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족한 삶
[시편 23편 말씀 묵상]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삶에 만족하고 계십니까? “인생을 살맛나게 하는 99가지 희망공식”의 이진호씨는 말하기를 “현대인들은 만족 결핍증을 앓고 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가장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라고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만족할 줄 아는 사람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미국의 작가 게일 쉐휘(Gail Sheehy)는 그의 베스터 셀러인 “통로를 찾는 사람들”(Path Finders) 이란 책에서 참 만족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로, 자기가 사는 의미와 가야할 방향을 알고 있는 사람; 둘째로, 자기의 인생을 허무하게 살아왔다고 실망하지 않는 사람; 셋째로, 자기 나름대로의 확실한 장기적 계획을 가지고 그것을 조금씩 성취해 가고 있는 사람; 넷째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대상이 있는 사람; 다섯째로, 깊은 속까지 털어 놓을 만한 좋은 친구가 있는 사람; 여섯째로, 명랑하고 어려운 일을 당해도 궁극적으로 해석하며 처리하는 사람; 일곱째로, 남의 비평이나 욕까지도 너무 신경 쓰지 않고 너그럽게 들을 수 있는 사람; 여덜째로, 두려움이나 근심을 뚫고갈 정신적 힘을 가진 사람.
오늘 본문 시편 23편 말씀을 보면 삶을 만족하게 살았던 시편 기자 다윗이 나옵니다. 그는 1절에 보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다윗은 주님이 목자이시기에 만족하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성도의 삶은 만족함이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 중심으로 부족함이 없는 삶 (혹은 만족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 여섯 가지로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도 만족한 삶을 살 수 있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만족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목자되신 주님에게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2절을 보면 다윗은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진정한 목자는 양들이 필요한 먹을 풀과 마실 물을 공급해 줍니다. 목자가 양들을 “푸른 초장”에 누이는 이유는 푸른초장에 양들이 먹기 좋아하는 연한 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선한 목자는 양에게 꼴을 먹여 줍니다. 또한 “쉴만한 물”이란 칼빈에 의하며 “천천히 흐르는 물이니 양들이 마시기에 편하고, 또 그 건강에도 유익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양들인 우리들에게 육신의 양식만 아니라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주십니다. 먹여 주시되 주님께서는 우리를 풍성하게 먹여 주십니다. 그는 “여호와이레”(The Lord Will Provide), 즉 공급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창22:14).
그러나 에스겔 당시의 이스라엘 목자들은 “자기만 먹이는” 목자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에스겔 34장2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이스라엘 목자들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였던 것입니다(겔34:3). 이렇게 양들을 먹이지 않을 때에 어떠한 현상이 일어납니까? 다시 말하면, 목자가 양들이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지 않을 때에 양들은 어떻게 됩니까? 유리(방황)하며 흩어지며 결국은 사탄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의 무리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 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의 무리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겔34:5-6).
많은 성도님들이 방황하여 흩어져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두 가지로 그 문제를 생각해 볼 수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목사의 문제입니다. 마치 에스겔 시대 때 이스라엘 목자들처럼 성도들은 먹이지 않으면서 자기만 먹이는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목사의 문제는 양들을 먹여도 건강한 음식을 먹이지 않으므로 양들이 영향실조 걸리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준비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성도들에게 선포하며 가르치기에 성도들이 영적으로 영양실조에 걸린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성도의 문제라 생각합니다. 즉, 목사들이 성도들에게 영의 양식을 먹이려고 ‘밥상’을 열심히 준비해 놓고 기다려도 와서 먹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볼 때에 양들이 배가 불러서 그러던지 아니면 ‘영적소화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말씀의 홍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이 말씀을 먹기를 거부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마치 어머니가 집에서 자녀들에게 하루에 세끼식 밥을 먹이려고 열심히 잘 준비해서 밥상을 차려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이 그 밥을 먹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저희 집 아이들 같은 경우는 식사 전에 과자나 캔디나 간식을 먹기 때문일 때도 있고 또 다른 때는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지 않아 식사 때에 배가 고프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전날 밤 늦게 먹은 것이 아직도 소화가 잘 안되어서 배가 부르기 때문에 아침을 건너 뒬 때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주일 한번 먹고 일주일 동안 살아가면서 또 먹지 않아도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배가 불러서 입니다. 즉, 소화가 잘 안되는 것처럼 주일 받아 먹은 말씀을 삶 속에서 순종해 가면서 영적으로 소화를 제대로 그 때 그 때 시키지 못하기에 또 말씀을 받아 먹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니 아예 영적 소화기능이 망가져 있는 기독교인들도 있지 않는가 생각됩니다.
우리가 만족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목자되신 주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일용할 양식과 더불어 특히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아 먹는 성도들이 되야 합니다. 우리의 영적 소화 기능을 잘 작동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특히 말씀을 받아 먹은 후 일상 생활에서 그 말씀을 순종(적용)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더욱더 주님의 말씀을 먹고자 하나님의 말씀을 향하여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시119:32).
둘째로, 만족한 삶을 살기 위해서 목자되신 주님께서 우리를 소생시켜 주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면 다윗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영혼을 소생시키 심’은, 범죄하였던 영혼을 회개케 하여 진정한 생명을 받게 하심을 의미합니다 (박윤선). 우리는 죄를 범한 후 회개하지 않고 있을 때에 우리 영혼이 짖눌림을 받습니다. 다윗이 그랬었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시32:3-4).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영혼은 항상 부족함을 느낄 수 밖에 없습니다. 영혼의 짖눌림을 당할 뿐만 아니라 죄에 매여 있어 영혼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회개치 않은 마음은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회개의 눈물이 메말라 있는 것입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영혼은 죄 때문에만 죽는 법이니, 다시 살기는 죄를 회개함으로만 되어진다.” 맞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회개하므로 우리의 짖눌렸던 영혼이 다시 소생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그의 거룩하신 영의 양식인 말씀으로 들춰내어 주셔야 우리는 죄를 죄로 여길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그 죄를 인정하는 가운데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오직 목자되신 주님 만이 그의 양들인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목자되신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심에 있어서 그의 말씀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편 119편을 보면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소성케 하소서”(25절), “나의 영혼이 눌림을 인하여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28절), “… 주의 도에 나를 소성케 하소서”(37절) 그리고 “…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음이니이다” (50절)란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목자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되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소성케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목자가 되시어서 영의 양식인 말씀을 공급해 주시므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우리 크리스찬들이 회개치 않은 죄로 말미암아 영혼이 짖눌려 참된 신앙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참된 만족함이 결핍되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인가 생각해 볼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 말씀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 보는 삶을 신실하게 감당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한 가운데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므로 말미암아 회개의 기도를 드리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은 영혼이 짖눌려 죽음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자되신 주님의 말씀 공급하심을 사모하는 가운데 그 말씀에 부지런히 내 자신을 비춰보면서 성령의 깨닫게 해 주시는 죄들을 철저히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의 말씀으로 소생케 됨을 받는 삶을 살 때에 우리는 만족할 수 있습니다.
셋째로, 만족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목자되신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다윗은 “…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는 말씀은 곧은 길, 즉 평탄한 길로 목자되신 주님께서 인도하심을 의미합니다(박윤선).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죄악된 세상은 의의 길을 택하기보다 악의 길을 택하여 그 악한 길로 걸어 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의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주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불가능 합니다. 베드로후서 2장8절 말씀에 나오는 의로운 롯처럼 악의 길을 걷는 사람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우리는 그들의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우리의 의로운 심령이 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상한 의로운 심령을 목자되신 주님께서 말씀으로 소성케 해주셔야만이 우리는 일어나 의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목자되신 주님은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심에 있어서 “인간 편의 어떤 좋은 조건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이름’ 때문”입니다(박윤선). 우리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죄를 도말하시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주님이시요 또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평탄한 길은 사람 보기에 험하고 좁은 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첩경이다.” 참 일리가 있는 말씀이라 생각됩니다. 하나님의 관점과 우리의 관점이 충분히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목자되신 주님을 전적으로 믿고 순종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양들은 목자의 음성만 듣고 좇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0장26-2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우리는 결코 ‘삯군 목자’를 좇으면 아니됩니다. 그 이유는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라가 양을 늑탈하고 도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기 때문입니다(요10:12-13).
우리는 목자되신 주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해서는 아니됩니다. 마치 아버지가 자녀의 손을 잡고 흙탕물을 비켜서 마른 땅으로 걷게 하려고 인도하려고 하는데 자녀가 아빠의 손을 뿌리치고 결국 흙탕물로 뛰어 들므로 신발과 바지가 적고 하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의 손을 뿌리치고 내 멋대로 걸어가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주님의 손을 꼭 붙잡고 그의 말씀을 공급받으며 그 말씀으로 내 영혼이 소생케 되는 가운데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목자되신 우리 주님은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의 인도하심을 받아 곧은 길(평탄한 길)을 걸을 때 우리는 만족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넷째로, 만족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목자되신 주님의 보호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4절 말씀을 보면 다윗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위험의 극단을 가리킵니다(박윤선). 다윗은 주님을 목자로 삼았기에 어떠한 위험에서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셉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 그러므로 형통의 복을 누렸던 요셉은 보디발 집에서 종노릇할 때에든지 아니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있을 때에도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았습니다. 목자되신 주님께서는 다윗과 함께 하시되 다윗을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 하셨던 것입니다. 마치 목자가 지팡이와 막대기로 양들을 맹수에게서 보호하며 양들을 푸른초장과 쉴만할 물가로 인도하는 것처럼 목자되신 주님께서도 그의 백성들인 우리를 맹수같은 사탄과 그의 종들로부터 보호해 주시며 우리를 인도해 주고 계십니다.
다윗은 시편 32편7절에서 주님에 대하여 이러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주는 나의 은신처이오니 환난에서 나를 보호하시고 구원의 노래로 나를 에우시리이다.” 우리의 은신처가 되시는 주님, 그는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시는 목자 되신 주님이십니다 (시17:8). 보아스는 룻기 2장12절에서 룻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 주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는 룻처럼 우리 또한 목자 되신 주님의 보호아래 있기에 어떠한 극심한 위험이 있을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목자되신 주님의 보호를 받고 사는 주님의 양들입니다. 그리고 그의 보호를 받는 부족함이 없는 우리는 시편기자가 시편 121편 5-6절에서 고백한 말씀에 동의합니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헤치 아니하리로다.”
다섯째로, 만족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목자되신 주님의 높이심을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보면 다윗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목자 되신 주님은 다윗을 위하여 다윗을 멸망시키려는 원수들 앞에서 연회를 베풀듯이 기쁜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박윤선). 또한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말씀은 “연회에서 귀빈에게 기름 붓는 풍속을 염두해 두고 한 말”입니다(박윤선). 하나님께서는, 원수 앞에 핍박 받는 다윗을 연회에 청함 받은 귀빈처럼 대우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이 받은 대접과 분깃은 풍성하고 넘쳤던 것입니다(박윤선).
목자 되신 우리 주님은 우리를 우리 원수 앞에서 높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는 우리를 승리케 하시는 주님이시요 또한 우리에게 연회를 베푸시되 크게 풍성하게 베푸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족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여섯째로, 만족한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목자되신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소망에 가득차야 합니다.
오늘 본문 6절 말씀을 보면 다윗은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 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 구절에서 과거의 은혜 받은 체험으로써 그 앞날 을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과거에 하나님의 사랑과 도우심을 받았습니다(1-5절). 그러나 다윗은 그의 앞날이 영원토록 평탄할 줄을 믿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항상 자기와 함께 할 줄 다윗은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호와의 집, 곧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히 거하는 확실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소망으로 가득찬 삶은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목자되신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삶, 즉, 주님의 공급하심과 소생케하심과 인도하심과 보호하심 그리고 높이심을 받는 삶은 확실한 미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히 거한다는 확실한 미래 소망을 가지고 현재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에 그는 만족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인생의 종착점에 다 와갈 때 우리가 인생의 뒤를 돌아보면서 다윗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라고 고백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만족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목자되신 주님의 공급하심을 받으며, 그의 소생케하시는 역사를 체엄하면서, 그의 인도하심과 그의 보호하심을 받으며, 원수의 목전에서도 나를 높이시는 주님의 은총을 받으면서 주님이 주시는 사랑과 소망으로 가득찬 삶을 살았다면 참으로 만족한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만이 다윗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축복이 우리에게 있길 기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하고 싶은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06년 4월 19일 주님 한분으로만 만족하기를 기원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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