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콩가루 집안들이 모인 곳이 바로 오늘 날 교회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교회도 콩가루 교회입니다.
입술로는 우리가 “주여 주여”하면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주님으로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말하고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회가 어떻게 성령 안에서 하나됨을 지켜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다툼과 싸움과 시기와 질투, 분쟁과 분열이 있는 교회, 그리고 미가처럼 교회의 헌금을 도덕질하는 목사나 장로나 안수집사 등등 도덕과 윤리가 없고 질서와 평화가 없는 교회, 콩가루 교회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왜 하나님의 교회가 이지경까지 된 것입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제 생각엔 제일 큰 문제는 바로 삯군 목사들입니다(참고: 요10:12-13).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 떼들을 사랑하기보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우리 목사들 때문에 교회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에 이끌림을 받아야 할 우리 목사들이
사례비를 더 많이 주는 더 큰 교회로 가는 것을 마음에 기뻐하기에
오늘날 교회가 콩가루 교회가 된 것입니다.
미가가 세운 레위 소년 제사장을 보십시오.
그는 미가가 고용한 사람이이습니다(삿18:4 “고빙”). 미가가 그를 자기의 제사장을 삼고자 “해 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겠다고 하니까(17:10) 그 레위인은 미가와 함께 거하기를 “만족히” 여겼습니다(11절).
그러다가 단 지파가 라이스란 땅(18:7)을 기업으로 삼고자 자기 온 가족 중 용맹있는 다섯 사람들을 보내어 그 땅을 살펴보고 돌아와 단 자손 육백 명을 데리고 다시 미가의 집에 이르러(13, 15절) 들어가 미가의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취한 후(17절) 레위 소년에게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 한 지파, 한 가족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어느 것이 낫겠느냐”(19절)고 말했을 때 그 레위 제사장은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취하고 그 백성(단지파) 중으로 들어”갔습니다(20절).
삯군 제사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가에게 고용되었다가 단 지파에 고용된 이 레위 제사장을 생각할 때 오늘 날 우리 목사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그 은혜와 사랑에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어디로 간 것입니까? 하나님의 첫사랑을 체험했을 때 흘렸던 그 뜨거운 헌신의 눈물이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에 불타오르던 그 심장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목사로서 먹고 살기 힘들다고 단지파가 기업으로 삼고자 한 라이스란 땅처럼 “한가하고 평안”하고(7절) “세상에 있는 것이 하나도 부족함이 없”는(10절) 매우 좋아보이는(9절) 목회지 찾기게 눈을 부릅뜨고 지금 기도하고 있다는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면서 왜 자꾸만 “하나님의 뜻”이라고 성도님들에게 함부로 말하는 것입니까? 솔직하게 욕심이 나서 큰 교회에 가서 큰 목회를 하고 싶다고 말하지…. ‘내가 그렇게 큰 교회 목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큰 교회로 사역지를 옮기는 것이다’라고 솔직하게 자신의 교만함도 드러내시지 왜 이런 저런 핑계아닌 핑계로 더 크고 더 사례를 많이 주는데로 사역지를 옮긴다고 우리는 고백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과 사명에 이끌림을 받지 않는 우리 삯군 목사들 때문에 교회는 콩가루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러한 목회자에게 무슨 진리의 말씀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진실되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주일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가 성도님들에게 어떻게 은혜가 될 수가 있겠습니까?
단 지파의 다섯 정탐꾼들이 미가의 집에 이르러 미가의 제사장 레위 소년에게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물어보아서 우리의 행하는 길이 형통할는지 우리에게 알게하라”(5절)고 말했을 때 그 레위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평안히 가라 너희의 행하는 길은 여호와 앞에 있느니라”(Go in peace; your way in which you are going has the LORD'S approval)(6절).
어떻게 삯군 제사장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기대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참 두렵고 무서운 것은 미가의 제사장 레위인이 단 지파 그 다섯 정탐군에게 한 말(6절)되로 주님께서 우상을 섬기는 단 지파를 인정(approval)하신 것처럼 단 지파는 라이스란 땅을 차지하여 자기들의 기업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27-29절).
참으로 놀랍고 두려운 것은 주일 강단에서 삯군 목사가 축복의 메시지를 전할 때 성도님들이 은혜(?)를 받고 그 축복이 자신들의 삶 속에 이뤄지는 것을 보고 “할렐루야!” 외치면서 감사 찬양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절대 축복이 아닌데 말입니다.
더 두렵고 떨리는 것은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을 동안에 미가의 지은바 새긴 신상이 단 자손에게 있었”던 것(31절)처럼 지금 하나님의 집인 교회 안에는 하나님과 우상이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예(숭)배하며 섬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콩가루 교회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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