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고난은 기회입니다. (6)

"고난의 유익은 그 고난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그릇행하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과 하나님의 법을 배우게 된 것과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시 119:67, 71). 이러한 깨달음(나의 죄)과 배움(하나님의 말씀)과 지킴( 말씀 순종)이 없는 고난은 무익합니다." 1. 깨달음: 교만함(시119:69), 그릇 행함(67절), 마음의 살찜과 기름덩이(70절) [마음에 지방을 제거하라!: https://blog.naver.com/kdicaprio74/150112959844] 2. 배움: 자녀들의 위기를 통해 저는 선하신 주님께서(68절) 저를 선대하사(65절) 가르쳐주신(68절) 시편 63편 3절 말씀과 베드로전서 5장 10절 말씀을 배우게 되었습니다(71절). [20년 전 이 아빠의 품에 잠든 사랑하는 첫째 아기 주영이를 추모하면서 ... : https://blog.naver.com/kdicaprio74/221262767368] [금년 2019년 한 해를 영원히 과거로 보내기에 앞서 ...: https://blog.naver.com/kdicaprio74/221756284213] 3. 지킴: https://youtu.be/i6TfokavYN4?si=P1E4vvk_bnPOvabx

과연 나는 고난의 주님을 귀히 여기고 있는 것인가?

과연 나는 고난의 주님을 귀히 여기고 있는 것인가?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 3).

 

고난의 주님은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셨다.

만일 내가 고난의 주님을 귀히 여기고 있다면

또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당하고)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지 않는가?

 

고난의 주님은 간고를 많이 겪으셨다.

그는 고난에 익숙하신 분이셨다(family with suffering).

만일 내가 고난의 주님을 귀히 여기고 있다면

또한 주님을 위하여 간고를 많이 겪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나는 주님처럼 고난에 익숙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나는 이토록 편안함에 익숙해 있는 것인가?

 

고난이 주님은 질고를 아는 자이셨다.

그는 비애의 사람이셨다(a man of sorrow).

만일 내가  고난의 주님을 귀히 여기고 있다면

또한 비애의 사람이 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나는 이토록 슬픔보다 기쁨이 좋은 것일까?

성경은 슬픔이 웃음보다 낮다(7:3) 말씀하고 있는데

나는 아직까지도 눈물을 흘리기보다 웃고 있는 것일까?

 

고난의 주님은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은 같으셨다.

만일 내가 고난의 주님을 귀히 여기고 있다면

또한 사람들이 나에게 얼굴을 돌려 보고 있지 않을지라도

묵묵히 주님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하지 않을까?

나는 주님의 얼굴만 바라보면서

분이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 못하고 있는가?

 

과연 나는 고난의 주님을 귀히 여기고 있는 것인가?

 


 

주님의 고난이 나의 고난이 되길 원하는, 아니 주님의 고난에 조금이나마 동참하길 원하는,

 

 

제임스 목사 나눔

(2011 4 13, 고난 주간 셋째날 새벽기도회 나의 허물과 나의 때문에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고난의 주님을 생각하면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