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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아들을 내주신 이 (롬8:32)

  https://youtu.be/9tJxsCkB1dc?si=yoecT3l2ALBPh1Wa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사도행전 2장 37-41절)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사도행전 2 37-41절 말씀 묵상]

 

달라스 윌라드의 “마음의 혁신”(Renovation of the Heart)이란 책을 보면 “내적 변화 없이 행동을 바꾸려는 노력은 헛수고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적 변화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행동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예를 들어서 요즘 많은 교회가 교회의 소프트웨어보다 하드웨어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교회문화 연구소 홈페이지(2002.7.11):“’판’이 바뀌었다”란 인터넷 기사를 보면 세상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한 10가지로 이의용씨가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셋째 변화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에로의 변화입니다.  피아노를 하드웨어라면 악보는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얼마나 크고 성능이 좋은 피아노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피아노를 연주하는 방법악보 같은 것이 더 중요하게 됐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한 시대가 온 것입니다.  컴퓨터 소프트웨어 상품을 만드는 데는 넓은 사무실이나 재료가 그다지 들지 않습니다.  컴퓨터 몇 대와 훌륭한 두뇌가 일할 공간만 있으면 됩니다.  기독교는 원래 소프트웨어의 종교이지하드웨어의 종교라고 할 수 없습니다그런데도 요즘 교회는 하드웨어에 더 큰 관심을 갖는 것 같습니다.  교회 건물실내장식부동산 같은 것보다 사람들의 영혼을 향한 가르침과 거기에 담긴 보이지 않는 기독교적 문화요소가 더 중요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기독교적 문화요소”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면 과연 우리는 보이지 않는 내적 변화에 얼마나 초점을 맞추어 씨름하며 몸부림치며 하나님께 간구하는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적변화로부터 오는 행동의 변화의 열매를 맺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이러한 열매를 맺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적변화가 결핍된 행동의 변화의 열매만 있는 것은 아닌지요??  아니면 이러한 열매 조차도 없는 것은 아닌지요?  달란스 윌라드는 “내적 변화에 대해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부드럽고도 엄한 내적 변화의 과정은 우리 영혼과 주변 세계에 거하시는 하나님 은혜의 임재를 통해 시작되고 지속된다.  과연 우리는 이 한해를 뒤돌아보면서 적어도 예배 가운데 하나님 은혜의 임재를 통해 내적 변화를 경험하였습니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대는 패역한 세대(perverse generation)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패역한”(perverse)란 말은 “곧은/똑바른/일직선의”(straight)의 반대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굽은만곡한뒤틀린”(crooked)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뒤틀린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뒤틀린 마음과 뒤틀린 생각뒤틀린 행동들이 판을 치는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뒤틀린 마음과 생각 가운데서 뒤틀린 말과 행동들이 자행자해되고 있습니다.  한 예를 들어 금요일에 들은 뉴스를 보면 한국에 황교수의 일로 설문조사를 한 것 있나본데 그 설문에 응답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진실(윤리)보다 국익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택의 잣대 혹은 기준이 뒤틀려 있습니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 못되었는지를 자기의 또는 국가의 유익이란 관점에서 판단을 하는 것입니다.  개별성을 강조한다는 포스트모던니즘 시대에 사람들은 상대론주의(relativism)에 빠져서 각자가 보기에 옳은대로 선택하고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 40절에서 사도 베드로가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2가지로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는 말씀에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 크리스찬들은 무엇에 반응하고 무엇에 무반응해야 하는지 혼돈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시 말한다면우리의 ‘영적 반응/무반응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는 듯 합니다.  예를 들어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에 반응하기보다 세상의 염려와 물질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소화기계의 면역 무반응에 관여하는 세포 규명”(서울대 강창율 교수)란 인터넷 기사를 보면 우리 몸에 “면역 반응”(immune response) “면역 무반응”(immunological  tolerance)이라는 상태가 있다고 합니다.  면역 반응(immune response)이란 “외부에서 우리 몸으로 들어오는 물질에 대한 면역계의 반응은 크게 해로운 물질을 제거하기 위해 면역 세포가 공격을 가하는 상태를 말하고 면역 무반응(immunological tolerance)이란 무해한 물질에 대해 불필요한 면역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면역 무반응은 외부에서 들어온 항원이나 자신의 몸으로부터 유래한 항원(자가 항원)에 대해 면역 세포가 면역 반응을 일으키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어느 면으로 생각해 보면 지금 우리 안에 ‘영적 면역 반응’이 작동되어 세상에서 우리 마음으로 들어오는 해로운 사상들과 유혹들죄악된 것들을 면역 세포인 우리의 신앙이 공격을 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면역 무반응” 상태에 있지 아니한가 생각됩니다.  우리는 무엇에 반응해야 하며 무엇에 무반응해야 하는지 명백하게 구분해서 실천해 옮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 37절을 보면 베드로의 설교에 반응을 한 3000명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을 보였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 37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과연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였는가?   3 가지로 생각해 볼수가 있습니다:  첫째로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행전 2 41절을 보십시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  우리는 마음 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받아야 합니다.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길 가에 뿌리워져서도 아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하므로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았아 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돌밭에 뿌리워져서도 아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으므로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라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가시떨기에 뿌리워져서도 아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면 아니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좋은 땅”에 뿌리워져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결실해야 합니다(13:19-22).  둘째로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찔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41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 양심에 찔림(conscience-stricken)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때 우리 마음은 점점 더 강퍅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 농사를 부진런히 해야 합니다.  묵은 땅을 기경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 밭을 가꾸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마음에 단단한 부분들을 부서트려야 합니다.  괭이로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에 단단한 부분들이 부서지고 깨져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가 어찌할꾜”라고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받으므로 마음에 찔림이 있었다고 해도 행동으로 옮기고자 하는 결단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반응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령충만한 사도 베드로의 하나님 말씀 선포를 듣고 그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41마음에 찔림 속에서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었습니다(38).  이들은 선포된 말씀을 통하여 마음(양심)에 찔림을 그냥 무시하고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설교 시간에만 말씀에 양심이 찔리고 설교만 끝나면 그냥 그 전 모습대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선포된 말씀에 대한 반응 입니까?  과연 요즘 목사님의 하나님의 말씀 선포를 들은 후 그 목사님에게 “제가 어찌해야 합니까?’라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진정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신앙인들은 삶의 행동의 변화를 추구하는 자들임.  입술로만 변화를 외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포된 말씀에 적극적으로 또한 능동적으로 변화를 추구하고자 힘쓰고 애쓰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신앙인들이 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포된 말씀에 반응을 보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받아야 하며 그 말씀으로 하여금 내 마음과 양심에 찔림을 사모할지언정 거부하며 피하려고 하면 아니됩니다.  더 나아가서 그 말씀에 찔림 속에서 “내가 어찌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며 그 질문에 답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답에 순종하므로 삶에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 둘째로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우리는 죄 사함을 얻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 38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오순절 성령충만함 속에서 사도 베드로가 모인 무리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였을 때 그 말씀을 받고 마음에 찔린바 되었던 심령들이 다 함께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질문을 했을 때에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오늘 본문 38절에서 “죄 사함을 얻으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여기서 죄 사함을 받으라는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그 말씀은 다름이 아니라 회개하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는 말씀입니다[(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 ].  여기서 “회개”란 “마음의 변화”(박윤선)를 가리키는데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고 있는 무리들에게 제일 먼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죄 (36)를 회개하므로 더 이상 예수님을 미워하고 그를 주님과 그리스도이심(36)을 부인하지 말고 마음으로 그를 자신의 주님과 그리스도로 영접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회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음의 변화이지생각의 변화가 아닙니다.  참된 회개는 우리의 행동까지 변화를 일으킬 마음의 변화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사실은 진정한 마음의 변화가 없이도 행동의 변화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실제적으로 회개는 우리의 ‘옛 사람’에 대해 반대 입장에 서고대신에 하나님의 편에 우리 자신을 두는 것입니다(인터넷).  우리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하나님을 따르든지계속해서 우리 옛 행위를 고집하든지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유의부단해서는 아니됩니다.  이러한 결단은 하나님과의 관계 설정에 본질적인 마음의 변화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네 가지 요소가 참된 회개의 증거로 나타납니다지성의 변화감성의 변화의지의 변화그리고 행동의 변화.  또 한가지죄사함을 받으라는 말씀은 회개하라는 말씀과 더불어 ‘세례를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세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PCA The Book of Church Order 56장을 보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세례는 은혜의 언약에 인을 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지는 것이며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며죄 용서중생양자 됨과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는 인을 치는 것임을 의미한다.  “물로 뿌리거나 씻는 세례는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로 죄를 씻어 버리는 것을 의미하며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효능으로 죄를 억제하고 죄악에서 벗어나 새 생명으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회개한 후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만일 이미 죄를 회개한 후 세례를 받았다면 우리는 마음의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성의 변화감성의 변화의지의 변화그리고 행동의 변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달라스 윌라드는 그의 책 “마음의 혁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과 변화에서 우리가 바른 방향과 꾸준한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받는다면반드시 우리 내면은 그리스도를 닮는 쪽으로 점점 변화된다.  외면생활특히 행동의 변화는 자연히 따라온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하는 “꾸준한 행동” 중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받아야 하며 그 말씀에 내 마음과 양심이 찔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찔림 속에서 마음의 변화부터해서 행동의 변화까지 이끌어 내야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또 우리가 해야하는 “꾸준한 행동”은 회개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보면서 틀춰지는 죄들을 회개하므로 마음의 변화와 더불어 지성감성의지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는데 힘써야 합니다.

 

 

이 패역한 세대에 구원을 받길 원하는,

 

제임스 목사 나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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