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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기회입니다. (6)

"고난의 유익은 그 고난을 통하여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그릇행하였다는 것을 깨닫는 것과 하나님의 법을 배우게 된 것과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시 119:67, 71). 이러한 깨달음(나의 죄)과 배움(하나님의 말씀)과 지킴( 말씀 순종)이 없는 고난은 무익합니다." 1. 깨달음: 교만함(시119:69), 그릇 행함(67절), 마음의 살찜과 기름덩이(70절) [마음에 지방을 제거하라!: https://blog.naver.com/kdicaprio74/150112959844] 2. 배움: 자녀들의 위기를 통해 저는 선하신 주님께서(68절) 저를 선대하사(65절) 가르쳐주신(68절) 시편 63편 3절 말씀과 베드로전서 5장 10절 말씀을 배우게 되었습니다(71절). [20년 전 이 아빠의 품에 잠든 사랑하는 첫째 아기 주영이를 추모하면서 ... : https://blog.naver.com/kdicaprio74/221262767368] [금년 2019년 한 해를 영원히 과거로 보내기에 앞서 ...: https://blog.naver.com/kdicaprio74/221756284213] 3. 지킴: https://youtu.be/i6TfokavYN4?si=P1E4vvk_bnPOvabx

“주의하라” (4)

주의하라” (4)

 

 

 

둘째로, 바울은 율법주의를 주의하라고 경고했습니다(2: 11-17).  율법주의란 외식했던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합니다(행위 중심 구원관).  이 율법주의는 자기 의에 기초한 신앙으로서 정해진 규정들과 규칙들을 잘 지키는 자기의 헌신과 노력이 강조됩니다.  그러나 이 자기 의에 기초한 율법주의적 신앙에는 2 가지 위험한 열매인 영적 우월감과 상습적인 죄책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바리새인들처럼 영적 우월감을 갖게 만드는 율법주의가 바른 신앙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율법주의를 경계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율법주의를 경계하면서 우리는 동일하게 율법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율법을 가볍게 여기는 것을 가리켜 “반율법주의”라고 말합니다.  이런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할 때 등장하는 2 가지 잘못된 대적들입니다(켈러).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 모두가 사탄의 거짓말을 믿고 하나님의 성품을 왜곡하였다고 말합니다(퍼거슨).  결국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구원자가 되는 2 가지 길을 추구합니다: (1) 모든 도덕률을 깨뜨리고 스스로 자유롭게 길을 정하는 것(반율법주의)(2) 모든 도덕률을 다 지키고 지극히 선한 삶을 사는 길(율법주의).  이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하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퍼거슨).  우리는 이미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를 위협하고 있었던 그 당시 이단 사상들 3가지 중 두 번째가 바로 ‘유대교적 율법주의’라고 배웠습니다(1:15-23).  여기서 ‘유대교적 율법주의’란 특히 육체의 할례와 음식의 규례와 특별한 절기의 준수가 구원과 관계있다고 주장한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주의를 주의하라고 이미 경고했습니다(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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