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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내 안에 계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   오직 내 안에 계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         “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 요한복음 5:30).     (1) 저는 “ 예수를 믿게 하는 증언 ” 이란 제목 아래 요한복음 5 장 30-47 절 전체를 한국 성경으로만 다 읽은 후 계속해서 제 마음은 30 절 한절만 묵상하고 싶은 충동이 있어 오늘은 30 절 한절만 우선 묵상하려고 합니다 .   묵상하되 저는 “ 내 심판 ” 즉 , 주님의 심판에 초점을 맞추어 묵상하면서 요한계시록 20 장 11-15 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 백보좌 ( 크고 휜 보좌 ) 심판 ” 과도 함께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     (a) 첫째로 , 저는 예수님께서 “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ο ὐ δύναμαι ἐ γ ὼ ποιε ῖ ν ἀ π ᾽ ἐ μαυτο ῦ ο ὐ δέν ( 우 뒤나마이 에고 포이에인 아프 에마우투 우덴 )]( 요 5:30) 하신 말씀을 묵상하고 싶습니다 .   이 예수님의 말씀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 " 행할 수 없다 / 내가 / 행하는 것을 / 내 자신으로부터 / 아무것도 "( 나는 내 자신으로부터는 그 어떤 것도 스스로 행할 수 없다 ).   여기서 저는 “ 스스로 ” 라는 한국어 성경 말씀을 묵상할 때 19 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 “…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ο ὐ δύναται ὁ υ ἱὸ ς ποιε ῖ ν ἀ φ ᾽ ἑ αυτο ῦ ο ὐ δ ὲ ν ἐὰ ν μή τι βλέπ ῃ τ ὸ ν πατέρα ποιο ῦ ν...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내 안에 계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내 안에 계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한복음 5:30).

 

 

(1) 저는 “예수를 믿게 하는 증언”이란 제목 아래 요한복음 5장 30-47절 전체를 한국 성경으로만 다 읽은 후 계속해서 제 마음은 30절 한절만 묵상하고 싶은 충동이 있어 오늘은 30절 한절만 우선 묵상하려고 합니다.  묵상하되 저는 “내 심판” 즉, 주님의 심판에 초점을 맞추어 묵상하면서 요한계시록 20장 11-1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백보좌(크고 휜 보좌) 심판”과도 함께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a) 첫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οὐ δύναμαι ἐγὼ ποιεῖν ἀπ᾽ ἐμαυτοῦ οὐδέν (우 뒤나마이 에고 포이에인 아프 에마우투 우덴)](요5:30)하신 말씀을 묵상하고 싶습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행할 수 없다 / 내가 / 행하는 것을 / 내 자신으로부터 / 아무것도"(나는 내 자신으로부터는 그 어떤 것도 스스로 행할 수 없다).  여기서 저는 “스스로”라는 한국어 성경 말씀을 묵상할 때 19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οὐ δύναται ὁ υἱὸς ποιεῖν ἀφ᾽ ἑαυτοῦ οὐδὲν ἐὰν μή τι βλέπῃ τὸν πατέρα ποιοῦντα (우 뒤나타이 호 휘오스 포이에인 아프 헤아우투 우덴 에안 메 티 블레페 톤 파테라 포이운타)].  이 두 평행 구절 말씀을 함께 묵상할 때 예수님께서”그들”(19절)인 예수님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고 박해하던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유대인들)’에게 증언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i)          주님을 박해하고 죽이려는 살기로 가득했던 유대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예수님이 이 두 번의 강력한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선언을 던지신 복음의 참된 의미를 인공지능이 3가지 관점으로 풀은 것입니다(인터넷):

 

1.   유대인들의 ‘종교적 오만’을 깨부수시는 철저한 폭로

 

당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스스로’ 가장 잘 지키고 있으며, 그 율법의 잣대로 다른 사람들을 심판할 자격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혜와 전통(가이드라인)을 기준으로 삼아 예수님을 안식일 파괴자요 신성모독자로 ‘스스로’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발: 주님은 "나는 내 자신으로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하심으로써, 역설적으로 유대인들이 행하는 모든 종교적 행위와 정죄가 100% ‘그들 자신으로부터’ 나온 독선이자 교만임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자기들의 기득권과 자아에서 나온 서슬 퍼런 판단의 칼을 휘두르는 유대인들을 향해, 주님은 진짜 하나님의 일과 심판이 무엇인지를 본질적으로 보여주고 계십니다.

 

2.   ‘독립적 행동’의 거부를 통한 완벽한 삼위일체적 연합 선포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동일본질)"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18절).  그들의 시각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외에 '또 다른 독립된 신'이 되어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불순종의 존재로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반론: 19절과 30절의 선언은 "나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내 마음대로(스스로) 행동하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라는 강력한 변증입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온전히 바라보고(19절), 아버지의 뜻만을 구하기 때문에(30절), 아들의 행위는 곧 아버지의 행위요, 아들의 심판은 곧 아버지의 심판입니다.  즉, "너희가 나를 거부하고 죽이려 하는 것은, 나와 완벽한 하나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거부하고 죽이려 하는 것"이라는 엄위한 선언입니다.

 

3.   백보좌 심판(계 20:11-15)과 연결되는 ‘가장 공의로운 심판’의 자격

 

요한계시록 20장의 백보좌 심판대 앞에서는 인류의 모든 숨겨진 행위와 책들이 낱낱이 드러나며 철저한 공의의 심판이 집도됩니다.  예수님이 그 두려운 백보좌에서 최종 심판주로 앉으실 수 있는 자격이 바로 오늘 본문 요한복음 5장 30절의 대답에 있습니다.

 

인간 심판의 한계: 인간의 심판은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옵니다.  아무리 공정하려 해도 개인의 감정, 편견, 이기적인 목적, 시대의 관례가 섞이게 마련입니다.

 

주님 심판의 완전함: 그러나 예수님의 심판은 자기 생각이나 야망이 단 1%도 섞이지 않은, 오직 보내신 아버지의 뜻과 일치된 심판입니다.  자기 의가 전혀 없는 완벽한 비워짐(무능의 선언) 상태이시기에, 주님의 심판은 백보좌 위에서 그 누구도 변명하거나 토를 달 수 없는 가장 순전하고 공의로운 최종적 마침표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 제자의 삶을 향한 교훈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선포하신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가장 안전하고 당당한 제자도의 비밀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람들의 평판에 흔들리고, 내 손으로 타인을 쉽게 정죄하며, 사역과 경건 생활에서 쉽게 지치는 이유는 여전히 내 삶과 행동이 ‘내 자신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보여주신 모범처럼, "나는 주님 없이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라는 철저한 자아의 깨어짐을 고백할 때, 역설적으로 우리는 유대인들의 살기 앞에서도 평안하셨던 주님의 그 거룩한 담대함과 가장 공의로운 생명의 역사를 일상 속에서 흘려보내게 될 것입니다(인터넷).

 

·       여기서 저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예수님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동일본질)’으로 삼았기 때문이다(18절)라는 것과  19절과 30절의 선언은 "나는 하나님과 분리되어 내 마음대로(스스로) 행동하는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라는 강력한 변증이라는 것이 매우 흥미롭습니다.  요한일서 2장 22-23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유대인들은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을 분리하여 자기들 마음대로 생각하고 믿고 확신하였기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고 생각됩니다.  지금도 이렇게 유대인들처럼 생각하고 믿고 확신하는 “거짓말하는 자”들(요일2:22)이 얼마나 많을까요?  지금도 “하나님의 영”이 아닌 “적그리스도의 영”에 속아 넘어가 삼위일체론을 부인하면서 이단에 빠져 허덕이는 영혼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이 심각한 현실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     요한일서 2장 22-23절에서 사도 요한이 경고한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의 영[ψεύστης (프세우스테스) (거짓말쟁이)]”은 과거 서슬 퍼런 유대인들의 살기 속에 머물지 않고, 오늘날에도 삼위일체론을 교묘하게 왜곡하며 수많은 영혼을 파멸로 이끄는 이단의 모습으로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이 심각한 영적 현실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대처해야 할지 인공지능이 3가지 핵심 관점으로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a.   분리주의의 위험: “예수를 낮추면, 하나님도 잃어버립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치명적인 실패는 성부 하나님은 지극히 사랑하고 공경한다고 자부하면서도, 그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철저히 배척하고 분리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삼위일체론을 부인하는 이단들(예: 여호와의 증인, 이슬람, 혹은 예수님의 신성을 깎아내리는 자유주의 신학 등)의 수법도 이와 완벽하게 똑같습니다.

 

성경의 단호한 선언: 요한일서는 명확히 대못을 박습니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다’(요일2:23).

 

우리가 가질 시선: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와 별개의 독립된 피조물이나 선지자 중 한 명으로 낮추는 순간, 그들이 믿는다고 말하는 ‘하나님’은 성경의 진짜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들의 상상과 욕망이 만들어낸 우상에 불과합니다.  아들과 아버지를 분리하는 모든 사상은 영혼을 죽이는 ‘적그리스도의 영’의 역사임을 우리는 냉철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b.   기득권과 자아의 우상화: 이단성이 작동하는 심리적 본질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하나님을 굳이 분리하여 생각하려 했던 속내(요5:30)는, 그래야만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온 종교적 가이드라인과 영적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하심을 인정하면, 자신들이 쌓아 올린 안식일 전통과 율법의 지배 체제를 통째로 예수님 발 앞에 굴복시켜야 했습니다.

 

이단의 본질: 오늘날 이단에 빠지는 영혼들이나 이단 교주들의 본질도 이와 같습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거부하고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통제하고 조종하려 합니다.

 

우리가 가질 시선: 이단 문제는 단순한 지식이나 신학 이론의 논쟁이 아닙니다.  인간의 완악한 자아와 교만이 주님의 절대 주권 앞에 무릎 꿇기 싫어하는 영적 전쟁의 결과물임을 보아야 합니다.

 

c.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구체적인 태도와 책임

 

이 무겁고 심각한 영적 현실 앞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자리를 옮긴 우리는 방관자가 아닌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첫째, ‘교리의 뼈대’를 바르게 세우고 가르쳐야 합니다.

 

교회 안의 많은 성도가 삼위일체 교리를 그저 ‘이해하기 힘든 복잡한 신학’으로 치부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합니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와 교부들이 이오타(ι) 하나에 목숨을 걸었던 것처럼,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존립이 걸린 뼈대입니다.  성도들이 바른 교리의 전신갑주를 입지 못하면, 교묘하게 성경 구절을 들이대는 이단들의 미혹(적그리스도의 영)에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른 진리를 부단히 배우고 흘려보내야 합니다.

[설명: ‘이오타(ι) 논쟁’은 4세기 니케아 공의회 전후로, 예수님이 하나님과 ‘완전히 같은 분’인지 아니면 ‘비슷한 분’인지를 두고 목숨 걸고 싸운 삼위일체 정통 교리 수호 사건입니다.

발단: 아타나시우스를 비롯한 정통 교회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일 본질(호모우시오스, ὁμοούσιος)’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이단인 아리우스파는 예수님이 하나님과 ‘유사한 본질(호모이우시오스, ὁμοιούσιος)’을 가진 피조물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오타(ι)의 차이: 두 단어의 차이는 헬라어 알파벳 가장 작은 글자인 ‘이오타(ι)’ 딱 하나였습니다.  이 글자 하나가 들어가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닌 ‘비슷한 피조물’로 전락하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결론: 아타나시우스는 이 작은 글자 하나를 양보하지 않기 위해 평생 5번이나 유배를 당하면서도 끝까지 복음의 본질을 지켜냈습니다.

결국 기독교가 “예수님은 하나님과 ‘비슷한 피조물’이 아니라, 완전히 ‘같은’ 참 하나님이시다”라는 정통 삼위일체 진리를 확립하게 된 위대한 신앙의 사건입니다.]

 

둘째, 영적 소경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을 품고 기도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38년 된 병자가 걸어가는 생명의 역사 앞에서도 눈이 가려져 정죄만 일삼았습니다.  이단에 빠져 허덕이는 영혼들 역시 거짓의 영에 사로잡혀 참된 생명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불쌍한 영적 맹인들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향해 적대감과 비난의 돌을 던지기 전에, 38년 동안 썩어가던 나를 말씀 한마디로 살려내신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그들의 가려진 눈과 귀가 열려 ‘아들의 음성(요 5:25)’을 듣고 살아나도록 눈물로 중보해야 합니다.

 

결론: 아들을 시인하는 자의 당당함

 

세상에 아무리 수많은 거짓말쟁이(요일 2:22)와 미혹의 영이 판을 칠지라도, 우리에게는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있습니다: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23절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아버지와 본질이 완전히 같은 분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영광스러운 신앙의 정통 위에 서 있습니다.

 

이 확실한 복음의 안전지대 위에서, 오늘도 내 자신으로부터 시작하려는 모든 교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의 온전한 연합과 통치 아래서 참된 자유를 누리며 진리의 빛을 묵묵히 밝혀가는 우리 모두의 신실한 걸음이 되기를 기원합니다(인터넷).

 

·       여기서 저는 당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자신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스스로’ 가장 잘 지키고 있으며, 그 율법의 잣대로 다른 사람들을 심판할 자격이 있다고 믿었기에 자기들의 지혜와 전통(가이드라인)을 기준으로 삼아 예수님을 안식일 파괴자요 신성모독자로 ‘스스로’ 정죄했을 때 주님은 "나는 내 자신으로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하심으로써, 역설적으로 유대인들이 행하는 모든 종교적 행위와 정죄가 100% ‘그들 자신으로부터’ 나온 독선이자 교만임을 폭로하셨다는 것이 충격적이면서 또한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종교적 행위와 정죄”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나온 독선이자 교만임을 들춰내시는 것이란 생각에 두렵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     사람이 만든 신앙의 가이드라인 뒤에 숨어서 "나는 이만큼 주일을 잘 지키고, 묵상도 깊이 하니 의롭다"고 생각했던 유대인들의 종교성이 실상은 100% ‘그들 자신으로부터’ 나온 무서운 독선이자 교만이었다는 주님의 고발은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은 철퇴로 다가옵니다.  내 자신으로부터 시작되는 위선과 판단의 자리에서 벗어나, 가장 공의로우신 백보좌 심판주 앞에 정직하게 서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인공지능이 3가지 실천 방향을 제안한 것입니다(인터넷):

 

a.   [멈추기] ‘내 힘으로 증명하려는 종교성’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꾸 타인을 정죄하고 나만의 신앙 가이드라인을 고집하는 이유는, 내 행위와 열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나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해 내려는 율법적 본능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실천 방법: "내가 오늘도 주일을 거룩하게 지켰고, 기도를 이만큼 했으니 괜찮은 그리스도인이다"라는 인과응보적 안식일 개념(종교적 자기만족)을 즉시 멈추어야 합니다.

 

나의 어떠한 노력이 아니라, 허물과 죄로 이미 영적 시체였던 나를 아무 조건 없이 그리스도와 함께 통째로 살려내신(엡 2:5) 십자가의 '거저 주신 은혜'만을 내 인생의 유일한 자랑거리로 삼아야 합니다.  내가 0(Zero)이 될 때, 내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독선이 비로소 힘을 잃기 시작합니다.

 

b.   [바라보기] ‘내 뜻’을 구하는 기도를 ‘주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로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심판이 완벽하게 의로웠던 비결은,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판단의 기준인 ‘내 뜻’을 완전히 비워내고 오직 ‘아버지의 뜻’만 구하며 들으셨기 때문입니다(요5:30).

 

실천 방법: 기도의 자리나 묵상의 시간에 내가 원하는 가이드라인을 주님께 밀어붙이며 "여기에 복을 주십시오"라고 떼쓰는 인위적인 노력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기도의 시작을 항상 "주님, 저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 삶의 현장에서 행하시는 주님의 일들을 보게 하시고, 주님의 세미한 음성에만 반응하게 하소서"라는 무능의 고백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내 판단과 기준을 주님 앞에 먼저 꺾을 때, 우리는 사람들을 정죄하는 재판관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습니다.

 

c.   [행하기] 내 곁의 형제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대하듯’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앞서 묵상했듯이, 내 눈앞에 있는 형제(이웃)를 미워하고 용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사망의 감옥에 머물러 있는(요일 3:14) 거짓말쟁이의 상태입니다.

 

실천 방법: 내 손에 쥐어진 다른 사람을 향한 판단과 정죄의 돌을 즉시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영혼을 향해 주님의 눈물과 긍휼(아가페)의 손을 뻗어야 합니다.

 

내 곁의 연약한 지체, 혹은 나에게 상처를 준 인물을 바라볼 때 "왜 저 사람은 저 모양인가"라는 내 자신으로부터 나온 자로 채점하지 마십시오.  보이지 않는 주님을 공경하듯, 그 형제를 주님의 마음으로 용서하고 귀하게 여기는 구체적인 사랑의 행동을 일상에서 실천해 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생명으로 옮겨진 진짜 증거입니다.

 

결론: 두려움에서 참된 자유로

 

주님이 내 안의 종교적 위선을 들춰내실 때 느껴지는 영적인 두려움은, 우리를 파멸시키려는 두려움이 아닙니다.  우리를 옥죄고 있던 율법의 무거운 침상을 내려놓고, 주님이 주시는 복음의 참된 자유와 생명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하시려는 창조주 아버지가 주시는 '거룩한 떨림'입니다.

 

"나는 내 자신으로부터 아무것도 스스로 행할 수 없다" 하신 주님의 완벽한 비워짐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인간이 만든 조잡한 전통과 내 자아의 교만이라는 감옥에서 걸어 나와, 오직 나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에만 굴복함으로써, 매일의 일상 속에서 흠 없는 주님의 의로우심과 평안을 누리는 진짜 자유인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인터넷).

 

(2) 둘째로, 저는 예수님께서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ὅτι οὐ ζητῶ τὸ θέλημα τὸ ἐμὸν ἀλλὰ τὸ θέλημα τοῦ πέμψαντός με (호티 우 제토 토 텔레마 토 에몬 알라 토 텔레마 투 펨프산토스 메)](요5:30)라고 하신 말씀을 묵상할 때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가 생각났습니다: “…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 Πάτερ μου, εἰ δυνατόν ἐστιν, παρελθάτω ἀπ᾽ ἐμοῦ τὸ ποτήριον τοῦτο· πλὴν οὐχ ὡς ἐγὼ θέλω ἀλλ᾽ ὡς σύ (파테르 무, 에이 뒤나톤 에스틴, 파렐다토 아프 에무 토 포테리온 투토, 플렌 우크 호스 에고 텔로 알 호스 쉬)](마26:39).  저도 예수님을 본받아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습니다’라고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는 삶을 살면서 더 나아가 ‘나를 보내신 주님의 뜻대로 하려 합니다’라는 결심과 고백속에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드려야 하는데 그리하지 못하는 무능력함 속에서 무기력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새찬송가 549장 “내 주여 뜻대로” 가사가 생각났습니다: (1절)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2절)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3)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아멘.  저는 이 찬송가의 배경 이야기인 17세기 독일의 경건한 목회자였던 벤자민 슈몰크(Benjamin Schmolck) 목사 부부가 화재로 두 아들을 동시에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주여 뜻대로”라는 주님께 순종이 담긴 찬송을 드렸다는 사실을 묵상할 때 열 명의 자녀를 하루아침에 모든 잃는 참혹한 재앙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엎으려 예배(찬양)을 드렸던 욥이 생각났습니다(욥1:20-22).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a) 오늘 본문(요 5:30)에서 예수님은 “나는 나의 뜻을 구하지 않는다”고 하셨고, 겟세마네(마 26:39)에서는 “나의 원(뜻)대로 마시옵고”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슈몰크 목사 부부와 욥의 처절한 고백(욥 1:20-22)처럼, 내 뜻이 완전히 꺾이고 주님의 뜻 앞에 나를 온전히 던지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인공지능이 3가지 신앙적 위로와 방향을 제안한 것입니다(인터넷):

 

1.   무기력감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철저한 무능(Zero)’을 믿음으로 고백하십시오.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해 무기력함을 느끼는 이유는, "내 힘과 결단으로 주님의 뜻을 행해 드려야지"라는 주도권이 여전히 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 사실: 주님은 이미 요한복음 5장 19절과 30절 상반절에서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οὐδέν (우덴) (Zero)]"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조차 인간의 육신을 입고 계실 때 하나님 아버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스스로의 결심으로 주님의 뜻을 살아드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 무기력감이 찾아올 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 자리에서 "주님, 그렇습니다.  나는 주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이 단 1%도 없는 영적 시체입니다"라고 나의 철저한 무능을 정직하게 대면하고 고백하십시오.  내 의지가 바닥나는 그 자리가 바로 주님의 능력이 시작되는 자리입니다.

 

2.   ‘내 뜻을 꺾는 노력’을 멈추고, ‘내 뜻보다 크신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십시오.

 

욥이 열 자녀를 잃고도 예배할 수 있었던 비결이나, 슈몰크 목사가 두 아들을 화재로 잃고도 "내 주여 뜻대로"를 찬송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들의 종교적 의지나 인내심이 강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영적 사실: 그들은 내 뜻과 계획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절망의 순간에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절대적인 주권(사랑)을 끝까지 신뢰했습니다.  내 뜻을 꺾으려고 억지로 주먹을 쥐는 인위적인 노력은 우리를 지치게 할 뿐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내 뜻대로 하지 말아야지"라는 소극적인 싸움을 멈추고, "하나님 아버지는 언제나 옳으시며,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신다"는 그분의 인격과 사랑을 바라보십시오.  내 짧은 생각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고난과 아픔 속에서도, 나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단번에 옮기신(요5:24)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묵상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내 뜻을 꺾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내 삶을 ‘맡겨드리는(Surrender)’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3.   내 힘으로 행하려 하지 말고, ‘내 안에서 일하시는 성령(롬 8:11)’께 항복하십시오.

 

우리는 이미 묵상을 통해 위대한 구원의 교리를 배웠습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성령)이 지금 우리 안에 거하고 계십니다(롬8:11).

 

영적 사실: 주님의 뜻대로 살아드리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5:17)"고 하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일상도 내 열심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쉬지 않고 생명의 역사를 집도하시는 주님의 일하심에 나를 태우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매일 아침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라는 찬송의 가사처럼, 나의 생각, 감정, 오늘 하루의 스케줄의 주도권을 주님께 완전히 양도(항복)하는 연습을 하십시오.  내가 일하려 하지 말고,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일하시도록 나를 기도의 여백으로 비워드릴 때, 무기력감은 사라지고 주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그와 같이 행함(19절)’의 열매를 보게 될 것입니다.

 

결론: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제가 느끼는 무능력함은 영적 침체가 아니라, 주님의 뜻을 너무나 사모하기에 겪는 거룩한 성장통입니다.  욥이 고난의 잿더미 위에서, 슈몰크 목사가 화재의 잔해 위에서 고개를 숙여 예배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는 내 무능함의 자리에서 고개를 숙여 주님의 절대 주권을 찬양하면 됩니다.

 

"나는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오직 내 안에 계신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이 완전한 항복의 고백을 가지고, 오늘도 내 뜻이라는 좁은 감옥을 깨부수고 온 피조 세계의 완전한 통치자이신 주님의 광활한 뜻 위에 인생을 평안히 맡겨드리는 진짜 자유인의 걸음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인터넷).

 

(3) 마지막 셋째로, 저는 오늘 본문 요한복음 5장 30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주님의 “심판”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καθὼς ἀκούω κρίνω (카토스 아쿠오 크리노)],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ἡ κρίσις ἡ ἐμὴ δικαία ἐστίν (헤 크리시스 헤 에메 디카이아 에스틴)].  저는 이 말씀을 요한계시록 20장 11-12절 말씀과 연관해서 함께 묵상하고자 합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Καὶ εἶδον θρόνον μέγαν λευκὸν καὶ τὸν καθήμενον ἐπ᾽ αὐτοῦ καὶ βιβλία ἠνεῴχθησαν, καὶ ἄλλο βιβλίον ἠνεῴχθη, ὅ ἐστιν τῆς ζωῆς (카이 에이돈 드로논 메간 류콘 카이 톤 카데메논 에프 아우투 카이 비블리아 에네오크데산, 카이 알로 비블리온 에네오크데, 호 에스틴 테스 조에스)].  이 말씀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은 무엇일까요?  주님의 뜻을 구하는 우리가 겸손히 받아 실행해야 할 교훈은 무엇일까요?

 

(a) 요한복음 5장 30절의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 하신 주님의 음성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 종착지인 요한계시록 20장의 ‘백보좌(크고 흰 보좌) 심판’을 한눈에 비추는 가장 장엄하고도 엄위한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심판이 그토록 완벽하게 의로운 이유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이 아닌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듣는 대로’ 집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기준은 백보좌 앞에서도 한치의 오차 없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이 두 본문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겸손히 듣고 삶 속에서 반드시 실행해야 할 3가지 영적 교훈과 주님의 음성을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세상의 소음이 아닌, 아들의 음성에만 주파수를 맞추라"

 

예수님은 사서함처럼 자기 뜻을 고집하지 않으시고, 아버지께 ‘듣는 대로’ 심판하십니다.  이처럼 완전하신 재판장 앞에서는 모든 인간의 위선과 핑계가 완전히 발가벗겨집니다.  요한계시록 20장 12절의 말씀처럼, 그 엄위한 보좌 앞에서는 큰 자나 작은 자나 예외 없이 ‘책들에 기록된 대로(자기 행위를 따라)’ 정직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실행할 교훈: 일상을 살아가며 우리를 흔드는 세상의 수많은 소음, 사람들의 평가, 혹은 사탄이 던지는 정죄의 소리에 귀를 빼앗기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 날 백보좌 앞에서 들릴 유일한 소리는 오직 주님의 음성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날마다 말씀과 묵상의 자리를 펴고, 주님이 들려주시는 세미한 음성에 내 영혼의 주파수를 맞추는 ‘듣는 훈련’을 평생 겸손히 실행해야 합니다.

 

2.   "내 손에서 ‘판단과 심판의 자’를 완전히 부러뜨리라"

 

예수님의 심판만이 유일하게 의롭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기 뜻(개인의 감정, 야망, 유익)을 단 1%도 섞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반면, 인간의 심판과 정죄는 언제나 100%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기에 결코 의로울 수 없습니다.

 

우리가 실행할 교훈: 우리가 일상생활이나 신앙의 자리에서 이웃을 내 좁은 기준으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행위는, 백보좌에 앉으실 주님의 고유한 심판 권한을 찬탈하는 무서운 교만입니다.

 

내 생각과 감정이라는 굴절된 렌즈로 타인을 재단하려 했던 모든 시도를 즉시 멈추어야 합니다.  내 손에 쥐어진 판단의 칼과 정죄의 돌을 십자가 앞에 완전히 내려놓고, "재판장은 오직 주님 한 분뿐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영적 겸손을 오늘 실행해야 합니다.

 

3.   "흔들리지 않는 ‘생명책’의 안식을 누리라"

 

요한계시록 20장 12절은 두려운 행위의 책들 옆에 ‘또 다른 책인 생명책’이 펴져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생명책은 요한복음 5장 24절에서 주님이 약속하신 구원의 완료형 사건, 곧 “내 말을 듣고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는 선언의 장부입니다.

 

우리가 실행할 교훈: 백보좌 심판은 주님의 음성을 거부하고 여전히 사망의 감옥에 머물러 있는 자들에게는 까무러칠 정도로 무서운 파멸의 날이지만,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우리에게는 눈물과 탄식이 끝나고 완전한 몸의 속량(부활)이 완성되는 영광의 날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구원의 확실성을 가진 자답게, 미래의 심판을 두려워하며 벌벌 떠는 종교적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를 조건 없이 살려내신 주님의 은혜 안에서 완전한 평안과 안식을 누리며, 오늘 내게 주어진 삶을 당당하고 기쁘게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 백보좌 위에서 나를 보며 미소 지으실 분

 

요한복음 5장 30절과 요한계시록 20장 11-12절이 주는 가장 깊은 위로는, 장차 그 크고 흰 백보좌 위에서 온 피조 세계를 엄위하게 심판하실 재판장이, 다름 아닌 베데스다 연못가에 누워 썩어가던 나를 아무 조건 없이 찾아와 말씀 한마디로 고쳐주시고 살려내신 나의 구원자 예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분은 나의 모든 연약함을 인간의 몸으로 친히 체휼하셨기에, 우리의 행위를 고발하는 책이 아니라 나를 위해 흘리신 당신의 십자가 보혈의 피로 덮인 ‘생명책’을 보시며 우리를 품어주실 것입니다.

 

이 장엄한 부활과 심판의 비전을 가슴에 새기고, 오늘도 내 자신으로부터 나오려는 온갖 독선과 판단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오직 주님의 음성에만 귀 기울이고 내 곁의 형제를 아낌없이 사랑하는 진짜 생명의 삶을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원합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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