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탓”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사람 도엑이 거기 있기로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말할 줄 내가 알았노라 네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탓이로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게 있으라 내 생명을 찾는 자가 네 생명도 찾는 자니 네가 나와 함께 있으면 안전하리라 하니라”(사무엘상 22장 22-23절).
“내 탓”입니까 아니면 “네 탓”입니까? “잘 되면 내 탓, 안되면 조상 탓”인가요? 진정 저 사람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것입니까 아니면 나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된 것입니까? 혹시 나 때문에 저 사람이 저렇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천주교 주요 기도문에 나오는‘고백의 기도’중 ‘전능하신 하느님과 형제들에게 생각과 말과 행위로 많은 죄를 지었으며 자주 의무를 소홀히 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가슴을 세 번 치면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하는 기도문이 있다고 합니다. 이 기도문에서 따온 말이 바로 “내 탓이오”였고 1990년에 있었던 카톨릭에서 벌인 “내 탓이오” 운동의 배경은 ‘너는 형제의 눈 속에 든 티는 보면서 어째서 제 눈 속에 들어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7:3)고 한 그리스도의 말씀처럼 자신의 잘못은 깨닫지 못하고 남의 잘못만을 비난하는 사회분위기를 앞장서서 반성하자는 데 있었다고 합니다. 카톨릭의 이 “내 탓이오” 운동은 국민적 자각을 일깨우는데 적지 않게 기여는 했지만 아쉽게도 오래 가지 못하고 1990년대 중반 자취를 감추었다고 합니다(인터넷). 저는 “네 탓이요”하면 생각나는 성경 인물을 창세기 3장 12절에 나오는 첫째 아담이 생각납니다. 찻째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 먹은 후 하나님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12절).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을 자기 아내 탓으로 돌린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6절). 이 말씀을 보면 아담의 입장에선 충분히(?) 자기 아내를 탓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다시 보면 첫째로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는 곳에 자기 아내와 함께 있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자세로 살고 있었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2:17)는 선악과에 가까이 가지도 말았어야 했습니다. 둘째로, 아담은 하나님께서 그 여자를 자기와 함께 하신 목적이 자기를 위하여 “돕는 배필”로 주신 것이라는 사실(18절)을 잊지 않고 있었다면 자기 아내가 선악과를 따먹으려고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돕는 배필과 정반대되는 행위인 줄 알고 사랑으로 그녀를 책망했었어야 했습니다. 셋째로, 아담은 자기 아내가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에게 주었을 때 그것을 거절하고 먹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는 자기 아내를 이끌었어야 했었는데 오히려 그는 그녀에게 이끌림을 당했습니다. 한 마디로, 아담은 가정의 가장으로서 자기 아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리드(lead)를 했었어야 했는데 오히려 그는 사탄의 말을 들은(3:1-5) 자기 아내에게 리드를 받아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아내가 준 선악과를 받아서 먹었습니다(6절).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아내를 탓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아니, 그는 자기 아내 탓이라는 생각조차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오히려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제 탓입니다’라는 마음 자세로 자신이 범한 죄를 자복하고 회개했었어야 했습니다. 저는 아담이 자기 아내를 탓한 것을 가리켜 ‘아담-콤플렉스’(Adam-complex)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 아담-콤플렉스가 아직도 우리 죄악된 본능 안에 있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이 되었으면서도 아직도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남 탓을 하곤 합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부모님을 탓하고, 배우자를 탓하며 또한 자녀를 탓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목사님을 탓하고 장로님을 탓하며 성도님(들)을 탓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우리 나라 대통령을 탓하며 또한 정치인들을 탓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이 모든 것이 ‘제 탓입니다’라는 생각조차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 생각하지도 못할 정도로 우리 자신을 모르고 있고 우리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정도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모르고 있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너무나 멀리 떠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상 22장 22절을 보면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사울 왕에게서 도망을 다니고 있었던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인 아비아달(20절)에게 “네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탓이로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아비아달의 아버지인 제사장 아히멜렉을 포함한 그의 집 85명의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한 것(18절, 현대인의 성경)이 자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사울에게서 도망 다닐 때 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나려고 놉으로 가지 않았다면(21:1, 현대인의 성경) 아히멜렉의 모든 사람 85명의 제사장들은 사울 왕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났을 때 사울의 목자장인 에돔 사람 도엑이 종교적인 의식 때문에 그 곳에 와 있었다는 것(7절, 현대인의 성경)을 알고 또한 도엑이 다윗과 제사장 아히멜렉과 이야기 하는 것과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음식도 주고 골리앗의 칼도 주는 것(9절, 현대인의 성경)을 그로 하여금 못보게 했었다면 제사장 아히멜렉의 집 85명의 제사장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22:18). 그러나 다윗이 죽은 아히멜렉의 아들인 아비아달에게 한 말을 보면 다윗은 “그 날 도엑이 거기 있는 것을 보았”고 또한 다윗은 도엑이 사울에게 말할 줄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22절,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알고 있었으면서도 다윗은 조심하지 않고 도엑이 다 보고 알정도로(9-10절)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음식을 구하고(21:3) 또한 칼을 구하므로(8절) 결국 아비아달은 하루 아침에 자기 아버지인 아히멜렉과 그의 모든 집안 식구들을 잃었습니다(18절). 그러니 이것이 다윗의 탓이 아니면 누구의 탓입니까? 그러나 좀 더 달리 생각을 시도하면, 다윗은 아히멜렉의 모든 85명의 제사장들의 죽음을 자신 탓이 아닌 도엑 탓으로 돌릴 수도 있었습니다. 다윗은 만일 도엑에 다윗이 놉에 가서 아히멜렉을 만나 것(9절)과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행한 일(10절)을 사울 왕에게 고발하지 않았더라면 아히멜렉의 모든 85명의 제사장들이 사울 왕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이 곁에 선 신하들에게 “너희 베냐민 사람들아 들으라 이새의 아들이 너희에게 각기 밭과 포도원을 주며 너희를 천부장, 백부장을 삼겠느냐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알리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7-8절)라고 말했을 때 사울의 신하들과 함께 서 있던 도엑이(9절) 고발(고자질?)을 한 것입니다(9-10절). 이렇게 다윗은 도엑을 탓할 수도 있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충분히 사울 왕을 탓할 수도 있었습니다. 분명히 처음엔 사울이 다윗을 크게 사랑하였고(16:21) 무척이나 다윗을 좋아했었는데(22절, 현대인의 성경)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다음 승리한 후(17장) 이스라엘군이 돌아올 때 이스라엘의 모든 성에서 여자들이 승전을 축하면서 “사울이 죽인 자는 수천 명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수만 명이라네”(18:7, 현대인의 성경)라고 하니까 사울은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8절) 그 날 후로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9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시고(12, 14, 28절) 그가 모든 일을 지혜롭게(성공적으로) 하므로(14, 15, 30절) 그는 다윗을 두려워하고(12, 15절)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었습니다(29절). 제사장 아히멜렉이 사울 왕에게 말했듯이 “왕의 모든 신하 중에 다윗 같이 충실한 자”가 없었고 “그는 왕의 사위도 되고 왕의 호위대장도 되고 왕실에서 존귀한 자”인데(22:14) 왜 사울은 다윗을 그리도 죽이려고 했는지 충분히 다윗은 제사상 아히멜렉의 85명의 제사장들의 죽음을 사울 왕 탓으로 돌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 왕을 탓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가 보기에 충분히 도엑이나 사울 왕을 탓할 수가 있었지만 그리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을 탓했습니다. 그는 죽은 아히멜렉 제사장의 아들인 아비아달에게 “네 아버지 집의 모든 사람 죽은 것이 나의 탓”이라고 말(인정)했습니다(22절).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평생 부모님을 탓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셨는데도 말입니다. 습관적으로 자기 배우자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사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면서도 아직도 목사님을 탓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탓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왜 우리는 다윗처럼 “나의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아무 죽을 죄를 범하지도 않은 제사장 아히멜렉처럼 죄없으신 대제사장 예수님께서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처럼 “나의 탓”[(현대인의 성경) “나 때문이오”](22절)이라고 인정하며 고백하고 있지 않는 것일까요?
나 같은 죄인 때문에 저주의 나무(신21:23, 갈3:13)에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8년 4월 5일, 사랑하는 지체의 고통이 나의 탓임을 인정하며 고백하며 회개의 은총을 사모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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