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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인터넷 사역 한국으로 둘째날을 뒤돌아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이유:

2025 인터넷 사역 한국으로 둘째날을 뒤돌아보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이유: 1.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요일 4:8, 16) 2. 하나님의 사랑을 사랑하는 친구, 권사님들, 장로님들, 형제와 자매들, 이웃을 통해 경험케 하셨기에 3. 사랑하는 사람들(사. 사. ?)과 주님 안에서 진솔하게 마음을 나누게 하셨기에 4. 이미 잊지 못할 사랑의 추억이 있어서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거기에데가 사랑의 추억이 더해졌기에  5. 이 모든 사랑의 사람들로 인해 사랑의 하나님께 감사케하시기에

하나님을 향한 분노

 하나님을 향한 분노

  

 

"우리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향한 분노를 표출하기까지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망 속에는 항상 '?'(Why?)라는 질문이 있다"  (제임스 ).

 

  

          예상하지 못한 극심한 고통이 길어지면 길어질 수록 우리는 하나님께 "어느 때까지리이까?"(How long?)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리고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더딜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가리우신 같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의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까지도 의심하게 된다.  '어쩌면 하나님이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가 보다.  아무리 기도해도 나를 극심한 고통에서 건져 주시지 않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나를 미워하시는가 보다.'  이러한 의심은 우리로 하여금 극심한 피해의식 속에 잠기게 한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에게 " 나인가?", " 하필이면 나인가?"라는 질문을  없이 던지게 만든다.  그리고 없이 던지는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들기 시작하며 끝에 가서는 하나님을 향한 분노도 표출하게 만든다.  과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분노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것인가?  


          나는 하나님을 향한 분노를 생각할 요나 선지자가 생각난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을 향한 요나의 분노를 생각할 때 왠지 요나의 분노는 이기적이란 생각이 든다.  자기가 원하는데로 되지 않으니까 요나는 하나님께 분노했다.  니느웨 멸망도 그렇고  자기에게 그늘을 주었던 박넝쿨이 없어진 것도 그렇다.  요나를 기쁘게 하는 방법은 니느웨가 멸망당하는 것이요 박넝쿨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였는데 반대로 되었다.   결과 요나는 죽고싶을 정도로 하나님께 분노했다.  과연 이러한 요나의 분노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분노인가?  우리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 바른 질물을 던져야 한다.  "?"(Why?)라는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게 만든다.   대상이 우리가 접한 고통스러운 상황이던, 고통을 우리에게 부여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던 심지어 하나님까지 우리는 원망하게 있다.  그러므로 나는 개인적으로 "?"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떻께?"(How?)라는 질문도 나는 바람직한 질문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임했는지 내가 접한 극심한 고통스러운 상황의 원인을 찾아보려고 애써도 그리 상쾌한 대답을 우리는 찾지 못할 때가 많지 않나 생각한다.  그리고 상쾌한 대답을 찾은 뭐하랴.  이미 업지러진 물처럼 나에게 풍랑처럼 다가온 고통스러운 일들을 해결해 나아감에 있어서 하나님보다 자신이나 사람들을 자꾸만 의지하게 만드는 위험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What?)이란 질문은 어떠한가?  예를 들어 우리가 고통스러운 상황을 접하고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어떠한가?  우리가 신앙인으로써 당연히 던져야 하는 질문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성숙한 신앙이 던지는 질문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데 왠지 나는 요즘 드는 생각은 질문조차도 함부러 던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천지차이일진대 입장에서 하나님의 생각이 이렇다 저렇다 말을 한다는 것이 어리석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땅에서 하나님의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내가 깨달을 없것만 왠지 깨닫고 있는 것처럼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너무 쉽게, 그리고 함부로 하나님의 뜻이 이렇다, 저렇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는가 두려운 마음이 요즘 든다.  마치 퍼즐 500개짜리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깨닫게 해주신 것이 5개라면 나머지 495개는 모르면서 거의 아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은 이렇습니다. 저렇습니다'라고 합부로 말하고 있지는 않는가 생각된다.  그러므로 나는 개인적으로 "무엇?"이란 질문도 최선의 질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최선의 질문은 무엇인가?  바로 "누구?"(Who?)라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을 "?", "어떻게?" 그리고 "무엇?"이라는 질문보다 우리가 던져야 질문은 '하나님은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이라 생각한다.  물론 질문은 믿음이 없이는 던질 없다.  그리고 질문을 던지기 위해선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한다.  그리할 우리는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경험하므로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고백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참된 예배자로 세움을 받을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분노가 아닌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시는 영혼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오름을 받을 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것을 보게 되며 하나님이 듣고 계시는 것을 듣게 있다.  ,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품게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선포하며 나아가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혼을 향한 열정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목사 나눔

(2010 9 12, 고통당하고 있는 사랑하는 사촌 동생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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