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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votional Reflection Based on the Incident of Peter Cutting Off Malchus's Ear:

Devotional Reflection Based on the Incident of Peter Cutting Off Malchus's Ear: “Then one of those standing near drew his sword and struck the servant of the high priest, cutting off his ear.” ( Mark 14:47, Today's Korean Version ) 1. Identifying the People Involved: The person who stood beside Jesus and drew the sword was Simon Peter . The servant of the high priest was named Malchus . “Then Simon Peter, who had a sword, drew it and struck the high priest’s servant, cutting off his right ear. The servant’s name was Malchus.” ( John 18:10 ) 2. Jesus' Response to Peter's Action: (a) Jesus said: “Permit even this.” ( Luke 22:51, KJV: “Suffer ye thus far”; RSV: “No more of this” ) The Greek words clarify this: “ἕως τούτου” (“heōs toutou”) = “up to this point” or “even this” “ἐᾶτε” (“eate”) = “allow it,” “let it be,” “leave it alone” Therefore, Jesus is essentially saying: “Let them do what they are doing. Do not resist any further.” “If ...

매우 복되도다 그 사람 (시편 1편)

매우 복되도다 그 사람

 


[시편 1 말씀 묵상]

 

 

       교회 유모  사탄의 8복이 있다고 합니다.   8 중에  주목을   3가지를 적어 봅니다: (1) "피곤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교회에 나가지 않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나의 가장 믿을만한 일군이  것임이요", (2) "목사의 과오나 흠을 보고 트집을 잡는 자는 복이 있나니 설교를 들어도 은혜를 받지 못할 것임이요", (7) "성경을 읽고 기도할  없을만큼 바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은 나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 마침내 나의 조롱거리가  것임이요".  사탄의 8   3복을 읽으면서 요즘 우리 크리스찬들에게 많이 적용이 되지 않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7번째 사탄의 복을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우리 크리스찬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었는가 라는 챙피스럽고 부끄러운 현실을 인정하지 않을  없을  같습니다.    우리 크리스찬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어가고 있습니까?   원인 중에 하나는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말씀을 인격화시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홍수 시대를 맞이했지만 머리만 커가는 우리 크리스찬들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이 '저주' 되어 우리를 더욱더 교만하고 거만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아는 지식(information) 많을지 모르지만 삶의 변화(transformation) 너무나 없는 모습이 바로 우리 크리스천들의 현 주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삶의 변화를 추구하기 위해선 우리는 다시 기본(basic)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시편 1 말씀에서 하나님께서는 " 있는 사람", 히브리어 원어로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매우 복되도다  사람"(박윤선) 누구인지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르침을 배워 순종하므로 말씀 인격화되어가는  삶의 변화를 추구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 보시기에 매우 복된 그 사람들이 다 되야  것입니다.

 

첫째로, "매우 복되도다  사람" 죄를 멀리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11 말씀을 보면 매우 복된 사람은 작은 죄부터에서  죄까지  멀리한 것을  수가 있습니다.  작은 죄란 "악인의 꾀를 좇지(does not walk)아니"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예 매우 복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쳐다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관심도 주지 않습니다.  앞에 놓여진 의인의 (6) 죄인의 (1)에서 매우 복된 사람은 죄인의 길에 발조차도 내려놓치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자주 악인의 꾀임에 넘어가 눈과 귀만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빼았끼고 있습니까?  아예  악인의 길에 발도 내려놓지 말아야 하는데 이미 내려놓고 '주님여 시험들지 말게 하옵소서"하면서 주기도문을 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서는 얼마나 우리는 자유롭게 우리의 선택과 상황을 합리화시키곤 하는지 이젠 놀라지도 않습니다.  너무나 익숙해진 작은 죄의 ...  그런데 우리는  작은 죄의 길을 걷다가  죄의 깊이 빠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합니다.  요가소    죄는 무엇입니까?  바로 "죄인의 길에 " 것입니다(stand in the path of sinners).  처음엔 악인의 꾀를 좇다가(walk이제는 아예 죄인의 길에  있는 것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벌써 죄인의 길을 걷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때가 없지 않아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매우 복있는 사람은 작은 죄인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였기에 죄인의 길에 서 있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인정하시는 의인의 (6) 걷습니다 나아가서 매우 복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리에 않지" 아니합니다(1).  여기서 오만한 자리란 하나님을 업신 여기는 악인들이 앉는 자리입니다.  결국 죄를 가까이하는 자는 악인의 꾀를 좇다가 어느  죄인의 길에 서서 결국은 하나님을 업신 여기는 오만한 자리에까지 앉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우 복있는 사람은  모든 (작은 죄에서  죄까지) 멀리합니다.  우리는 박윤선 박사님의 말씀을 곰곰히 생각해 봐야  것입니다: "우리는죄를 피함에 있어서 작은 것에서  것에 이르기까지 점진성을 무시할  없다."   죄의 점진성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아예 작은 죄의 뿌리부터 싹둑 짤라버려야 합니다.  그 이유는 작은 죄라고 가볍게 여기므로 한번 호기심 가운데 좇아다가는 결국 오만한 자리까지 나아가게  가망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왜 죄를 가까이 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중에 하나라 생각합니다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므로 죄를 멀리하던지 아니면 죄를 가까이 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멀리하던지...

 

오늘 본문에 매우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므로 죄를 멀리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매우 복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라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매우 복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찬송가 500 1 가사처럼 " 음성외에는  기쁨없도다"라고 매우 복있는 자는 찬양합니다.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에 매우 복있는 자의 영혼이 기뻐하며 만족하기에 그는 주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그러므로 받는 복은 무엇입니까?   3가지로 생각해  수가 있습니다.

 

(1) 매우 복있는 사람이 받는 복은 열매 맺는 신앙입니다(3 -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축복은 1절에 나오는 "악인"과는 너무나 대조가 됩니다.  "악인"이란 말은 '도덕적으로 또는 인격적으로 열매가 없음' 말하는데(박윤선매우 복있는  사람은 도덕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열매 맺은 신앙인입니다.  말씀 인격화되어가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인격참으로 매우 복있는 사람의 삶이 아닐  없습니다.

 

(2) 매우 복있는 사람이 받는 복은 생명력있는 신앙입니다(3 - " 입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축복 또한 1절에 나오는 "죄인" 대조가 됩니다.  "죄인"이란 '목표를 마치지 못하는 "(박윤선)인데 매우 복있는  사람은 신앙의 목표인 생명력을 소유하고 있기에 참으로 매우 축복받은 삶이 아닐  없습니다.

 

(3) 매우 복있는 사람인 받는 복은 형통의 복입니다(3 - " 행사가  형통하리로다").  매우 복있는 사람은 무엇을 하던지 간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므로 형통케 하시는 축복을 누립니다.   얼마나 매우 복된 삶입니까?  욥이 극심한 고난과 고통 가운데 있을지라도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므로 인내하며 견디는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을 두배로 받은 것처럼 매우 복있는 사람은 고난과 고통 중에 오히려 신앙의 열매를 맺으며 생명력있는 신앙의 삶을 살므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시는 역사를 경험하는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아서(4매우 복있는 의인의 복을 누리지 못하고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5결국은 망하게 됩니다(6).

 

과연 여러분은 매우 복있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 크리스찬입니까?

 

 

 

"매우 복되도다  사람 제임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간절히 원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목사 나눔

(2005 921 수요 기도회   말씀을 선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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