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문제
[느헤미야 9장 1-5절 말씀 묵상]
성경에서 찾아본 사오정 시리즈입니다(인터넷):
“간음하다 한 여인이 붙잡혔다. 사람들은 그 여자를 붙잡아서 예수님에게로
데려갔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막 왁자지껄하는데 예수님은 가만히 바닥에 앉아서
무언가를 쓰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막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있던 어떤 사람 왈 ‘왜 가는 거유?’ 사람들... ‘음... 돌없는 사람이 치라고 해서...’. 그러자 다른 사람이 말했다: ‘아냐, 저기 쓰는 것 보라구! 그 여자 집에 간 남자들 이름 쓰잖아!’ 그래서 사람들은 기겁하고 막 떠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사오정이 손에 돌을
들고 막 달려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사오정에게 물었다: ‘뭐하는 거야?"’ 그러자 사오정:
‘저기 스데반 아니에요?’. 이동원 목사님은 그의 책 “회개행전”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평신도로서 우리 시대에 커다란 영향력을 끼쳤던 C.S. 루이스 교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구도 정신을 상실한 시대’라고 진단했습니다.” 그 증거 중의 하나는 현대인들에게 더 이상 죄를 향한 진지한 접근이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 죄 때문에 고민하고 아파하며, 죄를 극복하려고 눈물 흘리며 노력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에서 구원받은 감격도, 죄를 이기는 환희도 경험하지 못하는 신앙인들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와
여러분들은 죄 때문에 고민하십니까? 죄를 극복하려고 발버둥 쳐보십니까? 이제는 죄를 지적하는 설교를 겸허히 듣는 성도들이 점점 줄어 들고 있습니다. 이동원 목사님 말씀대로 “죄악”이란 단어가 실종 위기를 맞이한 것이지도 모릅니다. 디모데후서4장3절 말씀처럼 그 “때가 이르”렀습니다. 그 때는 다름 아닌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보다 죄를 더욱더 가까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보다
죄와 더 밀접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Be Determined”란 주석을 보면 이런 글이 적혀 있습니다: “Separation without devotion
to the Lord becomes isolation, but devotion without separation is hypocrisy” (주님께 헌신이 없는 분리는 고립이 될 것이지만 분리가 없는
헌신은 위선 입니다). 얼마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세상과 죄악과 분리해서 신앙을 지키고자 발버둥쳐 보지만 결국 주님께 헌신이 없는 이러한 분리는 그들로 하여금 고립상태로 집어 넣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래서 주위에 이웃들과의 교제도 단절되었고 홀로 외로운 삶을 살아가는
크리스천들, 없지 않나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립된 크리스천들보다 더 많은 것은 아마 위선된 삶을 사는 크리스천 일 것입니다. 주님께 헌신했다고 입술로는 수없이 고백하지만 세상과 짝지어 살면서 세상 것을 즐기는 크리스천들, 헌신했다고 하지만 이같이 세상과 분리가 없는 위선적인 크리스천들은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그러한 크리스천이 아닙니까? 너무나 많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참된 마음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죄의 문제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죄책감”이라는 사슬에 우리의 마음에 메여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개인적으로 더욱더 시편119편 32절 말씀을 붙잡는 것입니다. 영어성경 NIV를 보면 우리가 주님의 말씀(계명)을 향하여 달려나아갈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set free”즉, 자유케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중심으로 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 것인지 2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죄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첫째로 세상과 절교해야
합니다(Be Separated from the
World!).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2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 이성관계에서의 절교, 가능한 것입니까? 한국에서 사역했었을 때 한 몇몇 자매들이 믿지 않는 남자와의 이성관계에 대해서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다들 상당히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을 대화 속에서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세 자매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남자들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을 때 저는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Do not
be yoked together with unbelievers)는 고린도후서 6장14절 말씀에 근거하여 이성관계를 끊을 것을 권면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랬을 때 보통 듣는 말은 ‘목사님, 지금은 믿지 않지만 결혼한 다음에 교회로 데리고 나와서 예수 믿게 하면 되지 않나요?’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결혼해서 전도하면 되지 않느냐는 말이였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에스라-느헤미야 시대 때의 문제는 바로 이방인들과의 혼합된 생활이였습니다. 그래서 에스라는 에스라 10장11절에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너의 열조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들 끊어 버리라”. 이방인과의 혼합된 생활 중 특히 문제가 됐었던
것은 이방 여인과의 결혼, 즉 지금 말로 하면 믿지 않는 자와의 결혼 이였습니다. 결국 솔로몬 왕도 이방 여인들과의 결혼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이방 신들을 섬기게 되므로 하나님께 범죄하였습니다. 바울의 논리는 분명합니다. 고린도후서 7장14절 하반절과 16절 상반절까지 보십시오:
“…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지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 어떻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공통점(common)이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과 우상과 조화를 이룰 수 있습니까?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기는
조화를 이루시려고 하십니까? 빛과 어두움이 어떻게 사귈 수 있습니까? It’s nonsense! 창세기 1장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에베소서 5장7절부터 보면 이제는 예수 안에서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expose them)고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는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두 물질의 성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물분자는 아주 약한 전기를 띠고 있습니다. 이 전기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세기는 아니지만, 분자의 세계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정도의 세기입니다. 따라서 물분자는 자신과 비슷한 분자들, 다시 말해서 전기를 띠고 있는 분자들과 잘 섞입니다. 전기를 띤 분자들끼리는 마치
조그만 막대자석들을 늘어놓은 것처럼 서로 잘 끌어당기기 때문이죠. 한편, 기름분자는 전기를 띠지 않습니다. 따라서 물분자와는 서로 섞이지도 않고 겉돌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기름분자는 자신과 비슷한 분자들, 즉 전기를 띠지 않는 분자들과 잘
섞입니다. 전기를 띠지 않은 분자들은 전기를 띠지 않은 분자들끼리 잘 섞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물과 기름이 섞일 때도 있습니다. 물과도 잘 섞이고, 기름과도 잘 섞이는 물질이 사이에 끼어 있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지요. 그 물질은 바로 비누입니다. 비누 분자는 길쭉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한쪽 끝은 약한 전기를 띠고 있고 나머지 부분은 전기를 띠지 않는 모양이지요.따라서 비누분자는
물과도 잘 섞이고 기름과도 잘 섞입니다. 이런 점 때문에 비누를 이용하면 기름때를 물에 녹여서 빨
수 있는 것이죠”(인터넷). “비누의 주성분은 계면활성제라는
것이다. 계면활성제는 성냥과 같은 구조로 머리부분은 기름에 잘 녹는 친유성의 탄화수소
부분이고 꼬리는 물에 잘 녹는 친수성의 카르복실기이다. 계면활성제는 물분자들이 표면을 최소화하려고
서로 잡아당기는 힘인 표면장력을 제거하는 특징이 있다. … 기름과 물을 한 용기에 따르면 서로 섞이지 않고 기름이 위층에 그리고, 물이 아래층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과 기름이 표면장력 때문에 서로 만나는 면을 최소화하기 때문에 두 층으로
분리되는 된다. 이곳에 비누액을 넣고 잘 저어주면 친유기 부분은 기름에, 친수기 부분은 물에 녹아 들면서 물의 표면장력을 제거하기 때문에 물과 기름은 서로 섞이게 된다”(인터넷).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이 “비누”와 같습니다. 마치 비누가 “물의 표면장력을 제거하”여 물과 기름을 섞이게 하듯이 이 세상은 ‘빛의 표면장력’을
자꾸만 제거하려고 유혹하여 결국은 ‘어두움의 분자’와 섞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비누”와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는 물과 기름처럼 분리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첫째로, 우리의 소속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16절을 보십시오: “내가(예수님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둘째로, 우리는 악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또 한가지, 우리는 진리로 거룩하게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요한복음 17장 17절을 보십시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죄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해야 할 것 또 한가지는
죄를 자복하는 것(Confess Your Sins!)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9장 2-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 … 낮 사분지 일은 죄를 자복하며 …”. 초막절이 한 3주 지난 7월24일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 모여 약 3시간동안은 서서 모세의 율법을 읽었고 또 다른 3시간 정도는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자기들의 죄와 열조들의 허물을 자복하였습니다(1-3절). 여기서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란 말은 애통의 표시로서 고대 이스라엘이 이같이 슬픔을 외부에 나타냈다고 합니다(창37:34; 삼상4:12; 삼하1:2, 3:31, 21:10 …) (박윤선). 이 사실은 좀 흥미롭습니다. 그 이유는 느헤미야 8장9절에서 초막절기인 첫날에
수문광장에서 약 6시간이나 학사 에스라를 통하여 모세 율법을 듣고 깨달아 울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일이기에 울지 말고 기뻐하라는 느헤미야와 에스라의 말을 듣고 초막절을 크게 기쁨으로 지켰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한 3주가 지난 후 오늘 본문에서 또 자기들의 죄와 열조들의 죄로 말미암아 슬픔을 외부적으로 나타냈는지 우리는 좀 의아해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Charles Fensham 학자는 그의 주석(NICOT)에서 말하기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초막절을 기쁘게 지낸 후 다시 그들의 죄(sins)와 사악(iniquities)이 자연스럽게 생각났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를 자복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죄를 “자복”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박광현 목사님이란 분의 원어 해석을 보니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자복”의 의미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박윤선): “자복은 하나님께 대해 사랑의 손길을 사모하며
자신의 죄와 허물을 하나님의 뜻에 빗나감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슬퍼하고 죄악을 떨쳐버리며 사죄의 확신을 가지고 손을 쭉 뻗어 찬양하며 예배하고 경배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자복했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한 5가지로 적용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뜻에 빗나감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엔, 하나님의 뜻에 빗나감을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뜻에 빗나간 자신의 죄와 허물을 생각하며 슬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죄악을 떨쳐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죄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 적용 원리에서 마지막 3가지를 좀 더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세 번째 원리인 회개의 눈물,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현대인이 슬픈 감정을 조절하는 것도 좋기는 하나 이것은
인격의 정서 방면을 마비시키는 하나의 폐단이다. 현대인들은 슬퍼해야 할 일에 웃어버리는
일도 많다. 슬픔을 표현하지 않는 자들의 심령은 강퍅해지기 쉽다.” 박윤선 목사님의 말씀의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현대인은 슬퍼해야 할 때 슬픔을 표현하지 않으므로 우리의 심령이 강퍅해지는 것에 익숙해져 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네 번째 원리인 죄악을 떨쳐 버려야 한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지만 우리는 죄악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죄악에 밀접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번 주일 설교에서 시편 119편31절에서 시편기자는
주님의 말씀에 밀접했다고 했는데 우리는 오히려 죄악을 밀접 된 삶을 살고 있을 때가 많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창세기 6장5절 하반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 그 (사람의)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사죄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절 하반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 그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4절과 5절을 보면 레위인들의 이름들이 나열되 있습니다. 그 당시 이들의 하는 일은 공중 예배를 인도하는 것이었는데 주로 하나님께 기도로 부르짖는 것이였습니다(4절 – “큰 소리로 그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고”). 흥리로운 것은 이들의 이름이 다 여호와의 성호와 관련을 가지고 있는 이름이란 것입니다(박윤선):
“예수아” à 여호와께서 구원하셨다, “갓미엘” à 하나님은 첫째이시다, “바니” à 여호와께서 지으셨다,
“스바냐” à 여호와께서 나를 회복하셨다, “브다히야” à 여호와께서 여셨다. 이 레위인들이 5절에 가서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하였습니다:
“… 너희 무리는 마땅히 일어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어다 주여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송축하올 것은 주의 이름이 존귀하여 모든 송축이나 찬양에서 뛰어남이니이다”.
이번 주 장모님과의 대화를 하였습니다. 목요일
아침 잠을 자고 있는데 아내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와서 눈물이 글썽이면서 하는 말 장모님의 몸에 있는 혹이 악성이라는 것이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유방암이라는 말이였습니다. 딜런 학교도 못 보내고 제 앞에서 무릅끓고 눈물 흘리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저는 눈을 감고 기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내는 딜런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나갔을 때 저는 장모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감사하게도 장모님의 목소리는 밝았고 또한 암을 하나님이 주신 "큰 선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큰 선물"로 인하여 마음에 모든 '죄악된
것'들도 하나님께서 다 끄집어 내 주시길 원하신다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장모님에게 전화로나마 함께 기도하고 싶다고 말씀 드린 후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수요 기도회 때 전파한 창세기 7장23절에 근거하여
홍수로 노아의 방주 안에 있는 사람과 동물들 외에 다 물로 쓸어버리신 하나님께서 예수 십자가의 보혈로 이미 우리의 죄를 다 쓸어 버리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선포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실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육신의 고통 가운데서라도 영혼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암 세포를 짤라 내듯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절단해 주시되 그 죄를 자복하게 하시므로 말미암아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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