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자리에서 억울한 일을 만나고 사방이 막힌 구금실 같은 어두운 밤을 통과할 때마다, 이미 그 길을 먼저 걸어가시며 승리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누가복음 22:63-65).
(1)
저는 오늘 본문 누가복음
22장
63-65절 말씀을 한국어 성경과 헬라어 성경으로 읽은 후 제일 먼저 병행구절인 마태복음
26장
67-68절과 마가복음
14장65절 말씀과 비교하면서 종합적인 요약을 하고 싶습니다.
1.
성경 본문 비교 분석
누가복음 22장 63-65절의 묘사:
누가복음은 예수님을 지키는 사람들이 그를 희롱하고 때렸다고 기록합니다.
헬라어 원어는 조롱과 구타가 동시에 일어났음을 뜻하는
‘에네파이존 아우토 데론테스(ἐνέπαιζον αὐτῷ
δέροντες)’를 사용합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의 얼굴을 가린 채(περικαλύψαντες
αὐτὸν) "너를 친 자가 누구냐"라며 "선지자 노릇을 하라(Προφήτευσον)"고 조롱했습니다.
누가는 이 외에도 무리가 많은 말로 예수께 신성모독적인 욕설을 퍼부었다고 증언합니다.
마태복음 26장 67-68절의 묘사:
마태복음은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무리가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주먹으로 치고,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때렸다고 생생하게 고발합니다.
특히 얼굴에 침을 뱉었다는 표현은 헬라어로
‘에네프튀산 에이스 토 프로소폰 아우투(ἐνέπτυσαν εἰς τὸ πρόσωπον αὐτοῦ)’로 기록되어 극도의 수치심을 나타냅니다.
더불어 마태는
"그리스도야, 우리에게 예언하라(Προφήτευσον
ἡμῖν, Χριστέ)"라는 문장을 통해,
그들이 예수의 메시아(그리스도) 직무를 직접적으로 조롱했음을 부각합니다.
마가복음 14장 65절의 묘사:
마가복음은 어떤 이들이 예수에게 침을 뱉기 시작했으며(ἤρξαντό τινες ἐμπτύειν), 그의 얼굴을 가리고 주먹으로 치며
"선지자 노릇을 하라"고 요구했다고 기록합니다.
마가는 대제사장 무리뿐만 아니라 재판 자리에 있던 하인들까지 가세하여 손바닥과 매로 예수를 넘겨받아 쳤다는 사실을
‘라피스마신 아우톤 엘라본(ῥαπίσμασιν αὐτὸν
ἔλαβον)’이라는 원어 표현으로 상세히 묘사합니다.
2.
공관복음 병행구절 종합 요약 및 특징
세 복음서는 예수님이 산헤드린 공의회 혹은 가야바의 뜰에서 당하신 육체적 핍박과 신성모독적 조롱을 공통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각 저자의 관점에 따라 강조점이 다릅니다.
a.
가해자의 신분 차이
누가복음은 가해자를
"지키는 사람들(guards)"로 묘사하여,
예수님이 구금된 상태에서 하속들에게 당하신 고초를 강조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대제사장과 공회원들이 사형 판결을 내린 직후,
"어떤 사람들(종교 지도자들)"과 "하인들(officers)"이 동시에 가해한 것으로 묘사하여 종교 기득권층의 잔인함을 고발합니다.
b.
희롱의 방식
(선지자 직무 조롱)
세 복음서 모두
"선지자 노릇 하라(Prophesy!)"는 조롱을 기록합니다.
누가와 마가는
'눈(얼굴)을 가린 상태'에서 때린 후
"누가 쳤는지 맞춰보라"고 조롱한 정황을 상세히 적어,
전지하신 예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죄악을 부각합니다.
특히 마태복음은
"그리스도야(You
Christ)"라는 호칭을 의도적으로 추가하여,
왕이자 메시아이신 분을 향한 인간의 극에 달한 완악함을 보여줍니다.
c.
폭력의 묘사
마태와 마가는 가장 모욕적인 수치인
'얼굴에 침 뱉음(ἐμπτύω)'과 주먹질,
손바닥치기를 생생하게 폭로합니다.
누가는 침 뱉음은 생략했으나,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blaspheming)'는 헬라어 원어 표현을 통해 언어적 폭력과 신성모독이 지속적이고 끊임없이 행해졌음을 종합적으로 요약합니다.
(2)
둘째로,
저는 예수님을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님이 구금된 상태에서 예수님 희롱하고 때렸다는 헬라어 원어 ἐνέπαιζον
αὐτῷ δέροντες (에네파이존 아우토 데론테스)를 좀 구체적으로 묵상하고 싶습니다.
1.
ἐνέπαιζον
(에네파이존) : 철저하고 지속적인 조롱
원어적 의미: '아이(파이스, παῖς)'처럼 다루다,
'아이들의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다'라는 어원에서 유래했습니다.
즉,
상대를 인격체로 보지 않고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되는 장난감처럼 취급하며 비웃고 희롱했다는 뜻입니다.
시제의 묵상 (미완료 과거형):
이 단어는 헬라어 문법상 미완료 과거(Imperfect)
시제입니다. 이는 단 한 번의 조롱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밤새도록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지속해서"
예수님을 희롱했음을 의미합니다.
무력하게 매여 계신 예수님을 향해 경멸과 비웃음이 멈추지 않고 쏟아졌던 밤이었습니다.
2.
δέροντες (데론테스)
: 살점을 찢는 듯한 폭력
원어적 의미: 이 단어의 원형인
'데로(δέρω)'는 본래
'가죽을 벗기다(to
flay, skin)'라는 끔찍한 의미를 가집니다.
이것이 고대 언어에서
'매질하다', '혹독하게 때리다'라는 의미로 확장되었습니다.
형태의 묵상 (현재 분사형):
문법적으로 '현재 분사(Present
Participle)' 형태로 사용되어,
앞서 나온 조롱(에네파이존)과 동시에 가해진 폭력을 묘사합니다.
그들은 말로만 놀린 것이 아니라,
가죽이 벗겨지는 듯한 고통을 주는 무자비한 구타를 말과 함께 계속해서 병행했던 것입니다.
종합적인 묵상 노트:
a.
장난감이 되신 창조주
우주를 창조하신 만왕의 왕께서 피조물들에게
'가지고 노는 장난감(ἐνέπαιζον)'처럼 취급당하셨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을 완전히 말살당한 채,
밤새도록 이어지는 조롱의 놀이판 위에서 묵묵히 그 수치를 견뎌내셨습니다.
b.
가죽이 벗겨지는 고통 속의 침묵
살점이 찢겨 나가는 듯한 혹독한 매질(δέροντες)이 가해지는 순간에도,
예수님은 하늘의 천군천사를 동원해 그들을 멸하지 않으셨습니다.
구금된 상태의 무력한 죄인처럼 자신을 낮추사,
이사야 53장 7절의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라는 예언을 온몸으로 성취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c.
우리를 대신한 수치와 아픔
조롱과 구타가 동시에,
그리고 끊임없이 반복되었다는 문법적 사실은 주님이 당하신 수난의 밀도가 얼마나 빽빽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형벌과 수치를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
주님은 그 가야바의 뜰 구금실에서 밤새도록 홀로 그 폭력을 받아내셨습니다(인터넷).
(a)
여기서 저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무력한 죄인처럼 자신을 낮추사 이사야
53장 7절의 예언을 온몸으로 성취하셨다("가죽이 벗겨지는 고통 속의 침묵")는 말을 묵상할 때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이 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i)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가죽이 벗겨지는 듯한 폭력(δέροντες)과 밤새도록 이어지는 조롱(ἐνέπαιζον) 속에서도 무력한 죄인처럼 침묵하셨던 모습은,
오늘날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가장 치열하고 깊은 제자도(Discipleship)의 삶을 요구합니다. 이 묵상을 우리의 삶에 세 가지로 구체적으로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인터넷):
1.
억울함 속에서
'자기 변호'의 권리를 내려놓기
(정서적 적용)
인간의 가장 본능적인 욕구는 누군가 나를 오해하거나 비난할 때 즉각 자신을 변호하고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묵상과 적용:
예수님은 말 한마디로 그들을 심판하실 수 있는
'전능성'이 있으셨음에도
'침묵'을 선택하셨습니다.
제자로서 우리도 삶에서 억울한 일이나 부당한 비난을 만날 때,
내 힘으로 즉각 피를 토하듯 변명하거나 보복하려는 마음을 내려놓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실천: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거친 말로 싸우기보다,
나의 공의로우신 재판장이신 하나님께 그 상황을 온전히 위탁하며
'침묵 속의 인내'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2.
'권리 포기'를 통한 사랑의 완성
(관계적 적용)
예수님의 침묵은 무기력한 포기가 아니라,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뚜렷한 목적이 있는
'자발적 권리 포기'였습니다.
묵상과 적용:
우리가 가정,
직장, 교회에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거나 자존심이 짓밟힐 때,
우리는 "내가 왜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지?"라며 분노합니다.
하지만 제자의 삶은 내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자존심,
평판, 대접받을 권리를 주님의 뜻을 위해 기꺼이 포기하는 삶입니다.
실천: 나를 아프게 하고 장난감처럼 취급하는 공동체의 구성원이나 이웃이 있다면,
그들을 향해 똑같이 분노를 쏟아내지 않는 것 자체가
'예수님의 침묵'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나의 낮아짐을 통해 상대방이 살아나고 공동체의 평화가 지켜진다면,
그것이 바로 이사야
53장 7절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제자의 삶입니다.
3.
고난의 현장을
'사명의 자리'로 바꾸기
(사명적 적용)
구금실의 밤은 인간 예수가 철저히 실패하고 패배한 것처럼 보이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그 자리가 구약의 예언을 온전히 성취하시는
'사명의 정점'이었습니다.
묵상과 적용:
우리 삶에도 구금실처럼 사방이 막히고,
지속적인 조롱과 영적·육체적 매질을 당하는 것 같은 어두운 밤이 찾아옵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십니까?"라는 원망이 터져 나올 때,
제자는 그 자리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성취의 현장'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실천: 고난과 아픔의 한복판에서 절망하는 대신,
"주님, 이 상황을 통해 내 안의 교만이 죽어지고 주님의 성품이 새겨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며,
고난을 내 인격과 믿음이 정금처럼 단련되는 기회로 삼는 것입니다.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베드로전서
2:23)
주님의 침묵은 우리에게
"너희도 이와 같이 행하라"고 보여주신 이정표입니다.
가죽이 벗겨지는 아픔 속에서도 침묵하신 주님의 통제된 전능하심이 오늘 나의 삶에서
'온유함과 오래 참음'이라는 열매로 나타나기를 구하는 것이 제자의 마땅한 삶일 것입니다(인터넷).
(3)
셋째로,
저는 왜 “지키는 사람들이”(눅22:63)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Προφήτευσον,
τίς ἐστιν ὁ παίσας σε (프로페-튜손, 티스 에스틴 호 파이사스 세)](64절)하고 물었는지 궁금합니다.
(a)
예수님을 지키는 자들이 그분의 눈을 가린 채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라고 물은 행위는,
단순한 신체적 가해를 넘어선 영악하고도 참담한 영적 조롱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이 왜 이런 방식으로 예수님을 시험하고 희롱했는지 인공지능이 세 가지 이유로 분석한 것입니다(인터넷):
1.
‘선지자’의 초자연적 능력을 조롱하려는 의도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선지자(Prophet)’는 하나님께 계시를 받아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숨겨진 비밀이나 미래의 일을 맞추는 초자연적인 존재로 인식되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이 그동안 수많은 기적을 행하고 선지자,
혹은 그 이상의 메시아로 추앙받던 인물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의 눈을 완전히 가려 시각적 정보를 차단한 후,
"네가 정말 하나님이 세우신 초자연적 선지자라면,
보지 않고도 영적인 능력으로 너를 때린 사람이 누구인지 맞추어 보라"며 덫을 놓은 것입니다.
맞추지 못하면 가짜 선지자라고 낙인찍어 대중 앞에서 그분의 권위를 완전히 실추시키려는 계산이었습니다.
2.
‘전지하신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영적 맹목성
(Blindness)
이 장면은 인간의 죄악이 가진
‘영적 눈묾’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인간의 착각:
가해자들은 예수님의 육신의 눈을 가리면,
그분의 ‘신성(Divine
Nature)과 전지하심(Omniscience)’까지 가릴 수 있을 것이라 착각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은밀하게 죄를 지으면 하나님이 보지 못하실 것이라 믿는 인간의 어리석은 죄성을 대변합니다.
참담한 역설:
그들은 "너를 친 자가 누구냐"라고 물었지만,
정작 그들 바로 앞에 서 계신 예수님이 자신들의 감추어진 죄와 속마음까지 모두 꿰뚫어 보고 계시는 전능한 창조주라는 사실은 보지 못했습니다.
정작 눈이 가려진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영적인 소경이었던 지키는 자들이었습니다.
3.
심리적 가책을 면하려는 잔인한 유희
인간은 다른 사람을 학대할 때,
피해자의 '눈'을 마주치면 본능적으로 양심의 가책이나 두려움을 느낍니다.
예수님의 눈빛은 늘 죄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며 회개를 촉구하는 신적인 위엄이 있었습니다.
군인들은 예수님의 얼굴과 눈을 천으로 가림으로써,
그 위엄 있는 눈빛으로부터 오는 심리적 압박감과 가책에서 벗어나고자 했습니다.
눈을 가려 상대를 철저히 인격이 없는
'물건'이나 '장난감'처럼 만들어 버린 후에야,
죄책감 없이 잔인한 폭력 유희를 마음껏 즐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헬라어 문장 핵심 묵상:
Προφήτευσον (프로페-튜손):
"예언하라!"는 이 명령형 단어는 만왕의 왕을 향해 피조물들이 던진 극에 달한 오만함의 표현입니다.
τίς ἐστιν ὁ παίσας σε (티스 에스틴 호 파이사스 세):
"너를 친 자가 누구냐?"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침묵하셨지만,
사실 주님은 그를 친 자의 이름과 그의 인생,
그리고 그의 죄악까지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능력이 없어서 맞추지 못하신 것이 아니라,
그 조롱의 죄값까지도 십자가에서 친히 담당하시기 위해 기꺼이
'모르는 자'처럼 묵묵히 서 계셨던 것입니다(인터넷).
(i)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조롱했던 무리들의 모습은,
이 시대 우리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은밀하게 저지르는 영적 죄성과 거울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순간 눈이 가려진 채 홀로 서 계셨던 예수님의 내면적 고통을 묵상할 때 우리의 숨은 죄를 통회하는 깊은 회개로 나아가게 됩니다”(인터넷).
1.
‘눈 가림’의 죄와 우리의 은밀한 죄
(연결성)
군인들이 예수님의 눈을 가린 것은
"눈을 가렸으니 이제는 보지 못하겠지"라는 어리석은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삶에서 짓는 은밀한 죄의 태도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현대적 묵상:
우리는 교회나 공적인 장소에서는 거룩한 제자처럼 행동하지만,
컴퓨터 모니터 앞,
스마트폰 화면 속,
혹은 아무도 없는 사적인 공간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이 전혀 보지 않으시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영적 적용:
내 눈앞의 현실과 사람들의 시선만 의식하고,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의 심장과 폐부를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현존(코람데오,
Coram Deo)을 잊어버리는 것 자체가 주님의 눈을 가리려 했던 군인들의 영적 맹목성과 다를 바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눈 가림 속에서도
"너를 친 자가 누구냐"라는 질문에 침묵하셨듯,
우리가 은밀히 죄를 지을 때도 오래 참으시며 묵묵히 바라보고 계십니다.
2.
눈이 가려진 예수님의 내면적 고통
이 장면에서 예수님이 느끼셨을 고통은 단순한 물리적 매질보다 비인격화(Depersonalization)가 주는 정신적·영적 고통이 훨씬 컸습니다.
소외와 단절의 고통:
인간에게 눈은 인격과 인격이 만나는 소통의 창구입니다.
눈이 가려진다는 것은 주변 세계와 완전히 단절되어 철저히 홀로 버려짐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우주의 중심이시며 모든 피조물과 친밀히 소통하시는 분인데,
피조물들에 의해 눈이 가려진 채
'인격'이 아닌
'물건'처럼 취급당하셨습니다.
통제된 전지함의 고통:
예수님은 눈이 가려지셨어도 신성(Divine
Nature)으로 자신을 때리는 자들의 거친 숨소리,
손을 치켜드는 근육의 움직임,
그들의 비열한 마음의 동기까지 전부
'지나치게 생생하게'
알고 계셨습니다.
다 알고 계시면서도 무력한 소경처럼 서서 그 모욕을 고스란히 받으셔야 했던 내면의 절제와 고통은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깊이의 것이었습니다.
제자의 삶을 위한 결단과 적용:
a.
'가려진 곳'이 없는 삶 살기
군인들은 천으로 주님의 눈을 가릴 수 있다고 믿었지만,
하나님 앞에는 어둠도 빛과 같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방에 홀로 있을 때도,
주님이 내 곁에 계시며 나를 보고 계신다는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회복해야 합니다.
b.
주님의 눈물이 담긴 눈을 바라보기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눈을 다시 가리는 자들이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죄의 유혹 앞에서
"주님이 나를 보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그 눈 가림의 자리에서 벗어나 주님의 거룩함에 동참하는 참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인터넷).
(4)
마지막 넷째로,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ἕτερα πολλὰ βλασφημοῦντες ἔλεγον εἰς αὐτόν (헤테라 폴라 블라스페문테스 엘레곤 에이스 아우톤)](눅22:65)란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1.
ἕτερα
πολλὰ (헤테라 폴라):
죄의 무한한 변칙성과 확장성
원어적 의미: 'ἕτερα(헤테라)'는 단순히 같은 종류의 다른 것이 아니라
'질적으로 다른,
상상치 못한 종류의'라는 뜻이며,
'πολλὰ(폴라)'는 '수없이 많은,
허다한'이라는 뜻입니다.
영적 교훈: 인간의 죄성은 한 자리에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운 악을 발명해 냅니다.
군인들은 육체적 구타와 선지자 직무 조롱에 만족하지 못하고,
밤이 새도록 온갖 기상천외하고 비열한 방식(ἕτερα)으로 새로운 조롱거리를 끊임없이(πολλὰ) 만들어 내며 예수님을 괴롭혔습니다.
이는 우리가 죄를 방치할 때,
그 죄가 얼마나 무섭고 다양하게 변칙적으로 확장될 수 있는지를 경고합니다.
2.
βλασφημοῦντες
(블라스페문테스): 피조물이 창조주를 향해 저지른
'신성모독'
원어적 의미: 이 단어의 원형인
'블라스페메오(βλασφημέω)'는 사람 사이의
'비방'을 넘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영예를 훼손하는 신성모독'을 뜻합니다.
영적 교훈: 무리들은 그저 죄수 한 명을 욕한다고 생각했지만,
성경은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βλασφημοῦντες)였다고 정확히 고발합니다.
그들은 말로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았습니다.
우리가 삶에서 형제를 비방하거나,
하나님의 주권을 원망하며 쏟아내는 불평의 말들 역시 본질적으로는 주님의 영예를 가로채고 모독하는 영적
'블라스페메오'가 될 수 있음을 두려움으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3.
εἰς
αὐτόν (에이스 아우톤):
모든 저주와 독설의 화살을
'그분 안으로'
받아내심
원어적 의미: '에이스(εἰς)'는 공간적으로
'~의 안으로(into)'
들어가는 운동성을 가진 전치사입니다.
즉,
그들이 쏟아낸 수많은 신성모독과 저주의 말들이 예수님의 내면과 온몸 속으로 고스란히 꽂히고 들어갔음을 묘사합니다.
영적 교훈: 예수님은 그 독설과 저주를 튕겨내거나 하늘의 불로 소멸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치 스펀지가 더러운 물을 모두 빨아들이듯,
인간이 뱉어낼 수 있는 가장 추악하고 오염된 언어의 쓰레기들을 자신의 온 인격과 존재 안으로(εἰς αὐτόν) 다 받아내셨습니다.
주님이 이 언어의 십자가를 통과하셨기에,
오늘날 우리의 추하고 가시 돋친 언어의 죄가 씻김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자의 삶을 위한 결단과 기도 방향:
a.
내 입술의 파수꾼을 세우기:
인간의 죄성은 끊임없이 새로운 악한 말(ἕτερα πολλὰ)을 쏟아내려는 속성이 있습니다.
주님이 밤새도록 그 모욕의 말을 다 받아내시며 침묵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누군가를 향해 비수 같은 말을 쏟아내고 싶을 때 입술을 제어하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b.
주님의 참으심을 기억하기:
누군가 나를 향해 질적으로 다른 수많은 비방을 퍼부을 때,
이미 그 모든 종류의 언어적 폭력을 온몸으로 받아내신 예수님의
'에이스 아우톤(εἰς αὐτόν)'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를 위해 그 모든 독설을 온몸으로 받아내신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치유할 것입니다.
(a)
“수난당하신 주님을 바라보는 마무리 기도문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구금되신 상태에서 밤새도록 홀로 고초를 겪으신 예수님의 수난의 현장을 묵상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만왕의 왕께서 피조물들의 손에 붙들려 아이들의 장난감처럼 희롱당하시고(ἐνέπαιζον), 살점이 찢겨 나가는 듯한 혹독한 구타(δέροντες)를 당하시면서도,
묵묵히 그 고난의 잔을 다 마셔주신 사랑에 고개 숙여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마땅히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수치와 형벌을 대신 짊어지시기 위해,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침묵하셨던 그 통제된 전능하심 앞에 우리의 교만과 오만함을 회개합니다.
주님, 무리들은 예수님의 눈을 가리면(περικαλύψαντες)
자신들의 죄도 가려질 것이라 착각하며
"너를 친 자가 누구냐"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영적인 소경이 되어 바로 앞에 계신 창조주를 보지 못한 것은 그들이었음을 깨닫습니다.
혹시 우리도 아무도 보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 하나님이 보지 못하실 것처럼 행동하며,
주님의 눈을 가리려 했던 군인들과 같은 영적 맹목성 속에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심장과 폐부를 꿰뚫어 보시는 코람데오(Coram
Deo)의 신앙을 회회복하게 하시고,
늘 불꽃 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키시는 주님의 현존 앞에 거룩하게 살아가게 하옵소서.
또한 밤이 새도록 온갖 기상천외하고 추악한 말들로(ἕτερα πολλὰ) 주님을 비방하고 신성모독했던(βλασφημοῦντες) 그 저주의 화살들을,
주님은 피하지 않으시고 온 인격과 존재 안으로(εἰς αὐτόν) 다 받아내셨습니다.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언어의 폭력을 온몸으로 흡수하시며 우리를 살리신 그 은혜를 기억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입술을 주장하여 주사,
이웃을 찌르고 주님의 영예를 가로채는 악한 말을 버리게 하시고,
오직 생명을 살리고 은혜를 끼치는 감사의 말만 담기게 파수꾼을 세워 주옵소서.
삶의 자리에서 억울한 일을 만나고 사방이 막힌 구금실 같은 어두운 밤을 통과할 때마다,
이미 그 길을 먼저 걸어가시며 승리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내 힘으로 즉각 변호하고 보복하려는 권리를 내려놓게 하시고,
나의 낮아짐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마음에 새긴 말씀이 삶의 능력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오며,
우리를 위해 모든 수치와 고통을 참아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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