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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말에 있지 않고 삶의 능력에 있습니다.”

“ 복음은 말에 있지 않고  삶의 능력에 있습니다 .”         “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 요한복음 5:31-40).     (1) 저는 “ 예수를 믿게 하는 증언 ” 이란 제목 아래 요한복음 5 장 30-47 절 전체를 다 묵상하기보다 어제는 첫 번째로 30 절 한 절만 묵상하였고 , 오늘은 두 번째로 31-40 절 말씀을 묵상한 후 다음 주 월요일에는 마지막으로 41-47 절 말씀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     (a) 제가 그리하는 이유는 요한복음 5 장 30-47 절 구조가 이렇기 때문입니다 : (a) 서론 : “ 예수님의 심판과 행위의 기준 ”(30 절 ), (b) 본론 :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입증하는 증언들 (31-40 절 ), (c) 결론 : 유대인들이 믿지 못하는 이유와 모세의 고발 (41-47...

“복음은 말에 있지 않고 삶의 능력에 있습니다.”

“복음은 말에 있지 않고 삶의 능력에 있습니다.”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요한복음 5:31-40).

 

 

(1) 저는 “예수를 믿게 하는 증언”이란 제목 아래 요한복음 5장 30-47절 전체를 다 묵상하기보다 어제는 첫 번째로 30절 한 절만 묵상하였고, 오늘은 두 번째로 31-40절 말씀을 묵상한 후 다음 주 월요일에는 마지막으로 41-47절 말씀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a) 제가 그리하는 이유는 요한복음 5장 30-47절 구조가 이렇기 때문입니다: (a) 서론: “예수님의 심판과 행위의 기준”(30절), (b) 본론: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입증하는 증언들(31-40절), (c) 결론: 유대인들이 믿지 못하는 이유와 모세의 고발 (41-47절))(인터넷).

 

(i)           오늘 묵상할 “본론: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입증하는 증언들(31-40절)”의 세부적인 구조는 이렇습니다:

 

·         자가 증언(self-testimony)의 한계(31-32절): 사람이 스스로를 증언하면 참되지 못하나, 예수님을 증언하시는 ‘다른 이’가 있다고 언급하십니다. 

·         첫 번째 증언: 세례 요한의 증언(33-35절): 유대인들이 인정했던 세례 요한이 이미 진리(예수)에 대해 증언했음을 상기시킵니다.  

·         두 번째 증언: 예수님이 행하시는 역사/표적(36절):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완수하라고 주신 일들(기적과 사역) 자체가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         세 번째 증언: 하나님 아버지의 친히 하시는 증언(37-38절): 눈으로 보거나 음성을 듣지 못했더라도, 아버지는 여러 방식으로 아들을 증언하셨습니다.

·         네 번째 증언: 구약 성경 (39-40절): 유대인들이 영생을 얻기 위해 연구하는 성경(구약)이 바로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는 책입니다.  그러나 정작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오기를 거부하는 모순을 지적하십니다(인터넷).

 

(ii)          저는 오늘 이 다섯 가지 증언을 하나씩하나씩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2) “자가 증언의 한계(31-32절): 사람이 스스로를 증언하면 참되지 못하나, 예수님을 증언하시는 ‘다른 이’가 있다고 언급하십니다.”

 

(a) 여기서 자가 증언(self-testimony)이란 “자기 스스로가 진짜라고 주장하는 말”을 뜻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와 법정에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 증언하는 것은 법적 효력이 없다"는 엄격한 규칙이 있었습니다(신 19:15, 두세 증인의 법칙).  즉, 아무리 본인이 "나는 메시아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주장해도, 객관적인 다른 증인이 없다면 그 주장은 법적으로 ‘참’으로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i)           그래서 예수님은 이 유대인들의 법적 기준을 그대로 가져와서 변론하시는 것입니다:

 

·         31절: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의미: "너희 법대로라면 내가 나 스스로 메시아라고 백날 말해봐야 증거 능력이 없다는 것을 나도 잘 안다."

 

32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의미: "그러므로 내가 진짜임을 증명해 줄 다른 증인(세례 요한, 표적, 하나님 아버지, 성경)들을 제시하겠다."

 

-     즉,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당신 말 말고 다른 증거를 대라"고 꼬투리 잡지 못하도록, 자가 증언의 한계를 인정하시는 척하면서 뒤이어 완벽하고 객관적인 '4대 증인'(세례 요한, 표적, 하나님 아버지, 성경)을 소환하여 입을 막으시는 논리를 펼치신 것입니다(인터넷).

 

(b) 예수님이 자가 증언의 한계를 선포하시며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다른 이[ἄλλος (알로스)]’를 소개하신 이 장면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3가지 핵심 교훈을 인공지능이 정리하한 것입니다(인터넷):

 

1.   ‘알로스(ἄλλος)’[“이가 따로 있으니”(다른 이가 있다)]의 비밀 : 내 삶의 가장 완벽한 증인은 성령과 하나님이십니다

 

32절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라고 하실 때, '다른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알로스(ἄλλος)’입니다.  헬라어에서 '다른 것'을 뜻하는 단어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헤테로스(ἕτερος):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예: 사과와 자동차), 알로스(ἄλλος): 본질과 성질은 완벽하게 같으나 인격과 존재가 다른 것 (예: 이 사과와 저 사과)

 

예수님이 여기서 나를 증언하실 ‘알로스’(다른 이)가 있다고 하신 것은, 일차적으로는 뒤이어 나올 세례 요한과 성경을 포함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님과 본질이 똑같으신 하나님 아버지와 성령 하나님을 뜻합니다[훗날 예수님은 성령님을 소개하실 때도 ‘다른 보혜사’, 즉 ‘알로스 파라클레토스’(ἄλλος παράκλητος)라고 부르셨습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이 세상에서 "내가 진짜 그리스도인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것을 내 스스로 증명하려고(자가 증언) 애쓸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내 지혜나 내 혈기로 나를 증명하려 하면 유대인들처럼 독선과 교만에 빠집니다.  참된 제자는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증언과 내 삶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나를 증명하도록 나의 주도권을 내려놓는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2.   복음은 세상의 상식과 기준을 존중하되, 그것을 뛰어넘는 ‘영적 지혜’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당신 증언은 가짜요"라고 공격할 빌미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너희 법이 두세 증인을 요구하지?  나도 그 법을 안다(31절)"라며 그들의 규칙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유대인들이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완벽한 하늘의 증인들을 소환하십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우리는 이 땅에서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나는 신앙인이니까 세상 법이나 상식, 질서는 무시해도 된다"는 식의 태도는 복음의 문을 막아버립니다.

 

예수님처럼 세상의 합리적인 기준과 질서를 존중하고 경청하되, 삶의 실제적인 열매와 태도를 통해서는 세상이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하늘의 신실함과 거룩함(객관적 증거)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3.   '내가 나를 증명하려는 피로함'에서 벗어나게 하는 복음의 배짱

 

인간의 가장 깊은 본능 중 하나는 '자기 증명(Self-testimony)'입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내 생각이 얼마나 옳은지"를 끊임없이 타인에게 관철하고 증명하려다 보니 인생이 피로하고 관계가 깨어집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예수님은 우주와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심판주이심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참되지 않다"라며 자기 증명의 권리를 기쁘게 내려놓으셨습니다.  아버지가 나를 아시고, 아버지가 나를 증명해 주실 것이라는 완벽한 신뢰가 있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미 자리를 옮긴(요 5:24) 우리 역시 이 배짱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몰라주고 비난할 때, 내 억울함을 스스로 풀기 위해 혈기를 부리는 ‘자가 증언’의 삶을 멈추어야 합니다.  "나를 가장 잘 아시는 주님이 내 증인이 되신다"는 이 확실한 복음의 안전지대 안에서 숨을 고르고, 나를 방어하는 대신 묵묵히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진짜 제자의 능력입니다(인터넷).

 

(c) 여기서 저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οἶδα ὅτι ἀληθής ἐστιν ἡ μαρτυρία αὐτοῦ (오이다 호티 알레데스 에스틴 헤 마르투리아 아우투)](요5:32)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좀 구체적으로 묵상하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고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i)           32절 하반절의 “오이다”[οἶδα (나는 확실히 안다)]라는 선언은, 유대인들의 살기등등한 공격 한복판에서 예수님이 누리셨던 ‘절대적인 평안과 내적 확신의 뿌리’를 드러내는 매우 위대한 고백입니다.  헬라어에서 ‘안다’는 단어는 경험을 통해 서서히 알아가는 ‘기노스코(γινώσκω)’와, 배우지 않아도 직관적이고 완벽하게 이미 알고 있는 ‘오이다(οἶδα)’로 나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자기를 향해 갖고 계신 증언이 100% 진리[ἀληθής(알레데스)]임을 눈으로 보듯 명백하게 확신하고 계셨습니다.  이 말씀이 가진 구체적인 의미와 오늘날 우리 삶에 던지는 3가지 영적 적용점을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구체적 의미 : "세상의 판결문보다 아버지의 증언이 훨씬 무겁다"

 

당시 유대인들의 법정은 예수님을 향해 "너는 안식일 파괴자요, 죽여야 마땅한 범죄자"라는 가짜 판결문을 조작하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소음과 정죄가 예수님의 영혼을 세차게 흔들 수 있는 위기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나는 확실히 안다[οἶδα(오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세상 재판관들이 내리는 판결이나 비난은 지나가는 바람일 뿐이며, 오직 나를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가 증명해 주시는 ‘그 증언’만이 영원토록 참되다는 절대적 신뢰를 고백하신 것입니다.

 

2.   삶의 적용 : ‘사람들의 평가’라는 감옥에서 완벽하게 해방되십시오.

 

우리는 살아가면서 주변 사람들의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곤 합니다.  누가 나를 칭찬하면 우쭐해지고(교만), 누가 나를 비난하거나 오해하면 밤잠을 설치며 억울해합니다(상처).  왜냐하면 내 존재의 가치를 '사람들의 증언'에서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구체적 실천: 오늘 주님의 음성을 내 삶에 이식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향해 뭐라고 평가하든, 나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신(요 5:24) 내 아버지 하나님의 증언이 참인 줄 내가 확실히 아노라(오이다)!"라는 영적 배짱을 회복해야 합니다.

 

세상이 나를 실패자라 조롱하고, 내 안의 연약함이 나를 고발할지라도, 나를 "보배롭고 존귀한 자녀"라 부르시는 주님의 복음적 증언만을 내 인생의 최종 판결문으로 채택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3.   삶의 적용: 내면의 ‘성령의 증언’을 신뢰함으로 무기력함을 이기십시오.

 

우리가 앞서 묵상할 때, 내 힘으로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해 무기력함을 느낀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 무기력함을 돌파하는 비결이 바로 이 ‘오이다’(나는 안다)에 있습니다.

 

로마서 8장 16절은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신다"고 했습니다.  내 감정은 수시로 변해서 "내가 진짜 구원받았나? 내가 주님의 제자가 맞나?" 흔들릴 수 있습니다.

 

구체적 실천: 감정을 믿지 말고, 내 안에서 끊임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흔들리지 않는 증언를 붙드십시오.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내 안의 성령의 증언은 참되다"는 것을 확신할 때, 우리는 무기력감의 침상을 털고 일어나 다시금 묵묵히 순종의 걸음을 뗄 수 있는 새 힘을 얻게 됩니다.

 

(3) 첫 번째 증언: 세례 요한의 증언(요5:33-35): 유대인들이 인정했던 세례 요한이 이미 진리(예수)에 대해 증언했음을 상기시킵니다.  

 

(a) 오늘 본문 요한복음 5장 33절을 보면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τῇ ἀληθείᾳ (테 알레데이아)] 증언하였느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빛에 대하여”[περὶ τοῦ φωτός (페리 투 포토스)] 증언하로 온 자라는 1장 7, 8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요한복음 5장 35절 상반절을 보면 성경은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ἐκεῖνος ἦν ὁ λύχνος ὁ καιόμενος καὶ φαίνων (에케이노스 엔 호 뤼크노스 호 카이오메노스 카이 파이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종합하여 유대인들이 인정했던 세례 요한에 대해서와 그의 증언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의 증언이 우리의 증언이 되는 원리와 적용도 배우고 싶습니다.

 

(i)           예수님이 유대인들 앞에서 첫 번째 객관적 증인으로 세례 요한을 소환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요한을 대단한 영적 권위자로 인정하고 그의 외침에 잠시 열광했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35절하).  그러나 예수님은 요한의 정체성을 ‘빛’이 아닌 ‘등불’로 명확히 정의하시며, 참된 증인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들을 종합하여 세례 요한의 증언이 가진 성경적 의미와,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증언이 되는 3가지 영적 원리 및 적용점을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요한의 정체성: 참된 ‘빛’이 아닌, 켜서 비추는 ‘등불’

 

요한복음 1장 7-8절은 세례 요한이 “이 빛(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임을 명시합니다.  5장 35절에서 예수님은 그 요한을 향해 ‘오 뤼크노스[ὁ λύχνος (그 등불)]’라고 부르십니다.

 

원어의 뉘앙스: 헬라어 ‘뤼크노스’(λύχνος )는 스스로 빛을 내는 태양이 아니라, ‘기름을 공급받아 누군가에 의해 불이 켜진 휴대용 등잔불’을 뜻합니다.  게다가 ‘켜서’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오메노스(καιόμενος)’는 수동태 분사로, ‘태워지며 소멸하고 있는’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영적 의미: 세례 요한은 자기 스스로 빛을 발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참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비추기 위해, 자신의 인생과 목숨을 기름 삼아 활활 태우며 사라져 가던 거룩한 도구였습니다.  어둠 가득한 세상에 진짜 빛(메시아)이 오셨음을 알리기 위해 밤을 밝히던 임시 등불이 바로 요한의 사명이었습니다.

 

2.   요한의 증언: 주객이 전도되지 않는 ‘진리에 대한 증언’

 

세례 요한이 유대인들에게 그토록 큰 존경을 받았던 비결은, 사람들이 자신을 메시아나 엘리야로 추앙하려 할 때 단호하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나는 광야의 소리일 뿐이다"(1:20-23)라며 자기를 철저히 감추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직 ‘진리(τῇ ἀληθείᾳ, 테 알레데이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3:30)는 고백대로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요한이라는 ‘등불’ 자체의 화려함에 취해 잠시 즐거워했지만(35절하), 요한은 끝까지 손가락을 들어 자기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빛’만을 바라보게 만들었습니다.

 

3.   세례 요한의 증언이 ‘우리의 증언’이 되는 원리와 삶의 적용

 

우리가 이미 구원받아 영생을 소유한 제자(24절)로서 이 땅에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때, 세례 요한의 삶은 완벽한 이정표가 됩니다.

 

첫째, ‘내가 주연이 되려는 자기 증명(자가 증언)’을 멈추고 주님만 비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일상이나 교회 생활 속에서 나도 모르게 "내가 얼마나 훌륭한 신앙인인지, 내가 얼마나 헌신했는지"를 세상과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어 합니다.  내 자아를 드러내려는 이 태도가 바로 유대인들의 독선이었습니다.

 

구체적 적용: 우리의 정체성 역시 스스로 빛을 내는 존재가 아니라, 주님이 켜주신 소박한 등불임을 날마다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칭찬받고 내가 주목받으려 하는 영적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세례 요한처럼 "나를 보지 마시고, 나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져내신 내 안의 예수 그리스도(참빛)를 보십시오"라고 삶의 방향을 끊임없이 주님께로 돌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둘째, 주님의 영광을 위해 ‘나를 기쁘게 태워 보내는 소멸의 영성’을 장착해야 합니다.

 

요한을 묘사한 ‘카이오메노스(태워지는)’라는 단어처럼, 등불이 주변을 비추기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안에 있는 기름을 소모하고 심지를 태워야 합니다.  희생과 헌신이 없는 증인의 삶은 가짜입니다.

 

구체적 적용: 오늘 하루 가정에서, 일터에서 지체들을 대할 때 내 자존심을 앞세우거나 내 뜻을 관철하려 하지 말고, 내 시간과 감정과 에너지를 기쁘게 태워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손해 보고, 내가 한 걸음 양보함으로써 내 주변이 밝아진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의 살아계심을 온몸으로 증언하는 가장 강력한 ‘등불의 삶’이 됩니다.

 

셋째, 세상의 일시적인 환호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영적 지조’를 지켜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요한의 등불 빛에 ‘잠시[πρὸς ὥραν (프로스 호란)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 기뻐했습니다(35절).  사람들의 평판과 인기는 이처럼 아침 안개와 같이 금방 변하고 사라집니다.

 

구체적 적용: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거나 알아주지 않거나, 오직 나를 향해 신실하게 증언해 주시는 하나님의 참된 증언(32절)만을 바라보며 복음의 자리를 묵묵히 지켜내야 합니다.  세상의 트렌드나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신앙의 가이드라인을 타협하는 미혹을 거부하고, 오직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온전히 드러내는 담대함을 일상에서 실행해야 합니다(인터넷).

 

(b) 오늘 본문 요한복음 5장 3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ἵνα ὑμεῖς σωθῆτε (히나 휘메이스 소데테)]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목적이 되야 하지 않을까요?

 

(i)           이 말씀은 요한복음 5장의 법정 논쟁을 관통하는 예수님의 가장 깊은 목회적 심장과 복음의 최종 목적입니다.  34절에서 예수님이 던지신 선언은, 얼핏 보면 세례 요한의 증언을 깎아내리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유대인들의 완악한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그들을 어떻게든 살려내시려는 주님의 눈물겨운 사랑의 추적입니다.  이 말씀에 담긴 구체적인 의미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하신 주님의 목적이 오늘날 증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야 하는지 인공지능이 3가지 관점으로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34절 상반절의 의미: “사람의 승인(취함)이 필요 없는 창조주의 당당함”

 

예수님은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λαμβάνω (람바노) (영접하다, 소유하다)] 아니하노라”고 하십니다.

 

본질적 의미: 예수님은 하나님과 완전히 같은 ‘동일 본질’의 창조주이십니다.  따라서 인간 세례 요한이 메시아라고 증언해 주든, 유대 교인들이 인정해 주든, 그것이 주님의 신성과 권위에 단 1%의 영향도 주지 못합니다.  주님은 인간의 칭찬이나 평가, 종교적 시스템의 공인을 받아서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피로한 인생이 아니십니다.  오직 아버지가 증명하시는 것(32절) 하나만으로 완벽하게 당당하고 안전하신 분입니다.

 

2.   34절 하반절의 의미: “나를 죽이려는 원수까지 살려내시려는 목자의 심정”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굳이 자기에게 필요도 없는 세례 요한의 증언(33절)을 다시 언급하며 이 변론을 펼치고 계실까요?  주님은 그 이유를 단호하게 밝히십니다”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사랑의 역설: 지금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안식일 파괴자로 몰아세우며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원수들입니다(18절).

 

보통 인간의 법정이라면 나를 죽이려는 자들을 향해 분노하며 독설을 퍼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도리어 그들이 존경했던 세례 요한의 권위를 빌려서라도, 그들의 가려진 눈을 열어 어떻게든 그 유대인들을 파멸(사망)에서 건져내어 ‘구원’하시려고 그들의 눈높이에 맞춘 변론을 선물해 주고 계십니다.  주님의 목적은 논쟁의 승리가 아니라, 원수들의 ‘생명 구원’이었습니다.

 

3.   증인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유일한 목적: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는 주님의 이 목적은, 오늘날 주님의 등불로 부름받은 우리 제자들의 유일한 존재 이유이자 사역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 ‘논쟁과 정죄’를 멈추고 ‘영혼의 구원’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가끔 일상이나 신앙생활 속에서 나를 오해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을 향해 "내가 얼마나 옳은지"를 증명하려고 혈안이 될 때가 있습니다.  내 자신으로부터 나온 독선으로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논쟁은, 요한복음 5장의 유대인들처럼 서로를 정죄하는 사망의 감옥에 갇히게 만들 뿐입니다.

 

구체적 적용: 누군가 나와 신학적 견해가 다르거나, 나에게 상처를 주거나, 이단의 미혹에 빠져 허덕이고 있을 때, 그를 이겨 먹으려는 논쟁의 칼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유일한 목적은 ‘그 영혼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나는 것’ 하나뿐이어야 합니다.  내 자존심이나 체면이 깎이더라도, 주님이 원하셔서 살리시고자 하는 자들(5:21)에게 복음의 생명을 전달하는 것에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둘째, ‘사람의 평판(취함)’에서 해방되어 오직 영혼을 품는 배짱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증언을 취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느냐, 내 사역을 칭찬해 주느냐"라는 ‘사람의 승인’에 목매는 피로한 삶을 끝내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완벽하게 옮겨진 자들입니다.

         

구체적 적용: 사람들의 시선에서 해방될 때, 비로소 우리는 사람들을 ‘이용’하거나 ‘의식’하지 않고, 그들을 온전히 ‘사랑하고 구원하는’ 진짜 증인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나를 비난하는 세상의 차가운 눈초리 앞에서도 "주님이 내 인생의 참된 증인이시니 괜찮다"는 배짱을 가지고, 오직 그들의 영혼이 구원받기를 바라는 목자의 심정으로 묵묵히 기도의 자리를 지켜내야 합니다(인터넷).

 

(4) 두 번째 증언: 예수님이 행하시는 역사/표적(요5:36):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완수하라고 주신 일들(기적과 사역) 자체가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a) 예수님은 36절에서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으니"라고 선언하시며,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주어 완수하게 하시는 역사[τὰ ἔργα (타 에르가)]를 소환하십니다.  이 본문 속에서 사도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의미와 오늘날 우리 삶과 묵상에 녹여내야 할 3가지 핵심 교훈을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에르가[ἔργα (역사)]’의 본질 : 단순한 기적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완수하는 사역’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기적을 보고 단지 안식일 법을 어긴 ‘불법 노동’으로만 취급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치유를 ‘아버지께서 내게 주어 완수하게[τελειώσω (텔레이오소)] 하시는 역사’라고 정의하셨습니다.

 

신학적 의미: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기적은 단순한 초자연적인 신기함(Miracle)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생명 구원을 이 땅에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표적(Sign)’이자 사역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에르가’(역사)는 이미 구약 성경이 예언했던 메시아의 구원 사역(맹인이 보고, 못 걷는 사람이 걷는 역사)과 완벽하게 일치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그 기적의 본질을 보았다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확실한 물증이었습니다.

 

2.   말(소리)을 넘어 ‘존재와 삶의 열매’로 증명하는 진짜 복음

 

세례 요한의 증언은 광야에서 울려 퍼지는 거룩한 ‘말(소리)’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의 증언보다 내 삶을 통해 나타나는 구체적인 사역의 열매(역사)가 훨씬 더 크고 확실한 증거라고 선언하십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우리가 일상에서 "나는 구원받아 영생을 소유한 사람(5:24)입니다"라고 입술로 고백하는 자가 증언은 참 귀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화려한 말주변이나 종교적 지식이 아닙니다.

 

내 손에 쥐어진 정죄의 칼을 내려놓고 내 힘을 빼며, 38년 된 병자 같은 이웃을 향해 주님의 사랑을 흘려보내는 ‘구체적인 삶의 열매와 행동’이야말로, 내 안에 진짜 예수의 생명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가장 강력한 물증이 됩니다.  복음은 말에 있지 않고 삶의 능력에 있습니다.

 

3.   ‘텔레이오소[τελειώσω (완수하다)]’: 내 뜻이 아닌 주님의 일을 끝까지 이루는 태도

 

36절에서 예수님은 아버지가 주신 일을 내가 ‘완수하려[τελειώσω(텔레이오소)]’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 단어는 훗날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구속 사역을 완전히 끝내시며 외치신 “다 이루었다[Τετέλεσται (테텔레스타이)]”라는 선언의 원형입니다(19:30).

 

우리에게 주는 교훈: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역사)은 도중에 내 기분이나 사람들의 평판, 혹은 율법적인 가이드라인의 방해 때문에 중간에 포기하는 일이 아닙니다.  내 뜻을 철저히 내려놓고, 나를 통해 누군가를 살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신뢰하며 묵묵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제가 고백하였던 사역과 경건의 자리에서 느끼는 ‘무기력함’을 이기는 비결도 여기에 있습니다.  내 힘으로 대단한 기적을 일으키려 하지 말고, 오늘 내게 주신 작은 일상의 순종(한 영혼을 용서하고 용기 내어 사랑하는 일)을 주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끝까지 신실하게 완수해 내는 것, 그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가장 아름다운 제자의 표적입니다(인터넷).

 

(5) 세 번째 증언: 하나님 아버지의 친히 하시는 증언(요5:37-38): 눈으로 보거나 음성을 듣지 못했더라도, 아버지는 여러 방식으로 아들을 증언하셨습니다.

 

(a) 이 세 번째 증언은 영적인 시각과 청각이 마비된 종교인들의 실상을 날카롭게 폭로하는 동시에,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르게 듣고 살아야 하는지 깊은 영적 도전을 줍니다.  예수님은 37절에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고 선언하시면서, 유대인들을 향해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라는 충격적인 진단을 내리십니다.  이 본문이 가진 구체적인 의미와 우리의 일상에 던지는 3가지 핵심 교훈을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종교적 위선’의 폭로 : 열심히 믿으나 하나님과 무관한 삶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매일 율법을 암송하고 제사를 드리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가장 잘 듣고 그분의 뜻을 가장 잘 아는 백성이라고 자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게 "너희는 단 한 번도 아버지의 음성을 들은 적이 없고, 그 형상을 본 적도 없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신학적 의미: 하나님 아버지는 구약의 성경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통해서 아들이 진짜 메시아임을 끊임없이 증언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만든 교리와 가이드라인의 안경을 쓰고 있었기에, 눈앞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종교적인 외형이 화려하고 성경을 연구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신앙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가짜(외식)임을 찌르신 것입니다.

 

2.   ‘멘오(μένω, 거하다)’의 비밀 : 말씀이 내 인격과 삶을 지배해야 합니다.

 

38절에서 유대인들의 결정적인 실패 원인을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μένω (멘오)] 아니하니”라고 짚으십니다.  여기서 ‘거하다’의 헬라어 ‘멘오’는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붙잡혀 살다, 완전히 뿌리를 내리고 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유대인들의 머릿속에는 성경 지식이 가득했지만, 그 말씀이 그들의 마음과 삶을 다스리는 ‘거함’의 역사는 없었습니다.  지식은 가득한데 삶에는 용서와 긍휼이 없고 정죄만 가득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낙심과 무기력함을 이기고 생명의 부활을 누리는 비결은, 말씀을 단지 ‘묵상용 텍스트’로 지식 소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 말씀이 내 생각과 감정과 모든 관계 속에 깊숙이 들어와 나의 자아를 깨부수고 나를 지배하도록 내 마음의 왕좌를 주님께 내어드려야 한다는 교훈을 줍니다.

 

3.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는 유일한 통로 : 오직 ‘예수 그리스도’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형상을 보지 못한 이유는, 하나님이 보내신 이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38절하)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이시기에, 인간이 그분의 음성을 듣고 형상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아들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에게 주는 교훈: 우리는 가끔 "하나님이 나에게 음성을 들려주시면 좋겠다, 환상을 보여주시면 좋겠다"라는 신비주의적 욕망에 빠지곤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다 보이셨습니다’(20절).

 

그러므로 우리는 헛된 소리나 신비한 체험을 쫓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내 자신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종교적 환상을 내려놓고,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시고 나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단번에 옮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온전히 나를 굴복시키는 것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가장 명확하고 안전한 방법입니다(인터넷).

 

(6) 네 번째 증언: 구약 성경 (39-40절): 유대인들이 영생을 얻기 위해 연구하는 성경(구약)이 바로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는 책입니다.  그러나 정작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오기를 거부하는 모순을 지적하십니다

 

(a) 이 네 번째 증언은 요한복음 5장의 법정 논쟁을 종결짓는 완벽한 마침표이자, 성경을 사랑하고 묵상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심장을 찌르는 복음의 거대한 거울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사랑하고 외우던 구약 성경을 향해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39절)”고 선언하시며, 그들이 성경을 종교적 기득권의 무기로 삼으면서 정작 진짜 생명이신 예수님께는 오지 않는 비극적인 모순(40절)을 날카롭게 발가벗기십니다.  이 본문 속에서 사도 요한이 드러내는 구체적인 의미와 오늘 우리의 매일의 묵상에 녹여내야 할 3가지 핵심 교훈을 인공지능이 정리한 것입니다(인터넷):

 

1.   ‘에라우나테[ἐραυνᾶτε (연구하다)]’: 생명을 잃어버린 메마른 지식주의

 

39절의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에서 ‘연구하다’의 헬라어 ‘에라우나테(ἐραυνᾶτε)’는 ‘먼지 하나까지 샅샅이 뒤지며 추적하다, 현미경을 들이대듯 조사하다’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비극: 유대인들은 성경의 글자 수를 세고, 자음과 모음을 낱낱이 분석하며 성경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렇게 껍데기 문자를 철저히 지켜내면 자신들에게 ‘영생’이 자동 지급될 것이라 착각했습니다.

 

종교적 감옥: 그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마음을 만나는 통로가 아니라, 자신들의 종교적 우월감을 증명하고 타인을 정죄하는 가이드라인의 도구로 박제해 버렸습니다.  성경 텍스트는 박사처럼 잘 알았지만, 그 성경이 가리키는 하나님 아버지는 전혀 알지 못하는 영적 맹인이었습니다.

 

2.   성경의 유일한 목적 : 모든 페이지가 지목하는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성경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단호하게 선언하십니다: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39절 하반절).

 

신학적 의미: 구약 성경의 수많은 제사, 성전, 율법, 선지자들의 예언, 그리고 베데스다의 치유 사건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모든 페이지와 서사는 단 하나의 목적지, 즉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손가락을 들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빼버리면, 성경은 그저 도덕적인 훈계나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책에 불과합니다.  성경 묵상의 종착지는 언제나 '나의 종교적 성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과 은혜'가 되어야 한다는 위대한 교훈을 줍니다.

 

3.   모순의 극치 : 영생의 껍데기를 잡고 ‘진짜 생명’을 거부함

 

40절은 복음서 전체에서 가장 슬프고도 엄위한 인간의 완악함을 폭로합니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οὐ θέλετε (우 델레테)(원하지 않는다)].

 

우리 삶을 향한 교훈: 유대인들은 영생을 그토록 얻고 싶어 성경을 현미경 보듯 연구하면서도, 정작 눈앞에 계신 영생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나아와 자신의 자아를 깨부수고 무릎 꿇는 것만큼은 철저하게 거부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 가면 내가 주인이 되어 쌓아 올린 ‘종교적 바벨탑’과 기득권을 다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매일의 묵상을 향한 적용: 이 교훈은 오늘날 매일 말씀을 대하는 우리에게 무서운 경종을 울립니다.  우리가 묵상을 깊이 하고 성경 구절과 원어를 많이 아는 지식적 만족에 머물면서도, 정작 내 일상의 삶 속에서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습니다”(30절)라고 주님 발 앞에 항복하지 않는다면, 우리 역시 유대인들의 비극적인 모순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묵상의 목적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매일 주님께 기쁘게 항복하여(Surrender) 그분의 생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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