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은혜스러운 말씀은 지혜의 말씀이요 능력의 말씀 입니 다 . 지혜의 하나님이시요 능력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은혜스러운 말씀 자체가 지혜요 능력 입 니다 . 그 말씀 , 그분의 가르치심을 듣고 감탄한 회당 안에 모였던 사람들처럼 지금도 교회당에 모여 하나님의 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이요 능력의 말씀인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아 새찬송가 200 장 “ 달고 오묘한 그 말씀 ” 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찬양드릴 수 있길 기원합니다 : (1 절 )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은 귀한 그 말씀 진실로 생명의 말씀이 나의 길과 믿음 밝히 보여주니 , ( 후렴 )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 샘이로다 아름답고 귀한 말씀 생명 샘이로다 .
"니고데모의 안경 나눔, 구속된 세상: 구속의 능력 P. 138-150
타락한 본성은, 마음이 나 자신을 향해 기울어져 있어 스스로는 하나님을 향해 방향을 전환할 수 없는 본성이다. 수많은 인간들의 본성이 불완전한 자기 자신을 향해 있다. 파스칼은 인간은 실존적으로 불안하고 기이한 존재라 변덕스럽고 변화무쌍한 오르간과 같으며, 이 오르간에는 질서가 없어서 아름다운 화음을 연주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창조질서’가 파괴된 모습이다.
그러한 우리에게 성도의 새로운 본성을 부여하는 것이, 새언약(렘31:33)에 기초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인하여 거듭나 재창조된 성도의 마음의 질서, 곧 사랑의 질서란, 하나님을 향해 그 마음이 기울어져 있어 사랑이 내가 아닌 하나님을 향하고, 또한 그 사랑이 하나님을 통해 이웃을 향해 흘러가는 마음이다.
이러한 거듭남은 썩지 않을 새로운 생명과 예수님을 닮은 새로운 본성이 시작되는 사건이다. 거듭나 천국의 영생을 소유하기에 합당한 영혼은, 이제는 죄를 혐오하고 하나님의 법, 다시 말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이중계명을 그 마음에 새긴 영혼이다.
물론, 거듭난 성도들의 마음에도 여전히 ‘죄’의 문제는 남아있다. 새로워진 영혼이 훗날 천국에서 새 몸을 입기 전까지는 육체의 정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내 안의 죄와 날마다 싸워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난 성도가 이전과 달라진 것은 더이상 죄가 우리의 왕 노릇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죄가 우리의 왕 노릇하던 때에는 우리의 선한 의지가 육체의 정욕에 굴복했고, 진리의 빛을 구하려는 의지는 죄악의 어둠에 가리워 굴복했으며, 우리의 사랑은 자기 만족과 자기사랑에 굴복했다.
또한 날마다 낡아지는 육체는 죄의 삯인 사망에 굴복했고,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기쁨에 대한 소망은 현생의 연기같이 사라질 찰나의 만족에 굴복했으며, 그 영혼은 결국 진노하신 하나님의 심판정에서 영원한 심판에 굴복할 처지였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로마서 5:21)
반면에, 은혜가 내게 왕 노릇한다는 것은 더이상 죄와 사망과 연약함과 부패함이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다는 뜻이다.
이제는 모든 양상이 달라졌다. 우리의 선한 의지가 죄의 유혹에 대하여 승리하고, 우리의 영혼은 육체의 낡아짐에 굴복하지 않으며, 우리 마음에 새겨진 새로운 법은 더이상 세상의 법과 세상의 이치에 굴하지 않게 되었고, 우리의 천국 소망이 인생의 절망에 굴하지 아니하며, 우리의 연단은 실패를 압도하고,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누리는 기쁨은 현재의 고난에 굴복하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죄가 왕 노릇하던 세상에서 구별되어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이제는 은혜의 다스림을 받게 되는 것이 성도의 거룩이다. 그리고 거룩을 이루어가는 '성화'의 과정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성도를 천국백성으로 예비하시는 탁월한 방법이며, 우리가 성화를 통해 거룩으로 세상과 구별됨이, 이 땅에서 천국을 미리 경험하는 방법이다.
죄가 차지하고 있던 왕의 자리를 은혜로운 예수님께 내어드려서 날마다 승리를 쟁취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승리에 참여하여 그 상으로 주어질 영생을 누리며, 승리의 주역이신 삼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이 성도의 삶이다.
자기 사랑 안에 매어있던 성도가 이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된 것은, 독생자를 내어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나또한 사랑으로 보답한다는 개념이 아니다. 주일 예배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뜨거운 눈물이 월요일까지도 이어지지 않고, 그저 보답하는 사랑만으로는 한 주 내내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경험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 아닌, 망각과 배신으로 귀결되는 것이 우리의 옛 본성인 것이다.
그러나, 성도의 ‘사랑’, 또는 사랑이라는 율법에 순종하는 성도의 ‘윤리’는, 은혜의 지배 아래에서 하나님을 향해 새로워진 본성의 자연스런 결과다. 내 마음대로 살았어도 단지 믿음 만으로 대가없는 구원을 얻을 수 있었지만, 구원받은 성도는 이제는 결코 내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부패한 본성과 사망의 그늘 아래에서 죄의 종 노릇했던 우리에게 소망이 없음을 발견하고서 이제는 하나님께 유일한 소망을 두게 된 우리가 어떻게 다시 죄와 사망에 마음을 둘 수 있겠으며, 예수님과 함께 옛 본성을 십자가에 못박고 은혜 아래 있게 된 우리가 어떻게 다시 죄의 종 노릇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물론, 거듭난 후로도 죄의 반복되는 유혹에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여 스스로 보기에 자신의 모습이 성도처럼 보이지 않을 때가 있고, 혹자는 그렇게 잠시 말씀을 떠나기도 하고 교회를 떠나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위나 외모와 상관없이 성도를 아름답다 여기심은, 우리의 사랑이나 선행이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성도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의', '그리스도의 형상'을 덧입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고 그의 ‘의’에 연합하여 죄인이 하늘 법정에서 의롭다 여김을 선포받는 것이 '칭의'다. 칭의는 단회적 선언으로 결코 취소될 수 없으며, 우리의 영원한 구원의 보증이 되고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담력을 제공하며, 점차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토대가 된다.
이러한 '칭의'와 '성화'는 '믿음'을 통해 함께 주어지는 '이중은혜'다. 칭의 없는 성화가 있을 수 없고 성화 없는 칭의도 없다.
‘칭의’는 단회적인 성격이지만 '성화'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거룩하게 변화시켜 나가는 지속적인 과정이며, '실체'이신 성령님께서 성도 안에 내주하시면서 지속적으로 신자에게 역사하심으로써 '사랑'의 열매를 동반하게 되는 매우 실질적인 작용이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믿음은 성화를 통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갈5:6), 다시 말해, 매우 실천적 믿음이 된다. ‘믿음’이란 단순히 머리로 인식된 어떠한 것이 아니라, '선물'로 주어져 삶속에 '소유'하게 된 분명한 '실체'다. 우리가 소유한 복음은 '사랑하라'는 명령과 함께 '사랑 할 수 있는 능력' 역시 주시기에 다른 종교와 같을 수 없는 것이다.
칭의를 얻고서 성화 중에 있는 성도는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빌3:13~14) 달음질한다. 나를 부단히 괴롭히던 과오나 나의 허물은 물론이고, 나의 이룬 업적마저도 뒤로 하고서 단 하나의 '푯대', 즉, 십자가 너머의 천국을 바라보는 여생을 살아가는 것이다.
'천국'은 반드시 있다. 우리가 죽은 후, 낙원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다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셨을 때에는, 우리가 부활된 새 몸을 입고 영화롭게 되어 새 하늘과 새 땅, 곧 완성된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이를 견고히 믿는다면, 이생에서 우리가 탐하며 구하던 것들, 예컨대 좋은 집과 좋은 차와 같은 것들은 바울의 말처럼 배설물에 불과할 뿐이고, 이미 우리는 이 믿음 가운데서 의롭다 여김을 선포받았다는 사실에 확신을 갖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을 향한 성도의 달음질이 때때로 바울의 삶과 같은 고난의 삶으로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3:12) 되었다는 바울의 고백처럼, 은혜 위에 견고히 서기 위해서 내가 그리스도를 붙잡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붙잡으셨으니 내가 서있는 은혜의 자리는 견고하며 영원하다.
우리의 견고한 구원은,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잡으심으로써 지속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완성을 이루시기까지 우리가 넘어지지 않게 하시고, 넘어져서는 일으키시며, 성도를 항상 굳건하게 붙드시는 하나님의 ‘견인’의 은혜다.
현실을 둘러보면 나는 여전히 세상에 대해 무력하고 나약하며, 젊은이들을 바라볼 때 나는 더욱 초라해져가는 것 같고, 세상의 기준에서는 내가 전혀 승리자의 모습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승리였던 예수님의 승리는 화려한 융단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처절하게 더럽고 고통스럽고 수치스러운 십자가의 자리에서 이루어진 승리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고난이 사방을 에워싸고, 스스로는 도무지 길을 찾을 수 없게 되어 “이러다 우리가 죽겠나이다”(마8:25) 싶을 때 “주여 구원하소서”(마8:25) 하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바라보아, 옛사람에서 탈피하여 예수님의 생명에 연합된 새 생명으로의 거듭남에 동참하고, 내가 어디에 있든, 그리고 내 비참한 처지가 어떻게 느껴지든, 그 자리에 주저앉지 않고서 은혜를 딛고 일어나 구원을 소망하고 거룩을 꿈꾸며 예수님께 의지하여 견고히 서게 되는 것이 성도에게 허락된 이 땅에서의 승리이고, 훗날 임하게 될 천국의 보증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평생에 걸친 성화의 과정이 지루하고 지리한 싸움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의존 가운데서 매순간마다 이 승리의 경험들을 누적해야 한다.
우리의 일상을 둘러싼 가정과 일터와 사회는 성도가 승리를 배우는 학교이며, 승리를 경험하는 중에 천국을 경험하는 연습실이고, 세상에 대한 성도의 승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무대가 된다.
이러한 성도의 승리를 통해, 내가 서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게 되는 것이 거듭난 성도의 소명이자 기쁨인 것이다.
이처럼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그리스도의 구속의 효력은 개인을 넘어 세상을 향하고 있다. 구속의 효력을 성도 각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은 성령님의 사역이지만, 이러한 구속의 효력을 세상의 각 영역에 적용하는 것은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성도들의 사역이기도 하다.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 성령님을 통해 성도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듯,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도들을 통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남을 믿으며, 곧 도래할 완전한 회복과 완성된 천국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 성도가 꿈꾸는 오늘이며 내일이다. "
(영상 형제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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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답변)
"이중 은혜"(칭의 & 성화)를 받은 "성도의 소명이자 기쁨"은 예수님의 "이중 계명"(하나님 사랑 & 이웃 사랑)을 순종하면서 살아가는 천국의 생활, 영화로운 삶이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제 작은 고모님의 감사의 글입니다: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동안 저희 가정과 하나님 나라에 먼저 간 제 둘째 딸 수정이를 위해 5년이란 긴 세월을 한결같이 기도해 주셔서 영광에 나라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안식을 하고 있는 딸을 생각하며 늦게나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은 우리 뜻과 다르게도 허락하심을 보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지금은 우리 곁에 있지 않아 그립고 보고 싶고 말하고 싶고 놀고 싶고....힘들고 어렵지만 제일 좋게 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지금은 비록 여러 모양으로 힘들지만 소망가운데 만날 날을 기대하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의 사랑을 듬뿍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웃에 힘든 자들을 위해 다시 기도에 자리로 나아갑시다. 항상 건강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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