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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죽으심 (눅23:21)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조금이나마 본받고 싶습니다.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죽고 싶습니다. 제 죽는 날은 슬픈 날이기보다 기쁜 날이 되길 원합니다. 제 장례예배는 축하(celebration) 예배가 되길 기원합니다. https://youtu.be/fdpCWoU5sTs

짧은 말씀 묵상 (2021년 12월 30일)

 

박해자 사울은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에 알지 못하고 주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면 남녀를 가리지 않고 보는 대로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했었는데 그러한 사울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도행전 9:1-5, 현대인의 성경; 디모데전서 1:13).  불신 속에서 무지함으로 신자들을 박해하는 사울과 같은 사람도 주님은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사명을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케 하십니다.

 

주님께서 사울을 구원하시고 부르시사 사명을 주시는 과정에 사울이 "사흘 동안 보지 못한 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는 말씀이 흥미롭습니다(사도행전 9:9, 현대인의 성경).  주님께서 사울에게 "시내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고(6, 현대인의 성경) 또한 다마스커스에 있는 아나니아라는 제자에게 환상 가운데 나타나셔서 "너는 어서 '곧은 거리'에 있는 유다의 집에 가서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라.  지금 그가 기도하고 있다.  그는 환상 가운데서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 자기에게 손을 얹어 다시 보게 해 주는 것을 보았다.'"라고 말씀하셨는데(10-12, 현대인의 성경) 그 두 사이에 사울은 사흘(3) 동안 보지 못한 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것입니다.  아마 사울이 금식 기도했는지도 모르겠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사흘" 동안 그가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 40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어쩌면 우리에게는 "사흘"(문자적으로 말고) 동안 "큰 물고기"와 같은 상황이든 "땅 속"과 같은 상황이든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상황이든 인생의 깊은 암흑 기간이 필요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깊은 암흑 기간 동안 이 세상에 아무 것도 보지 말고,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청할 수도 없는 인간의 무능력함과 무기력함을 뼈저리게 경험하면서 자아가 철저히 부서지고 깨지고 무너져야 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야 .. 그때서야 구원의 주님만 전적으로 또한 전심으로 의지하고 신뢰하게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때서야 주님께 부르심과 사명을 받은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우리 생명을 버리는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나 생각됩니다(마가복음 8:35).


주님께서는 부르실 때에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하는 아나니아라는 제자를 "주여 누구시니이까"라고 묻는 사울에게 "가서 ...  찾으라"고 명하셨습니다(사도행전 9:5, 10-11).

 

사울은 "기도하는 중"에 아나니아를 만나 그 만남 속에서 주님의 뜻대로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이방인의 사도(로마서 11:13)인 복음 전파자로 세움을 받았고(사도행전 9:11-20) 바울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성문 밖 강가로 나가서 루디아를 만나 주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시사 주님이 뜻대로 그녀와 온 집안 식구들이 다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16:13-15).  이렇게 "기도하는 중"에 주님이 계획하신 만남을 통해 주님이 뜻인 놀라운 구원의 역사와 사명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생명을 버리는 사람으로 거듭납니다(마가복음 8:35).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서 ...  찾으라"(사도행전 9:11)는 사람에 대하여 우리가 아직도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미 만나셔서 변화시켜 주신 사람에 대한 우리의 옛 기억에 근거한 선입관을 뛰어넘지 못하면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서 순종하여 가서 그 사람을 찾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충분히 변화시킬 수 있는 "사울"과 같은 사람을 우리가 그 "사울"은 절대 "바울"로 변하지 않을꺼야 라고 단정짓고 변화의 기회를 우리 마음에서 차단하는 것은 주님을 마음을 다하여 신뢰하는 것이 아닙니다(잠언 3:5).

 

사람은 절대 변하지 않지만 절대자 주님은 절대 변하지 않는 나같은 사람조차도 변화시켜주셔서 목사로 세우사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해 살게 하셨습니다.  "사울" "바울"로 변화시켜 주신 주님께서 이 놀라운 변화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사도행전 9:1-20).   이 놀라운 변화의 역사를 시작하신 주님께서는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 저를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시키시되(고린도전서 15:51) 저의 낮은 몸이 주님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빌립보서 3:21).

 

주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였던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동안 지냈습니다(사도행전 9:1, 19).  주님께서 사울을 바울로 변화시키신 결과 중 하나입니다.  주님께서 놀라운 변화의 역사를 이루시면 결코 함께 할 수 없는 사람하고도 함께 지낼 수가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에게 고난을 주던 자가 고난당하신 주님을 만난 후로는 주님을 위해 고난을 당하는 주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사도행전 9, 특히 16).  변화를 받지 못한 사람은 고난을 주는 자지만 변화를 받은 사람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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