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이유 (3)
[골로새서 1장 1-8절]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어떠한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저는 에베소서 2장8-9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현대인의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행으로 된 것이 아니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생각나는 성경구절이 바로 로마서 6장 23절,
현대인의 성경입니다: “죄의 대가는 죽음이지만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을 자격도 없는데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먼저 사랑해주셔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영원한 생명)을 받았다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범사에, 평생에 또한 영원히 하나님께 감사드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 자신을 뒤돌아 볼 때 저는 이 하나님의 큰
은혜를 싸구려로 만들고 있을 때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는데 구원
받은 자답게 살아가지 못할 때가 수 없이 많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는 영원한 생명을 받은 자답게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싸구려로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진정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받았다면 구원 받은 자답게,
영원한 생명을 받은 자답게 예수님의 이중계명대로 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하며
제 "이웃을 네(제) 자신 같이 사랑하"해야 하는데(마22:37,
39) 그 말씀대로 순종하면 살아가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이중계명을 사도 요한의 요한일서 말씀으로 재해석해서
제 자신에게 반영한다면 저는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오히려 세상을 미워해야 하는데
이 세상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눈의 욕심)과 삶에 대한 자랑(요일 2:15-17)을 은근히 마음속으로라도 사랑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이중 계명 중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22:39)는 말씀을 ‘형제를 사랑하고 미워하지 말라’(요일2:3-11)고 재해석을 했는데 저는 마음속으로라도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죄를
범할 때가 있기에 저는 하나님의 구원(영생)의 은혜를 싸구려로 만들고
있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또 한 가지, 저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내
육체의 가시보다 하나님의 족한 은혜에 초점을 맞추자”는 저의 짧은 말씀 묵상 글(2019. 6. 21.)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내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주시길 그리도 수없이 수년 동안 간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내
육체의 가시"가 그리도 없어지길 원했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나에게 허락하신 목적은 나로 하여금 너무나
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그 육체의 가시가 내게 없었다면 나는 얼마나 더 자만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나는 이제부터 내 육체의 가시가 아니라 내 육체의 가시 가운데
내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족한 은혜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그리고 나는 겸손히 하나님의 족한 은혜를 누리고자 한다. 누리되 나는 나의 연약함을 나눌 뿐만 아니라 자랑하므로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더 경험하고 싶다. 성경
고린도후서 12장 7-9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행13:43). 그리고
우리는 은혜 의식이 강해야 합니다(공로 의식을 배척해야 함). 그 좋은 예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 의식이 강했습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15장 8-10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맨 나중에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내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사도들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에 사도라고 불릴 자격마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며
내게 주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않아 내가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일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더 많이 주님의 일(수고)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의 고백은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여야 합니다(10절, 현대인의 성경).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2절 하반절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현대인의 성경)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은혜와 평안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사도 바울이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 골로새서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인사(greeting)하는 말로서 사도 바울의 13개 편지들 중 11개 편지들을
보면 이러한 비슷한 인사의 말씀들이 나옵니다: (고전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후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갈1: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엡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빌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전1: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살후1:2)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딤전1:2)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딤후1:2)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딛1:4) “…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몬1: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여기서 저는 2가지
흥미로운 점을 좀 짚고 넘어가려고 합니다.
첫 번째 흥미로운 점은, 사도 바울의 11개 편지들의 인사의 말씀을 보면 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디모데후서만 ‘은혜와 평강’이란 인사 외에 “긍휼”이란 단어가 추가돼 있음)입니다.
여기서 “은혜”(grace)라는 단어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일에 대한 사도 바울의 이해를 제일 분명하게 표현하는 신학적인 개념(a central
theological concept)입니다(WBC 주석)[(롬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또한 “은혜”라는 단어는 바울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이라고 사도행전 20장 2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갈라디아서 1장 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다른 복음”은
율법의 행위(인간의 공로)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을 강조했음(2:16)](WBC
주석). 성경
에베소서 2장 8-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렇게 구원이란 “은혜”는
로마서 6장 23절 현대인의 성경에서도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거주 주시는 선물”입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 사람들의 인사말이 무엇입니까?
주로 “안녕하세요”를 사용합니다.
그러면 다른 나라의 인사말은 무엇이 있을까요? (인터넷)
일본: “곤니찌와”(‘오늘은?’이란 뜻으로 낮에 하는 인사말이라고 함)
중국: “니하오마”(‘당신 좋으십니까? 안녕하십니까?’라는 뜻)
스페인: “올라!”(친한 사이와 만났을 때 쓰는 인사라고 함)
독일: “할로”(영어의 ‘헬로’와 같다고 함)
프랑스: “봉주르”(‘좋은 날’이라는 뜻) 등등 …
이스라엘: “샬롬”(‘평안’이라는 뜻임).
저는 여태까지 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사말인 “샬롬”을 그저 “평안”
또는 ‘평강’ 또는 ‘평화’란 뜻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연세대대학원장(구약학) 박준서 교수님의 인터넷 글을 통해 “샬롬”이란 말에는 여러 가지 좋은 뜻을 가득 담고
있다는 것을 좀 알게 되었습니다(인터넷). 본래 히브리어 "샬롬"의 어원적 의미는 "완전하다,
온전하다, 꽉 찼다"(be sound, complete,
full)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샬롬”이란 흠이 있거나, 깨어져 손상되거
나, 모자라고 부족하지 않고, 조화를 이룬 가운데 온전하고 완전한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뜻에서 이 말이 사용되는 여러 가지 경우와
맥락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의 몸, 신체와 관련해 샬롬이 사용되었을 때 이 말은 조화를 이룬 온전한 신체적
상태를 말한다고 합니다. 즉 건강이라는
뜻이 된다고 합니다. 또한 심리적인
측면에서 이 말은 평안이라는 뜻도 된다고 합니다. 샬롬은 농사와 관련해서도 사용된다고도 합니다.
농작물을 추수하는 샬롬의 추수라고 말하면 그것은 온전한 추수, 즉 풍작의
추수를 말한다. 따라서 이 말은 풍작이라는
뜻을 갖는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해
물질적인”풍요” 또는 “풍성”을 뜻하기도 합니다. 전쟁과 관련해 이 말이 사용되는 경우에는 승리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전투를 마치고 샬롬으로 돌아왔다고 하는 말은 승리의 귀향을
뜻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인간관계를
표현하는데 쓰이기도 한다고 합니다. 사람들 사이에 샬롬이 있다든가,혹은
샬롬의 관계라고 말할 때 사랑과 우애가 넘친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 말이 사회공동체와 관련해 사용될 때 “정의”라는 뜻도 갖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의 공동체가 샬롬의 공동체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요건은
정의가 세워지고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 시편에는 샬롬이 이루어진 공동체에서는 “정의와 샬롬이 서로 입맞춘다”고 노래한다고 합니다. 박준서 교수님의 말입니다: “사실 인간의 언어 가운데 이보다 더 좋은 말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이런 최상의 좋은 말로 「샬롬!」이라고 인사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건강하십시오. 승리하시고 사랑과 우애가 넘치시고 평화와
화평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정의롭고
조화로운 풍성한 삶을 기원합니다』라고 하는 축복의 인사인 것이다.
이 이상 더 좋은 인사가 또 있을까. 샬롬이 갖고 있는 본래의 뜻, 즉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 온전함」이라는 측면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세계를 바라볼 때 우리들은 샬롬이 깨어진 세계에 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갈등과 대결,
분열과 분쟁, 편견과 편가름, 독선과 아집,
이기심과 탐욕으로 조화(Harmony)는 깨지고, 샬롬 부재(不在)의 세계가 돼버렸다”(박준서). 이러한 상황을
향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니라”마5:9). 화평케 하는 자란 말씀은 단순히 평화를 사랑하는 온순한 사람이
아닙니다.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샬롬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 힘쓰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박준서).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샬롬을
이루기 위해서 어떻게 최선을 다해 힘쓰고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요?
적어도 우리 가정과 교회에 어떻게 힘쓰고 노력해야 할까요? 교회란 공동체 안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1) 화평케 하는 자(peace-maker), (2) 화평을 깨는 자(peace-breaker),
(3) 화평을 지키는 자(peace-keeper). 우리는 화평을 깨는 자가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돼야 하며 또한 화평을 지키는
자가 돼야 합니다. 교회란 공동체 안에는
평안(Shalom)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한 일원(지체)으로서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합니다(엡
4:3). 어제 토요 새벽기도회 때 어떻게 우리가
교회의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지켜 나아가야 할지 로마서 14장 1-3절과 15장 1-3절 말씀 중심으로 3가지 교훈을 받았습니다. 특히 로마 교회처럼 우리 교회나 어느 교회나 두 부류의 그룹인 믿음이
강한 성도들과 믿음이 약한 성도들이 있다는 전제 아래 사도 바울의 말씀을 통해 3가지 교훈을 받았습니다:
(1) 믿음이 강한 자들과 믿음이 약한 자들이 교회의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지켜 나아가기 위해선 서로 공존해야 합니다.
서로 공존하기
위해선 믿음이 강한 성도들은 믿음이 약한 성도들을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며(롬14:3), 믿음이 약한 성도들은 믿음이 강한 성도들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3절). 오히려 믿음이
강한 지체들이나 약한 지체들이나 서로 받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믿음이 강한 지체들이나 약한 지체들을 다 받아주셨기 때문입니다(3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우리도 서로 받아야 합니다(15:7). 그리할 때 우리는 교회의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지켜 나아갈
수 있습니다.
(2) 믿음이 강한 자들과 믿음이 약한 자들이 교회의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지켜 나아가기 위해선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행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 6-8절에서 “주를 위하여”라는 말씀을 5번이나 했습니다. 그만큼 믿음이 강한 지체들이나 믿음이 약한 지체들 모두가
다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해야 한다는 귀한 교훈입니다. 주님을 위해 하되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고 또한 믿음이 강한 성도들은 믿음이 약한 성도들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말고 이웃을 기쁘게 하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15:1-2).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3절).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기보다 믿음이 강한 지체들은 믿음이 약한 지체들을 기쁘게 하고 믿음이 약한 지체들은 믿음이 강한 지체들을 기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먹는 음식 때문에 서로 앞에 장애물을 놓아 근심하게 하므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동하여(14:13, 15, 현대인의 성경) 다 함께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6절). 그리할 때 우리는
교회의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지켜 나아갈 수 있습니다.
(3) 믿음이 강한 자들과 믿음이 약한 자들이 교회의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지켜 나아가기 위해선 교회의 화목과 서로 덕을 세우는데 힘써야 합니다.
성경 로마서
14장 19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화목하고 서로 덕을 세우는 일에 힘씁시다.” 교회 안에서 믿음이
강한 지체들이나 믿음이 약한 지체들이나 믿음의 성숙도의 차이는 있지만 공통점은 자기만을 위해서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해야 한다는 것과
또한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해야 합니다(6-7절, 현대인의
성경). 또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우리를 받아주신 것처럼 믿음이 강한 지체들이나 믿음이 약한 지체들이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서로 받되(15:7,
현대인의 성경) 서로 따뜻이 맞아들여서 서로 기쁘게 하고 서로 유익하게 하고 덕을
세워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2, 6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기
위해선 믿음이 강한 지체들은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여 행하는 일이 믿음이 약한 지체들을 넘어지게 하거나 꺼림칙하게 하는 것이라면 그 일을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14:20-21, 현대인의 성경). 주님께서는 주님의 교회를 세우심에 있어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님을 본받게 하시사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셔서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니다(마16:18;
롬15:5-6).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서로를 기쁘게 하여 서로 유악하게 하고 화목하여 덕을 세워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15:2, 5-6, 현대인의 성경). 그리할 때 우리는 교회의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지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2절 하반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현대인의 성경)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은혜와 평안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평강”(peace)이란 단어는 전쟁과 반대되는 단어로서 전쟁이 그치므로 누리는 결과적인
상황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번영의 축복이
일어날 법과 질서의 상태를 나타냅니다(WBC 주석). 이 “평강”이란 단어가 신약 성경에 91번 나오는데 그 중에 바울의 편지에만 54번 나오는데 이 평강에 대한 성경적 개념은 특히 관계와
관련하여 온전함과 관련이 있되, 특히 질서로서의 평화는 평화의 하나님에 의해 확립됩니다(고전14:33; cf.롬15:33; 16:20; 빌4:9)(WBC
주석). 실제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는 그 화평의 중보자이시다 라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롬 5:1, 골 1:20)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화평이시다 라고 말했습니다(엡 2:14-18). 그러므로 바울이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2절에서 골로새
교인들을 위한 평강을 위해 기도할 때 그것은 단순히 영적 번영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것은 만족의 내적 상태를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의 기도는 오히려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께서 그들과
맺으신 평화의 관계의 본질을 더 온전히 이해하도록 하는 것입니다(WBC 주석).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0절에서 이렇게 그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두 번째 흥미로운 점은, 사도 바울의 11개 편지들의 인사의 말씀을 보면 주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임. 그런데 오늘
본문 골로새서 1장 2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라고만
말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라는 말씀을 빠뜨렸습니다. 제 생각엔 사도 바울이 이 골로새서 편지를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쓴 목적과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그 당시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이 당면한 큰 어려움은 골로새
지역에 퍼져 있었던 복잡한 혼합 종교들의 영향이었는데 그 영향에 의해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이 흐려지는 위험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유일성, 그리스도의 구원자로서의 유일성과 절대성, 그리고 세상의 통치자로서의 유일성을 위협받게 되었을
것입니다(인터넷). 특히 골로새 교회의 주된 구성원들이 이방인이었고(1:12, 27; 2:13) 그들은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과거에 지니고 있었던 이방사상이나 또는 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이방종교적 전통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고,
또 그런 거짓 가르침에 쉽게 넘어갈 위험성이 많았기에(인터넷)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 2절과
18-19절 상반절에서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 일부러 겸손한 체하며
천사들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속아서 여러분의 상을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들은 자기들이 본 환상을
과장하며 헛된 생각으로 들떠 있습니다. 그들은 머리 되시는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생각엔 사도 바울이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골로새서 편지를 쓰면서 인사의 말씀에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1:2)라고만 말한 후 3절에 가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심을 말씀함으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기 하나이심(Jesus
is one in nature with God)을 말씀하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증합니다(an
affirmation of Christ’s deity)(MacArthur),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요(3절) 또한 “우리(사도 바울과 디모데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아버지”이시라는 사실을 말씀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에게는 한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3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요 “우리 아버지”이신 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함께하기를 기도하는(2절, 현대인의 성경) 인사의 말을 한 후 어떻게 그 성도들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은혜와 평강의 축복을
받았는지 골로새서 1장 13-22절에서 말씀(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나라로 옮기셨다는 것입니다(13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피 흘린 대가고 속량(자유)을 얻고 죄 사함을 받았다는 것(14절)이요 그 하나님의 “평강”이란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화평”을 이루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20절). 전에는 악한 행실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 마음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육체적 죽음을 통해 그들과 화해하셨다는 것입니다(22절,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와 평강으로 말미암아 감사함으로 화평케 하는 사역을
묵묵히 감당하길 원하는,
제임스 김 나눔
[2022년 2월 13일, “…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은혜와 평안이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골1:2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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