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말씀 묵상
마치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뜰에 보여 예수님을 교묘하게 잡아죽일 방법을 의논한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처럼(마태복음 26:3-4, 현대인의 성경) 어쩌면 지금도 교회의 담임 목사님을 교묘하게 좇아낼 방법을 의논하고자 교인들의 장로의 집에 모임을 갖고 있는 반-담임목사(anti-senior pastor) 장로들과 집사들이 충분히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들은 담임 목사님을 지지하는 성도들을 두려워하여 자신들의 목표와 계획을 이룰 때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참고: 5절, 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 여자가 값진 향유 한 병을 가지고 와서 문둥병자 시몬의 집 안에 있는 식탁에 앉으신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것을 보고 분개하여 “무엇 때문에 이렇게 낭비하시오?
이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줄 수도 있지 않았소?”하였습니다(마태복음 26:6-9,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짐 엘리엇이란 젊은 선교사가 생각납니다. 그가 29살이란 젊은 나이에 에과도르 복음화를 위하여 선교하다가 동역자 4명과 함께 순교했을 때 그 당시 미국에 일간지에서는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이런 머리말을 달았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What a unnecessary waste!)(인터넷).
과연 짐 엘리엇 선교사님의 죽음이 낭비였을까요?
과연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그 여인의 값진 향유 한 병이 낭비였을까요?
그 향유를 비싼 값에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것이 더 좋았을까요?
그 제자들 중 한 명이 가룟 유다는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은화 30개를 받고 예수님을 그들에게 넘겨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나요? (14-15절, 현대인의 성경)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생각을 아시고 “그녀는 나에게 좋은 일을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10절, 현대인의 성경).
새 찬송가 211장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1절과 4절 가사입니다: (1절) 값비싼 향유를 주께 드린 막달라 마리아 본받아서 향기론 산 제물 주님께 바치리 사랑의 주 내 주님께, (4절) 인생의 황혼이 깃들어서 이 땅의 수고가 끝날 때에 주님을 섬기다 평안히 가리라 사랑의 주 내 주님께.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반면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일러주신 대로 유월절을 준비하였습니다(마태복음 26:12, 19, 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너희도 알다시피 이틀만 지나면 유월절이다.
나는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 십자가에 못박힐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2절, 현대인의 성경) 그들은 유월절 절기를 준비한 것이지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준비하지 못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생각할 때 저는 예수님의 재림을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잘 준비해야겠다는 교훈을 받습니다(25:1-13).
열 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아 음식을 잡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아 넘길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매우 슬퍼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지요?”하고 물었는데 가룟 유다만 “선생님, 저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마태복음 26:20-25, 현대인의 성경).
왜 가룟 유다는 예수님에게 그리 물었을까요?
양심에 찔림이 있어서 그랬을까요?
만일 그랬다면 “선생님, 저입니까?”하고 묻기보다 “선생님, 저 입니다”하고 고백 했어야 하지 않았나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드리실 수 있으셨을까요? (26절, 현대인의 성경)
자기 제자인 가룟 유다에게 배반을 당하셔서 (이미 당하신 듯)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을 알고 계셨으면서도 어떻게 예수님께서는 “감사 기도”를 드리실 수 있으셨을까요?
새 찬송가 338장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4절 가사 하반부를 이렇게 수정하여 믿음으로 찬양 고백하고 싶습니다: ‘… 숨질 때 되도록 늘 감사 기도하면서 주님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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