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빈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져 있는 것만 보았고,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는 세마포 놓인 것만
보았으나, 사도 베드로는 직접 무덤에 들어가 놓인 세마포와 예수님의 머리에 쌌던 수건을 보았습니다. 그 때에야 그 빈무덤에 먼저 도착했던 그 다른 제자도 빈무덤에
들어가 보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예수님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요한복음
20:1-9, 현대인의 성경). 예수님의 빈무덤은 직접 눈으로 보고 믿긴했지만, 마음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성경 말씀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육신의 눈으로
모든 증거와 기적 등을 본다 할지라도 믿음이 없이는 성경 말씀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빈무덤에 일요일 새벽에 제일 일찍 왔다가(사도 요한과 베드로보다) 제일 끝까지 남아 있었던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다가 몸을 구푸려 무덤속을 들여다 보았을 때 흰 옷을 입은 두 천사들과
대화를 하게 되었고 마침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사도 요한과 베드로는 그 날 저녁에서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음)(요한복음 20:11-19, 현대인의 성경). 제 생각엔 막달라 마리아가 사도 요한과 사도 베드로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더 사랑하던 그녀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제일 먼저(예수님의 제자들에게보다)
나타내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주님을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마22:37) 자에게 주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지 않나 생각됩니다.
예수님의 빈무덤을 보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에게 달려가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갔는데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어요"라고 말했던 막달라 마리아가 결국에 가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주님을 보았어요!"하며 예수님이 자기에게 하신 말씀도 일러
주었습니다(요한복음 20:1-2, 18). 그 빈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찾던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증언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유대인 지도자들이 무서워 문들을 걸어 잠그고 모여 있는
상황에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에 가서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져 있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은 열려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문들을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요한복음 20:1, 19). 예수님의 말씀인 "에바다"(뜻: "열리라")가생각났습니다(마가복음 7:34).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의 못자국난 손과 창자국난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기뻐했습니다(요한복음 20:19-20). 주님은 우리의 두려움을 돌이켜 우리에게 평강을 주실 뿐만 아니라 기쁨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 속에서 문들을 걸어 잠그고 모여 있었던 제자들에게
오셔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20:19, 21). 주님의 파송 메시지가 문들을
걸어 잠그고 있는 제자들에게 임했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애굽으로 파송하시려고 했을 때 모세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주여, 제발 다른 사람을
보내소서"(현대인의 성경)](출애굽기 4:13).
왜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처음 나타나셨을 때 그 곳에 없었을까요?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의 못자국난 손과 창자국난 옆구리만 보고도 주님으로 인해 기뻐했는데 왜 도마는 그 못자국에
손가락을 넣으며 자기 손을 예수님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고 말했을까요? (요한복음
20:19-20, 24-25) 어쩌면 그 이유가
도마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11:16)
어쩌면 그 이유가 도마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14:4-7) 그 이유는 도마는
"믿음 없는 자"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20:27). 이렇게 믿음이 없는 자는 육신의 눈으로 보고,
육신의 손가락과 손으로 만지면서 보이는 것으로 살지 믿음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다(고린도후서 5:7).
보기를 원하는 자들에게 보여주시고 만지기를 원하는 자에게 만지게 하시는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20:20, 27, 29, 현대인의 성경). 육신의 눈으로 보지 않고는 믿지 않으려는 우리의 연약한 본능을
알고 계시는 주님은 주님을 보지 않고 믿는 자가 정말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그 때에는 우리가 주님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3:12, 현대인의 성경). 그 때까지 우리는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고린도후서 5:7, 현대인의 성경). “이 눈에 아무증거 아니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소리 아니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걸어가세 믿음위에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 버리고 걸어가세 믿음위에서서 눈과 귀에 아무증거
없어도”(새찬송가 545장,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1절과 후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여러분이 믿게 하고 또 여러분이 믿고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요한복음 20:31).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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