에 가깝다는 말을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사명 완수란 곧 닥쳐올 고난(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그러나 나는 고난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현대인의 성경)](50절)란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
여기서 예수님께서 받으실 세례란 “고난의 세례”(50절, 현대인의 성경)로서 예수님의 생애 가장 고통스럽고도 결정적인 사건인
'십자가 죽음'을 상징합니다(인터넷):
1.
전적인 침수와 압도
(Total Submersion)
여기서 “세례”란 헬라어 단어 “βάπτισμα”[바프티스마(baptisma)]는 '물에 잠기다',
'씻기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례는 고난과 죽음이라는 거대한 파도가 그분의 전 존재를 완전히 덮어버릴 것을 의미합니다.
시편
42편 7절의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나를 휩쓸었나이다"라는 표현처럼,
피할 수 없는 고통에 완전히 침수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2.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내는 통로
구약에서 물은 종종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노아의 홍수 등).
따라서 고난의 세례는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바다에 스스로 뛰어드시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죄인을 위해 그 심판의 물결 아래로 가라앉으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요나 1장
12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요나는 폭풍 속에서 배에 탄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말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눅12:50)라고 말씀하시며 십자가라는 진노의 바다에 스스로 몸을 던지신 자발적 희생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나 큰 다른 점은 요나는 자신의 죄 때문에 던져졌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의인으로서 죄인의 바다'에 던져지셨다는것입니다. 요나가 바다에 던져지자마자 사나운 파도가 멈추고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진노라는 거대한 물결 아래로
'가라앉으심(세례)'으로써, 죄로 인해 우리를 덮치던 심판의 폭풍이 그쳤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평안은 예수님께서 그 무시무시한 물결을 온몸으로 받아내신 결과입니다.
3.
죽음을 통한 새로운 생명의 탄생
세례는 '옛 자아의 죽음'과 '새로운 생명의 부활'을 동시에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난의 세례(죽음)를 통과해야만 인류 구원이라는 사명이 완성되고,
부활의 영광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례가 이루어지기까지 그토록
"답답함(쉬네코, 압박감)"을 느끼셨던 것입니다(인터넷).
-
여기서 저는 예수님이 받으실 “고난의 세례”(눅12:50, 현대인의 성경)란 말씀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신다면 이 고난의 잔을 내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눅22:42, 현대인의 성경)라고 간구하신 말씀과 연관해서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n
예수님께서 느끼신 “답답함”(눅12:50)이 겟세마네의 “고난의 잔”(22:42,
현대인의 성경)을 앞둔 고뇌에서 절정에 달했습니다. 누가복음
12장에서 말씀하신 “고난의 세례”가(12:50, 현대인의 성경)
온몸이 잠기는 외부적인 압도라면,
22장의 “고난의 잔”(22:42,
현대인의 성경)은 그 고통을 내면으로 받아들여 마셔야 하는 지극히 개인적이고도 실존적인 수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답답함의 상태가 겟세마네에서
"땀이 핏방울같이 될 만큼"
간절한 기도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하는 압박(“답답함”) 속에서, 그 압박을 해소하는 유일한 길은 구 “고난의 잔”을 마시는 것뿐임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습니다(인터넷).
(c)
여기서 저는 무엇인가를 하고 싶지만 현실적인 제약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력감을 느끼고 매우 답답할 때(막막할 때)
우리가 겪는 압박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 지 예수님의 답답함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지가 궁금해졌습니다.
(i)
“현실적인 제약 앞에 멈춰 서서 느끼는 막막함과 무력감은 마치 우리 삶이 좁은 감옥에 갇힌 듯한 통증을 줍니다.
누가복음
12:50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답답함(쉬네코)은 이러한 상황을 겪는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인 세 가지 교훈을 줍니다.
1.
답답함을
'사명'의 과정으로 재해석하기
예수님께 닥친 '고난의 세례'는 피할 수 없는 현실적 제약이었으나,
예수님은 이를 의미 없는 고난이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로 바라보셨습니다.
교훈: 우리가 느끼는 막막함이 단순히 나를 파괴하는 벽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기 위한 해산의 고통일 수 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멈춤이
'무능력' 때문이 아니라,
더 큰 선을 이루기 위해 잠시
'매여 있는 상태(쉬네코)'라고 관점을 바꾸는 것이 극복의 시작입니다.
2.
'내 뜻'과 '아버지의 뜻'
사이의 정직한 대면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느끼신 무력감과 압박감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쏟아놓은 과정이었습니다.
‘거두어 주십시오’라는 고백은 인간이 느끼는 한계를 부정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줍니다.
교훈: 무력감을 억누르지 말고,
하나님 앞에 ‘나의 막막함과 답답함이 이 정도입니다’라고 솔직하게 고백하십시오.
기도는 막막한 현실을 바꾸지 못할지라도,
그 현실을 견뎌낼
'심령의 공간'을 넓혀줍니다.
내 뜻이 꺾이는 자리가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시작되는 자리가 됩니다.
3.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에 집중하기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거대한 사건 앞에서 온몸이 조여오는 압박을 느끼셨지만,
결국 그분이 하신 일은
'순종의 한 걸음'을 떼는 것이었습니다.
요나가 자신을 바다에 던지라고 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자신을 고난의 세례에 내맡기셨습니다.
교훈: 압도적인 현실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오늘 나에게 허락하신 작은 순종'
하나에만 집중해야 합니다.
거대한 폭풍을 잠재우려 애쓰기보다,
그 폭풍 속에서 나를 붙드시는 하나님께 나를 맡기는 것(Trust)이 무력감을 이기는 가장 강력한 방법입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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