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바울의 3가지 마지막 권면 (11)

바울의 3 가지 마지막 권면 (11)       우리는 입술로만 아니라 생활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한다는 말씀은 3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   (1)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한 마음 , 한 뜻으로 서서 서로 협력하는 것 ( 빌 1:27).   우리는 주님의 겸손한 마음으로 한 마음을 품고 서로 돕고 힘을 합쳐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림에 있어서 같은 의지와 욕망으로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     (2)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 (28 절 ).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사 그 핍박과 고난을 견디며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 스도와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두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보다 그 두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지라도 그 상황을 극복해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이 우리에게 없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   (3) 그리스도를 위하여 믿음으로 고난을 받는 것 (29 절 ). 고난은 유익합니다 .     그 이유는 우리가 고난당하기 전에 그 릇행하였다가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배우므로 그 말씀을 지키게 되기 때문입니다 ...

“’서울대 몇 명 보냈냐는 질문은 이제 그만!’ … 강남 8학군 교장의 이유 있는 외침”이란 기사를 다시 읽으면서 …

“’서울대 몇 명 보냈냐는 질문은 이제 그만!’   강남 8학군 교장의 이유 있는 외침이란 기사를 다시 읽으면서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2/03/26/FRIHAX7I6VEHTDZDNTKKOE3QWY/


저는 이 기사를 읽고나서 저녁 식사 후 다시금 천천히 이 기사를 읽으면서 서울 중동고의 이명학 교장이란 분이 인터뷰를 하면서 질문에 답변한 말들에 대한 제 개인 생각을 좀 적어 내려가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이 분의 말에 동의하고 공감하는 부분들이 많이 있어서이기 때문입니다(참고로 저는 12살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에 이민을 온 사람이기에 제 개인적인 생각이 여러분과 다를 수 있음을 말씀 드립니다).

 

 

1.    "학교라는 곳은 원래 인류의 축적된 지식과 사람됨을 배우는 곳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오래전부터 서울대에 몇 명 보냈느냐로 순위를 매기기 시작했다.” 

 

제가 1996년도인가 미국에 온지 약 16년 만에 한국을 방문에서 같은 교회에서 유치원 때부터 함께 자라한 친구 목사를 만나 그 친구가 졸업을한 총신대학교 양지캠퍼스를 방문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제 기억에 남은 것은 그 때 저는 그 학교에서 비석에 쓰여 있는 글인데 바로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자가 되라는 글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 다섯 가지 “… 되라는 귀한 글에  부끄럽지만 저부터해서사람이 되라는 글을 써야한다는 생각입니다.  그 이유는 제 생각엔 우리 목사님들의 사람됨됨이 평신도 분들보다 못한 목사님들이 너무나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기사에서 이명학 교장이란 분이 학교라는 곳은 원래 축적된 지식과 사람됨을 배우는 곳이다라고 말을 했는데 모든 학교 뿐만 아니라 가정과 교회도 사람됨을 배우는 곳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모이는 노회나 총회에서도 우리 목사님들은 사람됨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노회나 총회에서도 우리 목사님들이나 장로님들이 평범한 사람답게 말하고 행동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르치는 장로인 저 같은 목사나 치리하는 장로인 장로님()이 섬기고 있는 장로교회에서 목사님과 장로님()간의 갈등(당회에서의 갈등)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며, 성령님의 하나됨을 지키지 못하므로 성도님들에게 깊은 상처들을 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회개하고 또 회개하면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목사님과 장로님이 되기 전에 사람됨을 큰 위가와 고통을 통해서라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축적된 지식에 관한 저의 생각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는 고린도전서 8 1절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물론 학교에서 지식을 축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도 성경적인 지식을 축적해야 하구요.  그런데 성경을 그리도 많이 읽었다고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축적된 지식으로 인해 교만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모습들을 보면서 저는 학교나 교회에서 축적된 지식보다 적은 지식을 배워 알아가면서라도 그 적은 지식으로 자신을 뒤돌아보고, 자신의 삶 속에 적용하면서 실천에 옮기는 지혜로운 사람들을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가지, 이명학 교장님이란 분은 우리 사회는 오래전부터 서울대에 몇 명 보냈느냐로 순위를 매기기 시작했다라고 말했는데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교회 풍토도 오래전부터 교인수가 몇 명이냐로 순위를 매기기하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교회 풍토의 전적인 책임은 저 같은 목회자라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목사가 한 영혼의 귀함과 중요성보다 교인수에 민감하고, 자기 보다 더 큰(?)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목사님들을 바라보면서 자신과 비교하는 가운데 낙심하면서 점진적으로 더 교인수에 민감해지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교인수에 집착하는 목회자는 주님께서 물고기 2마리와 떡 5덩어리로 남자만 5,000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을 설교하면서도 자신은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루시기 전에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면서도 빌립을 시험하고자 빌립에게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빌립이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라고 대답을했는데(요한복음 6:5-7) 교인수에 민감한 목회자나 장로님이나 교인들은 빌립처럼 계산적인 사람으로서 항상 교인수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리라 생각합니다.

 

2.    공부 말고 더 중요한 가치도 있다고 누군가 말해줘야 했던 것이라고 본다.

 

저는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여기서 제가 전적으로 동의하는 점이란 공부 말고 더 중요한 가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글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은혜의 선물(제 자신이 이들의 아버지가 될 자격이 없기에)로 주신 세 자녀들에게 2가지 중요한다고 생각하는 점들을 종종 나눴습니다(더 이상 그들에게 나눌 필요가 없을 때까지 나누려구요).  2가지란 … (1) 첫째로 너희는 학생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공부를 신실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말을 사랑하는 세 자녀들 중 딜런, 예리에게 그 때 그 때 기회가 주어져서 말한 이유는 그 두 자녀가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혹여나 주님의 일을 우선하면서 공부를 등한히 할까봐 염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막둥이 예은이는 오빠와 언니만큼 교회에서나 기독교 동아리에서 지도자로 아직은 섬기고 있지 못하고 있고 또한 공부를 열심히 잘 하고 있다고 판단이 되었기에 그리 말할 필요성을 아직까지는 느끼지 못하고 있음).  (2) 둘째로, ‘너희가 대학교 생활을 하면서 공부할 때에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또는 가치있는 것)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사랑하는 세 자녀들에게 많이 얘기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 은혜와 축복을 대학교 때 베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처음 2년은 친구도 없이 외롭게 캠퍼스 생활을 했지만 3학년 때부터 주님께서 기독교 동아리에서 임원으로 섬기게 하시면서부터 주님 안에서 많은 형제, 자매들을 만나게 하시사 귀한 교제를 나누게 하셨습니다.  그 중에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주님 안에서 마음을 나누는 귀한 교제를 누리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제 자녀들에게 자주 나눴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딜런과 예리 뿐만 아니라 막둥이 예은이에게도 기독교 동아리나 교회를 통해서(두 딸은 다른 교회를 다니고 있음) 좋은 만남들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저희 부부의 기도를 들어주시고 계심을 엿보고 있습니다.

 

3.    서울대에 가면 학생들의 장래가 보장되나나이 들어 고교 동기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보면 답이 다 있다.  대학 간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성실하게 하면서 살아온 친구들이 행복도나 삶의 질이 훨씬 낫다.

 

언젠가 대학생들을 섬기는 장로님 한분이 저희 교회에서 오셔서 가정 세미나를 인도하시면서 미국에 많은 한인 2세 대학생들이 Ivy League 대학교[미국 동북부에 있는 여덟 개의 명문 대학을 통틀어 이르는 말.  예일, 코넬, 컬럼비아, 다트머스, 하버드, 브라운, 프린스턴, 펜실베이니아 대학(네이버 사전)]에 들어가서 자살하는 학생들도 있고 또한 졸업을 한 후 많이들 힘들어 한다는 식의 내용의 말을 한 것을 어렴풋이 기억납니다.  저는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그 장로님의 말을 좀 어느 정도 상상이 된다고나 할까요 아니면 좀 이해가 된다고나 할까요 그렇습니다.  제가 전에 본 한국 드라마들 중에 대학 입시에 대한 드라마를 본 기억이 납니다.  잘모르겠지만 극성맞은(?) 어머니들이 학원 원장님들하고 관계를 맺으면서 어떻게 해서든 자기 자녀를 서울대나 고려대나 연세대(SKY)를 보내려고 하는 드라마였던 것 같습니다.  현실이 그정도인가 라는 의문이 들면서 동시에 이명학 교장님이란 분이 서울대에 가면 학생들의 장래가 보장되나?”라는 질문에 이런 저런 생각들이 듭니다.  씁쓸하다라는 단어가 적합한 표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학 간판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성실하게 하면서 …”라고 이 교장님이란 분이 말했는데 우리 부모님들의 과욕(?)그래도 대학 간판이 중요하다라고 생각을 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원인은 어쩌면 사회 시스탬이나 분위기가 대학 간판이 중요하다라는 생각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란 생각도 듭니다.  물론 그런 생각을 심어주려고 할 때에 부모님이 욕심을 내지 않고 사회에 안좋은 영향을 뿌리치면서 사랑하는 자녀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도록(발견하도록) 자녀 옆에서 도와주면서 묵묵히 신실하게 자녀를 양육하고 있다면 대학 간판이나 부모의 간판(체면?)이나 그리 신경쓰지 않겠지요.  그런데 이런 부모님이 몇명이나 될까 라는 의문도 들긴 합니다.  만일 사회 흐름이 90%이상 그렇다면 그 사회 흐름을 역류하는 부모님들이 몇 %나 될까 라는 의문도 듭니다.  저와 제 아내는 사랑하는 세 자녀를 하나님의 은혜로 양육하면서 대학교를 들어려고 대학 입시와 원서 등을 쓰고 있었을 때 각각 그들이 어느 대학을 갔으면 좋겠다는 말 등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막둥이 예은이는 그리도 제가 졸업한 대학을 들어가고 싶어했을 때 이 아빠도 너가 같고 싶은 대학에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너는 이 아빠의 후배가 되겠네라는 식으로 말은 했었지만 저는 그녀가 꼭 그 대학에 가야 한다고 말한적이 없습니다.  , 저는 그저 주님께서 딜런, 예리, 예은이를 제일 사랑하시고 제일 잘알고 계시기에 주님께서 그들 각자를 제일 좋은 대학으로 인도하여 주시길 연약한 믿음으로나마 기도했었습니다.  특히 첫째 아들 딜런 경우는 흥미로웠던 것은 저희 부부가 딜런이 2년재 대학을 갈 줄 알았습니다.  제가 딜런을 그 2년재 대학에 데려가서 카운슬러도 만났었거든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극적으로(?) 딜런은 Cal Poly Pomona 대학으로 인도해 주셔서 거기서 기독교 동아리 Epic을 통해 제가 보기엔 여러모로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주셨고 지금도 베풀어 주시고 계십니다.  이미 딜런은 대학을 졸업했지만 그 Epic 기독교 동아리의 풀 타임 인턴 사역자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딜런에게 사역의 마음(heart of ministry)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주님께서 딜런을 2년재 대학으로 인도하셔서도 그 사역의 마음을 충분히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저에게 있어서는 자녀가 어느 대학을 가느냐가 중요하기보다 주님께서 그들을 그리스도 중심된 꿈을 가진 일꾼으로 세움을 받는 것이 훨씬 중요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도 딜런 뿐만 아니라 예리나 예은이도 주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야 하며 또한 자기들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원해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억지로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세 자녀들이 각자 주님이 주신 마음과 은사와 달란트 등을 깨닫게 되어 마음 것 주님의 영광을 위해 각자의 사역이든 학업이든 앞으로 직장 생활을 하든 즐기면서 성실하게 살아가면 좋겠다는 기원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제가 제 자신을 뒤돌아보고 사랑하는 아내를 생각할 때 주님께서는 부족한 저희 부부로 하여금 그렇게 살도록 역사하고 계시다고 믿습니다.

 

4.    공부를 잘하냐 못하냐가 아니라, 무슨 일이든 성실하게 열심히 했느냐가 중요하다. 둘 다 노력에 대한 칭찬을 똑같이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 공부만 칭찬을 받아야 하나?”

 

저는 목사로서 이 글을 읽으면서 든 순간적인 생각은 목회를 잘하냐 못하냐가 아니라, 주님의 일을 성실하게 열심히 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하.  그만큼 어쩌면 저는 목회를 잘 해야 한다는 제 자신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압박감에서 자유를 누리면서(주님께서 그 은혜를 주셔서) “묵묵히”(창세기 24:21) 주님께서 저에게 맡겨주신 일을 사명감을 가지고 사역을 신실하게, 일관성있게 감당해야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제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들을 생각할 때 그들 각자 주님께서 주신 은혜와 은사와 달란트 등을 가지고 각자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서 주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하던지 잘하냐 못하냐라는 결과 지향적인 생각보다 성품(character)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 주님의 일을 하는 과정에서 진실되고 신실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열심히 하는 것도 자기에게 주어진 은사나 달란트에 적합한 것인지 확신이 들게 되면 자기 자신도 만족감 속에서 자신감도 생겨나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자연스럽게 열심히 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명학 교장님이란 분이 말한 것처럼 둘 다 노력에 대한 칭찬을 똑같이 받아야 한다고 저 또한 생각합니다.  그렇게 자녀를 칭찬할 수 있는 부모님들이 우리 가운데 몇 명이나 될까요?


5.    좋은 대학을 나와야 인생을 편하게 잘살 수 있다는 편견이다. 그런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런 편견을 가진 학부모가 있는 이상 우리나라 교육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학업 스트레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는 아이가 한둘인가. 공부에서 조금 뒤처지면 마치 낙오자가 된 듯 삶을 포기한다. 공부 말고 얼마든지 많은 다른 길이 있는데도….

 

이 말은 우리나라 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이명학 교장님이란 분이 답변한 글입니다.  물론 저는 한국 교육을 거의 모르기 때문에 이명학 교장님이란 분의 위에 글만 읽으면서 제 개인적인 생각을 좀 나누려고 합니다.  먼저 저는 편견이란 단어가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우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 특히 자녀 교육에 있어서 우리 부모님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이 위험성이라고 할까요 그것을 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 부모님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 그 편견이 이명학 교장님이란 분이 말한 것처럼 좋은 대학을 나와야 인생을 편하게 잘살 수 있다는 편견이라면 저의 질문은 (1) 첫째로, “과연 우리 부모님들이 생각하는 좋은 대학이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도 좋은 대학인가?”라는 것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저는 제 세 자녀들에게 좋은 대학이란 말보다 딜런, 예리, 예은이에게 적합한 대학이란 말을 더 선호합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각각 자녀들에게 적합한 대학이란 주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시는 대학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부모님들에게는 저희 부부가 가지고 있는 이 믿음이나 생각 또는 관점은 편견이라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금이나마 이해합니다.  그저 각자 우리 부모님들마다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 속에서 좋은 대학을 보내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기에 각 부모님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들이 다 어느 정도 있을 수 있다고도 생각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첫 번째 질문보다 (2) 둘째로, “과연 인생을 편하게 잘사는 것이 우리 자녀들이 대학 공부를 하는 목적인가?”라는 것입니다.  물론 어느 부모님들이 사랑하는 자녀가 인생을 불편하게 사는 것을 원하고 잘못사는 것을 원하겠습니까마는 저는 사랑하는 딜런, 예리, 예은이가 대학을 졸업하고(딜런은 이미 졸업을 했지만 예리는 대학 3학년, 예은이는 1학년임) 주님의 인도하심따라 각자의 길을 선택하여 걸어갈 때에 그들의 인생이 세상적인 관점에서 항상 편하게 잘사는 것보다 주님의 뜻이 계셔서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예수님을 따라 좁은 길을 걸어갈 때에 불편한 역경과 고통(저는 이것을 불편한 은혜라고 생각함)이 당연히 있겠지만 주님께서는 그 불편한 역경과 고통을 통해서라도 사랑하는 자녀인 딜런, 예리, 예은이를 성장케 하시고 변화게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참고: “불편한 은혜”(Uncomfortable Grace) https://blog.naver.com/kdicaprio74/220080013107].  또 한 가지 이명학 교장님이란 분이 이런 편견을 가진 학부모가 있는 이상 우리나라 교육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라고 말했는데 어느 정도 공감하는 점은 우리 학부모가 사랑하는 자녀의 역경과 고통을 통해서라도 변하고 성장하지 않으면(그래서 과잉사랑, 과잉보호, 과욕, 체면 등등을 버리고 또 버리지 않으면)  어느 나라의 교육이든 바뀌는 것이 매우 힘드리라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 부모님들이 변하고 성장하지 않는 이상은 자녀 교육에더 변화와 성장이 있을 수 없다는 게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6.    이 교장은 ‘명문고’는 서울대에 몇 명을 보냈느냐가 아닌, 이 학교를 나온 동문들이 사회에 얼마나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가로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서울대 몇 명 갔다고 명문이라는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바르게 살면서 어려운 이들을 돕는 동문이 많은 학교가 명문이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랑하는 세 자녀 딜런, 예리, 예은이가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자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선하신 주님께서 그들 각자의 삶을 향하신 선하신 뜻을 이루시사 그들이 각자의 삶 속에서 주님께서 천국으로 부르시는 그 날까지 주위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자들이 되길 기도합니다.  물론 여기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자들이란 이명학 교장님이란 분이 말한것처럼 사회 구성원으로서 바르게 살면서 어려운 이들을 돕는자들이 되는 것도 포함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제가 보기엔 중요한 것은 어려운 이들을 돕는것이 전에 저나 제 아내나 세 자녀들이 먼저 바르게 살면서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저희 다섯 식구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바르게 살지 못하면서 표면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돕는다면 그것은 위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위선자들을 교회에서 계속 만들어 생산하고 있지 않나 생각도 듭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제자 훈련 등등 여러 가지 중류의 프로그램들(programs)이 교회 안에 많이 있어서 그 훈련 과정을 마치고 해서 직분자까지 되고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사람들(people)이 변하지 않고, 신자나 그리스도인 답지 못하면서 사람들 보기에 선한 일을 하는 것은 그저 쇼(show)나 접대(entertainment)에 불과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쇼나 접대에 도움을 받은 어려운 이들이 우리들의 쇼나 접대의 도움에 현혹이 되어 우리가 바르게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가 알게 될 때 그들이 받는 충격과 상처 등등은 교회가 어떻게 감당을 하려고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먼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자 몸부림침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식구들 앞에서와 가운데서 바르게 살고자 씨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교회 식구들 앞에서와 가운데서 바르게 살고자 노력해야 하며 그러한 가운데서 사회에서도 바르게 살면서 선한 영향력을 자연스럽게 끼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지 못하면서 선행으로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고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고 오히려 나중에 악한 영향력을 미칠 위험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한 가지 더, “평가에 대한 제 개인적인 생각은 물론 명문고명문대명문가정’(?)이나 명문교회’(?) 등 그 고등학교나 대학교나 그 가정이나 그 교회 출신 사람들이 사회에 얼마나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가로 평가해야 한다고 하지만 저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주님 앞에 서서 결산할 때에(마태복음 18:23) 주님으로부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25:21)라는 칭찬을 받는 것이 저의 간절한 소원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제 아내 현영이와 딜런, 예리, 예은이도 이러한 간절한 갈망과 소원 기도가 있길 기원합니다.

 

7.    부임할 때 전체 선생님에게 ‘나는 학원 원장이 아니다. 3 담임들에게 서울대 많이 보냈다고 칭찬도 하지 않을 거고, 못 보냈다고 질책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고, 지금까지 그 말을 지키고 있다.”

 

이 말은 “1년간 중동고를 이끈 소감은이란 질문에 대한 이명학 교장님이란 분의 답변 중 한 부분입니다.  저는 이 글을 또 다시 읽으면서 우리 교육자들(교장님이나 선생님이나 목사님이나 교회 선생님이나 등등)은 우리가 한 말(물론 바른 말, 옳은 말)을 지키도록 매우 힘쓰고 애써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이명학 교장님이란 분처럼 3 담임들에게 서울대 많이 보냈다고 칭찬도 하지 않을 거고, 못 보냈다고 질책도 하지 않을 것이란 말을 지금까지지키고 있다는 것은 귀하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중동고에서 교장님으로 섬길 때까지 그 말을 지키도록 힘쓰고 애쓰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위에 글을 읽으면서 비록 이명학 교장님이란 분은 그리고 말하고 그리 지켜나아가고 있지만, 그러면 학원 원장분들은 어떨까 라는 생각이 좀 들었습니다.  과연 학원 원장 분들도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학원에 선생님들이 잘 가르쳐서(?) 3 학생들 중에 서울대에 많이 보내면 그 선생님을 칭찬하지 않을 수있을까요?  반대로, 서울대에 못 보냈으면 질책을 하지 않을까요?  3학생들의 학부모님들 중에 이명학 교장님 같은 생각을 갖고 있지 않는 분들도 많이 있을텐데 그 분들이 학원 원장님들에게 불평하고 원망 등 하면 학원 원장님들이 이명학 교장님처럼 그 말을 하고 그 말을 지켜나아갈 수 있을까요?  이명학 교장님처럼 생각하는 학부모님들이 몇 명이나 될까요?  같은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그리 생각하는데로 실천에 옮기고 있는 학부모님들이 몇 %나 될까요?

 

8.    공부 더 시키라는 분, 원격 수업 하지 말라는 분, 급식 반찬 타박하는 분 등 다양한 학부모가 있었다. 불만을 제기하실 때마다 ‘내가 다 책임지겠다’고 하고, 원칙대로 한다.”

 

이 말은 사소한 것까지 문제 삼는 학부모라면?”란 질문에 대한 이명학 교장님이란 분의 답변중 한 부분입니다.  저는 이 글을 다시 읽으면서 제 전도사 시절 때 추억이 좀 떠올랐습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 때 저는 전도사로서 고등학생들을 담당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좀 힘들었던 것이 지금까지 좀 생각나는 것은 학생들보다 부모님하고의 관계라 할까요, 아니면 자녀들을 너무나도(?) 모르는 부모님들이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자녀 입장보다 부모님의 입장에서 자녀를 사랑하는 뜨겁게(?) 사랑하는 부모님들로 인해 좀 고민을 많이 했었던 추억이 어렴풋이 생각이 났습니다. 하하.  다 지난 일이지요.  저는 개인적을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지켜나아가는 목회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다양한 학부모가 있었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들렸습니다.  그런데 그 다양한 학부모님들이 통일된 불만을 제기하고 또 제기해서 관철을 하려고 한다면 제 생각엔 교장님으로서 매우 힘들 수 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와 더불어 원칙대로 한다는 것은 왠만한 신념과 용기 등이 없이는 그리하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만큼 교육자는 자기 나름대로 원칙과 원리에 대한 신념이 확고하며, 담대하고 용기있게 성실이 일관성있게 밀고 나가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욕을 많이 먹고 오해도 많이 사고 비난 등 많이 받겠지만 학생들을 사랑하는 일관된 마음에 더 크기에 그 모든 다양한 욕이나 비난 등을 다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9.    이런 일을 함께하자고 했을 때 선뜻 나서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데 행복함을 느낀다.

 

이명학 교장님이란 분은 부친의 선한 영향력을 받아 평소에 좋은 일또는 선행많이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선행을 함에 있어서 함께하자고 했을 때 선뜻 나서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데 행복함을 느낀다고 하시니 이 얼마나 자신만이 행복감일까 생각해 봅니다.  그 행복감을 느끼기에 더욱더 즐거운 마음과 자원하는 마음으로 선을 행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저는 선뜻 나서주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인복이란 단어가 생각납니다.  , 제가 보기엔 이명학 교장님은 인복을 받으신 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인복이 물질의 복보다 훨씬 더 귀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안그래도 어제 금요일 막둥이 딸 예은이가 봄방학이래서 집에 왔기에 아내와 함께 점심 식사하러 집 근처에 있는 중국집에 가서 대화를 할 때 제가 돈보다 사람이 중요하다는 내용의 말을 그녀에게 했었습니다.  제가 그리 말한 이유는 지금 예은이가 대학 1학년인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어서(제 대학 후배를 사용하시사) 대학교 총동문회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는데 예은이의 상관이 참 좋은 분이라고 제 대학 후배에게 들었기에 제가 예은이에게 너가 거기서 일하면서 돈을 보는 것보다 하나님이 너에게 붙혀주신 상관이나 또 다른 사람들 있으면 그것을 중요시여기면 좋을 듯 싶다라고 제 마음을 예은이에게 나눴습니다.  안그래도 예은이가 “Business” 전공을 선택하여 공부하면서 이렇게 일도하게 되었는데 제 생각엔 주님께서 예은이에게 인복을 주시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나중에 예은이도 저처럼 뒤돌아보면 주님이 주신 이 인복이 얼마나 감사하고 귀하고 중요한지 더 깊이 깨닫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결혼 예배를 하나님께 드릴 때 주례하신 목사님이 3가지 축복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복, 인복, 물질의 복.  근데 결혼 예배를 마치고 나서 제 장인 어르신에 저에게 다가오시더니 제임스는 이 3가지 복을 다 받은 것 같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실제로 저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이 3가지 복을 받아 누리고 있습니다.  인복에 관하여서는 특히 주님께서 대학교 3학년때부터 기독교 동아리에서 임원으로 섬기게 하시면서 폭발적인 주님 안에서 귀하고 즐거운 만남들을 허락하셔서 이렇게 30년이 지나고나서도 계속해서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 안에서 마음을 나누고 마음과 마음이 어이지는 형제, 자매들이 있다는 것이 큰 은혜요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주님의 뜻이 계시면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이 형제, 자매들과 함께 주님의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 때 다들 선뜻 나서준다면 저 또한 행복함을 더 크고 깊게 느끼리라 확신합니다.

 

1 아버지가 늘 하신 말씀이 남을 배려하라는 것이었다.”

 

이명학 교장님이란 분은 선친에게 선한 영향력을 받으셔서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사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분들처럼 남을 배려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특히 이명학 교장님은 홍제동 슬레이트 판잣집에서 살 때, 우리 집에 신문 배달하는 또래 아이가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 형제 신발보다 그 아이 신발을 먼저 사 주셨다. 당시는 서운했지만, 돌이켜보면 그게 부모가 행동으로 보여주는 교육이 아니었나 싶다.”라고 말했는데 자녀로서 아버지가 자신과 형제 신발보다 신문 배달하는 또래 아이 신발을 먼저 사주셨을 때 충분히 서운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릴 때 한국에서 아버님께서 어머님과 함께 목회를 하시면서 성도님들에게 받은 선물들(제 생각엔)을 저희 세 자녀들(저희 형과 저와 여동생)에게 주시지 않으시고 다시 다 다른 분들에게 선물하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저는 그것이 서운했던 것 같습니다. 하하.  이렇게 지금까지 그리 기억하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요.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제가 2000-2003년도에 한국에서 아내와 3자녀들과 살면서 총신신대원에서 공부하면서 서교동 서현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을 때 하루는 집에서 아내랑 다퉜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아내는 아들 딜런이 유치원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양보하는 것보다 딜런이 하고 싶은 것을 하길 원했고(제 생각엔), 저는 딜런이 양보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difference)로 인해 저희 부부는 다퉜었는데 그 다툼을 통해서 나중에라도 저에게 귀한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그 깨달음이란 저희 부부 각자의 자라난 배경에 대해서 좀 더 알게 된 것입니다.  제 아내의 경우는 맏딸로서 자라나면서부터 부모님께 순종을 했습니다.  그 말은 아내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부모님께 양보하면서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는 딜런도 자기처럼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희생하면서까지 양보하기보다 사랑하는 딜런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딜런이 양보하길 원했던 이유는 제 아버님의 영향을 제가 좀 많이 받아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버님은 이명학 교장님의 선친처럼 남을 배려하는 삶을 지금도 살고 계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시냐면, 한번은 제 아내랑 한차로 교회를 갔는데 제가 제 자동차를 교회 건물과 제일 가까운데 세우니까 제 아내가 저에게 시아버님 같으면 여기에 세우지 않으시고 다른 성도님들을 배려하셔서 제일 멀리 세우실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을 했었답니다. ㅎㅎ  실제로 지금도 아버님은 교회 밖에 있는 2년제 대학교 주차장에 차를 세우시고 걸어서 교회당으로 걸어오십니다.  제 아버님은 그러신데 지금 저는 제 세 자녀들에게 남을 배려하는 것을 솔선수범하여 삶으로 가르쳐주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한 가지 있다면, 저의 간절한 기원은 제가 아내와 세 자녀들에게 죽음 후에도 말하는 믿음”(https://blog.naver.com/kdicaprio74/222344608734)을 삶으로 보여주다가 죽고 싶습니다.

 

11 원칙이 ‘간섭하지 않기, 잔소리하지 않기’였다.”

 

이 말은 자녀는 어떻게 키웠나에 대한 이명학 교장님이란 분의 답변 중 일 부분입니다.  저는 이 글을 다시 읽으면서 간섭하지 않기, 잔소리하지 않기라는 원칙에 많이 동의하며 공감합니다(제가 전적으로동의하며 공감합니다 라고 쓰려다가 이렇게 썼습니다).  오죽했으면 제가 아내가 저에게 좀 극단적으로 말하지만 당신은 자녀들을 “neglecting”(방관)하고, 나는 “controlling”하는 것 같다라고까지 말을 했었답니다 ㅎㅎ.  그 말을 저는 어떻게 이해를 하고 받아들였냐면 아내가 보기엔 저의 자녀 양육방법은 방관하기고 아내의 양육방법은 자녀들을 통제하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제가 보기엔 제 아내는 자녀들을 막 통제하는 controlling mom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엔 제 아내는 제가 자녀들을 내버려두면(아내의 말로 말한다면, 제가 자녀들을 방관하면 ㅎㅎ) 제 아내가 제가 못하는 것을 자녀들에게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녀들 한명 한명하고 실제적인 일들을 구체적으로 대화를 아내가 잘 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세 자녀들이 대학교에 들어가려고 했었을 때 저는 아빠로서 무엇이 중요한지 좀 원리적이고 영적인 것을 얘기해준 반면에 제 아내는 실제로 그들의 대학 원서 쓰는 것을 도와주고 재정적으로 융자하는 것 등등 아내가 다 했습니다. ㅎㅎ  저의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부모보다 딜런, 예리, 예은이를 더(제일) 사랑하시고 있으시니까 우리는 그저 부모로서 기도로 세 자녀들을 하나님께 다 맡기고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자녀들에게 신뢰를 줘서 자기들이 스스로 알아서 하되 실수와 실패의 아픔 등을 통해서라도 배워서 하도록 내버려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내벼려둬야 한다는 말은 이명학 교장님이 말한 것처럼 간섭하지 않기, 잔소리하지 않기와 같은 맥락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저 부모로서 옆에서 묵묵히 (자녀를) 지켜 봐야 한다고 저 또한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느끼는 때가 있다고 저 또한 생각합니다.  그때가 혹 늦게 오더라도 부모는 기다려줘야 한다.  속은 터지더라도.” ㅎㅎ

 

12. 모든 사람은 타고난 재능이 있다. 그러니 지금 좀 못한다고 조급해하거나 화내지 말고 기다려 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자녀가 의지할 곳이 부모 말고 또 누가 있나? 내 자식인데 부모가 믿어주지 않으면 누가 믿어주겠나? 그리고 남의 집 아이와 비교하지 말라는 얘기를 꼭 하고 싶다. 다른 집 아이는 다른 집 아이고, 내 아이는 내 아이다. 내 아이의 장점을 높이 평가해 주면 된다.

 

이 말은 학부모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을 것 같다는 질문에 이명학 교장님이란 분이 하신 답변입니다.  참 중요한 점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우리는 부모로서 우리 자녀에게 있는 재능을 알아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시간이 걸리겠지만 조급해하지 말고 믿음으로 기다리면서 각 자녀의 각 재능을 알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부부의 경우는 주님께서 딜런, 예리, 예은이 각자에게 주시는 마음은사재능이 무엇인지를 알아가길 기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부부는 세 자녀들에 대하여 많은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수시로 자녀에 대한 대화를 나누면서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는 저희 부부가 부모의 육신의 관점으로 자녀들을 바라보기보다 좀 수동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로서서 주님께서 각각 딜런과 예리와 예은이의 삶 속에 어떻게 역사하고 계시는지 아버지인 저의 관점과 어머니인 제 아내의 관점을 서로 대화로 나누곤 하게 하시고 계십니다.  그리함에 있어서 현재 저희 부부가 참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주님께서 사랑하는 아들 딜런에게 “heart of ministry”(사역의 마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딜런이 저희 부부에게 나눴음).  그래서 저희 부부는 딜런을 놓고 기도하면서 주님께서 딜런에게 사역의 마음을 주셔서 앞으로도 어떻게 인도하실지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주님께서 딜런에게 어떠한 은사와 달란트(재능)을 주셨는지 관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두 딸 예리와 예은이도 기도하면서 관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주님께서 이들의 마음에 역사하시고 계시는지 또한 어떠한 은사와 달란트를 주셔서 사용하실지 지켜 보고 있습니다.  또 한가지 꼭 생각하고 싶은 점은 이명학 교장님은 내 자식인데 부모가 믿어주지 않으면 누가 믿어주겠나?”라고 말하셨는데 저는 제 아내에게 권면하고 부부가 노력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은 신뢰하므로 자녀에게 신뢰 주기입니다.  제가 이것을 참 중요시 여기고 있는 이유는 제 자신부터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없으면, 제 자녀들에게 신뢰를 줄 수 없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말한다면, 부모가 믿음이 없이는 자녀를 믿어줄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신의 믿음 성장이 급선무고 주님을 향한 저의 믿음이 자라나면 자라날 수록 제 아내나 세 자녀들을 향한 저의 믿음도 자라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자녀를 남의 집 아이와 비교하지 말라는 점과 내 아이의 장점을 높이 평가해 주면 된다는 말도 좀 제 개인적인 생각을 나누고 싶지만 그냥 지나가겠습니다).

 

13. 어려운 질문이다. (한참 생각하다) 학생들이 내 말이나 행동을 보고 느낀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이 말은 어떤 스승으로 기억되고 싶은지란 질문에 대한 이명학 교장님이란 분의 답변입니다.  저는 이 글을 다시 읽으면서 제 자신에게 과연 나는 딜런, 예리, 예은이에게 어떠한 아버지로 기억되고 싶은가?’라고 자문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선뜻 쉽게 답변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저는 “10. 아버지가 늘 하신 말씀이 남을 배려하라는 것이었다”라는 부분에서 저의 간절한 기원은 제가 아내와 세 자녀들에게 죽음 후에도 말하는 믿음”(https://blog.naver.com/kdicaprio74/222344608734)을 삶으로 보여주다가 죽고 싶습니다라고 제 마음을 이미 나눴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만 더 추가한다면, 저는 제가 죽고 나서 사랑하는 딜런과 예리와 예은이가 저를 기억할 때에 내 아빠는 진심으로 주님을 사랑하셨고 예수님을 닮아가길 그리도 원하셨어라고 말할 수 있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이 두 가지는 제가 제 아내를 만나기 전부터 미래 배우자를 놓고 기도할 때 기도케 하신 내용이고 앞으로 죽을 때까지 제게 기도할 기도 제목입니다: (1) ‘주님, 저는 주님의 사랑으로 제 미래 배우자를 사랑하고 싶으며, 제 미래 배우자도 저를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케 하여 주세요 (2) ‘주님, 제 미래 배우자가 저의 삶 속에 작은 예수를 보게 하시고 저 또한 제 미래 배우자의 삶 속에 작은 예수를 보고 싶습니다.’  실제로 저는 제 아내에게 나의 간절한 소원 기도는 내가 죽기 전에 당신에게 작은 예수를 닮은 모습을 선물하고 싶다라고 몇번이고 제 진심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세 자녀들에게도 이 아빠의 간절한 두 기도 제목을 몇번이고 나눴습니다.  주님께서 저의 이 간절한 기도를 주님의 뜻대로,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들어주시사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들의 마음판(심비)에 저에 대한 기억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작은 예수이길 기원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