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죽으심 (3)
[사도행전 1장 1-11절]
사도행전 1장 3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
여기서 예수님의 “고난”이란 예수님의 죽으심을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미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두 번이나 묵상했습니다: (1) 첫째로,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
예수님의 33년 삶이 고난이었지만 특히 예수님의 피신(피난)하심이란 고난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
(2) 둘째로, 예수님의 죽으심을 미리 알려주심(예고)에 대해서 묵상했습니다(사52:13-53:12). 오늘 셋째로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서 묵상하고자 합니다.
주제는 “성찬식”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3-26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사도 바울이 주님께 직접 받은 계시인 성찬식은 예수님은 배신당하시기 전날 밤, 십자가 고통을 앞두고도 우리를 위한 사랑의 언약인 성찬을 직접 세우셨습니다.
여기서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ἔλαβεν ἄρτον καὶ εὐχαριστήσας ἔκλασεν (엘라벤 아르톤 카이 유카리스테사스 에클라센)](23-24절)란 말씀에서 “축사하시고”(εὐχαριστήσας - 유카리스테아스)란 말씀은 감사 기도를 드리다란 의미입니다.
이 밤은 예수님이 제자에게 배신당하시고 체포되시기 직전의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밤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원망과 두려움이 가득할 상황이었지만, 예수님은 도리어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먼저 올리셨습니다.
이 감사는 곧 당할 십자가 고난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유일한 길임을 아셨기에 드린 순종과 사명 완수의 감사입니다. 기독교에서 성찬식을 뜻하는 단어인 '유카리스트(Eucharist)'가 바로 이 단어에서 유래했습니다.
“떼어”(ἔκλασεν - 에클라센)란 단어는 ‘부 수다, 쪼개다’란 의미입니다.
큰 덩어리의 떡을 제자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는 반드시 조각조각 부수고 쪼개야 했습니다. 이는 다음 구절의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와 연결되어, 예수님의 육체가 십자가 위에서 채찍에 맞고(요19:1) 창에 찔려(34절) 참혹하게 찢기실 것을 시각적으로 예표합니다.
성찬식의 "떼어(ἔκλασεν, 에클라센 - 부수다, 쪼개다)"라는 단어와 요한복음 19장 1절의 "채찍질"은 구조적·영적으로 매우 깊고 강렬하게 연결됩니다(인터넷).
먼저 시각적 예표와 실제적 성취입니다.
예수님은 떡을 손으로 '쪼개고 부수어(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시각적인 예고였습니다.
그 예고가 실제 역사 속에서 처절하게 성취된 첫 자리가 바로 요한복음 19장 1절의 채찍질입니다. 당시 로마의 채찍(Scourge) 끝에는 납 덩어리와 뼛조각이 달려 있어, 한 번 내리칠 때마다 살점이 뜯겨 나가고 뼈가 드러났습니다. 즉, 성찬식에서 떡이 조각조각 찢기듯, 예수님의 살과 가죽이 채찍에 의해 실제로 떼어지고 찢기신 것입니다.
그 다음에 "너희를 위하는 내 몸" (대속의 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4절에서 떡을 떼시며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라고 하신 목적은, 요한복음 19장 1절에서 채찍에 맞아 찢기심으로 완성됩니다.
이 연결점은 구약의 예언인 이사야 53장 5절("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과 정확히 맞물립니다. 예수님의 몸이 채찍에 찢기신(떼어진) 이유는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기 위해서 였습니다.
원래 하나였던 떡을 떼어 나누어 먹음으로써, 성찬에 참여하는 모든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열되지 않고 연합된 '한 몸(교회)'임을 뜻합니다.
여기서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τοῦτο τὸ ποτήριον ἡ καινὴ διαθήκη ἐστὶν ἐν τῷ ἐμῷ αἵματι (투토 토 포테리온 헤 카이네 디아데케 에스틴 엔 토 에모 하이마티)](고전11:25)이란 말씀의 구체적인 3가지 핵심 의미입니다(인터넷).
(1)
첫 번째 의미는, 피로 체결된 법적 계약 (생명의 대가)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과 언약(계약)을 맺을 때, 짐승을 잡아 피를 흘렸습니다(출 24:8). 피는 곧 '생명'을 의미하므로, "이 계약을 깨뜨리는 자는 이 짐승처럼 피를 흘려 죽게 될 것"이라는 목숨을 건 엄숙한 계약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끊임없이 죄를 지어 구약의 언약을 파기했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죄의 대가로 피를 흘려 죽어야만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생명)를 흘리심으로 그 죄 값을 법적으로 완벽하게 지불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이 '새로운 계약'을 효력 있게 만든 단번의, 그리고 영원한 대가였습니다.
마태복음 26장 28절 말씀입니다: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의 피가 왜 새로운 계약을 효력 있게 만드는 ‘단번의, 그리고 영원한 대가’가 되는지를 법적·제사학적으로 확증해 주는 핵심 구절입니다(인터넷).
(a)
출애굽기 24:8(옛 언약)의 성취와 폐기
모세는 시내산에서 짐승의 피를 백성에게 뿌리며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동물의 피는 불완전하여 죄를 온전히 씻지 못했고, 매년 반복해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히 10:1-2).
예수님은 성찬식에서 출애굽기의 문구를 그대로 가져와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부르십니다. 이는 짐승의 피로 세운 ‘옛 언약’의 유효 기간이 끝났으며,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보혈로 체결되는 ‘새 언약’이 공식적으로 효력을 발휘(발효)함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b)
‘단번의 대가’가 되는 이유: 죄 사함의 완전성
마태복음 26장 28절은 그 피의 목적을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라고 명시합니다.
짐승의 피는 죄를 잠시 덮어두는(Covering) 역할만 했지만, 흠 없고 점 없는 신성(Divinity)을 가진 예수님의 피는 인류의 죄를 단번에 완전히 제거(Removing)하는 신적 능력이 있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 다른 제사나 피 흘림이 필요 없는 ‘단번의(Once for all)’ 완벽한 법적 대가가 됩니다(히 9:12).
(c)
‘영원한 대가’가 되는 이유: ‘많은 사람’을 위한 무한한 가치
마태복음 26장 28절에서 예수님은 이 피가 “많은 사람(유대인과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인류)을 위하여” 흘려지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짐승의 피는 제사를 드리는 특정 개인이나 일시적인 죄만 가릴 수 있었지만, 예수님의 생명 값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택하신 자들의 죄를 사고도 남는 영원하고 무한한 가치를 가집니다. 그래서 단 한 번의 흘리심으로 영원한 효력을 가집니다(인터넷).
(2)
본질적으로 새로운 관계 [새 언약: καινὴ διαθήκη (카이네 디아데케)]
헬라어에서 '새롭다'는 단어는 단순히 시간적으로 새것이라는 뜻의 '네오스(νέος) '가 아니라, 질적·본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차원을 뜻하는 '카이네(καινη̇)'가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의 옛 언약: 돌판에 새겨진 율법(십계명)을 인간의 행위와 노력으로 지켜야 하는 조건부 계약이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 늘 실패와 정죄감에 머물렀습니다.
신약의 새 언약: 예레미야 31장 31~34절의 예언대로, 하나님께서 법을 우리의 마음에 새기시고 성령을 주셔서 우리를 변화시키는 은혜의 계약입니다. 내 노력이 아니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용서와 사랑에 기초합니다.
(3)
진노의 잔이 축복의 잔으로 바뀜
성경에서 '잔(Cup)'은 종종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진노'를 상징합니다(사 51:17). 본래 우리가 마셔야 했던 그 처절한 진노의 잔을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며 대신 마시며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 결과, 성찬식에서 우리가 드는 잔은 더 이상 심판의 잔이 아니라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은 '축복과 구원의 잔'이 되었습니다(인터넷).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요1:17)은 다 은혜입니다(고후13:13). 그러므로 성찬도 은혜입니다.
요한복음 1장 17절의 원리를 성찬식에 대입하면, 성찬이 왜 기독교의 가장 위대한 '은혜의 수단'인지를 명확히 깨닫게 됩니다(인터넷):
(1)
전적인 자발성과 값없는 선물
성찬은 우리가 요구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바로 그 밤에, 제자들의 어떠함(배신과 도망)과 상관없이 주님이 친히 먼저 주도하셔서 베풀어 주신 은혜의 상찬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대가에 단 1%도 기여한 것이 없으며, 오직 주님이 찢으신 살과 흘리신 피를 믿음으로 '값없이 받아 먹고 마실' 뿐입니다.
(2)
요 1:17과 고후 13:13의 핵심 연결 고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은혜의 확증: 요 1:17 ➔ 고후 13:13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온 최고의 은혜(요 1:17)가 눈에 보이게 집약된 자리가 바로 성찬식입니다.
성찬 상 위에서 떼어지는 떡(몸)과 부어지는 잔(피)은 우리가 아무런 대가 없이 구원받았음을 확증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그 자체입니다.
(a)
은혜의 뿌리: 고후 13:13의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떼어 은혜를 베푸신 이유(요 1:17)는, 그 뿌리에 독생자를 아낌없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성찬은 예수님의 은혜를 통해 성부 하나님의 영원하고 변함없는 사랑을 맛보고 확신하는 자리입니다.
(b)
은혜의 누림과 적용: 고후 13:13의 "성령의 교통하심(코이노니아)"
예수님이 2천 년 전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은혜(요 1:17)를, 오늘을 사는 우리가 성찬식에서 떡과 잔을 먹고 마실 때 내 영혼의 양식으로 실제가 되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의 교통(참여·사귐)하심"입니다.
성령께서는 성찬을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더 나아가 성도와 성도가 그리스도의 피로 묶인 한 몸 공동체임을 누리게(교통하게) 하십니다(인터넷).
(3)
성령의 임재와 증인의 권능으로 이어지는 통로 (행 1:8 연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온 성찬의 은혜를 경험한 자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처럼 성령의 권능을 받아 땅 끝까지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증인'이 됩니다. 은혜를 받은 자만이 은혜를 유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6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a)
‘증인(행 1:8)’과 ‘전하는 것(고전 11:26)’의 본질적 일치
고전 11:26의 선포: 바울은 성찬식의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행위의 최종 목적이 내부적인 기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선포하는) 것"에 있다고 명시합니다.
행 1:8의 사명: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사명 역시 "내 증인이 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연관성: 성찬식은 단순한 예식이 아니라 복음 전파를 위한 영적 재충전의 자리입니다. 성찬을 통해 예수의 살과 피(은혜)를 내 안에 채운 사람은,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 주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보내는 증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b)
성령의 권능(행 1:8)이 필요한 이유
고린도전서 11장 26절의 명령("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길에는 핍박과 조롱, 고난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찬을 통해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의 "성령의 교통하심"을 경험한 성도들은, 성령이 주시는 하늘의 권능을 힘입어 비로소 고린도전서 11장 26절의 전파하는 사명을 넉넉히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c)
종말론적 시점의 일치: "그가 오실 때까지"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고린도전서 11장 26절은 주님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을 보면 천사들은 제자들에게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고 재림을 약속합니다.
사도행전 1장의 제자들과 성찬에 참여하는 오늘날의 성도들은 모두 ‘예수님의 초림(십자가)과 재림(다시 오심) 사이’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찬식은 다시 오실 주님을 대망하는 종말론적 예배이며,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우리가 이 땅에서 멈추지 말아야 할 유일한 과업이 바로 ‘성령의 권능을 통한 복음 증거’임을 두 구절이 동시에 외치고 있습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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