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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otional Reflection Based on the Incident of Peter Cutting Off Malchus's Ear:

Devotional Reflection Based on the Incident of Peter Cutting Off Malchus's Ear: “Then one of those standing near drew his sword and struck the servant of the high priest, cutting off his ear.” ( Mark 14:47, Today's Korean Version ) 1. Identifying the People Involved: The person who stood beside Jesus and drew the sword was Simon Peter . The servant of the high priest was named Malchus . “Then Simon Peter, who had a sword, drew it and struck the high priest’s servant, cutting off his right ear. The servant’s name was Malchus.” ( John 18:10 ) 2. Jesus' Response to Peter's Action: (a) Jesus said: “Permit even this.” ( Luke 22:51, KJV: “Suffer ye thus far”; RSV: “No more of this” ) The Greek words clarify this: “ἕως τούτου” (“heōs toutou”) = “up to this point” or “even this” “ἐᾶτε” (“eate”) = “allow it,” “let it be,” “leave it alone” Therefore, Jesus is essentially saying: “Let them do what they are doing. Do not resist any further.” “If ...

죽을 각오를 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주님의 종은 말릴 수가 없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주님의 종은 말릴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바울은 '왜 이렇게 울면서 내 마음을 아프게 하시오나는 주 예수님을 위해 예루살렘에서 묶이는 것뿐만 아니라 죽는 것도 각오하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아무리 말려도 듣지 않으므로 우리는 주님의 뜻대로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고서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사도행전 21 13-14)

 

 

      오늘 새벽에 미국에 와서 제일 먼저 알게된 38년 넘게 아는 친구의 15살 밖에 안된 막내 아들의 사망 소식을 접했습니다.  그 소식을 접한 후 저는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로 친구 부부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이 함께 하시길 기원한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친구에게 두 부부가 보여준 믿음의 본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친구 형제에게 그의 사랑하는 막내 아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그리 말한 이유는 지난 번 친구를 만나서 그의 아들에게 대하여 들은 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친구를 통해 그 친구의 아들이 암으로 인해 방사선 치료를 받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에서도 눈물을 흘린 이유가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고(displeased) 오히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싶어서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말을 친구를 통해 들었을 때 참 귀한 마음을 가진 친구의 아들의 믿음에 놀랬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귀한 믿음의 아들을 먼저 떠나 보낸 친구 부부가 SNS에 남긴 믿음의 고백의 글을 읽으면서 그 부부가 보여준 믿음의 본에 감사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그 부부의 마음을 붙잡아 주시고 그 부부의 마음에 평강(peace)을 주시니 그저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늘 새벽기도회 때 사도행전 21 13절 말씀을 읽고 그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바울이 대답하되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하니.”  저는 어젯밤 오늘 새벽기도회 때 읽을 사도행전 21장과 22장을 읽기 시작하다가 오늘 본문 21 13절과 연관해서 21 4절과 11절 말씀을 읽으면서 좀 의아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이 두로에서 7일 동안 머물러 있었을 때 거기에 있는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4두로를 떠나 돌레마이에 이르러(7거기서 여러 날 머물고 있었을 때 유대로부터 내려온 아가보란 선지자가(10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 수족을 잡아매고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 주리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11).  분명히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4), “성령이 말씀하시되”(11)라고 말씀하고 있고 그 말씀 내용의 요점은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할 것이기에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는 것인데(4, 11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죽을 것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겠다고 말한 것입니다(13).  좀 의아하지 않나요?  두로에 있는 제자들이 분명히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말했고(4성령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아가보 선지자를 통해서도 또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분명히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할 것이라고 말했고(11그 말을 들은 우리가  …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했는데(12어떻게 바울은 죽을 각오를 하면서까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한 것일까요?  왠지 이 말씀들을 읽을 때 바울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르지 않는 것 같고 오히려 성령님을 거슬려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까지 들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근거는 사도행전 16장에서 사도 바울과 그의 일행인 실라와 디모데가 바울의 제2  선교 여행을 시작하면서 복음 전파를 위해 아시아로 가서 말씀을 전하려고 했었지만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고[“성령님이 아시아에서 말씀 전하는 것을 막으셨고(현대인의 성경)](16:6) 그래서 그들이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썼지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셨다[“성령님이 그것을 허락하시지 않았다”(현대인의 성경)]는 것입니다(7).  이 사도행전 16장의 말씀을 보면 성령님께서 사도 바울의 그의 일행의 선교 여행을 인도하심에 있어서 막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사도행전 21장 문맥에서 두로에 사는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한 것과(4선지자 아가보가 성령이 말씀하시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고 말씀하신 것(11)을 듣고 우리가 …  그 곳 사람들과 더불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한 것(12)을 성령님께서 바울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막으시는 것은 아니가 라는 생각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아가보 선지자를 통하여 성령님의 말씀을 들은 우리는 그 곳 사람들과 함께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눈물로 권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2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고 말한 것입니다(13).  저는 그들의 눈물을 생각할 때 사도행전 20장에서 사도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20:17) 고별 설교를 한 후(18-35바울은 그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하였을 때 다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췄다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37).  에베소 교회 장로들이 그리 크게 울었던 이유는 다시는 바울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라는 말 때문이었습니다(38현대인의 성경).  그런데 오늘 본문 사도행전 21장에서도 둘에마이에서(21:7) 아가보 선지자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눈물로 권한 것입니다(11-12현대인의 성경).  이러한 작별의 눈물은 사도 바울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13).  이렇게 우리의 울음은 상대방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결박 당할 뿐만 아니라 죽을 것도 각오했습니다(13).  결국 아무리 말려도 바울이 듣지 않으므로 그들은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 지이다라고 말하고서 더 이상 바울을 말리지 않았습니다(14). 

 

그렇다면 저의 질문은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주님의 뜻인가요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이 주님의 뜻인가요?  달리 질문한다면바울이 두로에 사는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말한대로 예루살렘으로 가지 마는 것(4)과 바울의 일행인 실라와 디모데 및 돌레마이에 있는 형제들이 아가보 선지자를 통하여 성령님의 말씀을 듣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말(11-12)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는 것이 주님의 뜻인지 아니면 바울이 죽을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인지 무엇이 주님의 뜻인가요?  저는 이 질문을 제 자신에게 던지면서 좀더 말씀을 묵상하며 생각할 때 먼저 성령님께서는 사도 바울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을 막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돌레마이에서 선지자 아가보가 전한 성령님의 말씀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장차 일어날 일이 유대인들이 바울을 결박할 것이라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11).  그 성령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바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면한 것이구요(12).  이러한 관점에서 사도행전 21 4절에서 두로에 사는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는 말씀한 것도 생각할 때 그 제자들이 성령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바울에게 말했다기 보다 동일한 성령님이 아가보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그 제자들에게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장차 일어날 일(결박)을 말씀하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 말씀에 그 제자들의 반응이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한 것이라 생각합니다(4).  한 마디로주님의 뜻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확실한 증거는 바로 사도행전 20 22-23절입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현대인의 성경) “지금 나는 성령님의 인도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입니다만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모릅니다.  다만 내가 한 가지 아는 것은 어느 도시에서나 투옥과 고난이 나를 기다린다고 성령께서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성령님은 사도 바울에게 어느 도시에서나(예루살렘도 포함해서투옥과 고난이 나를 기다린다고 말씀해 주신 것(23)이지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라고 말했습니다(22현대인의 성경).  주님의 뜻은 바울이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도 바울은 그리도 울면서까지 형제들이 자기가 성령님의 인도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것을 말리는데도 불구하고(21:4, 14, 현대인의 성경죽을 각오를 하면서까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려고 한 것일까요?  저는 그 대답을 사도행전 20 24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자기 생명(목숨)보다 주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귀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자만이 자기의 생명을 걸며 죽을 각오를 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주님과 주님의 뜻을 따르는 주님의 종은 죽을 각오까지 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한 주님의 종은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주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마침에 있어서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십자가에 보배롭고 존귀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를 아는 주님의 종은 자기의 생명을 다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헌신한 자입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주님의 종은 교회 식구들 뿐만 아니라 가족 식구들이 말려도 멈추지 않고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사명감에 불타올라 가야할 길을 계속 걸어갈 것입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고자 하는 주님의 종은 말릴 수가 없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온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 간 주 인도하시고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큰 근심 중에도 낙심케 마소서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날 주관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내 모든 일들을 다 주께 맡기고

저 천성 향하여 고요히 가리니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

 

                        [새찬송가 549장 내 주여 뜻대로”]

 

 

 

주님께서 1987 5월 교회 대학부 수련회 때 들려주신 요한복음 6 1-15절 말씀에 끝까지 묵묵히 순종하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8 11 20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6:48)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면서(1;2) 그 말씀묵상을 계속해서 나누므로(6:11)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길 기원하면서(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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