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로마서 8장 31-39절]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시는
김창세 선교사님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1)
[로마서 8장 31-34절]
로마서 8장 31절 말씀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여기서 “그런즉”이란 접속사는 앞에 말씀과 뒤에 말씀과 연결시켜줍니다. 여기서 앞에 말씀이란 학자들의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1) 로마서 3:21-8:30, (2) 로마서 5:1-8:30,
(3) 로마서 8:1-30,
(4) 로마서 8:26-30.
제 의견은 “그런즉”이란 로마서 8장 29-30절 말씀과 연결시켜준다고 생각합니다. 로마서 8장 29-30절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의 다섯 단계를 말씀합니다. 즉 (1) 하나님께 미리 아시고(사랑하시고), (2) 미리 정하신(택하신) 자들을 (3) 예수님을 믿도록(모시도록) 부르시고, (4) 의롭다하시고(칭의), (5) 영화롭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라고 말씀했습니다(31절). 여기서 한국 성경에는 “이 일”이라고 단수를 사용하고 있지만 원어 헬라어를 보면 복수로서 “이 일들”(these things)입니다. “이 일들”이란 로마서 8장 29-3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다섯 단계를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일들”이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사랑하시고), 미리 정하신(택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의롭다하시며, 영화롭게 하신 일들을 말씀합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의 다섯 단계에 대해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라는 말씀은 우리가 아무 할 말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구원의 다섯 단계를 이미 이루셨기에 우리는 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1절에서 “만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에게 의문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리어 큰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에 “만일”이란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큰 확신은 구원의 하나님께서 반드시 구원의 다섯 단계를 이루신다는 확신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사랑하셔서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며 영화롭게 하심을 100% 확신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또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9-30절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다섯 단계를 말했을 때 동사를 과거사로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의 큰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의 몸은 아직 영화롭게 되지는 않았고 오히려 늙어가고 있었고 또한 “육체의 가시”도 있었지만(고후12:7), 그는 구원의 하나님께서 미리 사랑하시고 미리 택하신 자기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셨기에 반드시 영화롭게 하실 줄 확신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초림 때 하나님께서 ‘이미’(Already) 구원의 완성하셨고 예수님의 재림 때 하나님께서 ‘아직도’(Not-yet)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기에 그 ‘이미’와 ‘아직도’ 사이에 사는 그리스도인으로 이미 하나님의 구원의 뜻이 하늘에 이루어진 것처럼 장차(예수님의 재림 때) 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줄 확신했습니다. 참고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을 보면 “…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6:10, 현대인의 성경). 이러한 사도 바울의 구원의 확신의 근거는 그의 안에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입니다. 빌립보서 1장 6절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 가운데 선한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실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 땅에 육신으로 사는 것과 죽은 것, “이 둘 사이에 끼여 있”었을 때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요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그가 이 세상에 계속 머물러 있었던 것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였습니다(21-25절). 그는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길 원했습니다(20절). 그는 비록 아직 영화롭게 되지는 못했지만 영화롭게 될 줄 확신했기에 그렇게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1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이란 현대인의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 편이시라면”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 것을 창세전에 우리를 사랑하시고 택하시사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며 영화롭게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씀한 것입니다(31절). 실제로 악한 세력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사랑하사 택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 우리를 대적하고 있습니다. 그 악한 세력은 수시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그의 졸개들을 보내서 우리를 수시로 공격하되 세상 유혹을 통해서나, 우리 자신을 통해서나, 죄를 통해서나 등등 여러모로 우리를 공격해오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24절 말씀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악한 세력인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은 심지어 “큰 표적과 기사”[“큰 기적과 놀라운 일”(현대인의 성경)]까지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선택된 우리들까지 속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탄은 우리를 미혹하고 시험하며 공격하려고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니고 있습니다(욥1:7). 마귀는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벧전5:8). 마귀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고 구석구석까지 돌아다니면서 우리를 삼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기에 마귀 사탄도 감히 우리를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롬8:31).
스가랴 1장 8절을 말씀입니다: “내가 밤에 보니 한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 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붉은 말과 자줏빛 말과 백마가 있기로.” 구약의 계시록이라고 불리는 스가랴에서 스가랴 선지자가 본 환상은 “한 사람이 붉은 말을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 나무 사이에 썼고”인데 여기서 그 “한 사람”이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섰고”라고 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7장 55절 말씀입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스데반이 순교하기 전에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주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모습입니다(막16:19; 눅22:69; 골3:1; 히1:3; 10:12; 12:2). 왜 예수님께서 스데반이 죽기 전에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지 않으시고 서 계셨는가 하면 그 이유는 사랑하는 스데반이 어려움을 당하니까 서 계셨던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본 환상에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 계신 것을 본 것은 우리를 위하시기에, 즉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서신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가가 본 환상에는 “한 사람”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뒤에는 붉은 말과 자줏빛 말과 백마가 있”었는데(슥1:8) 그 말을 탄자들은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입니다(10절).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시되 이 사자들(천사들)을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셔서 두루두루 우리를 살피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사탄이 우리를 대적하려고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미리 사랑하시고, 미리 택하시사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한 우리를 위하시기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화롭게 하셔서 우리가 더 천국에 가서 영광을 누리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구원의 하나님이 우리를 창세전에 사랑하시고 택하시사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시기에 우리는 100% 영화롭게 되고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살 것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13장 6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하노라.” 또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깨어서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7절과 5장 8절 말씀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우리는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돼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주님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칭찬을 받길 기원합니다(마25:21).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2)
[로마서 8장 31-34절]
로마서 8장 32절 말씀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서 “자기 아들”이란 하나님의 독생자, 성자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고, 독생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스가랴 선지자가 본 8가지 환상 중에 첫 번째 환상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 세계에 오시는 것이었습니다(슥1:8). 그가 본 환상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신 모습이었습니다[독생자가 서 계시다는 말씀이 3번이나 나옴(8, 10, 11절)]. 주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는 모습인데(막16:19; 눅22:69; 골3:1; 히1:3; 10:12; 12:2) 스데반은 순교하기 전에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행7:55).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스데반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니까 서 계셔서 도와 주신 것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어려움을 당하는 성도들을 도와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에 우리를 대적하는 사탄과 그의 졸개들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 상반절을 보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성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이 아닌 다른 사람을 내어 주신 일이 나옵니다(내 자식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자식을 내어주는 일이기에 아깝지가 않을 것임). 이사야 43장 3절 말씀입니다: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현대인의 성경)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이며 너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거룩한 자이다. 내가 너를 자유롭게 하려고 이집트와 이디오피아와 스바를 네 몸값으로 내어주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애굽과 구스(이디오피아)와 스바(넓은 의미로 구스와 같은 지역을 말함)을 이스라엘의 속량물로 내어주셨습니다. 여기서 “속량물”이란 구원받을 자의 생명을 대신하여 내어주는 보상물 같은 것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홍해 바다에서 다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애굽인들을 대신하여 홍해 바다에 수장하므로(전멸시키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사야 43장 4절 말씀입니다: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현대인의 성경) “내가 너를 소중하고 귀한 존재로 여겨 너를 사랑하고 있으니 내가 다른 민족을 희생시켜서라도 네 생명을 구하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대신 사람들(애굽인들, 구스와 스바 사람들)을 내어 주시므로(그들을 희생시키시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을 구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배롭고 존귀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아끼셨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아끼셨는지 알 수있냐면 성부 하나님께서 어느 누구에게도 하지 않은 말씀을 오직 독생자 예수님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좀 알 수가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3:17);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17:5). 성부 하나님은 성자 예수님을 향하여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을 하셨을 정도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시고 아끼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로마서 8장 32절을 보면 성경은 성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이들”이신 독생자 성자 예수님을 아끼지 아니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 “아끼지 아니하시고”란 말씀의 뜻은 ‘내주다,’ ‘넘겨주다,’ ‘포기하여 버리다’는 의미로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성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피 흘려 죽는데 내 주셨다/넘겨주셨다/포기하여 버리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위하시”므로(31절)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매우 아끼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피 흘려 죽는데 내 주시되 지체함이 없이, 머뭇머뭇 거리지 않으시고 내 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시므로 (forsaken by God)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forgiven by God).
창세기 2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하나님의 시험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었습니다(창22:1-2). 그 때 아브라함은 머뭇머뭇 거리지 않고 즉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3-10절). 만일 그 때 아브라함이 머뭇머뭇 거렸던지 또는 아내 사라하고 의논하였던지 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 순종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일러주신 곳에 이르러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고 했었습니다(9-10절). 그 때 하나님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아브라함을 불러 이삭을 잡는 일을 멈추게 하였습니다(11절). 그리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12절).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이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약속의 씨)(롬9:8)인 줄 알았으면서도, 그리고 그 아들 이삭을 통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바 하늘의 셀 수 없는 뭇별처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는 말씀을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믿었는데도 불구하고(롬4:18,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창22:2) 그를 아끼지 아니하고(12절)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고 했었습니다(10절).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대적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려고 했었습니다. 그 대적자들 중에는 유대인 지도자들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4장 1-2절 말씀입니다: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과 무교절이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일 방도를 구하며 이르되 민란이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하지 말자 하더라.”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민란”이 일어날까봐 유월절 명절에는 예수님을 잡아 죽이지 말자고 하고 미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백성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눅22:1-2). 누가복음 22장 3-5절 말씀입니다: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그런데 사탄이 가룟 유다를 시켜서 종교 지도자들에게 가서 돈을 받고 예수님을 넘겨주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유월절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습니다. 또 다른 대적자들은 바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라고 환호했습니다(마21:9). 그들은 그 때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려고 하지 않았었습니다.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도 대적 자였습니다. 그도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이유는 빌라도가 직접 예수님을 심문했는데 예수님에게 죽을죄를 3번이나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눅23:22). 또한 빌라도는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을 알고(막15:10) 죄 없으신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는 “명절이 되면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6절)를 사용하여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는데 (사람의 동정심을 이용해서라도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는데)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 하게 하”므로(11절) 그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를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었습니다(15절). 누가복음 23장 23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긴지라.”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아내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9절 말씀입니다: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속에서 자기 졸개들을 사용하여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결코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예수님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7-18절 말씀입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으시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신데 어떻게 사탄이 예수님을 죽일 수가 있었겠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사탄이 아무리 총력을 다해서 공격한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주권 속에서 허락이 되었고 하나님의 한도 안에서만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한도란 바로 창세기 3장 15절(원복음)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며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사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한도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탄의 공격의 결과는 바로 요한복음 19장 30절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의 뜻인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을 다 이루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므로 구원의 역사를 다 이루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의 일에 대하여 이정도로 이렇게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롬8:31). 그 대적자의 공격도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이루는데 도구로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2절 말씀입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현대인의 성경) “이 예수님은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정하신 계획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졌는데 여러분이 악한 사람들의 손을 빌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거기에 따라서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 주신바 된 것입니다. 이렇게 허물과 죄로 죽었던(엡2:1)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량물로 십자가에 내어주신바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결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돼야 합니다(고전15:57-58).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주님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고 칭찬을 받길 기원합니다(마25:21).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3)
[로마서 8장 31-34절]
로마서 8장 32절 말씀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여기서 “내주신 이”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하나님을 말씀합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31절). 그리고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시요(신33:27; 사40:28; 롬16:26), 어디나 계시는 편재하시는 하나님이시요(사57:15; 렘23:24),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창28:3; 수22:22; 욥8:3, 5; 시50:1; 사 9:6; 겔10:5; 계11:17; 15:3; 16:7, 14; 19:6, 15; 21:22),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요일4:8, 16). 그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되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셨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그 아들”이란 독생 성자 하나님이신 하나님과 동등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은 “그 아들”(“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주셨습니다. 지난 주에 묵상한 창세기 22장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심에 있어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는데(창22:1-2), 실제로 아브라함에게는 또 다른 아들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16:16).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독자 이삭”(22:1)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7절을 개역 한글판(1956년)으로 보면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개역 개정판(1998년)으로 보면 “그 외아들”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그 독생자”라고 변역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독생자”였습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에 있어서 자신이 매우 사랑하고 아끼는 “독생자” 이삭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고 했었습니다(창22:9-10).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구원)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 주신 하나님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롬8:32).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고 주십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예수 안에’ 또는 ‘그 안에’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함께”라는 단어는 “말미암아”라고도 말할 수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말미암아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고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안에서/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셨고 주시는 “모든 것”은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1장 3절 말씀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모든 신령한 복”[“모든 영적인 복”(현대인의 성경)]으로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게 모든 신령한 복중에 몇 가지를 에베소서 1장4절부터 말씀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은 4절에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말씀을 하였는데 이것은 로마서 8장 29절로 말씀한다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 또는 미리 사랑하신 자들’을 “미리 정하셨”다(택하셨다)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이미 정하셨다 또는 택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이미 묵상한 구원의 5단계에 두 번째 단계입니다. 간략하게 다시 말한다면, 로마서 8장 3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모든 것”이란 “모든 신령한 복”(엡1:3)으로서 그 모든 신령한 복에는 구원의 5단계가 다 포함돼 있습니다. 여기서 구원의 5단계란 (1) 하나님이 미리 아심/사랑하심, (2)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심/택하심, (3) 하나님께서 부르심, (4)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심, (5)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심을 말합니다(롬8:29-30).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디모데후서 1장 9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사 우리를 부르심도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은혜”로 부르신 것입니다. 여기서 “영원 전부터”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은 영원 전부터 계획을 다 세우신 것이란 말입니다. 구원의 5단계에서 하나님께서 영원 전 또는 창세전에 우리를 미리 아시고/사랑하시고 미리 정하셨음/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태어난 후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3절 말씀입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각각 개별적으로 부르셨습니다. 부르심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아신 것/사랑하신 것과 정하신 것/택하신 것도 각각 개별적으로 사랑하시고 택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각각 개별적으로 의롭다 하셨습니다. 영화롭게 하심도 각각 개별적으로 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심에 있어서 이렇게 한 사람, 한 사람 개별적으로 사랑하셔서 택하시고 부르시사 의롭다 하시며 영화롭게 하시니 누가 우리를 대적할 수가 있겠습니까(롬8:31). 그래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2절 하반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을 하였는데 여기서 “우리”란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로마서 5장 6, 8, 10절에서 3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로마서 5장 6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우리는 연약해서 구원 받음에 있어서, 천국감에 있어서, 주님과 함께 하늘에 보좌에 앉음에 있어서 조금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고 지금도 없습니다. 결코 구원이란 ‘믿음’(은혜) 더하기 ‘행위’(선행)이 아닙니다. 이 영광스러운 구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지 않은” 연약한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입니다.
(2)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로마서 5장 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이지 우리가 의로울 때 그리하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의(righteousness)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totally depraved)한 죄인으로서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어떠한 공로를 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 주시므로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가 우리에게 전가(imputed)된 것입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로마서 5장 10절 말씀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사 죽게 하시므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가 원수 되었던 관계를 우리의 노력이나 행위(선행)으로 화목케 될 수가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원수 된 관계는 하나님께서만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그 해결의 방법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화목제물로 죽게 하시므로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뭔가를 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우리는 결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구원의 확신이 없는 이유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노력해야 하고 선을 행해야 하고 등등 우리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구원을 하시기에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사랑하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시고 계획하시사 그 구원의 5단계를 이루어 나아가시니까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8:32)을 개역개정판(1998년)으로 보면 그냥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번역을 했지만 개역한글판(1956년)을 보면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변역을 했습니다. 즉, 다른 점은 “은사로”라는 단어가 개역한글판에는 있지만 개역개정판에는 없습니다. 원어 헬라어를 보면 ‘xarizomai’라는 단어로서 한국어로는 ‘은사로 주지’라는 의미입니다. 즉, 원어 헬라어의 번역을 개역한글판이 “은사로”라고 제대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이 “은사로”라는 헬라어 단어를 우리는 로마서 6장 23절에서 또 볼 수가 있습니다: “… 하나님의 은사(헬라어로 ‘xarisma’)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에베소서 2장 4-5, 8-9절 말씀입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 말씀들이 우리에게 주는 매우 중요한 교훈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엡2:5, 8)요 “은사”(롬6:23; 8:32)이지 결코 ‘우리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엡2:8)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도 아닙니다(9절).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8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 전에 사랑하사 택하셔서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하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이 구원의 5단계, 즉 하나님의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이지 우리의 공로가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능력, 즉 복음의 능력이 우리 안에 역사하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지 우리의 행위가 결코 아닙니다(엡 2:8, 9).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의 구원의 위하여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 주셨습니다. 이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롬8:32).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요3:16) 예수 그리스도를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내어 주셨는데 어찌 하나님께서 “은사로”(롬8:32) 우리를 구원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를 창세전부터 사랑하시고 택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며 영화롭게 하시는 이 구원의 역사를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주님의 일을 더욱 힘쓰는 자들이 돼야 합니다(고전15:57-58).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4)
[로마서 8장 31-34절]
로마서 8장 33절 말씀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 여기서 “하나님께 택하신 자들”을 생각할 때 언제 하나님께서 택하셨습니까? 로마서 8장 2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만물이 있기 전인 창세 전에 택하셨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 말씀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 그러면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어떠한 자들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자들입니다(롬8:29).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이십니다(34절). 그 뿐만 아니라 그 분은 승천하시사 하나님이 우편에 앉으셔서 (막16:19; 히10:12)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분이십니다(롬8:34).
우리는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은 자들로서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은 예수님을 닮는 것이어야 합니다[새 찬송가 452장, “내 모든 소원 기도의 제목”].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만 본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하심도 본받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택하심을 받은 자들로서 예수님의 승천하심과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심과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심도 본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의 삶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는 자들 답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새 찬송가 463장, “신자 되기 원합니다” 4절 가사가 우리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 돼야 합니다: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아멘.”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창세 전에) 택하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8장 29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맏아들이 되시려면 동생들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께 미리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동생입니다. 우리가 다 예수님의 동생들입니다. 우리가 다 천국에 가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교제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히 누가 예수님의 동생들을 고발하겠습니까?(33절) 결코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자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선택하여 예수님을 닮게 하시고 예수님의 동생들이 되게 하셨는데 누가 감히 고발하겠습니까. 결코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대적하고 송사/고발/고소하고 송사합니다. 스가랴 3장을 보면 스가랴 선지자가 본 8개의 환상 중에 4번째 환상이 나옵니다. 그 4번째 환상에는 사탄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대적하고 고발하는 장면입니다(1절). 사탄이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고발한 이유는 그는 대제사장이지만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와 같이(2절) 소망이 없는 사람으로서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3절). 그러므로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사탄을 거듭 책망하시고(2절)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4절). 이렇게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는데 사탄이 어떻게 그를 송사/고발/고소할 수가 있겠습니까. 결코 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23장을 보면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고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1-2절). 그들의 고발 내용은 예수님이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여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였습니다(2절). 그래서 로마 총독 빌라도가 직접 예수님을 심문했지만 “죄가 없도다”(4절), “너희가 고발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14절), “나는 그에게서 죽일 죄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22절)[헤롯도 예수님께서 행한 일에는 “죽일 일이 없”다고 말했음(15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그들의 소리가 이”겼습니다(23절). 그 결과 죄도 없으실 뿐만 아니라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께서(고후5:21)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미리 사랑하신 우리들)(롬8:29), “미리 정하신 그들”(창세전에 선택하신 우리들)(30절)을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바 되어(고후5:21)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린 옷”[(현대인의 성경) “피 묻은 옷”]으로 말미암아(계19:13) 우리의 “더러운 옷”을 벗겨 주시고(슥3:3-4) 우리에게 “흰옷”(계7:13) 또는 “희고 깨끗한 세마포 옷”(19:8, 14)을 입혀 주셨습니다.
이렇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하나님께서(롬8:32) 우리를 미리 아시고(사랑하시고)(29절), 우리를 미리 정하시고(택하셨는데)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는데(30절) 누가 감히 우리를 고발하겠습니까(33절). 결코 없습니다!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고발당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자 십자가에 죽으시사 우리의 모든 죄가 다 사함을 받고 우리가 구원을 받아 예수님을 닮게 되었고 예수님의 동생이 되었는데 감히 사탄이 어떻게 우리를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5)
[로마서 8장 31-34절]
로마서 8장 33-34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로마서 8장 29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광의 세계인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로 하여금 닮게 하시고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감히 우리를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입니다(29절).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는 맏아들, 구원받은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인 우리를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형제(동생이라)라 그렇게 부르시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2:10-13). 그러니까 이러한 사람들을 누가 감히 고발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고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스가랴 3장을 보면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고발했습니다. 대제사장인 깨끗한 옷을 입고 있어야 하는데 더러운 옷을 입고 있으니까(3절) 사탄은 그를 고발한 것입니다. 그 때 “예루살렘을 택한 여호와께서” 사탄을 거듭 책망하셨고 엄히 책망하셨습니다(2절). 그 이유는 하나님께 택하셨는데 감히 사탄이 고발할 수가 없기에 하나님께서 사탄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째서 사탄을 엄하게 책망하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이미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죄를 다 사하셔 주셨기 때문입니다. 스가랴 3장 4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 앞에 선 자들에게 명령하사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하시고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하시기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모든 죄를 제거하셨는데 어떻게 사탄이 고발할 수가 있겠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엄하게 사탄을 책망하신 것이며 사탄은 물러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7절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명하셨고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2:17).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사탄의 꾐에 넘어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창세기 3장 6절 말씀입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롬5:10). 이렇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죄를 범하여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오셨습니다(창3:8-9). 이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9절)고 말씀하신 것, 이 얼마나 귀한 복음입니까. 창세기 3장 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구원하시기로 은혜의 언약을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하실 것을 여기에 약속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또 창세기 3장 2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여기서 가죽옷을 입히려고 하면 짐승을 잡아야 합니다. 주로 양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동물로 식물을 주시지 않으시고 초목으로 식물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양을 잡아서 가죽옷을 입혀 주신 것은 이 양이 죽는 것과 같이 너희도 죽는다고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그 후에 아담은 930세를 살고 죽었습니다(창5:5). 또한 짐승을 잡는 이유는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고 가죽은 옷으로 만들어서 입었습니다. 이것은 속제 재물과 화목 재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옷으로 입혀 주실 것을 보여줍니다. 로마서 3장 25-26절 말씀입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의롭다 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0절 말씀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 하셨는데 “누가 정죄하리요”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33하-34상). 이렇게 하나님께서 미리 사랑하사 미리 택하신 자들을 부르시고 의롭다 하셨는데(롬3:25-26; 8:30) 누가 감히 그들을 죄인이라고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자,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은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로마서 8장 2절 말씀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성령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주셨는데 누가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로마서 8장 4절 말씀입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하나님이 의롭다하신 자,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다 이루어졌는데 누가 우리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4절 말씀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님의 아들인데 어떻게 정죄할 수가 있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5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를 누가 감히 우리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로마서 8장 17절 말씀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상속자,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를 누가 감히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0절 말씀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셨는데 누가 감히 정죄할 수가 있겠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3절 하반절-34절 상반절 말씀입니다: “…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 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영화롭게 하셨습니다(30절). 스가랴 3장 5절 말씀입니다: “내가 말하되 정결한 관을 그의 머리에 씌우소서 하매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옷을 입히고 여호와의 천사는 곁에 섰더라.” 스가랴 선지자가 말하되 정결한 관 또는 깨끗한 관 또는 영광스러운 관을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씌우소서라고 간구했습니다. 그 때 “곧 정결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며 정결한 옷, 깨끗한 옷, 영광스러운 옷을 입히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이들을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장 5-6절 말씀입니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렇게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하시는데 누가 감히 우리를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의 권세에서 다 이기시고 부활케 하시고 승천케 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게 하시사 모두가 다 그 분 앞에서 무릎을 꿇고 경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하시니까 우리의 구원의 확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서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다가 주님 앞에 설 때에 칭찬받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6)
[로마서 8장 31-34절]
지난주에 로마서 8장 33절 하반절에서 34절 상반절인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란 말씀을 묵상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이는 어느 누구도 결코 정죄할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8장 3-11절을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3절) 세우고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4-5절). “그들이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해서였”습니다(6절, 현대인의 성경). 결론적으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10-11절). 예수님께서 그녀를 정죄하지 않았는데 감히 누가 그 여자를 고발하고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신데 “누가 정죄”할 수 있겠습니까?(롬8:33하-34상) 결코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4절 말씀입니다 : “…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 중의 복음이요 복음의 핵심입니다. 이 복음만 믿어도 넉넉히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죽으심만 묵상하고 다음 주에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4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여기서 “내가 전한 그 말”은 사도 바울인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합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믿어도 구원을 받습니다(2절).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3-4절에서 말했습니다: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 고린도전서 15장 3-4절 말씀은 오늘 본문 로마서 8장 34절의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말씀합니다. 여기서 “성경대로”(2번 나옴)란 말씀은 구약 성경을 말합니다. 즉, 구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예언한 말씀 그대로 신약 성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의미입니다.
먼저 구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관하여 예언한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신명기 21장 23절 말씀입니다: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이 예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인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예언하는 말씀입니다. 특히 이 예언의 말씀에 중요한 점은 나무(십자가)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27장 35, 38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 이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이 말씀은 구약 신명기 21장 23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메시아)께서 나무인 십자가에 죽으실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인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은 유대인들의 신명기 21장 23절의 관점으로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크게 외쳤던 이유(요19:6)는 예수님이 신성 모독(마26:65; 참고: 요10:33, 36)을 하였고 또한 성전 모독(요2:19) 죄 때문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시편 22편 16절 말씀입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이 예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손과 발에 못 박히실 것은 예언한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15장 24-25절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 새 누가 어느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예수님께서는 시편 22편 16절의 예언의 말씀대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입니다(사53:5).
스가랴 12장 10절 말씀입니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이 예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옆구리에 찔리실 것은 예언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 말씀입니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이 말씀은 스가랴 12장 10절의 예언의 말씀대로 한 군인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다는 말씀입니다.
시편 22편 7절 말씀입니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이 예언의 말씀은 십자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모욕하고 입술을 비쭉거리며 머리를 흔들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7장 39-42절 말씀입니다: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이 말씀은 시편 22편 7절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시편 22편 1절 말씀입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이 예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버림당하실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 말씀입니다: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 말씀은 시편 22편 1편의 예언의 말씀대도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 받으셨음을 말씀합니다.
이사야 53장 8절 말씀입니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여기서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이란 말씀은 죽으심을 말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메시아)가 죽으실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이 말씀은 이사야 53장 8절의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음을 말씀합니다.
시편 34편 20절 말씀입니다: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이 예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그의 뼈가 꺾이지 않을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9장 36절 말씀입니다: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은 시편 34편 20절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에 구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될 것이라는 예언한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다(고전15:3)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53장 5-6절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 예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찔리시고 상하시고 채찍에 맞으시는 이유는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예언의 말씀은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셨”다는 말씀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사 지낸 바 되실 것이라(고전15:4)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이사야 53장 9절 말씀입니다: “그는 강포를 행하지 아니하였고 그의 입에 거짓이 없었으나 그의 무덤이 악인들과 함께 있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 부자와 함께 있었도다.” 이 예언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후에 그의 무덤이 “부자와 함께 있”을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7장 57-60절 말씀입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이 말씀은 이사야 53장 9절의 예언의 말씀대로 예수님의 시체가 부자 요셉의 새 무덤에 넣은바 되었으므로 부자 요셉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대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를 위하여 대속 죽으신 것이고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입니다. 로마서 6장 6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므로(고전15:3)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속량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7)
[로마서 8장 31-34절]
로마서 8장 34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 이 말씀은 예수님의 부활을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절 하반절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성경에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에 대해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16편 10-11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주께서 나를 무덤에 버려 두지 않으시고 주의 거룩한 자를 썩지 않게 하실 것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을 나에게 알려 주셨으니 주가 계신 곳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영원한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언한 말씀으로서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무덤에 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4절 하반절에서 “성경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사흘 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예언의 말씀은 성경에서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더 핑크 목사는 창세기 22장 4절에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는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사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2절)는 이야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고전15:3-4)의 예언을 찾으려고 시도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9절 말씀입니다: “그(아브라함)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마태복음 12장 38-40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서기관과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에게 표적 보여주시기를 원하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예수님께서는 표적을 보여주시기를 원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 보일 표적이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요나가 밤낮 3일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예수님 자신도 밤낮 3일 동안 땅 속에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 1장 17절과 2장 10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자신이 고난당하시고,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은 예언(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1절 말씀입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마태복음 17장 23절 말씀입니다: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마태복음 20장 19절 말씀입니다: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그를 조롱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 박게 할 것이나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예수님께서 이 예언의 말씀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성금요일에 장사되셨다가, 토요일에는 무덤 속에 계셨고, 그 다음 날 3일째인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과 동행하셨지만 그 두 제자들은 그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줄은 몰랐습니다(눅24:13-16). 그 두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고 말했습니다(20-23절). 그들은 같이 동행하시는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인 줄 모르고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3일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부활하신 것)을 증거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습니다(27절).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 두 제자들에게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의 말씀으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예수님 자신에 관한 것(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관하여 자세히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을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담으로부터 오늘까지 한 사람도 부활한 사람이 없습니다(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은 예수님의 부활과 다름. 예수님의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시사 승천하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지만 나사로는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서 살다가 다시 죽었음). 성경에 승천한 사람은 있습니다(예를 들어, 에녹과 엘리야). 그러나 한 사람도 죽은 자 가운데서 예수님처럼 부활한 사람은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여러모로 증거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3절 말씀입니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고린도전서 15장 5-8절 말씀입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보이신 많은 중(예를 들어,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보이셨지만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기록돼 있지 않음)에 6개만 기록돼 있습니다: (1) “게바”(베드로)에게 보이셨습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지상에서 육안으로 적어도 5번 이상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환상이 아닙니다. (2) 열 두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3) 500명 형제들에게도 보이셨습니다. (4)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에게도 보이셨는데 야고보는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야 예수님을 믿었고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5) 모든 사도들에게도 보이셨습니다. (5) 사도 바울에게도 보이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사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성경대로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는 모든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받으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육체적인 부활이 있을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 23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자들은 예수님께서 강리하실 때에 다 부활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2절 말씀입니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성도들이 더 이상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그 때까지 살아 있는 성도들은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다가 죽은 사람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죽은 성도들의 영혼을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여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야 합니다(고전15:58).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8)
[로마서 8장 31-34절]
로마서 8장 34절 말씀입니다: “…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여기서 “죽으실 뿐 아니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말씀합니다(34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고전15:3). 또한 여기서 “다시 살아나신 이”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살아나심(부활)을 말씀합니다(롬8:3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경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고전15:4).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과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뗄 레야 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이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없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이 없이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믿고, 감사하며, 찬양하고 또한 증거하듯이 똑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믿고, 감사하며, 찬양하고 또한 증거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는 “죽으실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은(롬8:34)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또한 사람의 아들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하나님께서는 중보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습니다(고후5:18). 그러기에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 말씀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40일 동안 계시면서 자신의 부활하심을 증거하신 후 하늘로 올리워 가셨습니다(승천하셨습니다)(행 1:3, 9).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편에 계심/앉아계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4절에서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심/앉아계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장 3절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8장 1절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말의 요점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라 그는 하늘에서 지극히 크신 이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골로새서 3장 1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여기서 “하나님 우편”이란 비유의 말씀으로서 하나님 “우편” 또는 하나님 오른편이란 권세 또는 권능이 있다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부활하시사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 또는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께서는 권세 또는 권능을 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씀은 모든 권세 또는 절대적인 권세를 가지신이라는 것을 비유로 말씀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22절 말씀입니다: “그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그에게 복종하느니라.” 성경은 하늘의 모든 영물들이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복종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21-21절 말씀입니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히시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 33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가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대로 다시 살리시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부어 주셨습니다. 이런 권세가 어디 있습니까.
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8:34).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에서 “그리스도”란 기름을 부었다는 뜻으로는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에게만 기름을 부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그 선지자이시요, 대제사장이시요 왕 중의 왕이십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이시라는 말씀은 2가지 중요한 책임을 말씀합니다:
(1) 첫째 책임은,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몸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 앞에 자신을 단번에 제사로 드리셨습니다. 에베소서 5장 2절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여기서 “향기로운 제물”이란 즐거운 마음으로 또는 자원하는 마음으로라는 의미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또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장 26절 말씀입니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없애시려고 단번에 자신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 둘째 책임은,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십니다. 히브리서 7장 25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능력과 권능을 비유로 말씀한 것임)에서 간구하시니 이 얼마나 힘 있고 능력이 있겠습니까. 이 예수 그리스도의 간구는 능력이 있어서 응답되어 우리를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25절).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있는 간구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완성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그 구원의 완성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영화롭게 하”신 것입니다(롬8:30).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을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그분과 함께 앉게 해 주셨습니다”(엡2:6,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기에(롬8:31)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심은 반드시 완성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야 합니다(고전15:5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에 기도를 많이 하셨습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의 기도인 요한복음 17장입니다. 요한복음 17장 9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들을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히브리서 5장 7절 말씀입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이렇게 “육체에 계실 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하나님 아버지께 올리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젠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간구하고 계시되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형편과 사정과 필요를 다 아시고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고 계십니다(롬8:26-27).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되 “성경대로” 간구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9)
[로마서 8장 35-39절]
로마서 8장 35절 말씀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여기서 “우리”란 어떠한 사람이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일까요? 한 3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1) “우리”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가리킵니다(롬8:33).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를 택하셨습니까? 에베소서 1장 4-5절 말씀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는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에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리를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2) “우리”란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이”들을 가리킵니다(롬8:33).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의롭다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말로만 의롭다 선언하신 것이 아니라 의로운 사람으로 여기시고 대우해 주십니다. 에베소서 1장 5절 말씀입니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의롭다하신 우리를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 우리를 누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3) “우리”란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간구하시는 자”들을 가리킵니다(롬8:34).
성자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시므로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결코 없습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롬8:35). 성경 시작부터 끝까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 1, 16절 말씀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에서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되시고(18절) 성육신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이시기에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요한계시록22장 20-21절 말씀입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진실로 속이 오리라”는 말씀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속이 오시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14장 31절 말씀입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목적은 다시 오셔서 우리를 주님에게로 영접하여 주님이 계신 곳에 우리도 있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신랑 되신 주님께서 신부 된 우리 교회를 데리러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계신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셔서(계시록 21:1-2) 우리로 하여금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케 하실 것입니다(19:9).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사, 찬양, 경배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에 가득 찬 그리스도의 사랑을 다 묵상할 수가 없고 로마서 8장 34절만 묵상하고자 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것과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부활)과 우리의 영생을 위하여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 한지 충분히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엡3:19).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크기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새 찬송가 304장 3절과 후렴 가사는 이렇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늘은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 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네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로마서 8장 35절에서 “누가”라고 말씀을 시작하였는데 여기서 “누가”란 7가지를 가리킵니다:
(1)
“환난”(롬8:35):
로마 시대 때 곡식을 타작할 때 사용하던 ‘트리볼롬’(타작기)을 말합니다. 한국에서는 ‘도리깨’라고 콩이나 보리 등 고식의 낟알을 떠는 데 쓰는 농구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타작기로 곡식이 아닌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내리친다고 생각할 때 그것이 바로 “환난”이란 말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이러한 환난을 많이 당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4장 22절 말씀입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이 말씀은 사도 바울과 바나바가 제1차 선교 여행을 갔다고 돌아오면서 안디옥 교회에 들려 제자들을 권면한 말씀입니다. 이 권면의 말씀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하).
(2)
“곤고”(롬8:35):
여기서 “곤고”란 정신적인 고통을 말합니다.
(3)
“박해”(롬8:35):
여기서 “박해”란 다시 말하면 “핍박”을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 말씀입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
(4)
“기근”(롬8:35):
여기서 “기근”이란 굶주림 또는 배고픔을 말합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를 받게 되면 굶주리고 배고픔을 겪을 수가 있습니다.
(5)
“적신”(롬8:35):
여기서 “적신”이란 헐벗음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적신으로 못 박히셨기에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도 적신으로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6)
“위험”(롬8:35):
사도 바울은 위험을 많이 당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6절 말씀입니다: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사도 바울이 선교를 하면서 여러 종류의 위험을 당했던 것처럼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위하여 선교지에서 수고하시는 많은 선교사님들도 여러 종류의 위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7)
“칼”(롬8:35):
여기서 “칼”이란 긴 칼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긴 칼이란 사람의 목을 베는데 쓰이는 칼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칼”이란 죽음을 상징합니다. 성경을 보면 제일 먼저 칼로 죽임(순교)을 당한 사도는 사도 요한의 형제인 사도 야고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헤롯 왕이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였습니다(행12:1-2).
결국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5절에서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사 의롭다하시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우편에서 간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33-34절). 그러므로 이 7가지[“누가”(35절)]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쓴 것입니다. 10년이 못되어 로마 교회 성도들은 로마 네로 황제에게 이 7가지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많이 죽임을 당했습니다(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했음). 이 시대를 보면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가까이 온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이전에 대환난이 이를 것입니다. 언젤런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그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누구도 끊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환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담대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요16:33하). 주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우리 모두가 승리자로 주님을 맞이할 수 있길 기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10)
[로마서 8장 35-39절]
로마서 8장 36-37절 말씀입니다: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여기서 “기록된 바”란 사도 바울이 구약 성경 시편 44편 22절에 기록된 말씀을 인용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주를 위해 하루 종일 죽음의 위험을 당하고 도살장의 양 같은 취급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가“(롬8:36)에서 ”우리“란 문맥상 3가지를 가리킵니다: (1)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33절), (2)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이”들(33절), 그리고 (3)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간구하시는 자”들(34절). 사도 바울은 이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된다고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썼는데 여기서 “종일”이란 하루 종일을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일평생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 옥중서신이 로마서를 쓰면서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라고 말했는데 이것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으면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가르침이란 마가복음 8장 35절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즉,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이 먼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버리기까지 하면서 살고 있는 가운데서(그래서 감옥에 갇혀 있었음) 로마서 편지를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쓰면서 시편 44편 22절을 인용하여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를 위하여”(롬8:36)란 말씀은 “나와 복음을 위하여”(막8:35),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란 말입니다. 로마서 14장 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누가복음 9장 23절 말씀입니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 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현대인의 성경) “그리고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 거든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되 자기를 부인하고(버리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시편 44편 22절을 인용하면서 “우리가 종이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롬8:36)라고 말했는데 현대인의 성경은 “죽임의 위험을 당하고”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 바울과 로마 교회 성도들이 당하였던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35절)같은 죽음의 위험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위험은 그들로 하여금 마치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할 정도였습니다. 성경에 욥이란 인물이 마치 죽음의 상태에 이르게 할 정도의 극심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살면서 이러한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형제, 자매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롬8:36)라고 말했는데 양을 키우는 목적은 도살장에 끌고 가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메시아)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들어 보십시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현대인의 성경) “그가 곤욕을 당하면서도 침묵을 지켰으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 그의 입을 열지 않았다”](사53:7).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로마서 편지를 쓰면서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고 말한 것을 보면(롬8:36) 사도 바울은 이사야 53장 7절에서 예언하고 있고 그 예언대로 실제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본받아 자기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종일 고난을 당하면서 죽음의 위험을 당하고 있었고, 그랬기에 그는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우리가 …”(롬8:36)라고 말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9, 11-13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하나님이 우리 사도들을 사형장의 죄수들처럼 제일 천한 자리에 세우셔서 …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는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매맞으며 집 없이 떠돌아다니고 생활비를 위해 수고하며 손수 일해 왔습니다. 그리고 욕을 얻어먹어도 축복하고 핍박을 당해도 참고 비방을 받아도 좋은 말로 달래니 지금까지 우리가 세상의 쓰레기와 만물의 찌꺼기처럼 되었습니다.” 또한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 나는 그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며 여러 번 갇혔고 매도 수없이 맞았으며 죽을 고비도 여러 번 겪었습니다. 나는 유대인들에게 39대의 매를 다섯 번이나 맞았습니다. 또 세 번이나 몽둥이로 맞았고 한번은 돌에 맞았으며 세 번이나 파선하였고 밤낮 하루를 꼬박 바다에서 헤맨 일도 있었습니다. 나는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들의 위험과 도시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신자들의 위험을 당했습니다. 또 수고하고 애쓰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적도 여러 번이었고 주리고 목마르며 수없이 굶고 추위에 떨며 헐벗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 자신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음의 위험을 당하고 있었지만(롬8:36, 현대인의 성경)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8:37). 그는 그들에게 비록 “우리”(바울과 로마 교회 성도들)가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같은(35절) “죽음의 위험”을 당한다 할지라도(36절)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깁니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37절). 우리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이기는 것입니다. 이기되 간신히 이기는 게 아니라 “넉넉히” 또는 “거뜬히”(현대인의 성경) 이깁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사랑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 말씀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러므로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우리를 감히 고발하겠습니까?(롬8:33) “누가” 우리를 “정죄”하겠습니까?(34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35절) “환난”입니까? “곤고,” “박해,” “기근,” “적신,” “위험,” “칼”입니까? 결코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거뜬히 이깁니다”(37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우리는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5-57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입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죽음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죽음이 쏘는 것은 죄이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우리 모두 구원의 확신과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살아가십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11)
[로마서 8장 35-39절]
로마서 8장 38-39절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한국 성경에는 38절을 시작하면서 “왜냐하면”(γὰρ)(영어: For)라는 접속사가 없지만 원어 헬라어를 보면 그 접속사가 있습니다. 이 접속사는 37절에서 사도 바울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말한 말씀과 38-39절에서 말하는 말씀과 연결시켜주는 접속사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은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기에(37절) 그는 “내가 확신”한다(38절)라고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말을 한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같은(35절) “죽음의 위험”을 당한다 할지라도(36절)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데(37절) 그것은 우리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또는 “거뜬히” 이기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사랑하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요16:33).
사도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확신하노니”(롬8:38)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확신하노니”란 동사는 수통태이면서 완료형으로서 “내가 이미 확신을 당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이 “내가 확신하노니”라고 고백했을 때 그 확신은 자기가 확신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그에게 확신을 주셨기에 “내가 이미 확신을 당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어떻게 확신을 주셨을까요? 성령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바울)를 해방하였”으므로(2절)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바울)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게 하시므로(1절) 바울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또한 성령님이 바울 안에 계시고 그를 지배하시므로(9절, 현대인의 성경) 그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성령님이 바울을 인도하시므로(14절) 그에게 확신을 주셨고 또한 성령님이 “친히” 바울의 영과 더불어 그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므로(16절) 바울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바울의 연약함을 도우시사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그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되(26절) “하나님의 뜻대로” 그를 위하여 간구하시므로(27절) 바울에게 확신을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적어도 26-37절 말씀에 근거해서 “내가 확신하노니”라고 말하면서 38-39절에서 결론적인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얼마나 확신을 한 것입니까? 그의 확신의 정도/강도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한 예로, 사도행전 7장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를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9-60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여기서 “자니라”는 말씀은 스데반이 그리스도 안에서 잔다는 의미로서 비록 그의 육체는 “장사”하였지만(8:2) 그의 영혼은 천국에 갔습니다. 다시 말하면, 스데반은 죽기 전에 자신의 영혼이 주님과 함께 천국에서 영원히 살 것은 100% 확신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이러한 100% 구원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4, 17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실 줄 확신했습니다(물론 그 중에는 주님 안에서 이미 자는 자인 스데반 집사도 포함돼 있음). 또한 그는 그 때에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날 것을 확신했습니다(그들이 몸이 부활할 것임)(이 로마서 편지를 쓰고 죽은 사도 바울도 스데반 집사처럼 주님 재림하실 때 하나님께서 그의 영혼을 데리고 오실 것임). 그리고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살아남은 자들”은 변화되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 같이 될 것을 확신했습니다[“그분이 오시면 모든 것을 자기에게 복종시킬 수 있는 그 능력으로 우리의 천한 몸을 변화시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게 하실 것입니다”(빌3:21, 현대인의 성경)](참고: 고전 15:51-53). 그리고 사도 바울은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살전4:16) 그 때까지 “살아남은 자들도” 변화된 후인 “그 후에” 다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여 천국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을 확신했습니다(17절).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몸이 부활하여 하나님께서 데리고 오시는 영혼과 연합해서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있을 것이고, 그 때까지 살아남은 자들은 홀연히 변화되어 주님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되어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있을 것을 확신했습니다.
로마서 8장 39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아직도
살아 있는 성도들로서 사도 바울과 로마
교회 성도들을 가리킵니다(로마서 편지를
쓸 당시에는 바울과
로마 교회 성도들이 살아 있었기에). 좀 더
보편적으로 말한다면, 여기서 “우리”란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창세 전에 사랑하신 자들)이요(29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그들”(택하신 자들)이요, “부르신 그들”이요 또한
“의롭다 하신
그들”이요 “영화롭게 하”신
자들을 가리킵니다(30절). 사도 바울은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에(39절) 구원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구원의
확신은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러한 성령님이 말씀을
통하여 주시는 구원의
확신이 있는 우리는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5:3).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면서 “굳게
서서 흔들리지” 않고
항상 주님의 일에
열심을 다하되(고전15:58, 현대인의 성경) 특히 환난
당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전도하며 선교합니다. 우리 모두
로마서 8장 말씀을 암송하므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도 이
구원의 확신을 주시길
기원합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