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미쁘시니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24절 말씀 묵상]
지금 우리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예수님의 재림을
간절히 기대하며 소망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게을리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하면 우리의 마음이 저 천국에
있지 못하고 이 땅에 있으므로 위에 것을 생각하며 그곳에 보화를 쌓아 놓기보다 이 세상에 쌓아 놓기에 분주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마치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많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약속의 땅인 저 천국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세상의 것들을 그리워하고 또한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삶은 결코 믿음의 삶이요 소망의 삶이 아닙니다. 어떻게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한다고 말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나은 본향을 향하여 나아가기보다 떠나 온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을 수 있습니까? 이러한 우리 그리스도의 삶은 주님께 책망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주님께 책망 할 것이 있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결코 그래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책망할 것이 없는 자들이
다 되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항상 기도할 때 그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주님 재림하시는 날 주님께 책망할 것이 없는 자들이 될 것을 확신하여 하나님께 이렇게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고전1:8). 이 얼마나 귀한 감사 기도입니까?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때 예수님이 다시 이 세상에 오시는 날 여러분 모두가 주님께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견고히
믿음에 서 있을 것을 확신하여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항상 드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얼마나 귀한 감사 기도입니까?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사도 바울은 이러한 감사 기도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날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책망할 것이 없는 자들이 될 줄을 확신했었을까요?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 대답을 저는 고린도전서 1장 9절에서 찾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더불어 교제케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신실하신(미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하나님을 바라보기보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바라보았다면 그는 하나님께 확신을 가지고 감사 기도를 드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을 때 그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사랑하사 선택하시고 부르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예수님의 재림의 날까지
끝까지 견고케 하실 줄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성경 빌립보서 1장 6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저와 여러분들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는 바로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시작하신 착한 일을 완성하신다는 확신을 바울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 속에 시작한 구원의 역사는 주님께서
시작하셨고 주님께서 마치실 것이다라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비록
우리는 불성실하시만 우리 주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딤후
2:13).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고
말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이 일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우리는 3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다’(calling)는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사 창세 전에 선택하신 사람들을(엡1:4) 부르시사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MacArthur).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 하나님의 “효과적인 부르심”(God’s effectual call)이라고 말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0장을 보면 “효과적인 부르심(소명)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은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자들을, 그것도 그들만을 정하신 때에 기꺼이 효과적으로 부르시는데, 그분의 말씀과 성령으로, 그들이 본질상 속해 있던 죄와 사망의 상태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으로 부르신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영적으로, 구원적으로 마음을 밝혀 주시고,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 또한 그들의 의지를 새롭게 하시고, 전능하신 능력으로 그들이 선한 일을 하도록 결심하게 하시고, 효과적으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이끄신다. 그러나 그들이 지극히 자유롭게 오는 것과 같이, 그분의 은혜로 기꺼이 하도록 하신다”(인터넷). 이 신앙고백을 세 부분으로 나눠서 성경구절을 나눕니다:
(1) “하나님은 생명에 이르도록 예정하신 모든 자들을, 그것도 그들만을 정하신 때에 기꺼이 효과적으로 부르시는데”:
성경 로마서 8장 30절을 보십시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 성경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구원에 이르게 하시고자 부르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신학적으로 “예정론”이라고 말합니다. “예정론이란 우리의 최종 목적지인 하늘나라나 지옥을 우리가 그곳에 도달하기 전 뿐만 아니라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정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예정론은 우리의 궁극적인 운명이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R.
C. Sproul). 성경 에베소서 1장 4-5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자기 앞에서 거룩 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분의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우리를 자기 자녀로 예정하셨습니다.” 성경 로마서 8장 29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이 자기 아들의 모습을 닮게 하시려고 그들을 예정하시고 그리스도가
많은 성도들 가운데 맏아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2) “그분의 말씀과 성령으로”:
성경 데살로니가후서 2장 13-14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 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의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성경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신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시고자 부르신 사람들은 먼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 즉 중생(regeneration)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조상 아담으로부터 죄를 전가 받았으므로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다.(엡 2:1) 따라서 하나님을 찾거나 (고전 1:20)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으며(요 1:12,13) 영적 선을 행할 수도 없다(시 14:3). 중생(Regeneration)은 이러한 영적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 영적 생명을 회복하는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변화를 가리킨다.(고후 5:17)”(인터넷). 이러한 성령의 중생의 필연적 결과로 뒤 따르는 것은 회심(Conversion)이요 이 회심에는 회개(Repentance)적 요소와 신앙(Faith)적 요소가 있습니다[“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살후2:13)]. “여기서 회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자기의 죄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비를 깨닫고 자기의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면서
그 죄로부터 돌이키는 소극적 요소이다. 반면 신앙은 회개에 뒤이어 삶 전체를 하나님께 헌신하며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는 적극적 요소이다.”(인터넷)
(3) “그들이 본질상 속해 있던 죄와 사망의 상태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와 구원으로 부르신다”:
성경 디모데후서 1장 9-1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 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이 성경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성경 에베소서 2장 8-9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로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선행으로 된 것이 아니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부르심’에 대해 이미 데살로니가전서 2장 12절과 4장 7절에서 두 번이나 언급했습니다. 먼저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2장 12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을 영광의 나라로 부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생활을 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왜 바울이 마치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였는지(11절) 그 목적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을 부르사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현대인의 성경은 그들을 영광의 나라로 부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하게 하려는 것이었음)(12절). 다시 말하면,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구원을 받은 자들 답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 백성 답게 살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삶이야 말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 답게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권면한 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7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은 우리를 더럽게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 이유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은 그들이 거룩하게 사는 것인데(3절, 현대인의 성경)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그들의 아내를 대하지 않고(4절)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에 빠져(5절, 현대인의 성경) 남의 아내를 가로채는(6절, 현대인의 성경) 분수에 넘어서 형제를 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6절).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은 우리를 더럽게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살라고 부르셨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7절). 저는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한 이 두 말씀을 하나로 이렇게 요약을 해보았습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은 부르신 목적은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는 것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합당한 삶은 거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나라의 거룩한 백성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성도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도”란 누구입니까? 왜 그리스도인을 성도라 부르는 것입니까? "성도"의 의미는 "거룩한 무리(백성)"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카도쉬"와 헬라어 "하기오스'란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원래 "자르다", "분리하다"는 말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의 거룩은 "어떤 특별한 사람이나 사물을 신성한 사용을 위해 구별해 놓은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성막에서 사용된 물건을 "성물"(거룩한 물건)이라 불렀고, 사람을 대신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제사장직을 "성직"이라고 불렀습니다”(인터넷). 성경에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성도”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죄와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구별된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은 구원받은 자들인 우리
안에 거룩한 영(성령)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복음을 받은 우리는 성령을
소유한 거룩한 성전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복음을 믿는 저와 여러분을 "성도", 즉 거룩한 무리(구별된 무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인터넷). 성도답게
살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부르신
하나님은 반드시 이루시는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현대인의 성경)“이 일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 5장 1절부터 22절(특히 16-22절)의 권면의 말씀을 다 마친
후 오늘 본문 23절부터 편지를 마무리 하면서 그들을 축복 기도(benediction)하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축복 기도 속에서 오늘
본문 23절과 24절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1절부터 22절까지의 말씀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순종케 하시되 그 긍극적인 목적은 성화(sanctification)라는 것입니다(MacArthur). 바울은 그 성화를 미쁘신(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고 결론적으로 말한 것입니다(23-24절). 24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이 일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미쁘신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가운데 반드시 이루실 “이 일”, 즉 “성화”는 무엇입니까? 저는 그것을 2가지로 요약을 해보았습니다:
(1) “이 일”이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온전히 거룩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 우리 성도에게 있어서 거룩함(성결)은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우리에게 거룩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레19:2). 이 명령의 의미는 하나님이 ‘구별되시듯이’우리도‘구별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인터넷).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 13장을 보면 “성화”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그들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함 받은 자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통하여, 그의 말씀과 그들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그리고 직접 성화되며, 온 몸을 주관하는 죄의 권세가 파괴되고, 그리고 그 죄의 몸에서 나오는 몇 가지 정욕들이
점차 약해져 줄어지고, 그들은 점차 모든 구원하는 은혜 안에서 활기를 되찾아 강건하게 되어, 참된 거룩의 생활을 하게 된다. 이러한 거룩한 생활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 2. 이 성화는 온 인격을 통하여 되어지는 것이지만, 금생(今生)에서는 불완전하다. 그래서 모든 부분에 얼마간의 부패의 잔재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그로 인하여 계속적이고 화해될 수 없는 전쟁이 일어나,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려 싸운다.”(인터넷). 이 신앙고백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랑하사 창세 전에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효과적인 부르심(effectual calling)을 받고
중생(regeneration)하여 우리 안에 새 마음과 새 영을 창조함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오직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성화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전서 5장 23절 상반절에서 성경은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는 분은 평강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the God of peace
Himself)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성화는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왜 성경은 우리를 성화시키시는 분을 가리켜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평강(평화)의 근원이시며 또한 평강(평화)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평강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평안의 복음”을 듣게 하시사(엡6:15)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셨습니다(롬5:10). 예수님을 믿는 구원받은 우리는 우리의 평강이 되시는 주님(미5:5)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성령님께서 우리를 거룩케 하시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를 온전히 거룩케 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거룩(holiness)이 평강을 이루는데 필요한 조건이기 때문입니다(빌4:6-9)(주석). 결국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므로(살전 5:23) 우리로 하여금 평강을 온전히 누리게 하실 뿐만 아니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빌4:9).
(2) “이 일”이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영혼과 몸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인간은 영와 혼과 몸, 이렇게 세 개의 요소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신학적으로 “삼분설”이고, 영과 혼을
같은 개념으로 보아 영혼과 육, 이렇게 두 개의 요소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분설입니다. 저희 장로교는 이분설을 따르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두 부분인 영혼과 육으로 구성되 있다고 봅니다(마10:28; 고전2:14-15, 15:44, 46)(박윤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 13장을 보면 “성화”에 대해서 마지막 세 번째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3. 그 전쟁에서, 그 남아 있는 부패한 부분이 당분간은 상당히 우세할지 모르나, 그리스도의 성결케 하는
영으로부터 힘을 계속적으로 공급 받음으로서 중생한 부분이 이기게 되며, 그리하여 성도들은 은혜 안에서
자라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룬다.” 비록 우리가 이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이 세상에서는 끊임없는 영적
싸움이 있겠지만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 하반절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축복 기도는 평강의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그들의
영혼과 몸을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했습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의 “영과 혼이 … 흠 없게 보전”되고 우리의
이 ‘몸’도 죄로 더럽힘 없이 ‘보전’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오직
‘평강의 하나님’ 곧, 최후 승리자 되시는 하나님께서만 되게 하시는 일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를 씻으시며 성령으로 끝까지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로써 이 일을 이루신다(벧전1:2; 요일1:7, 9).”
마지막 셋째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부르신
하나님은 미쁘시다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24절을 보십시오: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이 일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이 미쁘신(신실하신) 줄 알고 계십니까? 성경 히브리서 11장 11절을 보면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이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라”란 여인은 창세기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부인입니다. 그녀는 나이가 많이 늙었고 여성의 생리가 끊어져서(창18:11) 아기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즐거움이 없었습니다(12절).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람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말씀하셨고 그 말을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던 사라는 웃었습니다(10, 15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하지 못한 일이 없으신(14절)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 대로 그녀를 돌보셨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녀에게
행하셨습니다(21:1).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인 90세에(17:17)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낳았습니다(21:2-3). 아브라함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했습니다(롬4:19). 오히려 그는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습니다(20-21절). 이러한 확신은 미쁘신 하나님께 근거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히브리서 10장 2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미쁘신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미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실 것이다 라는 소망을 굳게 잡고 요동하지(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2장 13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무슨 뜻입니까? 우리가 불성실할찌라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미쁘신
이유는 하나님은 진실(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그 진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작하신 구원의 일은 우리가 불성실 할지라도 반드시 완성하십니다. 미쁘신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의 영혼과 몸을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하실 것입니다(살전5:23). 그러므로 우리는 미쁘신 하나님에게 근거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믿음으로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진실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일을 시작하셨고 지금도 그 일을 하고 계시면 장차 주님 이 땅에 다시오시는 날 그 구원의 일을 완성하실 것입니다(빌 1:6).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그러기에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 일을 반드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미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온전히 거룩케 하실 것이며 또한 우리의 영혼과 몸을 예수님의 강림하실 때까지 반드시 흠없게 보전시켜 주실
것입니다. 이 귀한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길 기원합니다.
미쁘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반드시 이루실 줄 믿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9년 1월 15일,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내 뜻을 이루며 내가 의도한 목적을
성취할 것이다”(사55:11, 현대인의 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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