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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3가지 마지막 권면 (11)

바울의 3 가지 마지막 권면 (11)       우리는 입술로만 아니라 생활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     여기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한다는 말씀은 3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   (1)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한 마음 , 한 뜻으로 서서 서로 협력하는 것 ( 빌 1:27).   우리는 주님의 겸손한 마음으로 한 마음을 품고 서로 돕고 힘을 합쳐서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림에 있어서 같은 의지와 욕망으로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     (2)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 (28 절 ).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 때문에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시사 그 핍박과 고난을 견디며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 스도와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     우리는 이러한 두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기 보다 그 두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지라도 그 상황을 극복해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이 우리에게 없음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   (3) 그리스도를 위하여 믿음으로 고난을 받는 것 (29 절 ). 고난은 유익합니다 .     그 이유는 우리가 고난당하기 전에 그 릇행하였다가 고난을 통하여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배우므로 그 말씀을 지키게 되기 때문입니다 ...

"니고데모의 안경 토론질문 Q4.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은 기독교적 세계관과 무엇이 다른가?"

"니고데모의 안경 토론질문 Q4.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은 기독교적 세계관과 무엇이 다른가?


개혁주의 세계관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마12:28)와 "나라가 임하시오며"(마6:10)의 긴장관계, 즉, 하나님 나라 도래의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의 긴장 관계 가운데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시간적 개념이 아닌, 두 시대의 중첩을 의미하며, 현재는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와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가 공존하는 시기입니다.


거듭난 성도 안에 하나님에 의해 심겨진 거룩의 씨앗과,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은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화롭게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하게 회복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를 미리 맛보고 소망하게 하지만, 현재적 구원은 미래적 구원을 위한 안내자의 역할을 할지언정, 그 자체로서 완성된 구원은 아닙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영혼과 삶에 침투해있고 지금도 곳곳에서 성도들이 거듭남을 경험하는 일들을 통해서 현존하고 있지만, 여전히 도래하지 않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한 최종적 완성을 기대하며 영적 구원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교회가 거듭난 심령으로 성령을 따라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세상이 우리의 영원한 거처가 아님을 기억하며,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완성을 소망하는 것이 우리 성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적 교회들이 사회 문제에 둔감하고 사회 참여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신앙을 갖기전 제가 교회를 싫어했던 이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완성을 소망하기에, 이 세상에서의 책임을 소홀히 하기보다, 마치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가 자신을 준비하는 것처럼, 현재에 주어진 책임을 더욱 충실히 감당해야 합니다. 이러한 성도의 기다림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는 능동적인 기다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주권이 개인 구원의 영역뿐 아니라 문화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은 현재적 종말관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현세적 해방에 초점을 두고 현재의 사회 변혁을 통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지향하는 면이 있습니다. 이처럼 구원의 현재적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미래적 소망을 약화시키고 기독교 세계관이 바라보는 하나님의 나라를 단순한 사회 개혁으로 축소시키며, 모든 기독교적 사회 운동의 동력인 영적 구원의 우선성을 경시하고 구조적 악의 제거를 통한 해방을 강조합니다


해방신학자나 민중신학자들은 그 신학적 근거를 다음의 성경구절에서 찾을 것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4:18-19)


그러나 우리의 포로됨의 본질은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나 가난의 포로됨이 아니라, 죄의 포로됨입니다. 죄를 짓지 않을 능력을 상실하고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위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된 본성으로 인하여 지혜가 없고 사랑이 없어서, 우리가 모인 사회구조 역시 여실히 한계를 드러내고 우리에게 소망 없음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며, 우리의 비참함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에 기대어 전적인 의존을 올려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사랑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말씀과 성령을 따라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입어 새롭게 되었을 때, 자기 사랑을 깨뜨리고 고난 중의 이웃을 향해 손길을 내밀 수 있습니다. 


저는 교회를 찾은 이유도 처음에는 구원보다는 이웃을 위한 사회 참여가 목적이었고, 오래전 북한선교를 두고 고민할 때도 "빵이 먼저냐 복음이 먼저냐"에 대한 고민이 자연스럽게 뒤따랐습니다. 그것이 청년시절에 기독교적 세계관에 관심을 가졌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망없는 죄인을 자유케 할 수 있는 것은 복음 밖에 없으며, 우리가 현재 누릴 수 있는 구원은 완성된 구원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서 이루어가는 구원입니다. 


단 한 번의 의지와 말씀만으로 천지를 창조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서 일주일동안 창조를 이루어가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재창조, 즉 우리의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 역시,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을 통해서 이루어가는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보며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우리 안에 심겨진 거룩함의 씨앗 때문이지, 우리의 온전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내게 여전히 소망이 있고 세상에 소망이 있는 이유는, 내가 온전하거나 세상이 온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불완전 가운데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예비하시고 약속한 일들을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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