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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고 또 받습니다.

주고 싶어하시는 권사님들의 사랑, 비록 나도 받고 받는  그분들의 사랑을 돌려드리고 싶지만, 그분들을 위하여 귀하고 큰 사랑을 받고 또 받습니다.

과연 나는 고난의 주님을 귀히 여기고 있는 것인가?

과연 나는 고난의 주님을 귀히 여기고 있는 것인가?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 53 3).

 

고난의 주님은 멸시를 받아서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셨다.

만일 내가 고난의 주님을 귀히 여기고 있다면

또한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당하고)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지 않는가?

 

고난의 주님은 간고를 많이 겪으셨다.

그는 고난에 익숙하신 분이셨다(family with suffering).

만일 내가 고난의 주님을 귀히 여기고 있다면

또한 주님을 위하여 간고를 많이 겪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나는 주님처럼 고난에 익숙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나는 이토록 편안함에 익숙해 있는 것인가?

 

고난이 주님은 질고를 아는 자이셨다.

그는 비애의 사람이셨다(a man of sorrow).

만일 내가  고난의 주님을 귀히 여기고 있다면

또한 비애의 사람이 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나는 이토록 슬픔보다 기쁨이 좋은 것일까?

성경은 슬픔이 웃음보다 낮다(7:3) 말씀하고 있는데

나는 아직까지도 눈물을 흘리기보다 웃고 있는 것일까?

 

고난의 주님은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은 같으셨다.

만일 내가 고난의 주님을 귀히 여기고 있다면

또한 사람들이 나에게 얼굴을 돌려 보고 있지 않을지라도

묵묵히 주님께서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하지 않을까?

나는 주님의 얼굴만 바라보면서

분이 걸어가신 고난의 길을 걸어가고 있지 못하고 있는가?

 

과연 나는 고난의 주님을 귀히 여기고 있는 것인가?

 


 

주님의 고난이 나의 고난이 되길 원하는, 아니 주님의 고난에 조금이나마 동참하길 원하는,

 

 

제임스 목사 나눔

(2011 4 13, 고난 주간 셋째날 새벽기도회 나의 허물과 나의 때문에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고난의 주님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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