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생각
[로마서 8장 5-8절]
성경 로마서 8장 5-8절을 보십시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여기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들은 “육신”(5번)과 “영”(3번)입니다. 여기에서는 5절과 6절 말씀만 묵상하겠습니다.
성경 로마서 8장 5-6절을 보면 “…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이란 성령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영을 따르는 자”란 ‘성령님을 따르는 자’를 말하며 “영의 생각”이란 ‘성령님의 생각’을 말합니다. 여기서 저는 한 3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성령님을 따르는 자는 어떠한 사람인가? (2) 성령님의 일은 무엇인가? (3) 성령님의 생각은 무엇인가?
첫째로, 성령님을 따르는 자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성령님을 따라는 자는 3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1) 성령님을 따르는 자는 육신에 속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육신에 속했던 사람이란 성령님을 따르는 자가 되기 전인 “한 사람으로 말 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던 때로서 (롬 5:12) 죄와 사망에 속했던 사람을 말합니다.
(2) 성령님을 따르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입니다.
성경 로마서 6장 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 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 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여기서 “옛 사람”이란 육신에 속한 사람이요 “죄의 사망의 법” 아래 있었던 사람을 가리킵니다(8:2). 즉, 우리가 예수님 을 믿기 전인 옛 사람이었을 때인 육신에 속해서 죄와 사망의 법아래 있었 을 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므로 우리의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의롭다 하심 을 얻고 죄에서 해방되어(6:7) 의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9절). 성경 고린도후서 5장 14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 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여기서 “한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 도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으므로 우리의 옛 사람, 즉 육신에 속한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이미 죽 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단번”에 죽으심입니다. 성경 로마서 6장 10-11절을 보십시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 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성경 히브리서 10장 10절을 보십 시오: “이 뜻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 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또 다시 속죄제나 화목제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 다.
(3) 성령님을 따르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사람입니다.
성경 로마서 6장 10-11절을 보십시오: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 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 는 자들입니다. 성경 에베소서 2장 1절을 보십시오: “그는 허물과 죄로 죽 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성경 고린도후서 5장 1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한 마디로, 성령님을 따르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 거듭난 자 또는 중생한 자입니다. 성령님을 따르는 자는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자입니다. 성경 로마서 8장 4절을 보십시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령님을 따라 행하는 우리가 성령님을 따른 자들입니다. 성경 갈라디아서 5장 25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현대인의 성경) “만일 우리가 성령님을 따라 산다면 그분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우리는 성령님을 따라 산다면 성령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함.
우리는 어떠합니까? 과연 육신에 속했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습니까? 과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까? 과연 우리는 거듭났습니까? 중생했습니까? 새 피조물(새사람)이 되었습니까? 과연 우리는 성령님을 따르고 있습니까? 성령님의 따라 행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육신을 따르고 있습니까?
둘째로, 성령님의 일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면, 성령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무엇입니까?
성령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십니다. 성경 요한복음 15장 26절을 보십시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보내심으로 성령님은 오셨습니다. 동시에 성령님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또한 기쁜 마음으로 스스로 오셨습니다. 성경 요한복음 16장 8절을 보십시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님은 오셔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거듭나게(중생케)하시고, 회개케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선한 싸움을 싸우게 하시고, 구원을 이루시며, 거룩케 하시사(성화),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고, 이끌어 세우시며, 안디옥 교회에서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워 파송하시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하신 것처럼 우리를 세우시고 파송하시사 복음을 널리 전하게 하십니다. 성경 요한복음 14장 12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성령님도 하실 것이요 또한 그 보다 “큰 일”을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경 사도행전 1장 8절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이 지상에 계실 때에 복음을 제한된 지역에서만 전하셨지만 성령님은 예를 들어 바울을 통해서만도 더 넓은 지역에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성령님께서는 많은 선교사님들을 사용하셔서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게 하고 계심. 심지어 성령님께서는 이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에도 인터넷을 통해서라도 복음을 여기저기에 전하게 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성령 충만하여 권능을 받아 예수님의 증인이 돼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면 어떠한 어려움과 역경과 방해와 핍박 가운데서도 순교자의 신앙으로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렇게 성령님께서는 “큰 일”을 하고 계십니다(요14:12). 성경 빌립보서 4장 13절을 보십시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마지막 셋째로, 성령님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성령님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성경 로마서 8장 6절을 보십시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여기서 “생명”은 무엇입니까? 성령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심. 성령님은 생명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롬8:2). “생명”이란 이 3가지입니다: (1) 생명이란 하나님과 감미로운 교통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죄를 범하기 전까지는 하나님과 감미로운 교통을 했습니다. 이것이 생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언약의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여 죄를 범하므로 하나님과의 그 교통이 단절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망입니다. (2) 생명이란 마음속의 하나님의 충분한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3)생명이란 하나님의 충만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롬5:2), 이것이 바로 생명입니다. 우리는 영광의 세계를 이를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보고 기뻐하는 것이 바로 생명(영생)입니다. 그러면 “평안”(8:2)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평안(또는 하나님과의 화목)입니다. 성경 로마서 5장 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면 마음에 평안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내 마음에 평안(평화)이 없다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지 못하고 있은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불만 속에서 불평과 원망을 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빼앗지 못합니다. 성경 요한복음 14장 27절을 보십시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께서는 평화가 없는 이 세상에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고자 오셔서 평화를 누리셨습니다. 우리도 환경이 좋아서, 건강해서, 모든 일이 잘 되서 평안한 것이 아니라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비록 이 세상에 근심된 일과 곤고한 일과 죄악 된 일과 죽은 일이 쌓였지만, 주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인해 우리는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새찬송가 486장,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우리는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다 주 예수 주신 평안함 늘 충만하도다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 나의 맘속이 늘 평안해 악한 죄 파도가 많으나 맘이 늘 평안해"를 찬양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주시는 평안 때문입니다(새 찬송가 408장, “나 어느 곳에 있든지”).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평화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화평(화목)하여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가운데서 이웃과도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평화의 사도가 되어서 평화의 사역을 잘 감당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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