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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폐증이 있는 처남과의 삶

  https://youtu.be/vQXbXpHwG1I?si=2_q5Er5WZQgvGmt0  병원 채플린 선배 목사님의 글: "제임스 목사님 "Routine is a blessing" 이란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Routine이 가져다주는 장점과 유익들을 다룬...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routinely 행해야 할 것을 계속 강조하신 것을 볼 때 처남의 routine적인 성향을 통해 나에게 축복이 될 수 있는 나의 routine을 다시 돌아보게 되는군여... 자기 분야의 강한 routine을 통해 남이 넘볼 수 없는 성취를 이룬 많은 자폐증의 전문인들을 볼 때 처남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routine 을 통해 본인과 타인에게 가져다 줄 유익을 보게 됩니다 . 병원에서 많은 자폐증 환자들을 접하게 되는데...실로 처남의 자폐증은 착하고 얌전한 자폐증입니다. 이는 부모님의 사랑과 인내와 희생으로 길들여진 것이고 부모님을 이어서 처남을 신실한 목사님과 사모님 가정에 보내신 것은 처남에겐 축복이고 목사님의 가정에도 하나님의 선물... 주일 아침에...나는 주님이 인정하시고 상급이 되게 하시는 어떤 routine 이 있는가를 묵상하면서..." 

"성경적인 용서의 두 가지 측면"

 https://www.gospelandcity.org/news/articleView.html?idxno=31424

"콜린 핸슨: 다음 질문은 목사님의 저서 <팀 켈러의 용서를 배우다>에 나온 겁니다. 용서를 우리의 믿음과 복음 이해에 대한 시험이라고 묘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팀 켈러: 글쎄요, 성경에서 말하는 용서는 제 생각에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저의 사랑하는 친구 고 데이비드 폴리슨이 쓴 <선한 분노, 악한 분노>라는 책에서 그는 용서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설명했습니다. 이 두 개의 성경 구절을 처음 읽으면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 두 구절을 합치면 십자가에 기반을 둔 용서 방식을 얻게 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보상적인 용서 방법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얘기했듯이, 상대방에게 복수하며 그가 충분히 굴복한 후에야 용서하겠다고 하는 그런 방법이 아니죠. 성경적인 방식은 그냥 자기 자신을 위해서 용서하는 치료적인 용서 방식도 아닙니다. 마가복음 11장 25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들에게 가서 뭘 하라는 말이 아니라 당장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회개하면 용서하고, 일곱 번 회개하면 일곱 번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회개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처럼 보이지만, 데이비드 폴리슨은 이 두 가지를 합치지 않으면 이런저런 실수에 빠진다고 말합니다. 한 가지 실수는 그 사람을 용서한다고 하면서 그 사람에게 가서 말을 걸지 않아도 된다는 식이죠. 이는 모두 마음속으로 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반면에 사람들은 상대가 용서를 구하지 않으면 용서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데이비드가 말하는 바는 먼저 마음속으로 용서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가겠지만, 되갚으려 하지 않겠다. 그들을 굽실거리게 하지 않겠다. 사랑으로,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들이 진실을 깨닫게 하도록 노력하겠다"고 하는 거라는 거죠. 그래서 먼저 내면적으로 그들을 용서하고 그런 다음 그들의 눈을 뜨게 하고 어쩌면 화해까지 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는 이것을 내면적 용서라고 부르고 그 다음에는 회복을 위한 외적인 용서, 즉 관계적 용서를 말합니다. 그런 방식으로 한편으로는 정의에 관심을 갖는 겁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에게 가서 "당신이 정말 잘못한 것을 알고 있습니까?"라고 물으며 그 사람을 위해 그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어떤 면에서 다른 피해자들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서 노력하는 거죠. 하지만 먼저, 당신은 마음속으로 이미 그들을 용서한 것입니다. 용서하고 동시에 정의를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은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진정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만족시키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한 자비와 은혜와 구원도 동시에 얻어내셨기 때문입니다. 긴 답변이었지만, 간단히 요약하면 

콜린 핸슨: 한 번에 질문 세 개를 다 답변하셨네요. 계속 말씀하세요. 

팀 켈러: 간단히 요약하면, 용서하고 정의를 추구하는 것 둘 다를 하는 겁니다. 마치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용서와 정의 둘 다를 성취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세상에서는 자신을 위해 용서하는 치료적 접근 방식을 택하든지 용서가 아니라 굴복을 강요하는 거래적 접근 방식을 택하든지 합니다. 아니면 절대 용서할 수 없다며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방식도 있습니다. 십자가만이 이 둘을 하나로 묶습니다. 

콜린 핸슨: 그 주제로 계속 이야기해 보죠. 적어도 때로는, 왜 느끼기도 전에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누군가는 그런 관점이 오용되기 쉽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하지만 목사님은 용서에 대한 치료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동기를 반박하려는 것 같습니다. 

팀 켈러: 네, 느껴지기 전에 용서를 베풀어야 한다는 말은 용서는 화가 나 있을 때에도 할 수 있는 약속이라는 의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용서할 마음을 느낀다는 것은 분노가 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분노가 사라지기 전에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거죠. 만약 이 세 가지를 하겠다고 약속한다면 말입니다. 제 책에 써 놓았습니다. 예를 들어, 상대방에게 그의 잘못을 쏟아내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겁니다. 그를 용서했다면, 그를 볼 때마다 그의 잘못을 꺼내지 않을 거라는 거죠. 둘째, 다른 사람들에게 그의 잘못을 얘기하여 그의 평판을 손상시키려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당사자에게도 그의 잘못을 언급하지 않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계속 그것을 꺼내지 않을 것이며 나 자신도 그것을 계속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내가 그것을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내가 그 생각에 빠지지 않겠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내가 아내를 용서하고 싶거나 방금 한 일에 대해 아내가 저를 용서하고 싶어 한다면 상대방에게 그 잘못에 대해 쏟아내지 않습니다. 한 주나 두 주 후에도 말입니다. 우리는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얘기를 절대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에 대해 골몰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용서를 베풀면, 결국 용서하는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용서하는 마음이 들기를 기다려서 용서를 베풀려고 한다면 용서하는 마음이 결코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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