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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짧은 말씀 묵상 (2025년 6월 16-20일)

주간 짧은 말씀 묵상       " 그런데 예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 열 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곧 왔다 .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그와 함께 왔다 "( 마가복음 14:43, 새번역 ).   " 유다는 ' 내가 예수에게 입을 맞출 테니 그를 단단히 붙잡아 가시오 .' 하고 미리 암호를 짜 둔 후 곧 예수님께 나아와 ' 선생님 ' 하며 예수님께 입을 맞췄다 .   그러자 그들이 달려들어 예수님을 붙잡았다 .   그때 예수님의 곁에 섰던 한 사람이 칼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그의 귀를 잘라 버렸다 "(44-47 절 , 현대인의 성경 ) 는 말씀을 좀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 (1)    예수님께서 "...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42 절 ) 하고 "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 " 예수님을 파는 (42 절 ) 죄인 (41 절 ) 인 12 명의 제자들 중에 가룟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과 장로들이 보낸 무리를 앞장서 ( 누가복음 22:47) 곧 왔습니다 ( 마가복음 14:43, 새번역 ). (a)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실 때 곧 유다가 단검을 가진 로마 병사들과 몽둥이를 든 성전 지키는 자들을 이끌고 나타난 것입니다 .   유다는 밤에 겟세마네에 계신 예수에게로 그들을 인도하여 온 것입니다 ( 호크마 ). (i)                   마가는 유다...

우리의 힘 (느헤미야 8장 9-12절)

우리의 힘

 

[느헤미야 8 9-12절 말씀 묵상]

 

생명을 가진 곤충가운데 개미처럼 심비한 곤충도 없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개미는 그 작은 체구로 자기보다 몇 배나 더 큰 먹이를 끌고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까?  죽은 메뚜기를 질질 글고 가는 개미를 지켜보던 어떤 관찰자가 개미의 몸무게를 달아 보았는데 놀랍게도 개미는 무려 자기보다 60배나 더 되는 것을 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을 해낼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능력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주신 훌륭한 선물인 것입니다(인터넷).  그래서인지 지혜자는 잠언 6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와 우리를 비교하면 어떠합니까?  우리 인간은 개비보다 더 큰 힘과 능력을 선물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413절에서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우리 크리스천들은 능력없는(powerless) 삶을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주님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라는 것은 한 성경구절이지 우리 삶 속에서는 그 진리를 부인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있다’라는 말보다 ‘못하겠습니다’, ‘어려울 것 같은데요, 등등이란 말이 쉽게 우리 입에서 나오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아니면 속으로 주님의 능력을 부인하는 불신이 많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능력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면서 너무나 비관적인(pessimistic삶을 살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충분한 능력의 공급을 사용하지 못하면서 허비(waste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능력있는 신앙생활힘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10절에서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 크리스천들이 힘있는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는지 그 해답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힘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The Joy of the Lord)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8 10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Do not be grieved, for the joy of the Lord is your strength).  그럼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뻐하는 것입니까?   3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주님을 기뻐하기 위해서 우리는 슬퍼하지 말며 울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8 9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 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자 에스라를 통하여 모세의 율법을 듣고 또한 레위 사람 들을 통하여 율법을 깨닫게 될 때에 자기들의 죄가 들춰지므로 회개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율법을 통하여 죄의 자각(conviction of sins)이 있으므로 울었습니다.  에스라도 이러한 눈물을 흘리 기록이 에스라 101절에 나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의 자각으로 인하여 울고 있을 때에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성일 이니 슬퍼하며 울지 말라 고 권면했습니다.  지금 현대 말로 한다면목사님을 통하여 또한 성경공부 교사 선생님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님들이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어 회개 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에 목사님과 장로님과 교사 선생님들이 ‘오늘은 주일이니 슬퍼하며 울지 마십시오’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찬들의 눈가에 눈물이 메말라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죄를 자각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하나님의 말씀이 거울로 비유할 때 우리가 거울을 자주 보지 않고 사는 게 첫 번째 문제요 또한 거울을 보아도 자신의 추한 모습을 볼 수 없는 우리의 영안의 어두워짐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설교 시간에 눈물을 흘리는 것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가입니다.  John White 목사님은 이러한 말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을 심리적인 기술로 울도록 할 수 있다.  많은 설교자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심리 조작이라는 기술을 쓰고 있다.  강력한 감정의 물결이 모든 회중 을 사로잡을 때 만족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  “우리가 사람들을 울게 만들었을 때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것이 다!  이는 우리가 내적 각성보다는 눈에 보이는 결과에 더 신경쓰 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냉철한 관찰입니까?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많은 때에 우리 설교자들은 성도들에 내적각성보다 눈에 보이는 결과인 눈물에 더 신경을 쓸 때가 없지 않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우리가 흘리는 눈물이 말씀을 들으므로 죄의 자각으로 인한 회개의 눈물이라기보다 설교자들의 심리 조작으로 말미암은 감정(눈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내적 각성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은 아닐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눈물은 전혀 한 심령의 내적 각성과 연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엘 선지자는 요엘 212-13절 상반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  그러나 과연 회개의 눈물죄를 슬퍼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까?  그 대답은 “아니오”입니다.  성경은 회개의 눈물이 우리의 힘이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주님의 날인 주일주님의 전에 올라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이 우리의 힘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2) 주님을 기뻐하기 위해서 우리는 근심하지 말하야 합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8 10-11절을 보십시오: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종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매”.  왜 수문광장에 모여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근심을 하였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근심하였던 이유는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무엇이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지 잘 모르면서 오랫동안 주님을 올바르게 섬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Packer).  연말을 맞이하여 금년 한해를 뒤돌아 볼 때에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 을 바르게 섬기지 못했던 죄들이 생각날 수 있습니다.  ‘그 때 그렇게 했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을 텐데…’ 등등.  1년을 뒤돌아 보면서 참 “틈”이 많이 보입니다.  지혜롭지 못하게 말하고 행동한 것들이 생각납니다.  사랑의 부족함도 많이 느낌.  경험이 부족한 것이 너무나 분명하게 들어납니다.  이런 생각에 잠길 때에 마음이 기쁠리는 없습니다.  또한 내 자신이 자신에게 낙심하여 힘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금년 한해를 뒤돌아 보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신의 부족한 죄로 말미암아 근심이 있으십니까?  조만제라는 사람이 쓴 글 중에 “근심을 이기는 슬기”가 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근심은 생명의 적이다’라고 역설한 것처럼 근심이 지속되는 한 사람은 행복할 수 없고 즐거움을 가질 수 없다.  근심은 건강에 지장을 주어 생명을 단축시키고인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창조적인 일에 전념할 수 없도록 만든다.  널리 알려진 이솝도 "안심하면서 먹는 빵 한 조각이 근심하면서 먹는 잔치보다 낫다"고 말하였다”(인터넷).  맞습니다.  근심은 우리에게 힘이 되기보다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연약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와 에스라 그리고 백성들을 가르쳤던 레위 사람들은 울고있는 이스라 엘 백성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본문에서 두 번이나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서서 몇 시간동안이나 근심하면서 울고 있다고 상상 해 볼 때에 그 얼마나 지치겠습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울면서 근심하고 있었던 날이 “주의 성일”이였 기 때문입니다(10 –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 “이 날은”: “이 날은 이 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일세 기뻐하며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즐거워하세  이 날은 주의 날일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이 날은 이 날은 주의 날일세”.  주일 주님의 전에 올라와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서 우리의 죄가 들춰지므로 근심할 수 있고 또한 근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근심도 우리의 힘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3) 주님을 기뻐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8 12절을 보십시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느헤미야와 에스라그리고 그들에게 모세 율법을 깨닫게 했던 레위 사람들을 권면을 듣고 슬픔과 눈물과 근심을 그치고 “크게 즐거워”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본문 12절에서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이스라엘 백성들의 슬픔과 눈물근심을 사라지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모세 율법을 밝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모세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므로 회개의 눈물과 근심을 가져다 주는 것입니다(3:20).  모세 율법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밝히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갈라디아서 324절 말씀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모세 율법은 우리에게 죄의 자각즉 죄를 깨닫게 하지만 우리를 구원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 율법은 갈라디아서 324절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모세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되며 그 모세 율법이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밝히 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슬픔과 눈물과 근심을 중단하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우리 많은 크리스천들의 현실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므로 마음이 찔려 죄를 회개 하는 가운데 눈물과 슬픔근심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 단계 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말씀을 듣고 죄를 깨닫는 회개의 단계는 시작단계이지 결코 최종의 단계는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최종의 단계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죄 사함 및 구원이란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알고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을 믿음으로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마음에 모든 슬픔과 근심을 주님께서 없애주시는 평강의 축복을 누릴 줄 아는 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년 지키는 속죄 날을 지키고 주님께서 그들의 죄를 다루시므로(16말미암아 그들이 그의 용서를 받으므로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의 달력을 보면 속죄 날 다음에 초막절이 옵니다.  그 초막절은 1주일 동안 하나님의 사람들이 즐거운 축제를 가집니다(23:26-44).  중요한 순서는 바로 이것입니다죄의 자각(conviction), 씻김(cleansing), 그리고 축제 (celebration).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 율법을 듣고 밝히 알았다는 말은 이 순서가 있었다는 말입니다죄의 자각씻김그리고 축제.  그래서 본문 12절에 와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크게 즐거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잘 들어야 합니다.  이 말은 “종용”히 하나님 앞에서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둘째로그 말씀을 밝히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해 주시길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회개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우리 마음에 근심을 제거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 만이 우리의 기쁨이 되시는 것임.  그리고 그를 기뻐하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의 진정한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영조 목사님이 쓴 책 “힘은 있을 때 조심해야 합니다”를 보면 “참된 힘”이 무엇인가 한 4가지로 말씀하고 있는데 그 중 넷째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인터넷): 넷째참된 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때에 우리는 그를 즐거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기뻐할 때에 우리는 시편기자가 시편 181절에서 말씀한 것을 우리도 진실로 고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 가 주를 사랑하나이다”(I love you, O Lord, my streng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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